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시아 벌린. 『내 인생은 열린 책』
작가 이름도 책 제목도 생소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건 서평단 모집 글에서 이 책에 대해 엄청난 호평의 광고를 한 때문이었다.
해당 도서는 예스24 '오늘의 책'에 선정된 주목 신간입니다.
<타임> <뉴욕타임스> <보스턴글로브> <NPR> <엘르> <보그> <나일론> <AP통신> <커커스 리뷰> 선정 2018 올해의 책
소설가 구병모, 영화감독 박찬욱, 페드로 알모도바르 추천!
“숏폼 장인의 산뜻하면서도 애수를 담은 자전소설”
이국적인 이야기와 위트 있고 명석한 문장으로 전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은 루시아 벌린의 두 번째 소설집!
보석 같은 스물두 편의 소설들은 벌린 작품의 정수를 담고 있다.
루시아 벌린은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의 명과 암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그녀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명징하게 담아내는 재주가 있다.
이런 소개(특히 푸른색 문구)를 보고 어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책 광고에 기인했다. 단순히 읽어보고 싶다는 바람을 넘어 기대도 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던가. 이 책은 그랬다……유감스럽게도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꼭 그것 때문만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2.
이 책에는 모두 스물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한 권의 소설집에 어떻게 20여 편의 작품이 실릴 수 있을까? 책이 두툼한가? 그렇지 않다(이 책은 헌사와 역자 후기를 포함해도 375쪽이다). 그 이유는 극히 일부의 작품은 예외지만, 작품들 대부분이 짧은 분량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분량이 30쪽을 넘는 작품은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38쪽) 단 1편이다(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분량은 대개 편당 30쪽 안팎이다). 20쪽이 넘는 작품도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24쪽), 「양철 지붕 흙벽돌집」(27쪽),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24쪽), 「환상의 배」(24쪽), 「1974년 크리스마스」(21쪽) 5편에 불과하다.
심지어 10쪽도 안 되는 작품도 제법 있다. [「동생을 지키는 사람」(9쪽), 「벚꽃의 계절」(8쪽), 「딸들」(8쪽), 「흙에서 흙으로」(7쪽), 「초승달」(6쪽), 「오클랜드의 포니 바에서 있었던 일」(2쪽), 「비 오는 날」(2쪽)]
「오클랜드의 포니 바에서 있었던 일」(2쪽), 「비 오는 날」(2쪽) 두 작품은 겨우 2쪽 분량이다.
소설에서 분량이 무슨 문제가 될까? 나는 분량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장편(掌篇)소설의 경우 원고지 10매 안팎의 분량이고, 장편(掌篇)소설이 아니라 하더라도 짧으면서 완결성을 지닌 소설도 있다.], 문제가 되는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루시아 벌린 작품들의 짧은 분량은, 그녀의 작품들이 소설보다는 수필 같은 느낌을 준다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분량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소설이라고 하면 일정한 플롯을 가지고 있고, 그 플롯 내에서 어떤 형태로든 갈등의 발생과 해결이라는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때, 그 양상을 보여주려면 웬만큼의 분량은 요구되기 때문이다. 루시아 벌린 작품의 상당수가 소설보다는 수필 같은 느낌을 주는 데 분량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이유이다(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루시아 벌린 작품을 소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수록된 작품의 상당수가 내가 생각했던 소설, 곧,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플롯을 가지고 있고, 사건과 사건은 인과관계를 이룬다는 의미의 소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물론 모든 작품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분량이 짧지만 맨 처음에 수록된 「벚꽃의 계절」의 경우에는 매우 정제된 소설이라고 생각했으니까(반복되는 일상의 갑갑함. 소통하고 싶지만 소통되지 않는 남편, 그런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바람을 우편 집배원의 죽음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한 수작으로, 남편을 향해 “제발 나하고 이야기 좀 해.”라고 하는 마지막 대사가 예사롭지 않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왜 소설 같지 않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을까.
분명 다른 작품인데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동일인이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그런 작품들은 혹 연작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 느낌을 주는 인물들의 경우 대부분 주인공의 가족이거나 지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작품 속 성격도 거의 같다. 광산 기술자인 아버지, 몸이 아픈 어머니,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이혼녀가 된 주인공, 마약을 하는 남편 등…. 이런 이유로 루시아의 소설이 허구라기보다는 수필처럼 작가의 생활 속에서 벌어진 일을 서술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이런 이유보다도 근본적인 까닭은, 이미 언급한 갈등 구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상당수는 플롯 상의 ‘갈등 - 해결’ 구조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루브르에서 길을 잃다」처럼 특별히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단순한 여행기처럼 서술된 작품은 물론, 작품 속에 분명한 갈등을 가진 작품들의 경우조차도 그것이 플롯 상의 갈등, 곧 인과관계에 의한 갈등이라기보다 그냥 시간 순서로 벌어진 어떤 사건을 단순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해, 인물의 성격이 사건 이전에 이미 전제되어 있고, 그런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은 느낌.
한편, 작품 속 등장인물이 많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장편(長篇)소설이 아님에도,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 작품도 꽤 있었다. 이 점에서 정제된 단편소설이 아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마약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몇몇 작품, 가령 「안개 낀 어느 날」, 「낙원의 저녁」, 「환상의 배」, 「내 인생은 열린 책」 등의 경우, 영화로 각색하면 제법 흥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
루시아 벌린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은 어딘가 결핍된 존재로 그려져 있다. 그건,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이 대부분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일 거다.
작가 소개를 보면,
작가는 세 번 결혼에 실패했고,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온갖 일 -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 보조 등 - 을 경험한 것으로 나와 있다. 작가의 삶 자체가 소설 같다는 생각이다.
작품을 작가의 삶과 연결해서 봐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아니 어쩌면 작가의 이력을 무시하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한 작품 이해로 이어지는 수도 있지만(작품 외적 요소가 작품의 온당한 이해를 방해하는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작가의 생애가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루시아 벌린 작품에는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 이혼녀 등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의 생애를 알고 보면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과 작가의 삶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의 표제작인 「내 인생은 열린 책」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작품 내적 플롯 상으로 인과관계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소설처럼, 아니 소설로 읽히는 것은 작가의 직접 체험(작가의 체험 자체가 한 편의 소설 같지 않은가)에 기반한 이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정서상 수용하기 힘든 작품도 없지 않았다. 22편의 작품 중, 가장 많은 분량의 작품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작품은 제목에도 나오듯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로맨스의 상대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갓 사춘기에 접어든 10대의 ‘로라’로 아직 미성숙한 소녀인데, 이 ‘로라’의 로맨스 대상이 누구인가 하면, 아버지 또래로 일 관계로 아버지와도 아는 사이인 농장주 ‘안드레스’이다. 어떻게 아버지 또래인 남자를 보고 설레는 정도를 넘어, 섹스까지 하는 게 로맨스라는 것인지? 작품의 무대인 칠레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과연 로맨스가 될 수 있는 건지
4.
비록 내게는 기대만큼의 강한 끌림을 주지 못했지만(「벚꽃의 계절」처럼 짧은 분량의 소품임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도 물론 있다),
이 책이 많은 언론으로부터, 그리고 저명인사들로부터 호평을 얻은 까닭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작품 속 인물들이 전개해가는 작품 속 사건들이 사회의 주변부, 곧 어두운 곳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작가가 활동하던 당시의 남성 중심의 소설가들이 잘 조명하지 않은 소재, 곧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분투하는 주변부 여성의 삶의 모습을 매우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까
주변부에서 악다구니를 부리며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한편으로 삶이란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 『내 인생은 열린 책』이 아닌가 한다.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