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도 더 된 어린 날 어린이 명작 전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00권 정도 되는 전집에서 엘러리 퀸, 에드가 앨런 포, 아이작 아시모프,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 로버트 하인라인, 레이몬드 챈들러, 아서 클라크,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 모리스 르블랑 등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굵직 굵직한 이름값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SF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제 독서 취향은 아마도 그 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때 대실 해밋(Dashiell Hammett, 1894~1961)이라는 작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말타의 매(The Maltese Falcon)”라는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중역본에다 발췌본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소설임이 느껴졌던 기억이 어슴푸레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스타일의 미스터리 소설을 하드보일드라고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요. 마치 007 시리즈만이 스파이 영화라 생각하던 만 보던 사람이 제이슨 본 시리즈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네, 대실 해밋은 레이몬드 챈들러(Raymond Thornton Chandler, 1888~1959)와 함께 하드 보일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작가입니다. 하드보일드는 느와르적인 요소가 강하고 현실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스타일로 그 이전까지 낭만적이며 추리에 방점을 둔 탐정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스타일의 소설을 의미합니다.
“초록색 주사위 두 개가 초록색 테이블을 가로질러 굴러가더니 모서리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내드 보먼트는 도박에서 돈을 계속 잃자 형이라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이자 정치인인 폴 매드빅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 그가 헨리 상원의원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바로 그날 헨리 상원의원의 아들 테일러가 살해된 것을 내드 보먼트가 발견합니다. 그리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데…
이번에 읽은 “유리 열쇠 (대실 해밋 著, 홍성영 譯, 열린책들, 원제 : The Glass Key)”는 이전에 황금가지에서 번역된 적이 있는 작품인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다른 번역가에 의해 출간되었습니다.
무려 1931년에 처음 출간된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하드보일드 소설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품 중 하나로 기존 추리소설 혹은 탐정소설에서 보여 왔던 추리 게임, 퍼즐 게임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적 묘사를 극대화하여 이후 하드보일드의 전형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출판사 책 소개에도 언급되었지만 실제 대실 해밋이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라 자평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처음 출간된 지 무려 90년이나 지난 작품이지만 낡거나 고리타분하지 않습니다. 추리 소설 팬이지만 대실 해밋을 만나본 적이 없는 독자라면 반드시 한번은 읽어봐야 할 책으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말 하나 : 열쇠는 그 특성상 자물쇠를 열기 위해 자물쇠에 들어가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유리 열쇠는 보기에는 아름답고 그럴 듯 해보이지만 실제 자물쇠에 들어가 힘이 가해지는 순간 부서질 수 있습니다. 작품 전체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정말 훌륭한 제목입니다.
덧붙이는 말 둘 : 이 작품의 제목은 나중에 북유럽 추리문학상 중 하나인 ‘유리열쇠상 (Glass Key award, 1992~)’의 이름에 남게 됩니다.
#대실해밋, #홍성영, #열린책들, #영미소설, #하드보일드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주관에 따라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꿈 이야기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열쇠가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산산조각 나버렸어요. 자물쇠가 뻣뻣해서 억지로 열어야 했거든요.」 296p
탐정사무소에서 일을 했던 작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역량을 다 보여주고 그 이후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작가.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작가 그 작가가 바로 대실 해밋이다.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는 나에게 있어서는 참 계륵과도 같은 존재이다. 버리자니 무언가 더 재미난 게 있을 것 같고 그렇다고 읽자니 이 퍽퍽함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 같고. 원조라면 무언가 다르겠지라는 마음으로 읽는다.
작가 후기라던가 역자 해설을 먼저 보는 버릇이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먼저 읽어본다. 역자는 작가의 작품을 내적인 감정과 생각을 배제한 채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주변의 정황만으로 스토리를 끌어간다고 했다. 그런 말들이 이해가 된다. 세부적인 묘사나 당김과 조임을 반복하는 일이란 없다. 어떻게 본다면 무미건조하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열린책들에서는 인물들의 말들을 따옴표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꺽은 표로 처리하고 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그들의 말은 딱딱하고 정이 없이 느껴진다. 그것이 주는 매력이 있다.
