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전철에서 연세 드신 할머니를 보고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복잡한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전철에서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지만, 그날 내가 조금 의아했던 것은 그 할머니가 일행도 없이 전철 양쪽 끝 노약자석이 아닌 가운데 서 계셨기 때문이었다. '저쪽으로 안 가시고?'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곤 움찔했다. 젊은 사람은 전철을 타면 가운데 좌석 쪽으로, 나이 든 사람은 양쪽 끝으로 나누어 이동해야 한다는 꽤 견고한 내 안의 경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이 먼저 자리에 앉아 가실 수 있도록 배려하고 공경한다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구분이었겠지만 전철이라는 일상 속에서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은 언제나 철저히 나누어진다. 서로의 구역을 벗어나면 적잖은 질타의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옳은 걸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공경’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좀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일상을 만드는 전철의 노약자석처럼 사회 곳곳에서 갈수록 함께할 일 없는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만남’ 이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 책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만화는 새 집을 찾던 야베 타로가 부동산에서 2층 단독주택을 소개받는 소개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신주쿠 변두리에 있는 이 목조 건물에는 이제 1층에는 집주인 할머니가, 2층에는 저자가 산다. 이 책은 한 건물에 살게된 80대 할머니와 30대 마지막 해를 보내는 저자, 이 두사람의 특별하기도 하고 시시하기도 한 하루하루의 기록이다.
언제나 ‘강경하십니까?’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할머니는 택시를 타고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 단골 매장에 가서 명란젓 하나만 사오기도 하지만, 솜사탕이나 햄버거, 그리고 규동은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월세를 드리러 간 날, 할머니는 친절하게 차 한 잔을 권한다. 구석구석까지 반짝반짝 하다는 할머니네 집을 소개하는 이 작은 컷부터 나는 이 할머니가 참 좋았던 것 같다. 그녀가 상냥하고 단정한, 위트있고 비관적이지 않은 여성이라는 건 책장을 넘기면서 누구나 금세 알 수 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타입은 맥아더 장군. ‘애수에 젖은 분위기에, 어딘가 먼 곳에 데려다 줄 것 같아서’ 멋지단다. 무려 맥아더 장군이 이상형인 어떤 사람이 좋아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부질없다. 인생은 도무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가장 좋았던 에피소드를 고르는 일은 참 어려웠다. 거의 모두 좋았기 때문.
할머니와 가까운 곳으로 점심 먹으러 나간 바람부는 날 이야기, ‘가락국수와 반딧불이'는 그중에서도 마음에 남는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펼쳐진 서로 다른 세상을 꺼내 나누며 바라보게 된 날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사람이다.함께 외출한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럽지만 말라깽이라 비슷한 입장이다. (할머니는 너무 마른 그를 보면 ‘이 나라가 전쟁에서 왜 졌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둘은 바람 속에 처음 손을 잡고 걷는다.
세찬 바람은
이제 가라앉았고,
강이 있고,
반딧불이 없는
햄버거 가게와
덮밥집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지막 4컷의 글은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았다.
집주인 할머니의 생일 에피소드도 기억하고 싶다.
감동적인 생일 축하가 있어서라기 보다 생일날에도 무심히 펼쳐지는 할머니의 일상과 노련함과 다정함과 귀여움이 너무나 좋았다. 베레모를 쓴 젊은 여성이 일주일에 한 번씩 할머니 댁을 찾는다. ‘한결 편하시겠어요.’라고 아는 체를 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피곤함을 털어놓는다. 그녀가 언제나 목소리가 너무 크고 부엌의 수돗물을 그냥 틀어두고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오래 앉아 있으면 얼른 자리에서 못 일어나는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슬쩍 속이려든다. 할 이야기가 더 남아있는 것처럼. 그 장면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약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언제나 상대방을 편안하게 배려하려는 태도가 할머니의 일상을 채우고 귀여움으로 반짝인다. 할머니에게 귀엽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이 그들이 나이 먹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달리 표현할 길이 없지 않을까.
'슈퍼 같은 곳'은 다니지 않는 집주인 할머니는 언제나 택시를 타고 신주쿠에 있는 이스턴 백화점에서 물건을 산다. 함께 백화점 식당가에서 식사를 한 '나’는 할머니의 2천 엔짜리 명란젓을 보고 놀란다.
