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멀리건과 메릴 스트립, 헬레나 본햄 카터, 벤 위쇼 등이 출연한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를 보았다. 여성 참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영국의 여성 투표권이 1920년에 제정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앞서 나가던 나라였으나 여성에 대한 참정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저 여성들은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로 여겼다. 여성 참정권에 대하여 싸운 여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를 읽으며 왜 이런 주제를 말하느냐 의심스러울 것이다. 사람은 보는 만큼 시야가 달라진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영화를 본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소설에서 여성 참정권에 대하여 언급된 걸 보고 반가워서 내지르는 탄성이었다. 진 웹스터는 이 소설을 1912년에 썼고 <서프러제트>라는 영화 또한 그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키다리 아저씨』를 몇 번을 읽었으나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쓴 편지 중에서 '여성 참정권' 에 대하여 발언한 것은 뜻깊은 발견이었다.
그러므로 문학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는 작업과도 같다. 성년이 되어 『키다리 아저씨』를 세 번쯤 읽었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저 주디 애벗과 키다리 아저씨의 사랑이야기로 보았다면 윌북 판으로 읽는 네 번째의 『키다리 아저씨』 읽기는 여성의 참정권과 여성의 지위, 그리고 『작은 아씨들』에서의 조와 마찬가지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나타낸다는 점이었다.
주디는 고아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으나 그녀가 쓴 영작문을 보고 작가로 키우겠다는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것들, 대학생활을 편지로 써 보내며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키워 나간다. 기숙사에서 만난 샐리 맥브라이드와 우정을 나누고 줄리아 펜들턴과도 가깝게 지낸다. 펜들턴 가문의 딸인 줄리아의 삼촌이 찾아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의 고백을 받지만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마음 때문에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서간문 형식의 소설은 무척 매력적이다. 1인칭 소설로 진행되며 상대방을 향한 마음만 들어나니 애틋하다. 상대방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애가 탄다. 일기 형식의 편지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의 정체를 모르지만 어느 누구보다 가깝게 여기는 이유와도 같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건 정말이지 기묘한 느낌이에요. 흥미롭고 낭만적이죠. 가능성이 많잖아요. 어쩌면 저는 미국인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이 많으니까요. 고대 로마인의 직계 후손일지도 모르고, 바이킹의 딸이거나 러시아 망명자의 자녀로, 원래는 시베리아 감옥이 있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116페이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건 굉장히 큰 슬픔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그 기원을 모르니 자신의 탄생에 대하여 불안하다. 그런 마음들을 유머스럽게 드러내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다른 아이들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선물을받을 수 있어요. 아버지와 오빠, 이모, 삼촌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누구와도 그런 관계일 수가 없어요. 그건 그냥 재미 삼아 하는 생각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요. 사실은 혼자 벽에 등을 대고 세상과 싸워야 해요.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고 계속 안 그런 척하죠. (131페이지)
밝은 모습으로 지냈으나 주디가 숨겨놓았던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키다리 아저씨가 모자를 사라며 50달러 수표를 보냈던 것을 거절하며 보낸 편지다. 뉴욕의 상점가에서 줄리아가 비싼 모자를 사는 걸 주디가 편지로 썼던 내용에 대한 키다리 아저씨의 답이었다. 한번도 고아인 적이 없어 주디의 마음을 백 퍼센트 알 수 없겠지만 이 세상에 가족이 아무도 없다면 너무너무 슬플 것 같다.
앞서 주디를 가리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이라고 표현했다. 주디는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 장학금을 타게 되었다. 더이상 키다리 아저씨의 학비를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키다리 아저씨는 장학금을 포기하라고 한다. 주디는 장학금을 포기하라면 아저씨가 준 용돈까지 받지 않겠다는 당찬 모습을 보인다. 또한 방학때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점점 독립적인 여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작은 아씨들』이 핫한 배우들과 함께 영화로 제작되었듯 『키다리 아저씨』도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작은 아씨들』은 꽤 여러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던데, 『키다리 아저씨』는 영화적인 요소가 덜하나. 1935년도 뮤지컬 영화만 있어 아쉽다. 제발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출판사 윌북의 걸클래식 컬렉션1과 함께 많은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걸클래식 컬렉션2다. 화려한 그림을 자랑했던 컬렉션1과는 조금 차분한 그림으로 소녀적인 감성을 느끼게 하는 사랑스러운 세트다. 몇 번이고 읽어야 하는 이유, 사랑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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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는 좋아하는 책이라 여러 출판사 버전으로 읽어봤는데 이건 기대만큼 매끄럽지는 않네요.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쓰여진 서간체 소설이라 정말 남의 편지를 읽는 거 같은 문체를 사용해야 하는데 중간중간 누군가한테 이야기 하는 편지가 아니라 그냥 줄줄 써내려간 평서문 느낌 나는 부분이 있어요. 많이 거슬리네요. 양장본인 거 맘에 들고 표지도 따뜻하니 예뻐서 환불은 안 할거지만 만족스럽지도 않아요.
(2022. 10. 21 구매)
표지가 예뻐서 구매했다. 사실 삽화는 하나도 없지만, 표지 자체는 책과 상당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내용 자체는 워낙에 유명하니까.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들은 하나같이 받은 사람이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올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막 대학에 들어간 사회초년생이 난생 처음 겪은 경험하고 느낀 것에 대해서 적은 느낌이 물씬 풍겨서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
읽으면서 번역된 게 좀 딱딱한 느낌이 든다고 느껴졌다. 어린이 용으로 나온 것들에 비해 어휘가 어른스러운 느낌이 든다.
키다리아저씨 / 진 웹스터 지음 / 김율희 옮김
p131 사실은 혼자서 벽에 등을 대고 세상과 싸워야 해요.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계속 안 그런 척하죠.
어릴 때 만화로 언뜻 언뜻 보기도 했고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서 내용은 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읽지 않았던거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글인데 다시 만화를 찾아보고 싶을 만큼 정말 푹 빠져서 읽어버렸다. 키다리 아저씨가 선물을 줬을때 주디는 가족들이 선물을 보내는 주는 것이라 상상을 한다고 편지에 글을 적는 장면에서는 펑펑 울고 싶었다.
나에게도 키다리 아저씨 같은 분이 계시는데 내가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연락을 못하고 있다. 어느날, 이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어지면 연락을 드려야지.. 이젠 누군가의 키다리 아저씨가 될 나이가 훌쩍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한몸 가누지 못해서 아직도 방황중이다. 주디처럼 어린 나이에도 씩씩하고 당당하고 혼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난 왜 이렇게 늘 환경 탓만 했을까.. 주디에게 많은 걸 배운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