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셸리 케이건을 알아봐야겠죠.
예일대학교 철학 교수.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힘. 1995년부터 현재까지 에일대학교 철학 교수로 재직. 2016년에는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위촉. 그의 철학은 도덕철학과 규범윤리학 관점에서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두고 삶과 죽음의 문제, 행복과 도덕의 가치, 공공의 선, 인간의 본성, 동물의 권리 등을 다루며, 공리주의로 대표되는 결과주의와 칸트주의로 대표되는 의무론 사이의 논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 대표 저작 <도덕의 한계>, <규범 윤리학> <응보의 기하학>은 미국출판협회가 그 해 최고의 연구 결과가 담긴 출판물에 수여하는 프로즈상 철학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최고의 인기 강연 죽음을 기반으로 2012년에 출간된 동명의 책은 미국 외 국가로는 최초로 같은 해 가을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한국어판이 출간되면서 국내에 '죽음'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2014년에는 EBS 다큐프라임 생사탐구대기획 <DEATH>가 방영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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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레스 출판사의 조민호 대표가 대단한 저자를 골랐군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만났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 자기 출판사를 처음 열게 되었다고 책 리뷰를 부탁하던 메일이 다시금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동물에 관한 내용이라는 기본 배경을 갖고 과연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얼마나 비슷하거나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겠다는 관점을 갖고 책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받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_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5쪽
셸리 케이건의 서술 방식 :
앞으로 이어지게 될 이 책의 내용은 '동물윤리'에 관한 것이고 현재 통용되는 관례에 따라 '실천윤리'에 속하는 주제인 것은 맞지만, 내가 우려하는 부분은 이 책의 논의가 이 같은 주제를 망라한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할 수 잇는 갖가지 의견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인간이 자연에서 살아야할 동물을 반려동물로 삼는 것은 윤리적으로 올바른가? 야생 사슴 무리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그중 일부를 인위적으로 도태시키는 일은 윤리적으로 허용되는가?와 같은 질문에 관한 답을 기대했다면 이 책을 통해서는 얻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현재로는 어떤 실재적 결론을 제시하기 보다 공론을 이끌어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피터 싱어, 톰 리건, 데이비드 데그라시아와 같은 철학자들의 책과 논문을 읽고 생각하면서 대단히 즐거운 경험을 했으며 특히 제프 맥머핸 교수의 저작이 인상적이었다. ......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동물윤리에 관한 여러 대안적 접근방식을 설명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관점이 전적으로 독자적이지는 않더라도 내게는 전반적으로 다른 학자들이 제시했던 견해와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고 보인다. ...... 그러므로 이 책에서 내가 어떤 용어나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 여러분이 내가 말하려는 바를 연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로 국한했다. ...... 내가 다른 많은 학자들의 생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책에서 그들의 어떤 특정 견해에 관해 깊게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7-8쪽
목차를 보겠습니다.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존재들, 사람과 동물은 평등해야 하는가, 동물에게 복지를 나눠주는 방법, 복지의 가치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무엇이 도덕적 지위를 결정하는가, 계층주의에 대한 몇 가지 우려들, 단일주의는 의무론이 될 수 있는가, 동물에게는 의무론적 권리가 없는가, 동물을 아우르는 계층적 의무론, 동물에게 자기방어권이 있는가, 제한적 계층주의라는 대안.'까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 눈길을 잡아끄는 주제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1. 첫째 동물이 사람에게 공격당할 때 우리가 동물을 방어해주는 상황이다. 둘째, 사람이 동물에게 공격당할 때 우리가 동물에 대항해 사람을 방어해주는 경우다. 셋째, 동물이 동물을 공격할 때 우리가 한 동물을 다른 동물로부터 방어해주는 상황이다. 이제부터 이 세 가지 경우를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동물이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 물론 이 공격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동물이 먼저 사람을 위협하거나 공격함으로써 촉발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이 해당 동물에게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스포츠로 엽총 사냥을 즐기는 경우가 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저 즐거움을 위해 어떤 동물, 이를테면 사자를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보자.
