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르가 그랬던가. 감옥이란 사회 전체가 감방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따로 있는 것이라고. 물론 그가 말한 감옥이란 다름 아닌 우리 사회 전체가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즉 우리가 환상 속에서 현실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감옥이 저기 따로 있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불란서의 또 다른 철학자 푸코 역시 감옥에 관심을 갖는다. 개개인을 특정한 능력과 지식을 갖춘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 우리의 신체에 각인된 이른바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바로 근대사회 감옥으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이다. 가령 시간표에 따른 행동 통제, 필수적인 강제노동, 격리와 감시가 내면화된 감옥생활은 다름 아닌 근대인의 또 다른 모습이다. 들뢰즈의 말대로 푸코에게 중요했던 것은, 차라리 일상생활에서 작동하는 권력이 바로 감옥에서 집약된 권력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 푸코의 감옥이 근대사회의 축소판으로서 우리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아렌트는 강제수용소야말로 전체주의정권의 성격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장소라고 말한다. 자유와 인격을 제거하고 인간을 단순한 사물로 만드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비극. 그것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첫째, 사람에게서 법적 인격을 죽이는 것이다. 근대의 인권 개념은 국가의 주권과 동일선상에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해 각 국가의 최고법(헌법)에 의한 보증을 통해서 정상적인 인간(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적박탈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조치 아래서 인간은 자신의 보호수단을 상실하였고 자연 상태에 내몰리게 된다. 백인들이 흑인을 처음 봤을 때 그들을 인간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의 죄의식을 갖지 않고 그들을 ‘사냥’할 수 있던 것처럼, 법적 인격을 박탈달한 인간은 단지 다른 동료 인간과는 생김새만 같은 뿐, 인간임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동물종로서 전락하게 된다.
둘째, 인간 내면의 도덕적 인격의 살해이다. 과거 우리에게도 아는 사람이 남산 중정이나 남영동 분실과 같은 모처(某處)에 끌려간다면, 의식적으로 모르는 척 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비밀경찰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간다는 것은 산 사람들과 단절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과도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의 삶이 의미 없어졌음을 나타낸다. 사회학자 엘리아스(N. Elias)는 한 인간의 삶이 ‘의미 있다’ 혹은 ‘의미 없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와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는 중요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삶이 많은 사람에게 의미를 가질수록 그는 행복하며, 그 자신이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을 때 그는 정녕 외롭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어진 인간은 순교할 기회까지도 상실한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그의 죽음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질 경우에만 시행된다. 반면 수용소 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자살이 적었는데(부헨발트 수용소의 경우 자살은 매해 단지 2건에 불가했다), 이는 희생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망각을 통해 죽음 자체를 익명으로 만들어, 인간의 삶의 완성으로서 죽음의 의미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셋째,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의 삶과 대체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의미 없는 삶이 된다.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가 그만의 ‘장미’ ‘여우’를 좋아했던 것은, 그의 장미, 여우가 또 다른 여우종(種), 장미종들과는 분명 다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쉰들러 리스트」와 같이 수용소를 다룬 영화를 보면, 수용소에 들어갈 때 수많은 인간들은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고 호각소리에 맞춰 괴상한 방법으로 뛰어 가거나, 번호로 불리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 때의 인간들은 차이가 사라진 단순히 인간 형상을 한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삶의 의미를 갖는 인간이 개성을 상실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 단순한 인간적 동물종의 표본이 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수용소 내의 전체주의는 완성된다. 희생자가 단두대에 올라가기 전에 이미 그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수용소 바깥의 전체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때의 인간은 자발성을 파괴당하고, 언제나 다른 인간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똑같은 방식으로만 행동하는 기계이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란 인간이 무용지물이 되는 시스템이며, 언제나 인간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중세의 지옥은 인간의 환상에서 기인했다면, 전체주의라는 끔찍한 지옥은 하나의 현실로서 ‘살아있는’ 인간의 장소에서 공존하였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지옥을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서, 단지 인류의 역사상 항상 있었던 비극보다 조금 더 비참한 슬픈 역사로서 단순히 치부해 버릴 것인가. 그러나 현실은 그다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노동의 종말’을 예고하는 리프킨(J. Rifkin)이나, 전체인구의 20%만이 노동해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80%가 과잉인구라는 ‘20대80’의 사회는 누구나 ‘잉여인구’에 속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더불어 핵무기, 생화학무기의 발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는, 히틀러조차 번거롭게 생각하던 학살을, 보다 쉽고 간편하게 하며 가해자의 죄책감도 훨씬 줄일수 있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한편으로는 매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파괴의 공포로서 아직까지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기억하자. 전체주의는 우리들이 공포로 인해 웅크리고 있을 때, 우리들 마음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취업으로 인한 비관, 처절한 자본주의적 삶에서 어떠한 생각도 갖지 않는 허무주의 상태에 빠졌을 때 전체주의는 우리를 유혹한다.
