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이북으로 도전했다가 1부에서 집어던진 작품이다. 그때는 왜인지 바르바라 빼뜨로브나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우정 이야기 읽다가 넌더리나서 더 못 읽었다. 당시 번역을 좀 어렵게 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미뤄두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았다. 그런데 역자가 바뀌고 새로 출간되었길래 책까지 사서 읽었다.(권당 2천원이나 더 받는..ㅜ) 결론적으로 최고이다... 5부작 중 가장 강렬한 작품이다. <미성년>은 빼고 이야기하자면 <카라마조프~>가 생의 찬미로 가장 희망적이고 밝다고 느꼈다. <죄와 벌>은 문학적 완성도가 가장 높다고, <백치>는 작가가 내놓은 문제의식을 해결하지 못했으며(사실상 다른 작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작중 인물을 통제하지 못하다가 파국을 맞았다고 느꼈다. <악령>은 <백치>보다 문제의식이 하나의 사건으로 모이면서 뚜렷한 편이고, 작중 인물을 잘 통제하여 비극적이나마 나름대로의 결론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이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인물의 특징과 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그 인물들이 엮어져서 만들어지는 일련의 장면과 사건이 엄청나다.. 그리고 작가가 내놓은 돌파구와 해결의 실마리가 잘 잡혀 있어서 좋았다. 역시 이 작품에서도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메세지가 있다.
작가는 네차예프 사건을 기반으로 이 작품을 구성했다. 당시 러시아는 세상을 전복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혹은 허무를 말하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들끓던 때이다. 스따브로긴, 뾰뜨르, 키릴로프, 샤또프 등은 그것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허무주의 등등... 이런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 아래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적용될 때 이것은 반란을 일으킨다. 스스로 독자적인 생명성을 갖고 인간 위에 군림하며 삶을 구속하는 것이다. 마치 자유를 위한 여러 법과 제도가 모이고 나면 부자유의 시스템만 남듯이.. 이는 근본적으로 이성과 논리로는 사랑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념을 위한 이념만이 남게 된다.
이념이 아닌 다른 것을 택해야 우리는 비로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작 중 도선생이 샤또프가 아내가 출산하고 아이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기적과 숭고함. 이것이야말로 모든 철학과 사상의 토대여야 한다.
최근 코로나로 지구가 난리다. 그런데 그것을 보며 흥미로운(사실은 슬픈..) 것을 보았다. 자유주의의 대표주자인 미국과 사회주의의 대표주자인 중국에서이다. 미국은 40만의 확진자가 나왔으나 방치되어 있다. 중국은 후안무치 그 자체로 국민을 기만하고 은폐와 날조를 일삼는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나 막상 코로나로 병들어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인간을 위해 태어난 이념이 권력자의 정치 시스템을 지키는 성벽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이념은 성벽이다. 그렇지만 성벽 밖의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느꼈다. 박시백 작가의 만화 중 유명한 대목인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진 민중들이 화답하여 일어나 싸웠다. 한국인에게는 정말 이런 유전자가 있나 보다. 의료진과 국민들의 희생을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가능성이 남아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슬픈 기쁨을 느꼈다.
이념이 삶을 가로막는 것은 언론에도 느낄 수 있다. 내가 초등교사인지라 더 밀접하게 느껴지는 온라인 수업.. 이낙연은 6.25때도 수업은 했다고 말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당시엔 지금처럼 제도와 이익집단이 촘촘하지 않아 무엇을 하든 삶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양탄자와 같이 틈이라고는 없어 무엇을 하든 법에 저촉되거나 누군가가 반대하고 나선다. 황교안이나 각종 이익집단이 교육부에서 무슨 대책을 내놓든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며 너무 화가 났다. 비판을 위한 비판.. 그러다 보니 정부는 실질적 대책을 마련할 수가 없다. 무엇을 내놓든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니 그저 모면하기에만 급급해진다. 이는 늙은 권력이 제자리를 비키지 않아서 그러하다. 교육은 학생이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하지만 늙은 권력은 학생을 위하는 척 대변하는 척하며 그들의 자리를 빼앗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야 할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고집스럽게 앉아있어서 생기는 병폐이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현대사회는 실로 새로운 야만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키릴로프는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정말 튀는 인물이다. 자유 그 자체이지만 동시에 허무와 죽음 그 자체인.. 도선생은 그런 자유는 우스꽝스럽기까지한 파국을 맞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압권은 키릴로프의 자살을 기다리는 뾰뜨르 대목이다. 기괴하고 무섭고 우습기까지 하다. 마지막에 '인신' 키릴로프는 삶을 조롱하는 이상한 서명을 써내려가다 뽀뜨르의 새끼 손가락을 물고 - 바보로 죽는다. 어떻게 그게 자유의 모습인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자유는 한 개인의 자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개인이 서로 연대하며 소통하는 것이 자유이다. 키릴로프의 자살 장면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라 오로지 그 대목만을 위해 긴 책을 참고 읽을만 하다.
