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툴리아누스가 평생 동안 지녔던 열정과 에너지는 출생지와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그는 뜨거운 햇빛이 가득한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항구 카르타고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아프리카 지역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현 아프리카 북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같은 곳이 로마 제국 당시의 아프리카였습니다. 이 지역들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에도 나오듯이 찬란한 햇빛이 눈부시고 뜨거운 곳입니다. 이러한 햇빛은 사람의 성격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햇빛이 강한 북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종종 다혈질적인 성격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이라는 측면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였고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2강 이단의 발생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중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네 명의 황제 중 부황제인 콘스탄티우스Flavius Valerius Constantius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잘 생기고 아주 용감했으며 온갖 전쟁터를 누비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비티니아라는 지역을 가다가 여관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장군들은 막사에서, 자신은 여관에서 자는데 거기에 아리따우면서도 씩씩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관집 딸로서 이름은 헬레나였고, 마구간도 돌보며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시골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가 그녀에게 그만 반해 버렸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온갖 감언이설로 그녀에게 접근했지만 헬레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골 처녀의 모습에 콘스탄티우스는 더 매력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른바 ‘밀당의 대가’였던 헬레나에게 푹 빠졌던 콘스탄티우스는 그녀를 쫓아가서 열심히 구애를 했고, 결국 자신의 아내로 만들었습니다.
---「4강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통해 얻은 신앙의 자유」중에서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자고 하니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흥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좀 전에 언급했던 은수자들이 몰려와서 “네스토리우스, 나와!” 하면서 소리 지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네스토리우스가 그들에게 신학적으로 설명해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신념과 신앙만으로 수도 생활을 해 왔으니까요.
사실 이런 일들 뒤에는 배후가 있었습니다.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치릴루스Cyril of Alexandria(376년경~444년)입니다. 그는 “우리 알렉산드리아가 이렇게 힘이 약해졌습니까? 듣도 보도 못한, 새로 생긴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라는 자가 우리를 능멸하면서 계속해서 도전해 오는데 가만 둘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은수자들을 선동했던 것이지요. 치릴루스는 본격적으로 네스토리우스를 향한 공격에 들어갔고 그리하여 431년에 제1차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6강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의 완성」중에서
카르타고는 엄청난 규모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단히 발전했던 도시였던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 최대의 곡물 수출항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은 나일 강 유역 못지않은 곡창 지대였습니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유한 도시에는 꼭 홍등가가 발달하기 마련이지요. 기껏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카르타고에 유학 보냈더니 혈기왕성한 사춘기 소년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만 이러한 곳에 더 큰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모가 대주는 유학비를 신나게 노는 데 다 써 버렸습니다.
---「8강 흔들리는 로마 제국과 눈물로 키운 신앙」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자신의 잘못인가 하고 의문을 품고 움츠러들고 있을 때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분노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우리는 분노하면 고함을 지르거나 주먹질을 하기 쉬운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대신 펜을 잡았습니다. 매우 독특하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겠다며 무려 14년 동안이나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완성한 책이 《신국론De Civitate Dei》으로서, ‘하느님의 도성에 관하여’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11강 하느님의 나라, 땅의 나라」중에서
