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어떤 물질의 사랑』은 읽고 난 후 지하철 안에서, 노래를 들으면서 일상 속에서 불쑥 나에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책이었다.
바람이 유독 많이 불어서일까. '사랑'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오르는 때였다. <어떤 물질의 사랑>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사랑'을 어떠한 태도로 맞이해야 하는지 안내해준다.
참아야 했고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많았지만 내 삶도 어쨋든 삶이라서,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다.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고 상처와 포근함이 있었다. 내가 지나쳤던 모든 사람과 사랑이, 실은 지나친 게 아니라 그렇게 내 안에 굳어져 내가 되었다는 것을 라오에게 말하며 깨달았다. 너무도 평화로운 오후였다. <어떤 물질의 사랑> 83p.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는 사랑이 눅진히 녹아들어 있다. 사랑이 안겨주는 감정들은 나를 단단하게 하기도, 무너지게 하기도 한다. 사랑이 끝났다고, 모든게 끝난건 아니다. 그 사랑은 다음 사랑의, 다른 사랑의 밑거름이 되어 '나'를 완성시킨다. 지금의 '나'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삶', 그 자체가 사랑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알에서 태어나 배꼽이 없는 라현은 살아가며 수많은 혼돈과 맞닥뜨리지만, 그(그녀)에게 엄마는 무신경하고 시니컬한 태도로 일관한다. 몇 발자국 물러나, 있는 그대로의 라현을 받아들이는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에 억지로 하나를 맞췄다가 너를 영영 잃을 것 같았어. 그럴 바에야 그냥 너는 너 자체로 살아가는 게 더 맞겠다 싶었어. 배꼽이 없으면 어때. 틀린 것도 아닌데 ." <어떤 물질의 사랑> 86p.
우리는 다른 의미의 라현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결여되고, 결핍된 무언가를 가지고 산다. 라현에게 없는 것은 '유형'의 배꼽이고, 우리에게 없는 것은 '무형'의 배꼽이다. 라현에겐 눈에 보이는 배꼽으로 나타난 것이고, 우리에겐 드러나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나 역시 ('무형의') 배꼽이 없는 사람이다. 배꼽이 없는데, 어떻게 배꼽이 있는 것처럼 살 수 있나. 태어난 그 자체로 살아가면 된다. 배꼽 따위 없어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 나는 나대로 산다. 틀린 건 하나도 없으니까.
몸에서 비늘조각이 떨어지는 라오와 사랑을 한 엄마. 공간과 시간을 넘나드는 사랑을 한 엄마는 마침내 만난 라오와 떠나기 전, 라현에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라현아, 끊임없이 사랑을 해. 꼭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어도 돼.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존재를 만나. 그 사람이 우주를 가로질러서라도 너를 찾아올 사랑이니까." <어떤 물질의 사랑> 87p.
향초를 켤 때, 은은한 불에 서서히 초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좋아한다. 초가 녹아내리며 응축된 향이 사르르, 은근히 코를 찌르는 순간을 기대한다. 그렇게 편안한 느낌이 좋다. 사랑도 그렇다. 천천히 스며드는 사랑을 선호한다. 그 사랑이 저 먼 우주에서 왔을지라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나의 우주'가 있다. 내 우주는 보라색이다. 내 우주에는 주로 백예린, 권진아, 박지윤의 노래가 나오며, <스위트홈>, <하울의 움직이는 성>, <장화, 홍련> 등이 상영된다.
반면, 'S의 우주'는 주황색이다. S의 우주에는 멜론 탑백이나 발라드가 무한반복되며, <이터널 선샤인>, <범죄도시>, <존윅> 등이 상영된다.
'나의 우주'와 'S의 우주'는 색도 다르고, 나오는 노래도, 상영되는 영상도 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각자의 우주는 서서히 경계를 흐릿하게 지우고, 서로의 우주를 닮아갔다. '나의 우주'에선 'S'와 함께 보기 위해 <범죄도시>가 상영되기도 하고, 'S의 우주'에선 '나'를 위해 백예린의 노래가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우주는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의 우주'는 점차 'S의 우주'를 닮아갔고, 그렇게 '우리의 우주'가 탄생했다.
사랑은 이렇게 정리해보도록 하고, 이 소설들을 통해 천선란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아래의 작가의 말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 인생의 방향은 내가 정한다. 그 방향이 옳든, 옳지 않든 노를 쥐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비록 제자리걸음을 할지라도, 묵묵히 노를 저어보자.
세상을 알아갈수록, 지구는 엉망진창이다. 바꿔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인구수만큼 존재하는 사공이 산도 아닌 우주로 지구를 날려버리는 것 같다. 나 하나가 방향을 잡고 노를 젓는다고 해서 바뀔까? 내가 가는 방향이 옳은 방향일까? 이런 생각들을 언제나 하고 있지만, 결론은 하나다. 저어야 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작가의 말> 194p.
그러나 나를 만나고 싶다면 당신도 주저하지 마시길. 당신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든 나는 이렇게 대답해줄 테니까. 그렇군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혹시 배꼽도 없으신가요? P. 153
어떤 물질의 사랑은 천선란 작가님의 작품으로, 여러 단편 작품들이 수록되어있습니다. SF 장르를 자주 읽어본 편이 아니어서 오히려 단편으로 분량이 길지 않는 단편들을 읽어보게 된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SF 장르다운 신선한 소재들과 이야기 전개가 흥미로웠습니다. 단순히 장르만의 특성만이 돋보이는 작품이 아니라 생각해볼 점들도 많은 단편 모음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