스따브로긴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와 비슷하다. <악령>과 <죄와 벌>의 인물구도를 찌혼 신부는 뽀르삐리 예심판사, 소냐는 다리야, 마뜨료샤는 살해된 노파의 여동생 - 이렇게 연결할 수 있겠다. 마지막 부록같이 붙여진 찌혼의 암자에서는 필히 본문에 하나의 장으로 들어가 있어야 했다. 그 장 없이는 스따브로긴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 본문만 보아서 스따브로긴은 허무와 진공 그 자체이다. 본질적으로 그런 인간이라면 자살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면 자살할 수밖에 없다. 스따브로긴도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장면이 앞서서는 없었기 때문에 이 장은 큰 도움이 되었다.
스쩨빤은 가출해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도 무식한 러시아 민중을 보면서.. 그렇다 진보는 독방의 책상, 개인의 논리와 사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에 나가서, 사람과 지지고 볶으면서 하는 것이다. 스쩨빤이 만난 서적행상인 소피야 마뜨베예브나가 선량함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선이라는 것은 의식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아니다. 제 자신도 모르고 그저 실천되는 모습이다. 소피야는 아픈 스쩨빤을 위해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그를 보살펴 준다. 이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연대가 아니었을까..
악령은 돼지로 변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작중 이념이 씌여 그것에 지배된 인간은 모두 죽거나 감옥으로 향한다. 뾰뜨르를 제외하고. 뾰뜨르가 잡혀가지 않았다는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아직도 악령은 우리 사이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도선생이 살던 때의 사람들이 이 작품이 주는 경고를 더 귀기울여 들었더라면 20세기 2번의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념에 깔려 죽어간.. 이름도 없이 번호로 무더기로 죽어간 육체들... 교훈을 무시한 대가는 참혹했다.. 앞서 말했듯 이데올로기는 생성과 동시에 그 자체로 생명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상정하는 인간의 기본값은 시갈료프가 주장한 노예인이다. 하물며 사랑을 말하는 종교도 이데올로기가 되면 폭력으로 변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는 피를 마시지 않고는 제 몸집을 불릴 수 없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 전쟁은 당연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외치며 몸을 불사지른 사람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시갈료프가 말하는 비천한 노예에 불과하다.
정말로 자유를 인식하는 사람은 스스로에서 그치지 않는다.(즉 에고에 빠져버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 자유가 있음을 안다. 스따브로긴이 어떤 모욕에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며 죄책감 없이 죄를 저지르지만, 마뜨료나의 주먹질에는 고통스러워한다. 라스꼴리니꼬프 역시 꿈에서 불쌍하게 죽은 말을 보며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맹자가 인간이라면 사단이 있고 그중 측은지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옆 사람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사랑의 시작이고, 그것은 인간을 자유케 한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상종말전쟁>에서 갈 이라는 영국인 학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사랑의 이념을 주장하면서 막상 옆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 이성으로 우리가 갈 수 있는 영역은 끝이 있다. 그러나 감정으로 우리는 죽음 넘어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앞서 말한 측은지심으로 우리는 타인과 세상과 연결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남 덕분에 살아왔다. 뭐 하나 내 힘으로 살아온 게 없다.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스쩨빤 역시 살롱과 바르바라의 저택에서는 걱정거리가 태산이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농가에서 깨닫는다. 밀실 속 인간은 질식하는 줄도 모르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지만, 광장으로 나서면 눈부신 햇살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자유와 연대, 사랑을 가로막는 최후의 복병이 있다.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든다. 파스칼이 말하는 우주의 거대한 침묵이니 진공이니.. 피조물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비참함.. 이건 도대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인간은 순조로운 해결을 위해 신을 창조했다. 도선생 역시 러시아 정교회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난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선생이 일부로 편애하면서 정교회의 손을 들어주며 이야기를 끝마쳐서 그렇지 난 도선생 역시 자기가 내놓은 물음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특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과 조시마 신부의 대결구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반의 대심문관을 읽어보면 솔직히 이반이 승리했다.