이 사자는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를 갖고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처음부터 동물의 도덕적 입장에 서서 이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지 않다. 그래도 적응해보자. 사자에게 자기방어권이 있다면, 당연히 제3자가 방어를 도와줄 수 있다는 논리도 따르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이 사람의 사자 사냥을 강제로 멈추게 하는 행위가 허용된다. 공격을 당하는 사자를 방어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사냥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여러분에게도 엽총이 있고 사냥꾼이 사자를 죽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냥꾼을 먼저 쏴서 부상을 입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해보자. 이 정도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잇는 행위일 것 같다.
여러분이 당황했을 지도 므르겠다. 사실 이는 놀라운 결론이다. 인간사냥꾼에게 부상음 입힘으로써 그가 사자를 죽이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허용된다는 생각이 정상적이라고 할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동물에게 자기방어권이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결과일 뿐이다. ......
우리는 이 주장을 거부해야 할까? 동물은 자기방어를 할 권리가 없다고 해야 할까? 분명히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할 것이다. ...... 동물에게는 의무론적 입장 자체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나는 긴 지면을 통해 동물에게 의무론적 입장이 없다는 그들의 주장을 논박했다. 동물이 사람보다 자율성이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자율성이 아예 결여됐다는 사고방식은 잘못이며, 의무론적 입장을 취하려면 '충분한'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역시 아전인수격 논리임을 확인했다.
동물을 정당한 이유 없이 해치려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
다시 사냥꾼과 사자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이때에도 우리는 위해의 양에서 비례 원칙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잠재적 희생자를 방어해주고자 공격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있지만, 그 위해의 크기에는 제한이 있다. 위해의 양에 관한 함수 H=dh를 떠올려보자. 이 수식은 위해가 허용되는 크기의 상한을 보여주는데, H는 승수 d와 공격자가 잠재적 희생자에게 가하는 위해의 양인 h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미 도덕적 지위의 격차로 인해 동물인 사자의 생명과 사람인 사냥꾼의 생명이 그 가치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우리가 사냥꾼을 죽이면 그가 사자에게 가하는 위해보다 더 큰 위해를 그에게 가하는 셈이라는 사실뿐이다. 위해의 양에 관한 비례 원칙에 따라 공격자가 잠재적 희생자에 가하는 것 이상의 위해를 공격자에게 가할 수 없다면, 사냥꾼을 죽이는 행위는 잘못이라는 논리가 뒤따를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와 같은 사례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다음과 같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고 그 동물에게도 잘못된 것이지만, 제3자가 잘못한 인간 공격자를 죽이는 것은 비록 그 동물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라도 여전히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407쪽 |
내가 반복해서 이야기했듯이 동물의 낮은 도덕적 지위는 다양한 방식으로 동물이 약한 의무론적 권리를 갖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동물의 자기방어와 관련해서도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결국 자기방어권도 어떤 개체의 이익과 복지의 위해 당하지 않을 권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보호하기 위한 또 다른 장치로 발동한다. 하지만 자기방어권도 약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대상을 사람보다 낮은 도덕적 지위를 가진 개체로 옮기면 비레 원치겡 대한 조건이 허용 불가 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덕적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비례 원칙 조건의 제한과 같은 개념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사냥꾼에게 가할 수 있는 위해의 크기에 상한이 있다는 것이며, 이 상한은 동물의 도덕적 지위가 낮을수록 더 낮아진다는 것 정도다.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위해를 가하는 행위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나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시에 의무론자라면 적어도 이 논점에 대해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쨌건 구조의 의무에 대한 의무론자들의 입장은 공격당하는 동물을 구하는 문제에서 결과주의자들이 사고방식을 따르는 데 반대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경우라면 논점은 완전히 달라진다. 살아남기 위해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를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과 스포츠 활동으로 사냥을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고방식의 뿌리부터 다른 것이다. 403~411쪽
이 파트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셨나요? 저는 영화 <혹성탈출> 여러 편에서 나온 장면들이 떠올랐다 사라졌으며,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투우장으로 끌려간 소와 관련된 만화도 떠올랐습니다. '야성의 엘자'와 <야성의 부름, 잭 런던 저>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통령 강형욱과 '개는 훌륭하다의 보더 콜리 편'도 생각났고요.
