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글주의/서평)
한길사에서 출판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은 표지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청역 근처에 있는 순화동천에서 책을 쭉 둘러보다가 표지 때문에 제목을 읽기도 전에 책을 들었다. 그때는 키르히너의 [베를린의 거리 풍경](Berlin Street Scene)만을 보고 무슨 책인지 궁금했었는데, 운이 좋게도 바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책은 한나 아렌트가 챕터 별로 특정 인물에 대한 견해를 밝히며 글을 써 내려간 구성으로 되어있다. 그 인물들은 브레히트부터 오든, 하이데거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뛰어난 사람들이다. 각 인물을 챕터 별로, 마치 단편소설집을 상기시키는 구성이 맘에 든다. 그리고 표지가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다. “어두운 시대”라는 제목과 키르히너가 그린 1900년대의 독일 풍경이 잘 어울리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 그림 속 사람들과 아렌트가 챕터 별 언급한 인물들(물론 인물들끼리 아는 사이인 경우도 있지만)이 대치를 이루는 듯하다. 또한 키르히너의 그림에는 센터에 매춘부와 그 (남성) 고객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아렌트가 그린 인물들은 이들과 같이 당시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평가를 모두 받았을 것이다.
여러 챕터 중 제 8장,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에 대한 챕터에 집중하여 서평을 쓸까 한다. 나는 언제나 관심이 가는 철학자나 인물에 대해 생각할 때, 이들의 작품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지, 이들에 대한 작품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지 고민한다. 베냐민에 대해 매번 관심만을 품고 있다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으면서 베냐민에 대한 글을 먼저 읽게 되었다. 물론 아렌트 한 명의 의견이기는 하나, 그녀는 베냐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다양한 인용 등을 통해 베냐민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평가가 모두 포함시켰고, 그래서 읽기 정말 좋았다. 기억에 남는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1) 명성은 사회적 현상이다. 우정이나 사랑은 한 사람의 의견으로 충분하지만
(세네카가 현명하고 현학적이게 말한 바와 같이) “명성은 한 사람의 의견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어느 사회도 분류기준을 갖지 않을 경우, 즉 등급과 일정한 유형에 따라 사물이나 사람을 배열하지 않을 경우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2) 우리는 비평가를 양피지를 앞에 두고 있는 고문서학자로 비유할 수 있다. 고문서학자가 원본의 서체를 해독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듯이 비평가는 원본을 주해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3) 은유는 세계의 조화를 시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다.베냐민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은 그가 시인이 아니면서 시적으로 사유했으며 은유를 언어의 최대 선물로 생각한 것에 있었다.
4) 보들레르는 “나는 유용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언제나 매우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베냐민은 분명히 이 말에 동의했다.
5) 우리는 베냐민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극심한 동요로부터 정적인 것으로의 전환, 즉 운동 자체의 정적인 관념을 그의 모든 문장 이면에서 느껴야만 한다.
한길사에서 출판하는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처음으로 이번 책을 읽게 됬는데, 일단 하드커버라서 들고 다니기도 좋고 (무거울 수는 있지만 커버가 찢어지거나 꾸겨지는 걱정은 없다) 디자인도 예쁘다. 커버를 벗기지 않으면 명화가, 벗기면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빨강 색이 보인다. 내부의 장점은 여백이 충분하다는 점이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고 완벽하게 적당한 양의 여백이 있다. 그래서 글을 읽다 생각나는 점이나 적어야 할 내용이 있다면 이 여백을 활용하기에 딱 이다.
어떻게 끝맺음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상 서평 끝~!
#한길사 #한나아렌트 #한길그레이트북스 #어두운시대의사람들 #키르히너 #발터벤야민
한나 아렌트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단연 ‘악의 평범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론이 너무나 파격적이고, 서브컬쳐에서도 많이 쓰이곤 하니까. 그렇기에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여기에 악의 평범성 관련 논문이 있는건가? 하면서 무식함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 안 속의 이야기가 관련이 없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관한 이야기니까.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야스퍼스, 발터 베냐민, 베르톨트 브레히트, 하이데거 등, 솔직히 학생 입장에서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띵해지는 대지식인들이기도 하다. 평소 같으면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쉬운 설명이 있을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 책은 아니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겁다. 이 무거움은 불편할 수도 있다. 어렵고, 그에 대한 해석이 요하다.