근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일직선상의 시간관을 갖고 있다. 이 시간관을 타파할 때 죽음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벤야민이 메시아를 도입해 모든 죽은 사람이 깨어나게 만든 것처럼. 그러나 이 이야기는 너무 길어지고 <악령>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나는 죽음을 사랑과 육체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죽음은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랑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몰골이 추하고 힘겨워 보인다. 사랑의 화신인 예수는 사랑을 위해 여윈 몸에 고통스러운 얼굴, 가시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리며 손에 못이 박힌채 죽는다. 어떻게 그게 아름답고 행복한가. 그러나 예수가 그렇게 죽음을 불사하면서 지켜진 것이 있다. 사랑이다. 정말 사랑한다면 죽음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것 - 비록 그녀는 돌이 되었지만 사랑은 지켜졌다. 교황은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말했던가. 그게 바로 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에게 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코로나 관련하여 사랑제일교회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어떻게 그게 신을 위한 것인가. 그건 오로지 제 자신만 돌보는 이기심의 끝이다. 예수가 그걸 보면 도대체 뭐라고 말할것 같은가...
도스토옙스키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희생정신이 아닐까. 도덕적 인간은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이다. 그 사랑이 제것을 내어주는 모습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희생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 희생으로 느끼는 행복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인식하는 순간 에고의 덫에 걸려 도구화된다고 본다) 도덕, 사랑은 나를 잊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도록 느끼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술이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훌륭한 작품을 보았을 때, 세이렌의 노래를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미적 경험을 통해 느낀다. 인간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열렬한 찬미를 담아낸 글, 그림, 시, 음악의 형식. 내용과 형식은 사실 완전히 서로에게 꼭 들어맞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상호간의 부조화마저도 어떤 인상을 주고, 그것은 미적감각이 되어 우리가 무언가를 깨닫게 한다. 난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소설로서의 결함이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대의 추상화는 정확히 말하자면 추상이 아니라, 구성을 넘어선 구상이다. 도선생의 글 역시 난잡하고 두서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의 글이 담고 있는 정신과 꼭 들어맞는 그릇이라고 본다. 만약 작품이 사람 손이 닿지도 않은 것처럼 빼어나고 유려하며 말끔한 전개였다면 난 지금처럼 감동을 받았을 것 같지 않다. 도선생의 정신 없는 빽빽한 형식이 독자로 하여금 어떤 미적경험을 준다. 그럼에도 악령 1부에서 바르바라와 스쩨빤의 우정은 지나치게 길지 않았나.. 소심하게 적어본다.ㅋ (딴얘기 적자면 교훈은 내치고 미적 경험만 취하는 사람이 있다. 즉 속물인데.. 나는 내가 그런 부류같아 부끄럽다. 솔직히 이렇게 책 많이 읽은 게 쪽팔릴 정도이다...)
죽음을 극복하는 두 번째는 육체이다. 난 사실 육체와 관련해서는 정말로 무지한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지나치게 합리적이라 이런 파국을 맞이한 게 아닌가 이거다. 육체는 외면한 채 이성만 독자적으로 앞서나가다보니 인간을 짓누르는 이념이 탄생하고, 타인에게 공감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등장하며,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허약한 정신이 들어선 것이다. 원시인에게 삶은 육체이다. 우리는 육체의 삶을 살지 않는다. 직업구조만 보더라도 서비스직이 90퍼센트 이상이다. 역할만을 수행하다보니 우리의 정신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주체라고 말할 수 없는 대체품,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진짜' 노동을 한다면..(육체노동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노동이더라도 진정성을 확보한 것이라면 진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성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양 사상이 그렇게 안빈낙도를 노래한 것이 아닐까. 자연을 대결구도로 바라보며 지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하나가 되어 육체와 정신이 합일된 삶을 살아가는..