아렌트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의사소통 속에서 행위에 참여할 때 전체주의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먹고 자는 것은 살기위한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동물적인 필연성을 대신하여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창조적인 힘이다. 따라서 ‘시작하는 힘’을 갖는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자유를 알려주는 가장 기쁜 약속이면서,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들 역시 시작하고 주도하는 삶을 살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전체주의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자, 인간의 삶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바로 그때의 삶이 인간의 자유가 최고로 확장된 형태가 아닐까. 자본, 국가 혹은 이념과 같은 요소들에 자신의 자유를 양도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아렌트가 말한 노동의 필연성조차 하나의 유희로 또 다른 대안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창조한다면, 전체주의는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 역사상의 사건으로만 남지 않을까.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책인거 같습니다. 일단 문장의 호흡이 매우 길고, 저자의 단어 선택 자체가 조금은 생소해서 읽으면서 한참 생각하고 다음 페이지로 너머가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주석의 내용도 무척 길어서 이해하면서 읽는데 정말 많은 애를 먹은거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노력은 했지만 아직도 이 책 내용의 10%도 이해하지 못한거 같습니다. 1권에서는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 책이라면 2권은 나치와 소련의 볼셰비키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체주의를 운영해 갔는지 설명한 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두 전체주의 체제를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크게 인상적인 부분은 세 가지 정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첫 번째는 전체주의 체제를 '무정형'이라고 표현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전체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많이 바꾼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체주의라고 하면 매우 유기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한 조직체계와 명령체계를 가지고 개인의 사상과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전체주의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지도자 원칙'이라는 하나의 법칙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비교적 허술한 조직이었다는 것을 알고 참으로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인상적인 부분은 끊임없는 감시 체계입니다. 즉, 어떤 권력기관이 생기면 그 권력기관을 감시하기 위해 또 다른 권력기관이 생기고, 그 결과 군보다 비밀 경찰이 더 상급기관이 되는 촌극을 보여주는 부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수용소를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수용소의 역할이 단순히 여타 민족을 학살하는 장소가 아니라, 선발된 병사들을 살인 훈련을 시키는 역할과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되었다는 설명을 듣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실제로 강제 수용소에는 선발된 인원들이 파견되었고, 이곳에 파견된 인원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 다시는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가 전하고자 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전후 세대들은 독일이 패망하고, 또 이후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전체주의가 종말했다고 생각하지만,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요소는 아직 세계 곳곳에 남아 있고 인류 앞에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 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전체주의 지배에서 이상적인 신하는 골수 나치나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즉 경험의 현실)의 차이와 참과 거짓(즉 사유의 기준)의 차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녀의 이 말이 저에게 울림을 남긴 이유는 통신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거짓은 정말 빠른 속도로 퍼지고, 진실은 지렁이보다 더 느리게 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의 해결책은 한 명의 인권이 공격 받으면, 전체의 인권이 공격 받을 수 있다는 그녀의 말처럼 다시금 범세계적 차원에서 유대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주의라는 말을 요즘엔 듣기 어려운 용어인데 유대인 정치사상가인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전체주의가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이고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하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칭하게 되어 반(反)공산주의 슬로건으로 전용되었다고 합니다. 간단히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책을 읽었습니다.
전체주의 이전의 반유대주의와 전체주의적 반유대주의의 차이와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실례가 바로 ‘시온 장로 의정서’라는 어이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치가 이 위조문서를 세계 정복을 위한 교과서로 이용한 사실이 반유대주의 역사의 일부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이야기가 왜 첫손 꼽히는 반유대인 선전 도구로 이용될 만큼 그럴듯해, 보였는지 이 역사만이 설명해줄 수 있다. ---p.44
반유대주의 역시 유대인들이 공적 기능과 영향력을 잃고 재산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을 때 절정에 달했다. 히들러가 권력을 장악할 무렵 대부분의 독일 은행에는 유대인이 없었다. 유대인이 100년 넘게 요직을 차지할 수 있던 곳도 바로 독일이었다. 독일계 유대인은 사회적 지위나 수적인 면에서 점진적 성장을 한 후 너무나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통계학자들은 몇십년 내로 유대인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통계적인 관점에서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멸종은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진행될 과정을 쓸데없이 가속화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p.85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축소하고 파괴했을 뿐, 인간의 마음에서 자유에 대한 사랑을 결코 지우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자유는 인간이 새로 태어나고 그래서 각자는 새로운 시작이며 어떤 의미에서 세상이 새롭게 시작한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전체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자유를 위한 희망적인 시도인 것이다. 라고 합니다.
거의 3개월을 붙잡고 있던 책 읽기를 마치고 마감하자니 정리가 잘 안됩니다. 우리는 정말 모든 혜택을 다 누리며 안락한 생활을 하는 세대에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태어난 기쁨이랄까요? 문명이 고도로 발달할수록, 문명이 산출한 세상이 더욱 완성되면 될수록, 인간이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생산물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것, 수수께끼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적개심이 듭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자리 자리를 찾는 것, 우리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세상이 아직 아닌 것이 우리가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체주의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움이 있지만 한나아렌트가 나치에 의해 시민권까지 박탈당하며 무국적자 생활을 한 장본인이라 그의 정치사상은 조금 사유가 됐습니다. 과거의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것은 교훈삼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한 이들이 헛수고가 아니길 잊혀지지 않기를 책을 읽은 독자가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은이 한나 아렌트는 이 방대한 책에서 "정치는 여전히 의미를 갖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아렌트에게 전체주의는 가장 극단적 형태의 정치부정이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총체적으로 폐지하려 한다.
전체주의에 대한 시대 비판적 성찰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치 혐오를 설명해줄 수 있다... 정치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된다면, 즉 정치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심화된다면 우리의 자유도 역시 위험해진다. 아렌트는 이렇게 정치적 자유라는 불안한 문제를 건드린다....
앞에 역자 서문을 보면
번역자께서 이 책의 가장 마지막부분인 "이데올로기와 테러" 부분을
가장 먼저 읽어볼 것을 권유하셨더라고요
그래서 1권에 이어 바로 2권을 구입했습니다
여전히 좀 어렵긴 하지만 인간의 자유가 무시당한다고 정의내리는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에 대한 정의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보여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여러 부분에서 겹쳐 보이면서 각각의 시대란 엇비슷한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도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