“우와, 정말 특별한 능력이구나.”
라이너스 베이커는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사실 특별하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라이너스는 데이지라는 열한 살짜리 여자아이가 나무 블록들을 공중 부양시키고 있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는 중이었다. 블록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느릿느릿 돌았다. 정신을 집중하느라 데이지는 얼굴을 찌푸리고 혀끝을 잇새에 빼문 채였다. 블록들은 그렇게 1분은 족히 허공을 돌던 끝에야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데이지의 통제력은 믿기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좋아.”
라이너스는 수첩에 맹렬하게 글씨를 휘갈겨 쓰며 말했다. 이곳은 정부에서 지급한 갈색 카펫과 낡은 가구들이 마련된 말쑥한 원장실이었다. 벽에는 꼴사나운 솜씨로 그려진 다양한 자세의 여우원숭이 그림이 쭉 걸려 있었다. 원장은 자신은 그림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고, 만약 바로 이 고아원의 원장이 되지만 않았더라면 여우원숭이 훈련사가 되어 서커스 순회공연을 다니거나 갤러리를 열어 작품들을 온 세상에 선보였을 거라고 자랑했다. 라이너스는 인류를 위해서라도 이 그림들은 원장실 안에 머무르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마추어가 그린 그림을 품평하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러면 너는 그… 물건을 공중에 띄우는 일을 얼마나 자주 하는 거니?”
고아원 원장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더니 얼른 대답했다. 원장은 부스스한 곱슬머리에 체구는 땅딸막한 여성이었다.
“아, 그렇게 자주 하진 않아요.”
원장은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는 채 양손을 마구 비틀어댔다.
“아마… 1년에 한두 번?”
라이너스가 헛기침을 했다.
“한 달에 한두 번이요.”
원장은 방금 한 말을 얼른 수습했다.
“내 정신 좀 봐. 왜 1년이라고 했을까? 말이 헛나갔네요. 맞아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랍니다. 아시잖아요. 아이들은 자라면 자랄수록… 능력을 더 많이 발휘하곤 하죠.”
“그러니?”
라이너스가 데이지에게 물었다.
“네, 맞아요. 한 달에 한두 번. 더 이상은 안 해요.”
데이지가 더없이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이너스는 혹시 아이가 사전에 어떤 대답을 하라는 지도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도 그런 일들이 있었을 거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테니까.
--- p.7~9
“지금부터 저희가 하는 이야기는 절대 이 방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베이커 씨. 아시겠습니까? 이건 4급 기밀 사안입니다.”
라이너스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4급 기밀이란 기밀 중에서도 최고 등급을 의미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걸 이론상으로는 알았지만, 실제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라이너스는 딱 한 번 3급 기밀 사안을 담당한 적 있었는데, 엄청나게 애를 먹었었다. 고아원에 있던 여자아이가 알고 보니 죽음의 전령 밴시였던 것이다. 그 애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죽게 될 거라는 예언을 하는 바람에 DICOMY가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아원 원장이 아이들을 이교도 제물로 바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너스는 구사일생으로 아이들의 목숨,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업무가 끝난 뒤 이틀간의 휴가를 얻었는데, 지금껏 그가 받은 가장 긴 휴가였다.
“어째서 저한테?”
라이너스는 속삭임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밖에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대답은 그게 다였다.
자부심에 벅찰 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배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두려움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안경이 입을 열었다.
“점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범법 행위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베이커 씨가 방문하게 될 고아원은… 특별한 곳입니다. 다른 어떤 곳과도 다른 고아원이고, 그곳에서 지내는 여섯 명의 아이들은 지금껏 당신이 본 그 어떤 아이들과도 다릅니다. 그중에서 특히 몇몇 아이들은 더… 문제가 많지요.”
“문제가 많다니요? 그게 무슨….”
“모든 게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당신 과제입니다.”
미남은 설핏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그 고아원의 원장인 아서 파르나서스는 물론 자격을 갖춘 적임자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은 극도로 특이한 유형이기에 파르나서스 씨가 여전히 이들을 관리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한 명도 벅찰 텐데, 여섯이나 되니까요.”