저도 젊었을 땐 혈기왕성했고 철두철미하게 규칙을 지키는 모범생이었다 보니, 주일 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그들을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그런데 베네딕투스도 그만큼 엄격했던 모양입니다. 베네딕투스가 반드시 규칙을 지키라고 엄하게 명령하니 수도자들이 “어쩌다 저런 분을 모셔 왔지? 완전 잘못 뽑았어.”라며 베네딕투스를 데려온 것을 후회했습니다. 순명까지 강조하니 수도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꾸몄습니다. 베네딕투스가 자연적으로 죽으면 딱 좋겠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네딕투스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13강 기도하고 일하라」중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어느 가을날, 엘로이즈가 아벨라르두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아벨라르두스가 “엘로이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다그치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는데, 글쎄 엘로이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벨라르두스가 당황해서 “엘로이즈, 왜 그래?”라고 물었는데 그녀는 “선생님은 몰라요!”라고 하며 토라진 듯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찰나였지만 아벨라르두스는 자신을 바라봤던 그녀의 시선에서 그녀가 자신을 교사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로서 본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16강 세상의 사랑에서 천상의 사랑으로」중에서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겁을 주려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라딘과 리처드 왕이 서로 마주한 상태였는데, 리처드 왕이 먼저 칼을 빼서 옆에 있는 쇠사슬을 끊으며 “항복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이 쇠사슬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라고 협박했습니다. 아마도 이 모습을 보고 살라딘이 겁에 질리길 기대했겠지요. 하지만 살라딘의 표정은 담담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혹시 대왕께서는 이런 것도 할 수 있소?”라고 물으면서 자신이 두르고 있던 비단을 풀어서 하늘로 던져 올렸습니다. 그리고 반달 칼을 빼어 들고 공중에 떴다가 내려오는 비단을 단번에 잘랐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용맹하고 강력한 두 지도자가 이끄는 군대가 서로 부딪혀서 벌인 전쟁이었기에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나, 마침내 평화롭게 성지 순례를 하도록 보장하겠다는 살라딘의 확약을 얻는 것으로 타협을 이루며 제3차 십자군 전쟁은 끝났습니다.
---「17강 종교 간의 전쟁과 그리스도의 평화」중에서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찾아서 열심히 읽었고, 아베로에스의 주해서도 읽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고 직접 아베로에스의 주해서와 비교하면서, 맞지 않다고 판단되는 내용은 수정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주해서를 저술했습니다. 그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맞을 때는 “오, 놀라워라! 하느님의 은총!” 하고 외치면서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맞지 않다고 판단되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라고 쓰며 비판하고 수정했습니다.
---「19강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교회의 위기 또는 기회?」중에서
이렇게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했지만, 교수 강의의 질은 다양한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오늘날의 강의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뛰어난 교육 방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디스푸타시오Disputatio’, 즉 토론입니다. 간혹 TV에서 토론하겠다고 나온 정치인들이 상대방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줄줄 나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것은 토론이 아닙니다. 중세의 토론 방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엄격한 규칙이 있었지요. 그 규칙을 만든 사람이 바로 아벨라르두스였습니다. 아벨라르두스가 자신의 재능을 살려 고안해 낸 방식이 있었는데, 바로 ‘그렇다와 아니다’입니다.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상반되는 입장의 답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20강 교회와 함께 성장한 중세 대학」중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횃불을 들고 여인을 내쫓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룬 성인전에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볼 수 없었다.”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인전에는 약간의 과장이 섞이기 마련인데, 심지어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기절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때 두 천사가 나타나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허리에 끈을 동여매어 주었고, 그 후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욕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이 전설에 의심이 갈 수도 있지만,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굳은 결심과 의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21강 천사적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중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은 원형 아치와 자연광에 의한 엄숙하고 장중함을 보이고, 수평적인 특징이 강조되었습니다. 또한 순례하고 투쟁하는 교회의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반면 고딕 양식은 장미창과 아주 높이 솟아 있는 첨탑을 통해서 신앙심을 고양하는 모습, 높이 올라가는 채광을 보이고, 수직성을 더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신앙심을 드높이자! 하늘 높이 치솟게 만들자!” 이런 주의였던 것이지요.
이 두 양식이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데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문화적인 배경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도원과 그 안에서의 폐쇄적인 경제, 차가운 귀족 계급의 관심이 로마네스크 양식에 표현되어 있다면, 고딕 양식에는 도시가 발달하면서 희망에 찬 인간의 모습, 경제 활동을 통해 새롭게 펼쳐지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배웠던 것을 응용해서 이해해 보자면, 보편 실재론이 로마네스크 양식에 표현되어 있고, 온건 실재론이 고딕 양식에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3강 돌로 만들어진 천상 예루살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