개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상황에서 그 개를 찬다면, 또는 사람이 고양이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상황에서 그 사람을 업어치기로 제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평소 생각도 잘 해야하고 상황이 닥쳤을 때 대응도 적절히 잘 해야 하는 상황이지 싶습니다. 물론 외면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도 중요하고요. 하지만 외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책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그 상황을 상상하고 대비할 힘을 주는 동시에 외면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정당방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실상해도 있는 세상이니까요. 참 단순하지 않은 세상에 산다는 것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2. 사람과 동물은 평등해야 하는가
내가 단일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오직 하나의 도덕적 지위만 있으며, 도덕적 입장을 가진 모든 존재는 철저히 그 지위를 공유한다고 말한다. 이 주장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글이 있다.
도덕적 지위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켜거나 끄는 문제일 뿐이다. 모든 개체는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75쪽 주1 참조. |
도덕적 지위에대한 이 대안적 견해는 현대 동물윤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한 아직까지 제대로 된 명칭이나 비슷한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내가 '단일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단일주의자들의 주장은 간단명료하다. 도덕적 지위는 단 하나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지위는 도덕적 입장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보편적이다. 내가 이 책의 서두에서 설명했듯이 이 관점은 어떤 존재라도 도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면 모두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점에서 평등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설명했듯이 이 용어는 도덕철학의 다른 분야, 특히 분배 문제에서 이미 다른 뜻으로 ......
애초 이런 차등이 적절치 못하다고 여기는 단일주의자들은 동물의 도덕적 입장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스스로 도덕적 지위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구의 어떤 이익인지의 요소는 전혀 도덕적 차이점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은 모든 존재의 도덕적 지위가 동일하다는 말이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모든 존재의 도덕적 지위는 그들이 어떤 종류이건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한 똑같다는 것이다.
단일주의는 규범윤리학 내에서 다양한 입장들과 양립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공통적인 외형상 일부분으로서의 단일주의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만 다른 윤리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을 수 있다. ...... 이처럼 단일주의라는 개념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우리의 주목 대상에서 멀어져 있을 뿐이다.
...... 어떤 존개가 다른 존재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다고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다른 견해를 제대로 설명하려는 경우 그것이 언제나 명확하게 작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이른바 도덕적 동률 moral tie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를 구할지 동전을 던져서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다행스럽게도 사람 두 명이 아니라 쥐와 사람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고민할 까닭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단일주의라면 사정이 다르다. 사람이 쥐에 비해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물에 빠진 쥐를 구해야 하는 도덕적 이유와 사람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모든 면에서 똑같은 가중치를 갖게 된다.
나는 도덕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때때로 놀랄 만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치에 맞거나 바람직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조차 않은 채 이런 비직관적인 결과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단일주의자들의 주장을 살펴보기만 하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하므로, ......보다 설득력 있는 계층주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74~83쪽
침팬치와 사람, 사람과 고릴라, 킨타쿤테와 백인, 노비와 양반. 이렇게 치환을 하고 생각해보면 어떤 결론을 내기게 되나요? 도덕적 지위에 차이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그런데 내가 침팬치가 되고 고릴라가 되고, 킨타쿤테가 되고 노비 입장이 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영화 <노예 12년>과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을 기억해봅시다. 그러면 단일주의자와 계층주의자에 대해 간단하게 호불호 또는 지지와 반대를 설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못지않게 복잡한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단순하지가 않네요.