이번 문단은 삶과 죽음 이야기하면서 딴 얘기 하는거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너무 거대한 무엇이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그런데 작가마다 스타일이 달라 그것을 다루는 태도가 천차만별이다. 크게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부류와 포기하는 부류가 있다. 끝~~까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로는 도스토옙스키, 페소아, 카뮈, 카프가, 발자크가 떠오른다. 작품으로는 황석영의 <객지>, 박경리의 <토지>가 떠오른다. 이런 글들을 읽어보면 작가에게 글쓰기란 정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생존 그 자체의, 절박한 글쓰기이다. 그런 글은 진짜로 고민한다. 그런데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다가, 그런 고민을 하는 나에게 반해버리면서 허영심이 들어선다. 존재론적인 질문에 응하는 스스로에게 반한달까.. 그런 작가로는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작품으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떠오른다.(사실 <전쟁과 평화>는 역사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할튼 너무 거대한 무엇이며 독자적이라 사례로 적절치 않아보긴 하다. 그러나 내 인상이 그렇다는 거다.) 물론 이 작가들도 삶에 의문을 갖고 진지하게 성찰했다. 다만 내가 느끼기엔 그런 의문이 목적이 아니라 어쩐지 도구가 되어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견해이다. 한편 삶과 예술을 동시에 잡은 경우도 있다. 삶을 성찰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성도 목표로 하며 잡아낸. 그런 작가로는 쿳시가 떠오른다. 작품으로는 <모비 딕>과 <돈키호테>. 앞에서 말한 작가와 작품이 예술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만을 목표로 하면 달려간 도선생에게 예술성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또다른 목표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위고나 졸라 같이 허영이 들어간 경우도 예술성이 뛰어나지만, 지금 말한 것들은 허영이 없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존재론적 질문에 지쳐서 포기해버린 부류가 있다. 포기에도 2가지가 있는데 냉소와 예술로서의 타협이다. 원래 우리는 죽음이 예정된 피조물이야. 그걸 이제 알았어? 그 까짓 질문 내가 아무리 대답하려고 애써봤는데 안돼 안돼. - 이렇게 냉소하는 작가가 있다. 필립 로스와 쿤데라가 그러하다고 느꼈다. 이들은 앞문단에서 삶에 응답하려는 작가와는 달리 사랑의 정신이 없다. 앞문단의 작가는 비판을 하며 참혹한 모습을 그리더라도 그것은 삶에 대한 사랑을 음화로 보여준다.(도선생의 작품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놀라울만큼 삶을 찬미하듯) 그러나 이 작가들은 비판하며 보여주는 음화에 허무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내가 했는데 안되더라, 나도 안되는데 니들이 될거 같아?라는 오만과 자기방어가 보이는 듯 하다. 한편 예술적으로 포기한 작가이다. 존재론적 질문에 응답하다가 나이들면서 다 귀찮은지 그냥 예술적으로 적당히 형상화하는 작가가 있다. 사실상 문학을 돈벌이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작가이다. 황석영과 파묵이 그러하다고 느낀다. 한편 요사의 경우 돈벌이 작가는 아닌데 <염소의 축제>나 <세상 종말 전쟁>을 읽어보면 삶보다 본인의 문학적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게 느낀 것 같다. 요사는 이쪽과 다음에 말할 부류 양쪽에 있다.
그리고 앞선 두 부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작가가 있다. 예술 그 자체를 찬미하는 부류와 응답할 기회가 없었던 부류이다. 먼저 죽음을 외면하고 예술로 돌아선 부류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은 꿈을 꾼다. 당장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상황에 옆에 있는 꿀을 먹던가 하는 장면이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외면하게 해주는 이 꿀을 가정과 예술이라고 말한다. 바로 예술이라는 꿀을 먹는 작가들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나 <새엄마 찬양> 등등)가 떠오른다. 작품으로는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늦여름>. 이들에게 존재론적 질문은 중요치 않다. 그저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도선생은 자타공인 미남인 스따브로긴을 자살로 귀결시키며 이런 아름다움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작가들이 좋다. 이들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있어야 우리가 좀 숨통 트이고 살 수 있다. 가끔씩 술 마셔줘야 하는 것처럼!ㅋㅋ 응답할 기회가 없었던 작가는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가 떠오른다. 둘다 존재론적 질문에 응답할 역량은 차고 넘친다. 다만 오스틴은 당시 편협한 사회로 기회를 얻지 못했다. 브론테의 경우 단명해서 쓰기도 전에 죽었다..