폴 매드빅과 네드 보몬트. 네드가 매드빅에게 형이라고 부르고 있어서 처음에는 형제인가 했지만 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냥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구나 하고 이해했다. 원서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bro라고 적혀져 있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본다. 그렇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면 굳이 여기에 형이라는 단어를 쓸 이유는 없었을테니 말이다.
매드빅이 상원의원의 딸과 결혼을 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이 계획은 또다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그녀의 오빠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바로 길거리에서 말이다. 그 상황을 본 것은 바로 네드. 그는 즉각 매드빅에게로 와서 이 사건을 신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연줄을 이용해서 자신이 이 사건을 맡아서 해결하겠다고 나서게 된다. 과연 그는 이 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가 있을까.
끈임없이 벌어지는 폭력과 계략.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권력들. 폭력이 가해지고 병원에 입원할만큼 피가 흐르는 장면이 묘사되는데도 왠지 모르게 건조한 느낌이 든다.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일까. 그런 느낌들이 생경하고 낯설지만 나름의 재미와 흥미를 유발하고 있어서 이 장르가 주는 매력을 여전히 껴안고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다. 유리열쇠. 자물쇠를 열지 못하고 부서져 버리는 약한 존재. 그녀가 이야기했던 그 유리열쇠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 53페이지에는 사라사 무명천을 씌운 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라사. 얼마전 읽었던 [유랑의 달]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었다. 전혀 다른 쓰임의 같은 두단어. 이렇게 서로 다른 책이 또 연결된다.
합법적인 사업체 뒤에 암흑가까지 장악한 사업가 폴 매드빅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헨리 상원의원의 재선을 도우며 정치적 입지와 더불어 연모를 품고 있는 의원의 딸 재닛과 결혼할 뜻을 품고 있다. 매드빅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그의 책사 역할을 하는 네드 보몬트는 매드빅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네드는 헨리 상원의원의 후원과 재닛의 결혼을 통해 상류사회로 진출하려는 매드빅의 야망을 눈치채고, 토사구팽 당할 것을 우려하여 의원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조언하지만 매드빅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헨리 상원의원의 아들 테일러 헨리가 피살된다. 늦은 밤, 시신을 처음 발견한 네드는 곧장 매드빅에게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사건 현장에는 테일러의 모자가 사라졌고, 그는 죽은 날 오후 내내 매드빅의 딸 오팔과 함께 있었다. 한편 네드는 자신의 돈을 갖고 도망간 버니가 테일러의 차용 증서를 이용해 테일러를 협박했음을 알고 버니의 애인 리를 속여 떼먹힌 돈도 찾고 증거 조작으로 버니를 테일러 살해 용의자로 몰아간다. 물론 네드는 증거 불충분으로 버니가 다시 풀려날 것을 알고 저지른 일이지만.
며칠 후 또 한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는 프랜시스 웨스트라는 남자로 자정 직후 퇴근하다가 총에 난사되어 사망했는데, 문제는 피해자의 형 또한 한 달 전에 살해되었고, 그 용의자가 티모시 아이번스라는 것. 티모시의 동생이고 매드빅의 수하에서 일하는 월터 아이번스는 형을 감옥에서 빼내달라고 조르고 있는 상황인데, 선거기간 동안 트러블이 될 만한 일을 자제해야 하는 매드빅 입장에서는 여의치 않다. 이때 헨리 상원의원의 경쟁자인 빌 론 의원 편에 붙어있는 섀드 오로리가 월터 아이번스를 꼬드기면서 일이 복잡해진다. 웨스트 형제의 피살 사건은 선거와 맞물려 폴 매드빅과 섀드 오로리의 권력싸움으로 번진다. 테일러 헨리와 웨스트 형제를 죽인 살인범은 누구일까? 단순한 암흑가 권력 싸움의 희생양일까?