라이너스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분명 이 지역 고아원 원장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파르나서스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4급 기밀 아니겠어요? 베이커 씨가 파르나서스 씨를 안다는 건 기밀이 유출되었다는 뜻이겠지요. 우린 유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베이커 씨. 아시겠습니까? 새는 곳이 있으면 막아야겠죠. 신속하게 말입니다.”
--- p.58~60
집 근처에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한 가지에 빨간 사과, 초록 사과, 분홍색 사과까지 온갖 종류의 사과가 함께 열려 있는 모습이 놀라워 그는 눈을 깜박였다. 나무둥치를 따라 아래로 시선을 내렸더니 그곳엔…. 작은 조각상이 하나 있었다.
정원을 장식하는 노움이었다.
“예스럽기도 해라.”
라이너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노움 조각상은 라이너스가 흔히 보던 다른 조각상에 비해 컸다.
노움이 쓰고 있는 뾰족한 모자 끝이 거의 라이너스의 허리 높이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노움의 얼굴에는 하얀 턱수염이 나 있었고, 양손은 몸 앞에서 깍지를 껴 마주잡은 자세였다. 색을 어찌나 꼼꼼하게 칠해 두었는지 저무는 햇빛 속에서 보니 꼭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눈은 밝은 파란색, 두 뺨은 장밋빛이었다.
“특이한 조각상이네.”
그러면서 그는 허리를 숙여 조각상을 들여다보았다.
평소였다면 라이너스도 분명 노움의 눈을 보자마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쳐 있었고, 사라진 고양이가 걱정됐다.
그러니 조각상이 별안간 눈을 깜박이며 건방진 말투로 “다른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무례하시네요. 그렇게 생각이 없나요?” 했을 때 그가 꽥 소리를 지른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다가 뒤로 벌렁 넘어지는 바람에 그는 컥컥거리며 바닥의 잔디를 붙들려고 몸부림쳤다.
노움은 코웃음을 쳤다.
“정말 시끄러운 인간이군. 내 정원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건 질색이에요. 시끄러우면 꽃의 말소리가 안 들린다고요.”
그러더니 그는 (턱수염은 있었지만, 여자아이였다) 손을 뻗어 모자를 고쳐 썼다.
“정원에선 정숙해야죠.”
라이너스가 간신히 목소리를 되찾았다.
“너는… 너….”
그 말에 노움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나라니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해요? 그럼 내가 나지 누구겠어요?”
“넌 노움이구나.”
노움이 부엉이처럼 눈을 깜박였다.
“맞아요. 난 노움이죠. 탈리아라고 해요.”
아이는 허리를 굽히더니 옆에 떨어져 있던 작은 삽을 집어 들었다.
“아저씨가 베이커 씨예요? 만약 그렇다면, 우린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만약 아니라면, 아저씨는 무단침입자니까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이 정원에 묻어버리겠어요. 나무뿌리가 아저씨 내장과 뼈를 양분으로 쓸 테니 아무도 모르겠죠.”
아이는 또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사실 아직 사람을 땅에 묻어본 적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둘 모두에게 값진 경험이 되겠네요.”
“내가 베이커 씨가 맞단다!”
그 말에 탈리아는 엄청나게 실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알았으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무단침입자가 와 줬으면 했던 게 그렇게 큰 욕심이에요? 인간을 비료로 쓰면 어떨까 예전부터 궁금했거든요. 좋은 비료가 될 것 같아서요.”
--- p.108~110
“평소에도 손님이 오면 이렇게 위협적으로 맞이하곤 하십니까, 파르나서스 씨?”
이번에도 주도권을 잡을 요량으로 그가 깐깐하게 물었다.
파르나서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평소엔 아닙니다만, 사실 손님이 오는 경우도 거의 없기는 합니다. 그냥 아서라고 불러주시지요.”
등 뒤에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라이너스는 긴장한 상태였다. 루시 같은 존재를 등지고 있는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냥 파르나서스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저 역시 방문하는 동안 베이커 씨라고 불러 주시면 되고요. 원장님도, 아이들도 말입니다.”
파르나서스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뭐가 저렇게 재미있는 거지? 날 놀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별안간 분노가 밀려왔다. 얼른 내리눌렀지만 하마터면 표정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그럼 베이커 씨라고 부르죠. 직접 맞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는 집 쪽을 흘낏 본 뒤 다시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루시와 면담 중이었거든요. 물론 그 녀석이 당신이라는 존재를 저한테서 완전히 숨겨버리려 한 것 같지만 말입니다.”