처음 읽는거라 내러티브 따라가기도 급급해 글이 형편 없고 몇 개 안되는 주제에만 치중되어있다. 이런 작품은 최소 세 번은 읽어야지 말할 수 있는데.. 내 글은 한 번 읽은 아마추어도 멋도 아닌 사람이 쓴 글이라는 것을 감안해달라.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성찰하며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작가는 놀라우리만치 그 돌파구가 비슷하다. 희생정신, 사랑, 연대, 믿음, 삶에 대한 열렬한 예찬.. 도선생은 개인사가 본인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아서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나 보다. 개인적으로 모든 작가 중의 최고봉이다. 그의 소설이 어둡고 비극적이어 보이지만 그것은 음화라 그렇지 뒤집어 보면 삶에 대한 찬미 그 자체이다.. 그것에 나는 항상 감동하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근데 무인도에 책 들고가면 뭐 들고갈래 할 때 도선생 작품 언급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건 잘못 고른 거 같다. 왜냐, 도선생은 인간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무인도에서는 도저히 무용지물이고 오히려 그런 메세지 들었다가는 무인도라는 현실에 죽고 싶을 만큼 고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도선생이 빚어낸 에고의 감옥이 공간으로 형상화된다면 무인도 아니겠는가.ㅎㅎ) 무인도에 갈 거면 14년간 침대에서 글을 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적격이 아닐까. 비록 난 안 읽어봤는데 엄마랑 이 작품으로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걍 써본거다.ㅋㅋ 나중에 그 작품도 읽어야지.
너무 무거운 주제라 읽는 동안 존재의 무거움에 눌려 고통스럽기도 했으나..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강추 중 강추이다.
오래전 '도스또예프스키'라는 작가가 가진 위명에 이끌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읽었었는데, 솔직히 말해 기대했던 거장의 작품이라는 감명보다 '이게 왜 이렇게 유명한거지?'라는 의문만을 남긴 채 '도스또예프스키'와의 첫만남은 다소 실망스럽게 마무리됐다. 몇 년 전 다시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을 알아보고 싶단 욕심이 일고 '아는만큼 보인다'는 격언처럼 내가 예전보다는 조금 더 나은 지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다시 읽게 됐다. 오래전 읽었을 때처럼 낱알을 세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역시 어렵다는 생각과 대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절감하긴 어려웠다. 그후로 도스또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가난한 사람들>, <백야> 등의 소설을 접하면서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을 어느정도 충족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도스또예프스키에 대해 느끼지 못한다는 자조가 남았다.
이렇듯 내게 도스또예프스키는 접근이 어려운 작가로 남아있지만 언제고 그의 작품에서 남들이 얻었으리라 생각되는 감동과 만족감을 얻고 싶다는 생각은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이 아닌 다른 작품은 어떨까라는 궁금증으로 <악령>을 읽게 됐다.
'도스또예프스키'의 4대 장편소설(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악령, 죄와 벌, 백치)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악령>의 상권과 중권의 절반가량을 읽은 지금까지 느낀 바는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보다는 읽기가 수월하다는 점이다. 개연성이 보다 뛰어나 일반 독자로서 접하기가 편했으며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언행을 이해하기도 쉬웠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나왔던 문장, "돈은 주조된 자유다."가 뇌리에 각인되었던 것처럼 <악령>에도 함축적이고 철학적인 문장이 종종 등장해 생각을 환기시켰다.
현재는 이 책에 <악령>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를 짐작하는 단계에 불과하기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겠지만 주인공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니콜라, 스따브로긴)가 보여주는 기이한 행동과 깊이 관련돼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19세기 러시아가 농노가 해방되고 전제정이 위협받고 사상적 과잉으로 사회불안이 심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니콜라를 비롯한 그의 주변사람들의 언행이 정통적이라 여겨지던 러시아 사회를 뒤흔들었기에 '악령'이라는 제목이 붙었을지도 모르겠다.