하지만 이 무거움이, 어렵다고 안 봐도 될 것은 아니다. ‘악의 평범성’이 한 개인에 의한 악을 이야기 한다면, 이 책은 그 악이 가득한 시대, 혼란스러운 어두운 시대의 이야기니까. 물론 이러한 한나 아렌트나 여기에 있는 인물들의 이론, 생각, 주장이 완벽하다 이런 것으로 추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두울 때 가장 빛이 환하다고, 이들의 주장은 다들 강한 자기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이 책은 시대를 밝히려고 노력을 했던 사람들을 바라본 한나 아렌트의 의견이 섞인 책이다. 무지는 죄라고, 평소에도 농담으로도 진담으로도 말하고 다니는데 이 책을 읽을 때, 내 무지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름만으로 보던 사람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명 한명씩만 하자고 해도 주변에 ‘덕후’급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한 학술서로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시대에 관한 이야기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대도 혼란의 세대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 일 수도 있다. 서로 항상 올바른 자세를 지녔단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한 책이다. 단순히 넘어가기엔 우리의 세대가 그 시대와 동일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두운 시대”는 브레히트의 유명한 시 <후손들에게>에서 가져온 문구로 저자 한나 그랜트는 존재하는 것을 노출시키지 않고 은폐하는 언어, 오래된 진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진실을 무의미한 사소한 것으로 폄하하는 도덕적인 또는 다른 형태의 권고 때문에 빛을 잃게 될 때 어두움은 찾아온다고 한다. 책은 이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빛으로 조금이나마 밝히려 노력했던 사람들을 공유하고 있다. 소개한 사람들은 서로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모두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 시대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전제하에 글을 썼다.
책에서는 총 열 네명의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레싱, 로자 룩셈부르크,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카를 야스퍼스, 이자크 디네센,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베냐민, 베르톨트 브레히트, 발데마르 구리안, 랜달 자렐, 마르틴 하이데거, 로베르트 길벗, 나탈리 사로트, 위스턴 휴 오든이 그 주인공이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웠던 철학가, 사상가들의 이름이 많이 보여 반가웠고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이 책을 번역한 홍원표 한국어외국어대학교 교수의 ‘어두운 시대의 세계를 밝히는 빛: 우정, 정치적 사유 그리고 후마니타스’란 여는 글로 시작했는데 저자 아렌트와 소개된 사람들의 실존적 소통을 통해서 우정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며 가장 가까운 친구란 공적인 것과 관련해 두 사람이 이익과 손실을 공유하는 투쟁에서 서로 씨름하는 친구라는 표현이 굉장히 인상깊었고 몇 번 생각하고 곱씹어야하는 철학, 사상의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이해하고 그 사람들의 깊이있는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기뻤다.
“나는 세계의 이러한 현상을 억지로 알려 하지 않는다. 이 지구상에는 지금까지 수없는 문명이 유혈과 공포가 사라진 문명을 갖게 될 날을 이 지구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나는 우리의 지구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100만 번째 또는 400만번째의 생일잔치까지 이러한 선물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지구는 마침내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을 내림으로써 생각이 깊지 못한 우리를 벌 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쇠퇴해가있으며 역사를 폐허의 장소로 본 베냐민은 1935년 파리에서 보낸 편지에서 위와 같이 썼다. 이 구절은 현재 2019년에도 의미심장하고 되새겨들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쉬운 책을 아니지만 매일 조금씩 조금씩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과 이야기한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분명 지금의 시대를 보는 시각도 조금 더 깊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p.341
"어떤 시도 독자를 위해 쓰인 것은 아니며,
어떤 그림도 감상자를 위해 그려진 것은 아니며,
어떤 교행곡도 청중을 위해 작곡되는 것은 아니다."