서로 다는 세대를 사는 두 사람의 일상은 언제나 이렇게 다른 경험, 기억, 가치, 취향, 습관이 마주치며 자주 놀란다. 그리고 서로의 세상은 자꾸 넓고 깊어진다.
팥떡 한 덩어리에 공양할 때 사용하는 초 하나를 꼽아 저자의 생일을 축하해 준 할머니 삶의 방식은 나이 든 사람의 촌스러움이기만 할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이 사랑스러운 만화는 힘주어 말하는 대신 뭉클하게 보여준다.
세대 간의 갈등과 단절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어쩌면 일찌감치 서로를 차단해 버린 선입견과 거리두기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다고 단정하고 닫아버리는 나이 든 이의 삶은 결국 모두가 오늘도 내일도 다가가고 있는 세상일 뿐이며, 더 신나고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의 삶은 실은 모두가 통과해간 어느 날이라는 것.
그림은 단순하고 종종 엉성하기도 하다. 그런데 읽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좋은 글과 그림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내내 생각했다. 연예인이라고 하지만 늘 부족한 것투성이인 화려할 것 없는 저자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하루하루. 연약한 몸이 남았지만 부지런하고 상냥한 할머니의 하루하루. 그 작은 날들이 만나 서로를 염려하고 격려하고 보살피며 쌓아가는 그런 삶을 보잘것없다고 내버리는 대신 그리고 쓰고 기억하며 결국 빛이 되는 그런 책 말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지겹도록 상투적인 질문을 다시 해본다. 그것은 이 누추한 삶을 넘어 저 찬란한 미래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어서 버리고 지금 이 자리, 나의 현실에 집중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거기엔 살아온 세월 30년도 80년도 다르지 않다. 2층에 사는 집주인 할머니의 "강경하십니까?" 는 바로 그렇게 지금을 사랑하는 단정한 인사라고 믿는다.
병원에서 지내셔야 했던 할머니가 리모델링을 마친 집으로 돌아와 매화 꽃 흩날리는 봄날 차를 마시며 끝나는 책.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강경하시길.
p.s. 궁금했던 이 책의 속편이 지난해 여름 나왔단다. 주문하련다. 이 두 사람의 동거가 너무 좋았던 나은 일본어를 읽지 못한다는 것도 그만 잊은 것이다.
일본에서 개그맨으로 활동하는 저자는 8년 전부터 주인 할머니 집 2층에서 월세를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겪은 주인 할머니와의 소소한 이야기를 <집주인 할머니와 나>에 담았습니다. 그럼 내용을 보겠습니다.
일본 개그맨 야베 타로는 신주쿠 변두리에 있는 목조 2층 단독주택으로 이사 왔습니다. 그곳은 바깥 계단으로 올라가는 2층 방과 욕실과 화장실은 별도로 있으며 1층은 집주인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어요. 인사말로 '강녕하십니까?'를 하시고, 87살이며 일찍 일어나 옷을 단정하게 입고 쓰레기를 내놓은 뒤 마당을 쓸고, 일정한 시간에 밥을 드시고, TV에서 재미있는 프로를 한창 할 시간에 일찍 주무십니다. '나'는 자고 싶을 때 실컷 자고, 밥은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하고, 할머니가 잠드실 때쯤에 최고로 기운이 쌩쌩합니다. 이사 오고 한 달째, 집주인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와 일이 없으면 점심에 같이 밥을 먹자고 합니다. 나는 부담이 돼서 거절했더니 식사를 배달시켜 주었고 그 뒤로 다달이 한 번씩 불러 밥을 함께 먹게 되었습니다. 빨래를 널어놓고 나가 있으면 전화가 와서 비가 온다며 알려주고, 어떨 땐 빨랫감을 개서 보자기에 넣고 문고리에 매달아 놓기도 하십니다. 처음엔 할머니의 관심이 부담되었던 나도 할머니와 얘기하고 밥을 먹으며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나의 생일도 축하해 주시고, 이세탄 백화점에서 장을 보는 멋쟁이 주인집 할머니, 그분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어느새 주위 사람들에게도 주인집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나, 그만큼 정이 들은 거지요. 지방 공연을 떠났을 때 할머니가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병원으로 갑니다. 이제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말씀하시고, 한 달 후 재활전문병원으로 옮기셨습니다. 그곳에 할머니 집에 들른 적 있는 동료 개그맨과 가서 보고 옵니다. 할머니가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고, 석 달이 되던 때, 할머니의 조카 분과 여러 사람들이 와서 의논을 하더니 리모델링을 시작합니다. 할머니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문턱을 없애고, 슬로프와 손잡이를 단답니다. 리모델링이 마치고, 할머니가 오신 날 함께 차를 마시며 마당에 핀 매화꽃을 봅니다.
