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와 함께 읽으면 혐오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다.
위 책은 법률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면, 혐오의 시대는 부제에서 알 수 있다시피 철학적 응답에 담겨있다.
우선 혐오표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다.
혐오표현의 개념은 관점에 따라 ‘협의의 혐오표현’과 ‘광의의 혐오표현’으로 나뉜다.
우선 혐오표현의 개념을 좁게 보는 사람들은 혐오표현을 소수자 집단의 특성을 겨냥한 적대적인 표현으로 정의한다. “인종, 피부색, 국적, 성, 장애, 종교, 성적 지향과 같은 어떤 집단의 특징을 근거로 행해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반감이나 경멸의 소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혐오표현은 모욕하려는 의도로 개인들에게 직접 건네진 언어들의 이름이며, 여기에는 혐오스러운 언어들, 직접적이면서 강렬한 증오나 경멸을 전달한다고 여겨지는 언어들이 활용된다.
반면 혐오표현을 넓게 정의하는 사람들은 소수자의 도덕성이나 능력에 대한 의심을 나타내는 표현에서부터 해당 집단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까지, 다양한 의사소통을 아우르고자 한다. 예컨대 ‘여성은 리더십이 필요한 지위가 아니라 가정생활에 적합하다’고 묘사하는 것, 인종 분리에 대한 추상적인 옹효, 소수자들을 정형화하는 ‘농담’들, 혹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지금까지 언급된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낙인찍거나 주변화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의사소통을 혐오표현으로 간주한다.
혐오에 관한 논문을 읽을 때는 미국의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와 함께 견해를 같이 하는데, 아담스미스의 고전경제학처럼 자유로운 시장에서의 결정을 따르자는 내용이다. 혐오표현은 자유롭게 대항표현이 나올 것이며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처음에는 그 말에 현혹되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혐오표현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엄격하다. 물론 미국에 비해서 말이다.
우리나라는 이런 면에서는 미국주의?를 따른다. 그동안 미국 유학파가 우리나라를 많이 잠식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연예인들의 악플에 의한 자살사건등을 볼 때 지금은 여론이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를 옹호하는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다.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유민석, 김영사, 2019)을 읽다.
저자는 혐오표현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면서도 비교적 쉬운 언어로 핵심을 전하고 있다. 이 책은 먼저 혐오표현을 정의하고, 협오표현은 발화수반행위로 모욕과 선동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혐오표현에 대한 응답으로 대항표현, 즉 말대꾸를 적극적으로 해야하고, 그럼에도불구하고 혐오의 언어를 발화하며 표현의 자유를 떠드는 자들에게 보론에서 표현의 자유가 갖는 5가지 논증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언어는 곧 행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기반으로 혐오표현이 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인지 이야기하되, 장애인·여성·성소수자·이주민·난민 등 여러 소수자 집단에 가해지는 혐오표현이 어떤 기제로 모욕과 편견을 선동하는지 분석한다.
발화는 발화행위(의도×)와 발화수반행위(의도○), 발화효과행위(청자 반응○)로 구별되는데, 혐오표현은 서열매기기, 차별을 정당화하기, 권력을 박탈하기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청자를 구속시키는 폐해를 갖는다.
혐오표현이 불평등, 차별지지 및 실행, 혐오와 관련된 행위라면, 대항표현은 이것들 각각의 대응방안인 평등, 차별반대, 역량강화와 관련이 있다.(p.81)
내면에 호소하는 대항표현은 혐오발화자들을 변화시키거나 설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위선적인 ‘척’이라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화자는 대항표현이 혐오표현을 방지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공론장에서나마 화자가 ‘천한 동기’를 숨기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항표현이 효과적이기 위해선 대항표현은 집단적인 연대와 조직에 기반해야 한다. 단체와 공동체의 힘을 통해 공론장에서 지속적으로 혐오표현에 압력을 가하고 더 나아가 국가 중심 대항표현은 시민사회의 대항표현이 갖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시민 개개인들에 비해 권위를 가지고 있는 공직자나 정부 기관, 대통령이 혐오의 정치를 직접적으로 비난한 사례는 혐오표현의 피해자들도 존엄하고 동등한 시민이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게 해 주고, 국가가 그들의 편에 서 있다는 강한 확신을 제공해 준다.
“국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그런 말을 들어야 했다는 것에 유감을 표합니다. 불행히도 일부 개인들이 여전히 이런 말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국민 전체를 대신하여 우리는 당신 곁에 서서 확신을 줄 것이고, 당신이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며, 그들이 말한 것은 공허한 위협으로 그치게 할 것을 보장하겠습니다.”( p.126)
국가의 재난 상황이 터질 때마다 국가가 앞장 서서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피해자들을 향해 혐오표현을 서슴지 않은 우리 사회의 처지가 새삼 개탄스럽다.
이 책은 혐오표현을 남발하면서도 그것이 표현의 자유에 속하다고 강변하는 자들에게 표현의 자유의 5가지 논거를 보론에서 제시한다. 어떤 표현이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기 위해선 진리논증, 권리논증, 민주주의논증,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 역량 논증 등 5가지 논증으로 검토해 보는 것이 안전하다. 특히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법안들이 위험한 이유에 대해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 평소 혐오표현을 대할 때면 저런 사람들은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입틀막이 필요하다고 본 나의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반성해 보게 됐다.
이미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모욕죄 등 정권에 반대하는 의견을 억누르거나 고소·고발을 남용하여 재갈을 물리는 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는 법안들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혐오표현 삭제 법안들을 추가하는 것이 아무래도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혐오표현 삭제 법안에서 규제하려는 혐오표현의 기준이 모호하고 그 적용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면, 이중 잣대를 가지고 소수자에게 불리하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김치녀”는 내버려 두고 “한남충”만을 혐오표현으로 간주하여 삭제한다든지, “똥꼬충”은 그대로 두고 “개독교”만을 혐오표현으로 규제할 수 있는 것이다.(p.174~175)
혐오표현 규제가 실질적으로 소수자 집단을 검열하는데 악용되는 경우 소수자를 위해서 입안된 규제가 오히려 소수자 운동에 득이 되기는커녕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으로 저자는 혐오표현이 출현해도 내버려두는 사회는 디스토피아지만, 혐오표현을 법으로 금지하여 강제로 틀어막는 사회는 겉모습만 유토피아적인 사회일 것이라고 우려를 표한다. 규제는 성차별주의, 인종혐오, 성소수자혐오 등 혐오표현을 야기한 사상이나 견해를 논박하거나 설득하여 침묵시키지 않고 수면 아래로 잠복시키기 때문이다. 즉 혐오표현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서 책의 말미에 혐오발화자들을 담론 공동체에서 낙인 찍고 정화하기보다는 그들의 편견을 교육하고 민주적으로 설득해 나가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정의롭고 보다 유토피아적인 사회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맥빠진 결론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사실 사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교육의 부재와 설득이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저자의 다음 책에서 그 어려운 교육과 설득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보다 철학적 응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