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노래, 음악, 문학, 미술이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왔듯이, 사랑하는 이를 잃으면 우리의 심장은 정말로 부서질 수 있다.
내 생각에 이런 연구 결과는 몸과 마음이 통합시스템으로서 작용하며 몸은 말 그대로 우리의 정서 상태를 보여준다는 자명한 관점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슬픔은 우리의 몸에 물리적인 영향을 끼친다. 외적으로는 관절염, 피로, 요통 등 온갖 질병에 취약하게 만들고, 내적으로는 주요 장기들뿐 아니라 세포, 호르몬, 호흡 단계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친다.
--- p.71
나는 바를 지나쳐서 걸어갔다. 촛불이 깜빡이는 저 바닷가 테이블 중 하나에 나 혼자 앉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빌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내 생각은 자기만의 의지를 지니고 너무도 자주, 너무도 멀리 헤매어 가곤 했다. 문제는 빌을 떠올리지 않아도 끔찍하긴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 죄책감이란! 내가 어떻게 빌 생각을 안 할 수 있지? 이 무슨 배신인가. 난 얼마나 끔찍한 아내인가. 아니, 아내였는가. 젠장.
--- p.130
사별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상황을 아주 좋아지게 만들기도 하고, 지독히 나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들이 나의 애도에 관여하는 만큼 나 역시 그들의 애도에 관여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빌을 잃은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빌을 사랑했던 가족과 친구들도 그를 그리워하며 각자 자기만의 사별 과정을 겪는 중이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서로의 바람과 감정의 임의성, 때로는 모순적이기까지 한 특성을 고려하고 수용하며 서로에 대한 반응을 조율해야 했다.
--- p.152
나 혼자서 눈물의 단어장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끝도 없이 다양한 표현이 떠올랐다. 흐느끼기, 울부짖기, 쉰 목소리로 신음하기, 흑흑거리기, 끅끅거리기, 질질 흘리기, 콸콸 퍼붓기, 통곡하기, 엉엉대기, 절규하기, 괴로움에 조용히 몸부림치기, 몸 비틀기, 훌쩍대기, 글썽거리기, 내 의지를 거스르고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낮은 소리로 외치기. 그에 따르는 다양한 후유증도 있었다. 앤서니 조슈아와 10라운드 경기라도 치른 양진을 빼놓는 절망과 우울의 눈물. 혹은 한결 마음이 가뿐해지는 해독과 정화의 눈물. 심지어 몸속에 고여 출구를 못 찾고 있을 뿐 틀림없이 존재하는 부식성 눈물도. 그런 눈물이 차올라 마치 새로운 내면의 인격이 된 것처럼 몸을 부풀리는 게 느껴졌다. 눈물은 내 안에 잠복한 채 나를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 pp.188-189
이런 상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느껴진다. 실제로도 끝이 없다. 다만 그 형태가 바뀔 뿐이다. 애도를 하나의 길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길에는 보통 목적지가 있지만 애도에는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다. 애도는 결코 유족을 떠나지 않는다. 애도가 끝나지 않듯이 우리도 그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다. 다만 이런 상태를 더 잘 처리할 수 있게 되기를, 감정의 침입이 줄어들기를, 적어도 고통을 토해내는 방식과 그 시점에 대한 통제력을 다소나마 되찾기를 바랄 뿐이다. 비탄은 결코 작아지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비탄을 감싸 안으며 점점 더 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 p.192
‘상실 지향성 스트레스 요인’은 잃어버린 것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추억, 고인과의 소통, 그리움 등을 말한다. 내 경우 거의 모든 것이 이런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즐겨 찾던 카페를 지나치는 일, 빌이 보고 싶어 했던 연극과 영화의 개막이나 개봉을 알리는 이메일, 특정한 음악을 듣거나 식당에서 (빌이 항상 그랬듯) 와인 대신 수제 맥주를 찾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빌에 대한 그리움과 너무나 달라져버린 내 삶을 상기시키는 고통스러운 추억들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일상에서 이런 추억들에 부딪치다 보면 마치 수천 번 종이에 베여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 p.217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옷장 문제를 가만히 방치해두었다. (…) 하지만 오늘 아침 나는 면도솔과 비누를 내다 버렸다. 솔이 낡아서 교체해야 하고 비누도 거의 다 닳았다는 구실을 대면서. 정말로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머지않아 버려질 물건들이었다고 생각하니 내 뒤틀리고 비합리적인 머릿속에서도 합당한 논리로 느껴졌다. 그래서 딱히 의식적인 결심도 없이 솔과 비누를 쓰레기통에 넣은 다음 그 자리를 떠났다. 망설이지도 울지도 않고, 그냥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일인 것처럼 해치워버렸다. 사용 기한이 다된 물건 몇 가지를 정리한 것뿐이야. 별일 아니야. 소란 피울 것 없어.
