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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 쉬지 않고 일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기 힘든가
EBS 자본주의 제작팀 저/EBS MEDIA 기획
집을 떠나 자취를 하거나 혹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힘들고 서러운 순간을 꼽으라면 대부분 아플 때라고 대답을 한다. 몸이 아파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을 때 혼자서 견디어 내야만 하는 시간은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도 상대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라는 부제의 이 책은 ‘돌봄노동’에 대해서 시종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내용이다. 더욱이 가족들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환자에 대한 돌봄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이 대부분 여성들에게 전가된다는 현실을 저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즉 ‘모든 돌봄을 여성에게 미뤄두고 나 몰라라 하는 이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아픈 이들,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들, 나이 들어가며 혹은 아니 들어가는 가까운 이를 보며 불안하고 겁나는 이들, 자신이 지나온 악몽 같은 시간을 삶의 일부로 끌어안으려 애쓰는 이들에게 이 책이 약상자였으면 한다’는 바람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아픈 몸을 견딜 수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있는 한밤중, 혹은 그러한 환자를 돌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을 함께 하는 시간을 ‘새벽 세 시’라는 표현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다. 질병에 걸린 당사자는 물론 그를 돌봐야 하는 보호자 또한 고통을 견뎌내야만 하는 ‘새벽 세 시’의 상황이 힘겨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 4명의 저자가 참여한 이 기획은 아마도 짧지 않은 기간 동안의 강좌와 행사를 토대로 마련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제는 그만큼 ‘돌봄노동’의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돌봄노동’이 너무도 힘들고 가혹하기에 ‘가족에게는 맞지 않은 일’이라고 단언하면서,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복지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보호자라는 자리’가 여전히 가족에게만 허용될 때, 정작 보호자가 없는 혹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지 않은 환자들이 겪는 고통의 문제를 환기하기도 한다. 나이가 든 환자의 경우 돌봄의 문제가 공론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논의가 깊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젊고 아픈 사람’의 경우 비교적 환자로서 치료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수 있지만, 오랜 기간 혹은 평생을 병을 지니고 살아야만 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 역시 돌봄노동의 몫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밖에도 ‘병자 클럽의 독서’라는 글에서는 돌봄노동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책을 함께 읽고 견뎌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치매 환자의 입장에서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짚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짧지 않은 기간 질병을 안고 살아야만 하는 이들에게, 마지막에 수록된 ‘시간과 노니는 몸들의 인생 이야기’는 스스로의 처지를 되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아플 때를 경험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복한 이후에 그것을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지내야만 하는 경우, ‘돌봄노동’은 진지한 탐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동안 가족에게 맡겨진 이 문제를 이제는 우리 사회의 현실로 인식하고, 앞으로 제도적인 정책으로 정착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더욱이 이 책의 저자들은 돌봄노동의 대상이거나 혹은 보호자로서의 경험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진지하게 그 대안을 마련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차니)
‘새벽 세 시’라는 말에 깜빡 속을 뻔했다. 깨어있다면 감성을 누리기에 충분한 시간 아니던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 아니 아침으로 향해가는 새벽 시간에 뭔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어도 좋고, 누군가 깨어있는 사람 또 없을까 싶은 마음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있어도 좋다. 미뤄두었던 정리하지 못한 책을 꺼내놓고 이삿짐 싸듯 정리해도 괜찮겠지.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만으로 기꺼이 깨어 있어도 좋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내 의지라면 말이다. 이 책에서 마주하는 ‘새벽 세 시’는 내가 생각했던 감성과는 거리가 먼, 책임과 부담이 먼저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여러 이유로 겪게 되는 우리 몸의 변화가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12페이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떼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이 책은 우리가 아프고 나이 들며 살아가고 죽어가는 몸으로 사는 일에 관해 말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감당해야 할 일을 한 개인으로 몫으로, 가족의 일로 남겨둘 수 없다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우리 모두 병명은 다를지라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언젠가, 현재에, 앞으로의 어느 날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관심 두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고통과 질병을 마주하고, 그 정면에서 부딪히는 장면에 질문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할 상황을 마주한다면, 당신이 그 돌봄을 수행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사회가 같이 안아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꺼낸다.
보호자는 불현듯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차마 도망치지 못한다. 이 ‘차마’에 담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많이 아픈 사람들 곁에서 돌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회가 ‘보호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마음은 어째서 수시로 진창이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간병하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같이’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배우지 못한다.(131페이지)
돌봄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가족의 일이니까 마음을 다해 보살피면 된다고 여기던 일에 위기는 찾아온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그 돌봄의 책임이 당연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 때문인지 왜인지, 우리는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가족같이’라는 말을 꺼낼 때가 많다. 서로 애틋하고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뜻일까? 이 말에 의미를 둔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니 가족 같다는 말이 언제나 정이 넘치는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돌봄의 위기가 그 ‘가족’에서 시작되고, ‘독박’에서 찾아온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나도 한마디 거들면서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 양가감정을 슬쩍 꺼내놓아 본다. 상황이 그러하니까, 가족이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이런 이유로 누군가 독박 돌봄을 해야 한다면, 돌봄의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한 사람은 온전한 마음으로 환자를, 가족을 돌볼 수 없다. 그러다가 환자를 방치, 학대하는 일도 생긴다. 어느 순간 간병인에서 가해자가 된 이들의 마음을 누가 제대로 읽어줄 수 있을까.