3.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능력 차이 - 정상적 편차
계층주의에 대한 우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껏 도덕적 지위가 개체의 능력과 함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또한 자주 관찰된 대로 이런 능력들은 가변적이며, 많은 동물들은 덜 발달되거나 덜 정교한 형태로 갖고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뜻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능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다만 사람과 동물만큼의 엄청난 격차는 아니기 때문에 격차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른바 정상적 편차라고 부를 만한 이런 종류의 차이는 지금까지 고려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헤아려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덜 헤아려진다는 이런 관점을 받아들여야 할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정상적 편차라는 개념을 제기하는 데 우리의 도덕적 지위를 생성하는 능력들이 지속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자.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인간 성인 사이에서의 도덕적 지위 차이를 포함하는 관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도덕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잃게 될 복지의 양이 더 많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이와 유사한 불편함을 겪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 사이에서의 도덕적 지위 격차라는 사고방식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계층주의 거부라는 결론만이 남아 있는 것일까?
확실한 사실은 정상적 편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내가 주장하는 계층적 접근방식은 이를 빌미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리라는 점이다.
실천적 현실주의라고 부르는 사고받식과 연결된다. 그런데 그 세부 사안은 제11장 제2절에서 함께 다루기도 하겠다. 그렇다면 당분간 내 주장은 일종의 약속 어음과 같은 것이 될 텐데, 정상적 편차 문제에 아직까지 설명되지 않은 실현 가능한 해법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리고 계층주의가 내포한 일부 개념들, 즉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의 실재 가능성이나 가장자리 상황 등이 우리를 당혹스럽고 불쾌하게 만들 수 있으나, 그 또한 계층적 접근방식을 거부해야 할 충분한 이유는 될 수 없다.
우리는 이 문제가 당연히 동물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는 어떤 동물이 사람에 필적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동물에 대해 적절한 계층적 접근방식을 따를 때 그 개체는 사람과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정상적 편차 문제는 평범한 성인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능력의 차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269-277쪽
이 책은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이며 철학자가 작성한 글입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으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큽니다. 동물이 방어권을 가질 수 있는가? 사람과 동물이 평등해야 하는가? 개체들 사이의 정상 편차. 이 3가지만 가지고도 수 많은 질문과 역사상 그리고 문화적인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책.
그리고 사실은 먹고 살기 바쁘다고 말하면서 외면하거나 생각을 보류했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는 책입니다. 들어가면서 셸리 케이건의 논조를 설명한 이유는 다른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참조는 하지만 자신의 견해를 밝히겠다는 그의 입장이 견고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읽으면서 정답을 제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맞는 견해나 해법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면이 이 책에 강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쉬운 책이 아니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반려견은 반려견이고 나는 반려견에 물려죽은 80세 노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이기에. 그리고 반려견과 사람의 입장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장악한 시대에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까지 미치고 나면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도덕적 지위와 계층의 차이를 조금 더 심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해볼 여지를 충분히 제공해주는 책. 그리고 조금은 가볍게 때로 묵직하게 다가온 책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일차 독서를 마치고 리뷰했습니다.
'신생 1인 출판사' 안타레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증정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진지한 자세로 해당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릴 순 없을 것이다. 바로 사람과 동물을 동일선 상에서 비교하는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대립과 평가, 엇갈린 생각 등이 펼쳐질 주제들이 가득하며, 보는 관점에 따라서 매우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생각으로 사람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하는 입장을 표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동물을 지배하는 역사를 거쳤고, 이는 당연한 정서로 자리매김하고 있기에, 이런 자연스러운 반응이 이어지는 것이다.