--- p.235
소중한 사람을 잃는 일은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정신적 외상을 남기며, 이는 절대 한순간에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잠시 울고 약을 한두 알 삼킨 다음 툭툭 털어내고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얘기다. 유족이 되는 것은 몸과 마음과 정신과 감정의 대폭발이요, 세계와 신념을 뒤흔들어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경험이다. 물론 새로운 우리도 멋지게 살아가며 기쁨과 행복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예전의 우리는 아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변화를 겪고 새로운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에서 전문가의 동행이라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p.241-242
길고 끔찍한 애도의 여정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발전이라도 반갑게 받아들여야 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 위의 배는 그리 견고한 지반이 못 되었고 난 여전히 물결치는 대로 떠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나를 떠받치는 이 지반을 받아들이고 신체감각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린다면, 그 안정감이 요가에서처럼 나를 실제로나 비유적으로나 더 멀리 뻗어나가게 할 것이었다. 깊이 뿌리를 내릴수록 나의 가지는 높이 뻗어나갔다. 하늘을 향해, 우주를 향해. 몸과의 연결은 몸을 벗어난 더욱 크고 영적인 존재와의 연결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 p.252
이제는 내가 잃은 것보다도 가진 것, 지금까지 얻은 것에 집중할 수 있을 듯했다. 내 삶이라는 돌무더기를 찬찬히 뒤지며 그 안에 숨은 보석을 찾아보고 싶었다. 나의 상실을 귀중한 부가가치이자 폐허를 재건할 수단으로 재구성하고 싶었다.
--- p.282
나는 이제 고통도, 눈물도, 빌에 대한 그리움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 감정들은 형태와 색채를 바꾸어가며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처음에 그랬듯이 충격적이고 기진맥진하도록 격렬한 감정은 아닐 수 있지만, 어쨌든 항상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리움과 애절함은 점점 깊어지는 반면 빌의 실재성과 존재감은 희미해질 테니까. 빌의 목소리에 대한 기억도 흐려질 것이며, 기억 속 빌은 계속 중년의 모습인 반면 나는 늙어가리라. 하지만 나는 내 상황이 얼마나 힘겨운지 만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내 삶에 빌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는 빌을 잃었기 때문에.
--- pp.326-327
여러분도 내 경험에 어느 정도는 공명했을 것이다. 내 경험의 일부가 여러분의 경험과 겹쳐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의 경험은 무척 다를 수 있다. 여러분이 잃은 사람이 부모나 자식, 형제자매, 친구라면 많은 것이 여러 면에서 다를 것이다. 나처럼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더라도 상황이 더 복잡할 수 있다. 서로 많이 다투었거나, 둘 중 하나가 바람을 피웠거나, 이혼을 고려했던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고인이 오랜 병환 끝에 사망했거나 자살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당신의 여정은 오직 자기만의 것이 되며 다양한 양상을 띤다.
--- p.329
나의 해피엔드는 세상에 명확한 해피엔드란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해피엔드를 포기하는 것 자체가 해방이자 기쁨이다. 또한 나의 해피엔드는 빌의 기억을 내 마음속에서만이 아니라 더 넓은 바깥세상에서도 지켜나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속에 있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행복, 부질없어 보이는 삶도 아직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사소한 기쁨 속에 있다. 그와 더불어 나는 매일 찾아드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장면을 목격하거나 말 한마디를 듣거나 특정한 장소를 지나치거나 냄새를 맡으며, 내가 잃은 소중하고 대체 불가능한 사람을 떠올리고 그를 향한 그리움을 절절히 느끼는 순간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 고통을 내가 그를 깊이 사랑했다는 인식으로서 달게 받아들이고, 그런 순간 또한 환희의 순간처럼 덧없으며 결국엔 지나가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p.331
나는 가족만이 아니라 나 자신 또한 재정립했다. 아내가 아니라 유족으로서, 기혼자가 아니라 독신자로서, 빌의 유산과 기억을 지키는 사람이자 나 자신의 자아와 창조성을 빚어낼 도가니로서. ‘더 나은 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게 얼마나 좋아지든 간에 빌과 함께 했던 시절보다 좋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우울해하고 몽상에 빠지고 세상에 분노하며 소리친다 해도 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인생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 ‘더 나아질’ 수는 없겠지만, 달라진 삶 역시 괜찮을 수 있다.
---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