성장하고 독립하면서 인생을 꾸려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우리는 다시 독립적이지 못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젊음이 독립이었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늙음은 의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존의 상황은 두렵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묻는 말에 나오는 답은 늙고 병든 몸은 비용이고 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육체가 버겁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돌봄을 피할 수도 없다. 치욕이라 여기는 돌봄과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언제부터 돌봄이 이렇게 고역이 되었나. 이 책으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의 돌봄 구조였다. 앞서 말한 독박 돌봄의 불균형이 돌봄을 긍정의 이미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돌봄은 대개 가족 내 돌봄으로 이루어지고, 돌봄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란다. 한국 사회가 만든 돌봄의 구조가 가족, 특히 여성에게 전가해온 현상이다. 그 안에서 돌봄은 고통과 희생이 되고, 때로는 학대와 방치에 가깝게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돌봄 경험은 여성의 주도가 되지 못하고 남성이 돌봄 경험으로 기록한 책들이 더 많다. 웃기게도 이건 육아와 비슷한 흐름으로 보인다. 남성의 돌봄은 기록으로 남겨져 남다른 지식과 경험이 되는 현상이다. 왜 누가 하면 당연하고 누가 하면 배워야 할 지식이 되는가? 이는 여성의 모성과 돌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우리 몸의 아픔과 돌봄 문제에서 같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사회 문제이다.
저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은, 돌봄이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부담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시민적 돌봄’을 강조한다. 누구나 아프고 죽어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이라면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비슷하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가 된다. 이는 각자가 겪는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시민으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일이라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과 가정의 일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책이 반영되어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절대 혼자 이룰 수 없는 집단이며,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공동의 부담이면서 ‘우리’가 되었을 때 받는 힘의 크기도 만만치 않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계속 말하고, 소통하며, 듣게 하는 이야기다.
부담인 줄 알면서도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에 다른 시선이 생긴다. 나는 환자로 누워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보호자로 누워 있는 사람을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족의 일이었고,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 나의 일이 되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간병인을 구할 수 없던 그때 꼬박 일주일을 환자 옆에 있던 어느 날, 자주 마주치던 수간호사 선생님이 나에게 빨리 간병인을 구하라고 했다. 장기전이 될 텐데, 지금 이러면 보호자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간병인이 구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간병 비용 부담도 상당했다. 어쨌든 나중에는 간병인과 교대하면서 병상을 지켰지만, 책에서 언급한 ‘독박’이란 분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내 몸을 챙기지도 못하면서 쌓여가는 감정적 육체적 피로는 또 다른 고통을 낳고 있었다. 아, 이래서 학대와 방치가 생길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의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저자들이 들려주는 많은 경험과 통계 자료들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저자들은 한때, 그리고 지금 아픈 몸으로 살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더 절실하고 생생하게 들려오는 이유다. 건강하다고 여기는 이 몸이 언젠가 돌봄을 받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고 늙으며 살며 죽는다. 이 모든 삶의 순간들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돌봄에 의존한다. 또한 의존하면서 의존하는 다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돌본다. 내용과 형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돌봄은 언제나 상호적이며 쌍방향적이다. 의존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큼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복합적으로 발화되고 청취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돌봄이 어떤 노동이고 어떤 윤리적 가치인가를 차이 속에서 보편적 합의로 구성해내는 것은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다. (21페이지)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돌봄을 주고받았던 관계는 ‘나’의 일부다.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80페이지)
우리는, 누구나 새벽 세 시의 몸이 된다. 우리 몸이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 모두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돌봄의 현실을 같이 마주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고, 멀고 먼 일이라고 여길 텐가. 피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마주침을 최대한으로 미루고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시간은 내 계획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안다.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떡 하고 나타나 현실이 된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돌봄의 고립된 세상에 남겨지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나 혼자 부담하기에는 외롭고 힘든 시간이 될 간병에 힘이 되는 ‘토로’이자 ‘토론’의 이야기인 이 책이 조금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가 늙고, 병들고, 죽는다. 예외가 없다. 이 책은 이 얘기를 하고 있다. 어떻게 잘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인가. 해답은 병듦이라면 병을 삶의 한 과정이라고 인정하고 혼자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나의 노력도 필요하고 타인의 도움도 필요하다. 타인도 마찬가지다. 그 타인은 가까운 친구나 친척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국가가 될 수도 있다.
해답은 분명하다. 아픈 환자라면 환자 본인도 잘 대응해야 하고, 주위 사람들도 잘 보살펴야 하고, 국가도 국가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무 당연하다. 해답도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왜 그럴까?