책에서는 도덕적 관점, 윤리적 양심이나 철학적인 의미로 사람과 동물에 대한 비교, 분석을 하고 있으며 인권운동가나 다양한 철학가는 들어봤지만, 동물을 주제로 평등해야 하는지, 동물복지의 개념을 도입해야 하는지 등을 고려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는 매우 색다른 의미와 지식을 제공하는 측면도 강하지만, 요즘처럼 모든 정보와 지식이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시대에서 동물에 대한 가학적 행위나 학대 등은 도저히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그런 정서와 심리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도 사람처럼 인권이 있고, 자기 방어권을 행사 할 수 있는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멸종되거나 소멸되어 가는 동물들이 존재하며, 이를 바라보는 각종 사회단체나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경우, 항의를 하며 동물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사람들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생활의 터전을 잃고 밀려나는 동물들도 존재하며, 결국 우리 인간이 스스로 반성하며, 공존을 모색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 바라보며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관련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단순한 비교우위나 나열의 방식이 아닌, 사람과 동물의 공존, 상생을 위한 협의를 통해 일정한 대안책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여전히 대중들에겐 생소한 분야로 다가오는 동물윤리, 개인의 양심에 맡겨서도 안되지만, 무조건 동물을 위한 방향성 만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이를 정교하게 바라보며 타협의 여지나 대안책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저자의 논리는 괜찮으면서도 진보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도 사실이다. 책을 통해 어떻게 동물을 헤아려야 하는지, 한 번 쯤은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나라도 '반려동물 1천만 시대'라고 한다. 반려동물이란 개, 고양이 등 동물을 가족처럼 여기고 대우하는 것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하더라도 우리는 동물은 가축이든 야생이든 인간과 엄격히 구분했다. 필요에 의해서 기르다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물건'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면 인간과 동물의 공생은 언제부터였을까? 공생이라면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닌가. 동물에게도 윤리가 있을까? 있다면 그 윤리는 인간의 윤리와 같은 것일까?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의 저자 셸리 케이건은 동물을 다루는 윤리학적 관점은 생명체의 형태에 따라 도덕적으로 적당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예를들면 모기를 죽이는 행위는 침팬지를 죽이는 것과 같은 종류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사람의 삶은 쥐보다 낫다. 인간과 쥐의 이런 비교론이 옳은 것일까? 쥐의 삶은 과연 인간의 삶보다 못할까?
인간의 삶만 가치가 있는 것일까? 사람만이 어떤 종류의 삶이 다른 종류의 삶보다 가치 있는지 없는지 질문하고 고민하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의 내면은커녕 사회적 삶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사람이 동물보다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고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와 같은 차이는 그들의 삶이 지금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지와 같은 삶의 내용에 좌우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를 통해 ‘죽음의 본질’과 ‘인생의 의미’를 탐구했던 그가, 이번에는 동물윤리 한복판에 뛰어들어 ‘동물의 삶’과 ‘인간의 자격’을 역설한다. 이 책은 케이건 교수가 옥스퍼드대학교 우에히로 실천윤리 센터(UEHIRO CENTRE FOR PRACTICAL ETHICS)의 초청을 받아 진행한 특별 강좌를 재구성한 것으로, 인간과 동물의 도덕적 ‘지위’와 의무론적 ‘권리’ 그리고 윤리적 ‘공존’에 관해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써 그의 윤리적 관심은 ‘인간의 죽음’을 넘어 ‘동물의 삶’을 아우르는 데까지 이르렀다. 케이건 교수 특유의 유머 감각과 재치 있는 입담은 여전하다. 논증은 훨씬 정교하고 집요해졌다. 이 책에서도 그는 독자의 지적 호기심과 윤리적 양심을 일깨우는 다양한 질문을 던지지만,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답게 신념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이성과 논리로만 동물의 권리와 인간의 가치를 파헤친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읽힌다. 하나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잘사는 ‘윤리적 공존’을 모색하는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지구상에 가장 월등한 존재로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다.
오늘날 동물윤리 분야의 지배적 견해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는 동시에, 사람과 동물의 도덕적 차이를 철학적으로 살핌으로써 ‘무엇이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지’ 성찰하게 한다.
사람과 동물은 동등하지 않다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동물을 어떤 식으로 대우할 것인가?”와 관련한 철학적 주제는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50년이 흐르는 동안 추(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동물윤리는 도덕철학에서 가장 견고하게 자리 잡은 분야가 됐다. 이 주제를 다룬 저작과 논문과 기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며, 정기 간행물 발행이나 학술회의 개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서 동물윤리 분야에 거대한 ‘철학적 관점’이 형성됐다.