<악령>은 인물들의 제스쳐 묘사를 굉장히 잘해놨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여러군데서 접할 수 있는데 특히 <악령 상권>의 후반부에 사건의 주인공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긴장감을 고조시킨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커피를 들고 오는 하녀에게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하긴 커피는 나와 마브리키 니꼴라예비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거절했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는 찻잔을 들었다가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다. 마리야 찌모페예브나는 정말 한 잔을 더 마시고 싶어서 손을 내밀었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그녀는 이런 자신이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커피를 거절한 쁘라스꼬비야 이바노브나, 커피를 들어도 상관없는 관중에 해당하는 '나'와 마브리키 니꼴라예비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기회를 잡기 어려워하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육체적 정신적 장애 덕분에 상대적으로 둔감한 마리야 찌모페예브나 등 몇개의 문장으로 인물들이 가진 입장을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철학적 접근을 하게 하는 언행도 자주 읽게 됐다. 니체의 사상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삶은 고통입니다. 삶은 공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고통과 공포입니다. 지금 인간은 삶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고통과 공포를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삶은 현재 고통과 공포를 대가로 주어진 것이며, 이것이 바로 기만이라는 겁니다. 현재의 인간은 아직 진정한 인간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당당한 새로운 인간이 나타날 것입니다. 살아 있건, 살아 있지 않건 상관없는 인간, 그가 스스로 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신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니체의 사상과 아주 흡사하다는 느낌을 얻게 된다.
하권까지 다 읽은 후에야 전체적 줄거리를 이해하고 어떤 결론에 이를 수 있겠지만 <악령>은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비해 가독성이 좋고 몰입도가 높다고 느꼈다(주관적인 견해이다). 만약 나처럼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을 접하고 싶은데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이라면 <악령>을 읽어보는게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악령 (상)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 열린책들
책의 앞 장에 등장인물을 소개해주고 있지만 관계가 정리가 되지 않아 읽으면서 등장인물을 구별하기가 어려웠어요. 책을 다 읽고 관계 중심으로 다시 정리하니 조금 파악이 되더라구요.
누가 주인공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많은 인물들로 정신없이 헤매며 읽었네요.
끝부분에 가서야 비르긴스끼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관계가 조금씩 정리가 되더라구요.
악령이 비르긴스끼에게 들어가서 기이한 행동을 한 것이지, 악령으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은 괴기스러운 내용을 상상하며 읽어나갔는데 이야기가 자꾸 다른 방향으로 가네요.
지금에서 다시 보니 비르긴스끼 주변의 인물인 뾰뜨르, 샤또프, 끼릴로프를 유의해서 읽으면 도움이 되는 것같아요. 뒤로 갈수록 그들의 비중이 커지니 저절로 알수 있긴 하지만요.
상권의 책 속 문장들입니다.
이 도시에서는 우리 모임이 자유사상과 방종, 무신론의 온상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매우 순수하고 온전하며, 순 러시아식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잡담을 나누었을 뿐이다. <고급 자유주의>나 <고급 자유주의자>. 즉 아무런 목적이 없는 자유주의자란 오직 러시아에서만 가능하다.
52쪽 (열린책들)
악령은 당시 러시아의 다양한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자유주의, 무신론, 혁명사상까지 등장인물들을 대표하는 사상적 관념의 대립과 혼란을 보여주고 있어요.
당신들은 민중을 바라볼 때도 혐오스러운 경멸감을 가지고 대해 왔으며, 민중이란 단지 프랑스 민중 그것도 파리의 시민들 뿐이라 생각하고 러시아 민중이 그들과 같지 않다고 부끄러워 여겼을 뿐입니다.
60쪽(열린책들)
슬라브주의자인 샤토프의 말이에요. 러시아 민족주의자로 러시아적 정신을 강조하죠.
삶은 고통입니다. 삶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고통과 공포입니다. 지금 인간은 삶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고통과 공포를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 신은 죽음과 공포가 야기하는 고통입니다. 고통과 공포를 이겨내는 인가, 그가 스스로 신이 될것입니다.
끼릴로프의 말로 그는 무신론자에요.
인물들마다 가지는 사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다음 책에서 다른 인물들의 사상을 더 볼 수 있어요.
중권으로 넘어가면 속도감있게 책이 읽혀 이제야 이 책의 재미를 느끼게 합니다.
몇년전부터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전부 구매하고 있었습니다.제작년쯤 구매하려던중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이 많기도 하고 편하게 읽고자 전자책으로만 구매하고자 했으나 악령작품만 품절 되버린것을 확인하고 많이 아쉬웠습니다. 번역자와의 계약때문인지 번역자가 바뀌어 재 출간된것을보고 바로 구매하였습니다. 기존 번역자의 작품을 보지는 않았지만 더 잘 되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도스또예프스끼작품은 인간의 깊은 내면들을 알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가볍지 않은 깊은 성찰. 읽고 있으면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깊은 여운을 줍니다. 이 맛에 고전을 찾는 것이죠. 러시아 작품이라 이름이 너무 길고 헷갈리지만 노력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