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간 이 악령들, 이것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우리의 환자, 즉 우리 러시아에 쌓인 모든 궤양, 모든 독기, 모든 불결함이며, 크고 작은 모든 악마입니다. (327쪽)
악령을 드디어 모두 완독하였다. 하권은 앞에 권에 비해 읽기는 수월하였다. 이름과 지명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뒤에 뭐랄까 느낌을 표현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소설 전개도 1인칭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각가 시점이 교차되는 것 같다.
도스도예프스끼의 <악령>이라는 소설은 인간이 악령에 들리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성선설이 맞냐 성악설이 맞냐 논란이 많지만 이 책은 철저히 성악설이다.
등장인물들을 보면 제대로 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주인공 스타브로긴은 아주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굉장히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인데 모두들 그를 추종하고 따르고 싶어 한다. 특히 여자들도 그와 사귀기를 원한다. 겉으로는 멋져 보이지만 그의 마음 깊은 속에는 악령이 조종하고 있는 무서운 인물이다.
사실 난 소심하고 예민하고 감성적이어서 이런 유의 책을 잘 읽지 못했었다. 책 속의 내용에 너무 공감해서 빠져들다 보니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동화를 많이 읽었고(성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림책을 좋아하였다. 소설도 해피엔딩만 골라 읽곤 했었다. 영화도 아름다운 판타지나 애니메이션, 가족영화를 즐겨 본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하지만 이제 인생을 살다 보니 고통과 슬픔에 둔감해져 버린 것 같다. 추리소설도 못 읽던 내가 이제는 비극적인 소설도 무서울 것 같은 범죄소설도 읽는다. 10대 시절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고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했던 경험이 있었다. 작가는 왜 모두 죽여버렸을까? 그래서 그때는 마음이 편지 않았다. 그런 불편한 감정이 싫어서 비극적이고 자극적인 글들은 잘 잘 읽지 않았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문학작품을 읽었는데, 문학작품에서도 비극적인 삶이 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비극적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인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동심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감각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이것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악령은 인간의 악한 본성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거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3부의 핵심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뾰뜨르 스쩨바노비치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각 장별로 이 내용과 인상 깊은 문장을 살펴보면
제1장 축제 1부
불안정한 혼란의 시대나 과도기에는 어디서든 항상 여러 종류의 저급한 인간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p.10
율리야가 가정교사를 위한 축제를 여는데 여기서 시 낭송 사건이 벌어진다. 축제에서도 여러 진상 인간들이 나타난다. 거만한 사람, 눈치 없는 사람, 인정욕구에 매달리는 사람, 자기 말만 길게 하는 사람, 음식에만 관심 있는 사람 등이 나와 축제 분위기를 망친다.
제2장 축제의 종말
뾰뜨르가 율리아를 이용하기 위해 아첨하며 사로잡는 내용. 스따브로긴과 라샤의 소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무도회 중 화재사건이 터진다. 결국 엉망과 조롱거리가 된 무도회, 모두들 상대방을 모욕 주는데 즐거워한다. 남의 불행을 즐긴다.
“모든 것이 방화다. 이것은 허무주의다. 만약 무언가 타오르고 있다면 그것은 허무주의다. ”
화재 사건도 중 레밧낀과 그의 동생 마리아가 죽임을 당한다.
제3장 끝나 버린 사건
스따브로긴과 리자. 뾰또르와 스타브로긴의 만남. 리자를 향한 군중의 폭행.
제4장
스따브로긴이 사라짐. 5인조 모여서 샤또쁘 살해 계획을 세움. 살해당한 페찌까.
제5장 나그네 여인
샤또프의 아내 마리야의 방문 . 마리야가 스따브로긴의 아이를 낳음.
제6장분주한 밤
샤또프 5인조에게 총살당한 후 시신을 연못으로 던짐.
뾰뜨르가 끼릴로프를 찾아가 자살하도록 종용함. 뾰뜨르는 기차를 타고 떠나버림.
제7장 스쩨판의 최후의 방랑
스쩨판이 방랑길에 농부에 아낙을 만남. 아낙의 집에서 옛 지인을 만남.
스쩨판의 여인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 성경을 읽어 주는 소피야. 스쩨판은 병으로 죽는다.
제8장 결말
사라진 스따브로긴은 다리야에게 함께 하자고 해놓고서는 자살해 버린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은 뾰뜨르이다. 같은 5인조 동료들도 그의 거만함 때문에 그를 매우 증오한다. 마지막까지도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고 자신은 죄책감도 없이 도망가 버린다.
우리는 사회에서 이런 뾰뜨르같은 인물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래서 악이 되는 인물은 아예 가까이하지 않는 게 상책인 것이다.