이 책에서 셸리 케이건 교수는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관점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다음 논증을 시작한다.
‘도덕적 입장(moral standing)’을 가진 존재는 마땅히 도덕적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모든 개체가 동일한 ‘도덕적 지위(moral status)’를 갖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도덕적 지위는 동물보다 월등히 높으며 동물들 사이에서도 각각 다르다. 이른바 ‘계층적(hierarchical)’ 관점이다.
그러나 누구든 직관적으로 당연하게 여길 것 같은 이 관점은 동물윤리 분야의 주류가 아니다. 오늘날 동물윤리를 지배하는 견해, 즉 ‘철학적 관점’은 “사람과 동물은 동등하다”는 입장이며, 케이건 교수는 이 관점을 ‘단 하나’의 도덕적 지위만을 인정한다고 해서 ‘단일주의(unitarianism)’라고 부른다. 그는 인간 사회의 도덕 이론을 동물에 적용한 단일주의자들의 노고를 인정하면서도, 동물윤리 분야가 교착 상태에 빠진 이유 또한 이들의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사람과 동물이 동등하다는 견해가 “동물을 사람과 같이 헤아려야 한다”는 일반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괴상한 논리로 발전해 공론을 이끌어내기는커녕 분열만 야기하고 있다.
개나 고양이는 ‘가족’과 같은 헤아림을 받는 반면 소나 돼지는 ‘고기’로 식탁에 오르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일주의 관점에서는 그저 ‘옳지 못한’ 행위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더 이상 논의의 여지는 없다.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존재들
“도덕적 입장을 가진 존재는 도덕적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해당 존재가 ‘도덕적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저자는 “고통은 고통(Pain is Pain)”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지각 능력(sentience)’, 즉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는 도덕적 입장을 갖는다”는 단일주의의 기존 견해를 소개한 뒤, 이 능력은 도덕적 입장 설정의 근거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고통이나 쾌락은 해당 개체만이 느낄 수 있는 주관적 경험이므로, 지각 능력은 이를테면 학대당하는 고양이를 보고도 그저 몸부림칠 뿐이지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개념이 못된다. 그래서 해당 개체가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지의 여부는 케이건 교수가 ‘행동 능력(agency)’이라고 명명한 개념을 통해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행동 능력은 스스로의 의지와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말하며, 우리가 해당 개체의 행동 양상만 관찰하면 도덕적 입장의 확보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는 나아가 사람과 동물의 도덕적 지위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을 비교하면서, 사람인 우리가 동물보다 더 가질 수 있는 ‘좋은 것들’에 관해 고찰한다.
무엇이 도덕적 지위를 결정하는가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존재들에게 높고 낮은 도덕적 지위를 갖게 하는 특성은 무엇일까? 무엇이 도덕적 지위와 격차를 만들까?
케이건 교수는 다름 아닌 ‘정신적 능력’에서의 차이가 도덕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정신 능력은 ‘행동 능력’과 이어진다.
사람이 동물보다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 것도, 개와 고양이가 물고기나 곤충보다 도덕적 지위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같은 종(種)의 동물들끼리도 그 능력에 따라 도덕적 지위는 달라진다. 모든 돼지가 아닌, ‘이’ 돼지와 ‘저’ 돼지가 저마다 확보한 능력이 도덕적 지위의 차이를 초래한다는 ‘개체주의(individualism)’ 시각이다. 케이건 교수는 심지어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지위가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심각한 뇌 손상을 입어 정신적 능력이 결여된 인간은 통상적인 사람들보다 도덕적 지위가 낮다. 이는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지만, 케이건 교수는 ‘잠재적(potential)’ 지위와 ‘양식적(modal)’ 지위라는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계층적 관점을 유지한다.
계층주의에 대한 몇 가지 우려들
계층적 관점은 용어의 뉘앙스부터 오해를 살 만한 견해다. 차등, 차별, 차이, 격차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케이건 교수는 계층적 관점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 우려(공격 포인트)를 설정하고 하나씩 반박한다. 우려는 네 가지다.