경쟁자라고는 하지만 도망갈 곳도 없이 섀드 오로리를 밀어 붙이는 매드빅의 방식이 못마땅해 뉴욕으로 떠날 결심을 하는 네드와 이를 말리는 매드빅의 사이가 틀어진다. 이 틈을 이용해 섀드가 끼어들어 네드에게 매드빅의 비리를 신문사에 제보해주면 현금 2만달러와 도박장 운영권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섀드에게 덫을 놓기 위해 찾아갔다가 오히려 함정에 빠진 네드. 빚에 쪼들린 '업저버' 기자 매튜스를 협박해 매드빅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를 쓰게 해 그를 테일러 헨리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뒤집어 씌어 선거에 승리하려는 섀드 오로리.
이 즈음 네드를 비롯해 오팔, 재닛, 파 검사 등 매드빅의 주변 인물들에게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편지가 날아든다. 문장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동일하게 매드빅을 테일러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오팔까지 아빠가 살인범이라고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이제 차이나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매드빅이 테일러 헨리의 살인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네드에게 자기가 테일러를 죽였다고 자백하는 매드빅. 그가 정말 테일러를 죽였을까?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 매드빅의 진심, 그리고 권력의 무상.
교양 뒤에 숨은 권력을 향한 추악한 야망, 정치나 조직폭력배나 싸우는 상대와 방식이 다를 뿐 크게 다를 바 없는 지저분한 진흙탕 싸움의 실체. 돈과 권력 앞에 너나할 것 없는 민낯이 드러난다. 뭔가 손에 잡힐 듯 하지만 잡히지 않는 범인. 살인 사건을 빌미로 각각의 이권 다툼이 얼키설키되어 정작 사건의 범인을 찾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이 싸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누가 죽어나가든 상관이 없다. 소설은 건조하게 흘러간다. 상황은 급박한데 문장 어디에도 작가가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없다. 마치 그들의 추악한 싸움을 관망하듯 써내려간다. 이 메마른 건조함이 나쁘지 않다.
오랜만에 읽은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대실 해밋의 작품은 몇 권 읽지 않았는데, 기회가 닿아서 즐겁게 읽었다. 오래 전 레이먼드 챈들러를 통해 하드보일드를 처음 접하면서 챈들러만큼 만족할 만한 작품을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가 존경과 지지를 보내는 작가라고 하니 나머지 작품들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 리뷰어스클럽을 통해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하드보일드 장르의 창조자 대실 해밋 장편소설 유리열쇠.
가난한 집안 탓에 열네 살에 학교를 중퇴한 그는 1915년 핑커턴 탐정 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당시 전쟁과 폭력, 대공황과 범죄, 불안과 냉소가 사회상으로 해밋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범죄와 폭력이 난무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영화이기도 하다.
금주법과 함께 태어난 시대.
1920년 미국에서 전역에서 알콜음료 마시는 것을 금지한 금주법이 시행된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짓말....그 당시에 금주법으로 주류 시장이 마파이에게 넘어가면서
공무원,경찰,정치인까지 비리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도시의 거물 폴 매드빅은 합법과 불법,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세력을 넓혀 가는 정치인이다.
그를 따르며 보좌하는 네드 보몬트는 늘 도박에 빠져 살지만, 매드빅과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며 그의 브레인 역할을 한다.
매드빅은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그가 평소 연모하던 상원 의원의 딸 재닛 헨리와 결혼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중 재닛의 오빠인 테일러 헨리가 거리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네드 보몬트는 미묘한 정치적 긴장이 얽힌 이 사건에 뛰어들어 그 전모를 파헤쳐 간다.
그러나 사건은 충격과 반전을 거듭하며 점점 더 안개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데…….
폴 매드빅은 테일러 헨리가 살해당한 직후 왜 그의 모자를 훔쳤는가?
테일러 헨리가 살해당할 당시 쓰고 있던 모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테일러 헨리의 시신을 최초로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왜 당신의 직속 부하 직원이 되었는가? p78
주고 받는 대화속과 총을 겨누고 쏘는 장면까지..
한편의 영화를 연상케하는 전개 방식이 그 당시를 잘 반영하였고, 반전에 반전으로 범인이 밝혀진 순간
황당하면서도 비정한 정치와 폭력이 난무했던 시대에 가능한 일였을까? 하긴...여전히 시끄러운 정치계쪽을 보면 그럴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