「번역자의 사명」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어떤 시대로 기억 될까?
그 시대 속에서
나는 어떻게 기억 될까?
내용은 어려웠지만
문장은 쉽게 읽혔던 책.
하루면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삼일 정도에 걸쳐서 읽느라
조금 힘들었다..
다음에 더 집중해서 읽어봐야지 :)
1900년대 초반의 유럽은 그야말로 어둡고, 절망적이며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1914년부터 4년 동안 이어진 제 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리고 1929년에 닥친 대공황은 인플레이션, 대량실업, 그리고 혁명적 불안을 야기했으며, 1939년 발발한 제 2차 세계대전은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럽 전역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시대는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었고 어떤 행동도 의미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개인을 무의미한 축제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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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파괴된 세상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대적 어두움을 이해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답습하지 않도록 노력한 여러 인물들의 처절한 지적 헌신은 혁명적 운동, 철학적 성찰, 문학적 표현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이 활동했던 정치적 어둠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 그리고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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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인물들은 잃어버린 세대라고 표현된다. 잃어버린 1세대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와 전쟁터를 통해 처음으로 세계에 참여한 사람들이고, 제 2세대란 대공황으로 사회의 불안전함을 깨우친 사람들이다. 마지막 3세대는 나치 강제 수용소, 전범재판 등으로 세계와 접촉할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 시기의 인물(일정한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뛰어난 사람)들은 세상의 어둠을 명백하게 이해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든 정치 공간이 상실됐을 뿐 아니라 개인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추동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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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브레히트의 시어인 ‘어두운 시대’를 정치적 은유로 수용하여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밝음과 어둠의 공존과 대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아렌트가 어둠과 밝음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란 제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아렌트의 철학 전반을 오독할 수 있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렌트는 인간의 내면을 어둠과 연계시킨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동기를 품고 있는지는 보호받아야 한다. 만약 자신의 내면이 공적인 빛에 의해 벗겨진다면, 우리는 고독한 사유의 자유를 침해당할 것이다. 두번째로 아렌트는 사적 삶을 어둠으로, 정치적 삶과 공공영역의 특성을 밝음으로 묘사한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인 집은 은폐된 것이다. 공공의 빛이 집안까지 비춰진다면 우리는 편안한 휴식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반면 공공영역 즉 정치영역은 서로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있기 때문에 공개적이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말’로 표현하는 공간이 공적영역이기 때문에 은폐된 사적 영역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아렌트는 공공영역에 빛을 발휘하는 인간의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건강한 정치가 유지될 수 있고 인간의 공존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공공의 빛이 조작된 형태로 모든 사적 공간을 비추고자 하는 경우, 정치의 어두움이 드리운다. 그것이 전체주의 사회를 지배한 어둠, 칠흑같은 어두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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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는 사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어두운 영역에 강제적인 빛을 비춤으로써 사적 영역과 공공영역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방법은 비밀 경찰과 테러, 거짓말 그리고 상호 고발을 동원한 총체적인 감시로 이뤄진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사생활마저 파괴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이 고립을 가장 극단적이고 절망적인 경험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서 삶을 영위해왔기 때문에 어둠과 밝음은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하지만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파괴는 인간세계를 사막화 했으며, 절망만을 확산시켰다. 그리고 나치즘이 보여준 어둠의 또다른 모습은 인간조건 전반을 파괴했다는 것에 있다. 어두운 시대는 공간을 파괴한 것을 넘어서 인간 조건인 삶, 다원성, 탄생과 죽을 권리 모두 부정했다. 집단 수용소는 어둠의 모델이었으며, 조건이 파괴된 인간은 껍데기, 혹은 잉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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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두운 시대는 개성을 상실했고, 사람들의 기본적 도덕관마저 부정당한 시대였다.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공간은 마치 지옥과도 같다. 이 시기는 모든 정치적 빛을 상실했고, 건강한 어둠은 왜곡됐다. 새로운 시작을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어둠이 바로 전체주의의 어둠이다. 하지만 어둠은 민주주의 시기에도 찾아온다. 