라이너스는 아연실색했다.
“그 애가… 그럴 수가 있다고요?”
그러자 파르나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죠, 베이커 씨. 하지만 직접 알아보시도록 하십시오. 그게 이곳에 오신 목적일 테니까요. 루시는 피한테서 베이커 씨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맞이하고 싶어 했어요.”
“특별하다니.”
라이너스는 곧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파르나서스가 포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이곳은 당신이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을 것들로 가득한 특별한 곳입니다. 편견은 내려놓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베이커 씨. 그러면 이곳에서의 나날이 훨씬 더 즐거워질 테니까요.”
--- p.134~136
“아서는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는 항상 시간을 내야 한다고 했어요. 안 그러면 행복해지는 방법을 잊어버릴 수도 있대요. 베이커 씨는 행복해요?”
“완벽하게 행복하지.”
“하지만 동그란 게 싫다면서요. 그러니까 완벽하게 행복한 건 아니네요.”
피의 말이었다.
“난 동그랗지 않다니까….”
“베이커 씨는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도시에서 일하세요?”
천시가 더듬이에 달린 눈을 이리저리 튀기면서 물었다.
라이너스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그래, 도시에서 일한단다.”
천시는 꿈을 꾸듯 한숨을 내쉬었다.
“전 도시가 좋아요. 직원이 필요한 호텔이 얼마나 많을까요? 꼭 천국 같아요.”
“도시에 가 본 적도 없으면서.” 하고 끼어든 건 루시였다.
“그게 왜? 사진만 보고 좋아할 수도 있지. 베이커 씨도 바다를 좋아하지만 오늘 처음 봤잖아.”
“바다가 그렇게 좋으면 결혼이라도 하지.”
피가 말했다.
그러자 시어도어가 입안에 고기를 가득 넣은 채로 뭐라고 짹짹거렸고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샐조차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라이너스가 묻기도 전 채플화이트가 알려주었다.
“시어도어가 그러는데, 당신이 바다랑 아주 행복하기를 바란대.”
“전 바다랑 결혼 같은 거….”
탈리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콧수염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입을 열었다. “아하, 벌써 결혼을 했나 봐요.”
“결혼했어요?” 피가 따지듯 물었다.
“아내는 누구예요? 여행 가방 안에 들어 있어요? 왜 그 안에 넣었어요? 곡예사예요?”
“아까 그 고양이가 아저씨 아내예요?” 루시도 물었다.
“난 고양이가 좋은데, 고양이는 날 싫어해요.”
아이의 눈에 점점 빨간 빛이 돌기 시작했다.
“나한테 잡아먹힐까 봐 그러는 거죠. 하지만 난 억울해요. 고양이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맛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고요. 베이커 씨 아내는 맛있나요?”
“반려동물을 먹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루시.”
파르나서스가 새치름하게 입가를 훔쳐내며 말했다.
루시의 눈에서 빨간색이 금세 걷혔다.
“맞아요. 반려동물은 친구니까요. 또 베이커 씨의 고양이는 아내니까, 제일 친한 친구 같은 거죠.”
“맞아.” 파르나서스는 재미있다는 말투였다.
“아뇨. 아닙니다. 고양이는 제 아내가….”
“난 동그란 내가 좋아. 사랑스러운 내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더 커지는 거잖아.”
탈리아가 그렇게 외치자 천시가 “사랑해, 탈리아.” 하면서 눈 하나를 탈리아의 어깨에 내려놓았다. 그 눈이 천천히 돌아서 라이너스를 바라보았다.
“도시 이야기 더 해줄 수 있어요? 정말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아 환해요?”
라이너스는 이 대화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 아마도 그럴 거다. 하지만 난 밤에는 밖에 잘 안 나가.”
“어둠 속에 도사린 존재들이 아저씨 몸에서 뼈를 발라낼 수도 있으니까요?”
루시가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물었다.
“아니야.”
라이너스는 토할 것 같았다.
“집이 제일 좋아서 그래.”
지금이야말로 간절히 집에 가고 싶었다.
“집이란 그 어디보다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이지. 우리도 그렇지, 얘들아? 우리 집에선 우리들 자신이 되잖아.”
채플화이트의 말에 라이너스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 p.160~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