계층주의가 ‘엘리트주의(elitism)’라는 비판, 사람보다 도덕적 지위가 높은 ‘우월한(superior) 존재’가 실재한다면 윤리적으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의 문제, 심각한 정신 장애를 가진 이른바 ‘가장자리 상황(marginal cases)’에 처한 존재의 도덕적 지위를 설명하는 방식,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능력 차이로 인한 도덕적 지위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정상적 편차(normal variation)’ 문제의 설득력 있는 논증 여부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는 ‘엘리트주의’, ‘우월한 존재’, ‘가장자리 상황’은 간단히 우려를 불식시키면서도, ‘정상적 편차’ 문제만큼은 일종의 ‘약속 어음’을 발행하고는 뒤에서 반드시 회수하겠다고만 약속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 책은 현대 철학 논리 전개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후 펼쳐지는 장에서 케이건 교수는 단일주의가 의무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동물에게 의무론적 권리를 부여하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등을 집요할 정도로 꼼꼼히 논증한다. 그리하여 계층적 관점 말고는 의무론과 결합 가능한 견해가 없음을 증명한 뒤 최종적으로 ‘제한적 계층주의’를 동물윤리 분야의 새로운 이론적 토대로 정립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케이건 교수는 독자에게 발행한 약속 어음을 회수하며 ‘정상적 편차’ 문제도 해결된다. 그가 펼치는 논리의 향연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함께 따라가보자.
톰(Tom)이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서 표류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섬에는 몇 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지만 삶을 지탱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톰은 음식을 먹어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곧 굶어 죽을 것이다. 이때 그가 지속적으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면 계속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톰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만약 여러분이 물고기가 도덕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물고기 대신 야생 토끼나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을 떠올려도 된다.
단일주의를 수용한 절대적 의무론자라면 이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가 될 것이다. 톰은 무고한 동물을 죽일 수 없으며, 그것밖에는 살아남을 도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물고기(또는 토끼나 다람쥐)를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 물고기를 죽이는 것은 결국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인데, 이 권리는 여러분이나 내가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고 중요하다. 절대적 의무론의 관점에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행동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단일주의를 받아들인 절대적 의무론자로서는 무고한 물고기를 죽이는 행위 또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스스로를 굶어 죽게 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결론은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일주의적 절대적 의무론자들은 이 결론을 피해가지 못한다.
- 「제7장: 단일주의는 의무론이 될 수 있는가」 중에서
철학에서는 때때로 추상적 주장이 일견 설득력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함의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주장과 그것이 담고 있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설득력 있어 보였던 전제를 포기함으로써 그 주장에 저항(또는 회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더욱이 이성적으로는 이해되는데 감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감성적으로는 납득이 되는데 이성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계층주의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 같은 딜레마에 봉착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우리가 꽤 오랫동안 살펴본 것처럼 이런 개념들은 그 자체로서도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계층적 접근방식을 통하면 행여 우리가 짊어졌을지도 모를 흥미롭지 않고 불합리한 수많은 잘못된 결론을 모두 피할 수 있다. 계층적 관점은 다분히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접근방식이므로 우리의 이성에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다.
-「제11장: 제한적 계층주의라는 대안」 중에서
동물은 비록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껏 가져온 생각보다는 훨씬 더 많은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여러분이 나와 함께 꽤 긴 논의를 진행해오는 동안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들을 점검해볼 수 있었다면 나는 만족한다.
내가 제안한 여러 견해에 여러분이 동의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온전한 ‘사람’인 여러분이 사람의 삶을 살면서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동물의 삶에 투영하는 것이 유의미한 작업임을 깨닫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다. 이제 동물의 몫을 생각할 때다.
무엇을 줄 수 있느냐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동물을 학대해온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그 같은 행위가 불명예스럽고 치욕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인식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우리가 오게 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날이다.
-「나오며: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중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