아렌트는 1960년대 미국에서 거짓된 정보를 바탕으로 베트남 전에 참전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며, 케네디 전 대통령도 암살당하는 등, 미국의 시대적 배경은 마치 ‘공화국의 종말’과 같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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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어느 시대라도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고, 생각하는데 나태해질 때 찾아온다. 하지만 전체주의의 칠흑 같은 어두운 시대라도 빛을 밝히려 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은 정치적 사유를 통해서 어둠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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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싱의 위대성은 …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즐겁게 받아들인 데 있습니다. 유일한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논쟁의 종식이었을 것입니다. … 그리고 이 논쟁의 종식은 곧 인간성의 종언을 의미했습니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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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소개되는 레싱은 사유의 중요성을 피력한 인물이다. 그는 진리와 정치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는 정해진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사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탄생하는 것이다. 즉 그는 아렌트가 훗날 이야기할 정치에서 공적 영역의 회복을 외친 초기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인식의 효모’를 유포시켰다고 이야기한다. 이 효모라는 은유는 생각을 가능케 하는 요소를 의미한다. 즉 인간 개개이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절대 진리는 그 과정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 진리가 존재하게 되면 대화의 종언으로 이어진다. 나치즘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진짜 반지’ 인냥 사람들의 복종을 강제했고, 덕분에 정치 영역은 소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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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는 도덕적 문제 때문에 일차적으로 혁명에 관여했다. 이러한 관여는 로자가 공적인 삶과 공공업무, 그리고 세계의 운명에 정열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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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자 혁명가이다. 여성의 정치적 참여가 터부시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로자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에 순응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자 혁명그룹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하는 등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의 운명에 정열적으로 참여한 공적인 인물이었으며 죽는 순간까지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비극적으로 암살당했지만, 후대의 정치 참여자들에 의해 이름이 언급되면서 ‘불멸성’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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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구의 파멸이라는 공포에 기초를 둔 소극적 연대는 명료하지 않지만 적잖이 중요한 이해에 그 대응 방안을 지니고 있다. 즉 인류의 연대는 정치적 책임을 동반할 경우에만 그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관념에 따라 개인적 ‘죄책’과 관계없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공적인 문제에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행하여 우리를 감당하기 어려운 전 지구적 책임상황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시민으로서 책임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연대는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일 수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부담에 대한 공통된 반발은 정치적 무감각과 고립주의적 민족주의, 즉 인간주의의 회복에 대한 열정이나 욕구라기보다 현존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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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유대는 주관적으로는 “무한한 소통을 향한 의지”이며 객관적으로 보편적 이해 가능성이라는 사실이다. 인류의 통합과 유대는 하나의 종교, 철학, 또는 한 정부형태에 대한 보편적 동의에 있는 게 아니라 복수성이 다양성이 의해 동시에 은폐되면서도 노출되는 유일성을 지향한다는 신념 속에 존재한다.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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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스승이자 친구인 야스퍼스에 대한 찬사와 존경을 숨기지 않았다. 때문에 이 책에서 유일하게 두 챕터를 소비해가며 그를 소개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공공영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동정심, 형제애, 박애 등과 같은 인간애를 후마니타스라고 명명한다. 야스퍼스는 유대인 부인을 두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쫒겨났지만, 그 철학적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고 세계사랑과 후마니타스를 외쳤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인류의 진정한 연대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세계 시민들이 “무한한 소통을 향한 의지”로 나아갈 때, 후마니타스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정치적 악과 타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망명하면서도 공적 세계와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눴다. 