<악령>은 상당히 문제적 작품이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도 한다. 나도 처음에는 읽을까 말까 고민했었다. 난해 하기도 하고 허무주의 소설 같기도 해서이다. 하지만 도스도예프스키의 작품을 너무 사랑하여서 이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결론은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와 사상,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고전문학에서 인간 악의 본성을 다루는 소설들이 꽤 있다. <이방인> <폭풍의 언덕>등이 그 예이다. 이런 소설들을 읽다 보면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악령 (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 열린책들
도스또예프스끼의 <악령> 하권.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는 3부입니다.
마지막 권에서는 사건 사고가 끝이 없습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죽음은 충격에 충격을 주는 급 탐정물이 되어갑니다.
등장인물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앞서나온 이념적 문제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듭니다.
<악령>은 네차예프사건을 모티브로 문학적 형식을 통해 시사적 문제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관심을 표현한 시도했다고 합니다.
스따브로긴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을 보여주면서 당시 러시아의 여러 사상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고 해요.
책을 마무리하면서 참 어려운 책이란 생각이 들어요.
스따브로낀이나, 뾰트르나 어쩜 이런 인간들이 다있을까요. 현실이었다면 정말 조심조심해야할 인물들이이네요. 그들의 주변에서 이용당하고 죽임에 이르게 되는 상황이 한심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답니다. 현실에 이런 인물들이 있다면 경계대상 1호들이 되어야 할 것같아요. 책을 마무리하고 역자의 말에서 인간적인 울분에서 이념적인 설명을 읽고 그나마 문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방대한 분량에 사상적 배경에 인물들의 상호관계를 잘 짜맞춘 작가의 능력에 다시한번 몰라게 되네요.
오늘날에도 이런 저런 사상속에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같아요.
어떤 사상이 악령이 되어 우리를 괴롭히는지 정신 바짝 차려야 할거란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모두 악령에서 사로잡혀 미쳐 날뛰면서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빠져 죽을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그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니까요.
『악령』하권 328쪽 , 열린책들
주인공 스따브로긴을 둘러싼 인물들이 만들어낸 긴장이 해소되는 하권을 읽었다. 스따브로긴을 따르는 뽀뜨르 베르호벤스키, 키릴로프, 샤또프 등은 모두 비극적 결말에 이르며 그를 따르던 여인들 또한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 비극적이라는 결말을 공유한다. 게다가 스따브로긴 자신도 내면의 붕괴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는 <악령>에서 그가 차지했던 높고 숭고한 위치에서조차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한 자의 고통을 반영한다.
내가 <악령>이라는 책에 담긴 사상, 철학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책의 전반에 흐르는 급진적 사회주의, 허무주의, 무신론 등은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느꼈던 좌절은 <악령>에서 어느정도 회복되었으며 <악령>은 소설 자체로서도 흥미로울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19세기 러시아의 정세를 파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악령>의 주인공 격인 등장인물들은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스따브로긴과 뾰뜨르 베르호벤스키는 스뻬시네프와 네차예프를 모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악령>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던 '네차예프 사건(급진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대학생 모임에서 동급생을 살해한 사건)'은 이 소설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샤또프와 끼릴로프가 보이는 범슬라브주의와 무신론은 러시아 사회를 흔드는 정신적 충격으로 볼 수 있는데 <악령>의 마무리는 범슬라브주의도 무신론도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 몇몇 작품들, <죄와 벌>,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죽음의 집의 기록>, <가난한 사람들>, <백야> 정도를 접했던 내 짧은 경험으로는 <악령>이 가장 재밌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도스또예프스키가 자신의 작품에 넣어둔 형이상학적 테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같은 작품에서 훨씬 더 풍성한 답례를 얻어갈 수 있었을텐데....
조만간 <죄와 벌>을 다시 읽을 생각을 갖고 있지만 <악령>에서 느낀 흥미가 좋은 영향으로 작용해 오래전 읽었던 <죄와 벌>을 조금 더 원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자신이 첫 번째 인신(人神)이 되고자 했던 끼릴로프의 말에서 -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안락함을 찾는 거지, 그게 전부야...
신은 필요해. 그러니 존재해야만 해.
그러나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
만약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은 신의 의지이고 나는 신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어.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의지는 나의 것이니, 나는 자의지를 표명할 의무가 있는 거야. 정말로 이 지구 상에는 신을 끝장내고 자의지를 확신한 후, 그것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자의지를 선언할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나는 자살할 의무가 있어. 왜냐하면 내 자의지의 가장 완전한 지점은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지.
급진적 사회주의를 꿈꿨던 럄신의 자백 중에서-
그것은 사회 기반의 조직적인 동요, 사회와 모든 원칙의 조직적인 해체를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며, 그렇게 해서 병적이며 우울하고 냉소적이며 신을 믿지 않는 사회, 그러나 그럼에도 뭔가 지도적인 사상과 자기보존에 대한 무한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불안정한 사회를 단숨에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동안 활동을 이어 가며 조직원을 모집하고,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파고들 수 있는 모든 취약한 부분을 실질적으로 찾아온, 5인조의 총체적인 그물망에 의지하여 폭동의 깃발을 들어 올림으로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