할머니가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한 차에 이 만화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집주인 할머니와 저희 할머니는 다르지만 그래도 할머니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간을 보낼 줄 알고, 물건을 아끼고, 들어본 적 없는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도 집주인 할머니와 같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시간을 보내길 바라듯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점차 연세로 힘이 없어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 또한 인생의 과정이니 피할 수 없겠죠. 부디 아프지 않고 편안히 마지막까지 계시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건강하길 바랍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쓴 후기입니다.
개그맨 야베타로와 집주인 할머니의 일상툰
할머니는 87세
몸가짐과 말투에 기품이 있고
인사말은 강녕하십니까?
매달 오라버니 기일에 공양으로 올리는 덮밥을 야베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옛날 일에 대해 무심히 이야기하고
혹시 연락이 안되어 걱정을 하기라고 하면 친구와 호텔에서 1박을 놀고 오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할라치면 최소 4시간은 걸리고
생일 선물을 하고
자신이 가진 물건을 나누고
죽음에 대한 농담을 하고
이세탄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별 일 없는 일상을 별 일 있게 그린 재밌는(?) 감성 그림 에세이
#집주인할머니와나 #야베타로 #소미미디어
<집주인 할머니와 나>
굽은 할머니와 마른 청년의 맞잡은 두 손. 표지부터 정감있는 모습의 이 책은 만화로 구성된 감성 에세이다. 일본 현지에서 120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책으로 무명 개그맨 야베 타오와 정 많은 집주인 할머니의 소소하고 재치 있는 일상을 그려낸 책이다. 1977년 생의 개그맨 야베 타로는 영화, 연극, 드라마도 출연하고 있지만 사실 무명개그맨이다. 이 책은 그가 처음 그린 만화로 책이 출간된 지금도 집주인 할머니네 2층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어떤 책일까 무척 궁금한 마음에 열어보았는데 생각보다 따뜻하고 잔잔한 유머가 있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야베 타로는 TV에 출연하는 연예인이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다. 각박하고 힘든 현실에 이리저리 치이는 삶을 살고 있는데 새로 월세방을 구해 이사를 가게 된다. 그곳에는 1층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할머니와 동거 아닌 동거를 하게 된다. 늦은 시각 귀가할 때면 인사를 먼저 건네주시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빨래를 방에 넣어 주신다. 정 많은 할머니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나누어주는 참 좋은 분이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을 서로 공유하며 함께 백화점 쇼핑도 다니고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고, 짧은 여행을 떠나는 특별한 시간들을 갖게 된다.
무명 개그맨과 할머니의 조합은 어딘지 쉽게 섞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족이 아니지만 더 가족 같은 그들의 모습에 공감이 갔다. 요즘은 친척이 누군지도 모르고, 바로 옆에 사는 이웃과 마찰도 잦은 시대가 되었다. 그럴수록 일상의 따뜻함을 그린 이런 이야기들이 필요한 것 같다. 빵 터지는 웃기는 상황이 아님에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미소가 머금어 진다. 모두의 하루가 그렇듯이 무탈하고 평안하게 일상을 그려내지만 그 안에 개그맨답게 재치 있는 유머코드를 잘 담아내고 있다. 일본에서 인기를 끈 이유가 바로 보인다. 나라는 다르지만 사람간의 정이라는 코드는 어떻게든 통하는 것 같다. 은근히 할머니에 대한 향수도 느껴지고 쓸쓸한 요즘을 살아가는 시대에 보이지 않는 정이 느껴진다. 읽는 동안 멀어서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가족이 더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