그는 “위기의 시대와 순응의 시대”에서도 사유의 힘, 그리고 사람들을 믿었던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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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제외하곤 대부분 극작가, 시인, 평론가 등 문학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설명한다.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베냐민, 브레히트, 나탈리 사로트, 오든, 자렐 등은 문학영역에서 그들의 사유활동 전반을 보여주며, 이것이 어떻게 정치적 행위와 연관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우린 아렌트의 은유적 표현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책 제목에서부터 ‘어두운 시대’라는 시어를 따왔듯이 아렌트는 정치 이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언어를 표현할 때만큼은 시적인 은유를 사용한다. 레싱의 말을 인용하며 사용한 ‘인식의 효모’, 진리를 묘사한 ‘진짜 반지’, 그리고 빛을 밝히는 ‘조명’과 극단적인 빈곤을 말하는 ‘어둠과 매서운 추위’는 모두 시적인 메타포이며, 아렌트는 메타포를 통해 사유와 행위를 연결하고자 했다. 형이상학 전통은 이데아라는 정신적 삶(빛)과 현상이라는 활동적 삶(어둠)으로 세계를 구분한다. 아렌트는 전통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이 오류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신활동에 참여할 때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아렌트는 두 영역 사이에 놓인 심연을 좁히는 방법을 찾았으며 그것이 바로 사유 언어 즉 은유(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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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은유를 통한 사유와 행위를 조응하고자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학가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대한민국의 어두운 시대, 식민지 지배 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처절하게 항쟁한 운동가들도 있었지만, 펜으로 일제에 저항한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와 같은 저항시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자기 성찰을 보여주었으며 노골적으로, 혹은 메타포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했다. 그들은 정신과 행위를 연결하는 메타포를 통해서 정치적인 빛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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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예술가의 잘못된 행동은 고대 이래로 정치문제였으며, 때로는 도덕문제였다. 나는 이러한 사례에 대한 다음 논의에서 두 가지의 가정을 고수할 것이다. 첫째, 괴테는 일반적으로 옳았으며 평범한 사람들보다 시인들로부터 더 많이 인정을 받았다고 시인들도 중대한 죄를 범할 수 있으므로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짊어져야 한다. 둘째,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 좋은 시행을 쓰는 능력은 시인들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도움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을 부여받았어도 그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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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한 예술”의 마굴에서 벗어나 “모든 미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의 힘 속에 투입하는 것”이 현대 문학의 특별한 사명이라는 것, 이러한 주장은 모두 브로흐가 창작활동을 시작하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원칙이었다. 그는 윤리의 절대적이며 신성한 탁월성과 행위의 탁월성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특이한 근대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 그는 이 근대성 때문에 갈등과 어려운 문제에 의해 결정된 삶 속에서만 근본적 태도와 자기 품성의 근본적 요구조건을 표현해야만 했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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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을 찬양했지만 동베를린에 정착해 공산주의의 현실을 깨달은 브레히트처럼, 예술은 공적 영역으로 발표된 직후, 사람들의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작품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벗어나 예술 속에는 미적인 것, 윤리적인 것들이 투입해야 한다는 브로흐의 말처럼, 예술 그 자체론 불충분하다. 예술은 인간을 정치적 삶으로 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짜를 퍼트려 인간을 순응화, 잉여화 할 수 있는 만능 도구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인간을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차원을 개방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상향만을 책임없이 퍼뜨려 사람들을 칠흑 같은 어둠의 공간으로 끌고 갈 것인가? 정신과 활동의 심연은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아니기 때문에, 시인과 예술가는 그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는 연결되어 있다. 공적인 삶을 무시하고 책임 없는 발언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다면 그것은 기만을 낳고 혼돈을 초래할 것이며, 민주주의의 보이지 않는 위험을 끌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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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쉽지 않은 책이다. 은연한 메타포는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번역하신 홍원표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아렌트가 사용하는 메타포 때문에 번역에 상당히 애 먹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메타포는 아렌트의 사상체계를 꿰뚫는 중심적인 방법론이기 때문에 곱씹으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말하고자 했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어렵더라도 시간을 들여가며 찬찬히 읽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