이 책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을, 돌봄 노동의 문제, 청년으로 오랜 기간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치매 환자와 같은 여러 가지 경우들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읽다보면 의미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예를 들어 돌봄 과정에서 자신이 돌봄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제기, 청년기 질병 문제를 논의하며 질병을 삶의 예외적인 경우로 치부하지 말고 어떻게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논의 등은 읽어 볼만 했다.
하지만, 위의 얘기들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웠긴 했지만, 동시에, 그럼 어떻게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구체적 각론에서는 여전히 좀 막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고 여전히 첫 페이지를 펼칠 때의 막막함과 또 다른 기대는 그대로였다. 주제 자체가 너무 어려운 주제였다. 아예 뭐 지구 평화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거창한 주제면 그 막막함이 덜할 텐데, 곧 닥칠 내 삶의 문제다 보니, 인식의 전환 말고 구체적 방법론을 묻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 쯤 읽어봐야 할 책임은 분명하다.
책 속 문장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를 떠올려보라. 가장 아끼는 음악의 축복 속에서 몽상의 글귀를 암송하고 사유의 문장들에 공명하며, 그렇게 자기만의 우주를 누리던 저 숱한 새벽 세 시의 시간들은 이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몸이 우리를 데려가는 시간으로 바뀐다.
_여는글에서
삶에 대한 사적이고 공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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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의존, 취약함이 가능성이 된다는 내용이 신선하고 따뜻했습니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받는 사람은 누구든 해당될 수 있고 아픈 사람을 전담으로 돌보겠다고 자처하기란 친밀한 관계에서도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기에 보이지 않게 멀 리 떨어뜨리거나 외면하고 싶기도 하지만 가까이에서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돌봄과 돌봄 받는 현실을 삶의 연장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이 일상으로 자리한다면 필연적으로 나이 들고 늙어가는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덜 두렵겠습니다
가을 독서 두번째 모임의 책은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였다.
건강하지 않은 몸에 대해서, 건강하지 않은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모임원분들과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나누는 시간이 뜻 깊었고,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살아갈 권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에 발목을 다쳐 수술을 하고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녔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대중교통들이, 신호등이, 대부분의 이동 수단들이 신체 활동에 제약이 없는 비장애인에게 맞춰진 거라는 걸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하철 역사에서 목발을 짚고 이동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병원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데 그 길이 끔찍하게도 멀게 느껴졌을 때, 오도가도 못해서 서럽던 감각을 기억한다. 신호등을 건너는데 중간에 신호가 바뀌는 끔찍함이란. 신호등 시간은 왜 그렇게 짧은 건지.
사회는 우리에게 모두 '건강'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말로 건강해야만 한다고 하는 건 아니다. 사회의 기준에서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배제되는 시스템으로 하여금 눈치 채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그 기준에서 밀려난 순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문명은 부러졌다 다시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는 어느 인류학자 분의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사회를 본다. 그 분의 말을 생각하고 보면 지금의 문명은 발전한 건지 퇴화한 건지, 아니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태어난 이후 매 순간 건강할 수만은 없다. 운이 좋으면 건강하게 태어나서 별 탈 없이 어른이 되겠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혹은 태어나기 전부터 삶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언제나 그랬듯 느리다. 진짜 끔찍하게 느리다. 아직까지도 세상에 혐오와 차별이 가득한 걸 보면 착잡하기 그지 없다. 서기, 예수님이 죽고 난 뒤부터 열심히 날짜를 세서 202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사회는 아주 느리게 바뀌었다.
성경이 세상에서 베스트 셀러라는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언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것 같다. 다들 아무래도 성경은 사놓고 안 읽는 것 같지. 다음달에 곧 크리스마스인데,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는 잘 챙기면서 이웃은 별로 안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면 아프고 병든 자들, 나와 다른 자들은 이웃 목록에서 빼버렸던가. 어느쪽이든 '네 이웃을 사랑하라'던 예수님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 것 같지만.
하여튼 다들 자기가 원하는 말만 쏙쏙 빼먹는 거 좋아한다. 성경의 핵심 메세지는 아무리 봐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 한 줄인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거 사실 진짜 진짜 어려운 일이다. 외면하고 싶을만 하긴 한데, 그렇다고 이걸 외면하고 이웃을 조지는데 성경을 끌어다 쓸 생각을 할 거면 진짜 왜 그러는 건가 싶다. 근데 이건 기독교나 가톨릭이나 성경 열심히 공부하면서 이상한 짓 하는 거 생각하면 개인의 문제는 아니구나 싶다. 여성 차별 심하던 과거에도 구약 보면 여자 사사도 있는데, 여성 사제는 없는 가톨릭 보면 한숨이 나온다. 저기요, 지금 2021년인데요?
하여튼 다들 열심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핵심 메세지는 외면하고, 혐오하고 차별하는데 구약 부분 끌어다 쓰기 바쁘다. 구약 끌어다 쓸거면 몸소 레위기에 적힌 모든 세세한 규칙들을 실천하면서 산 뒤에 말하도록 하자. 아마 불가능하겠지만. 교황님도 레위기에 적힌 규칙들대로 살진 않잖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만 줄여야겠다. 아니, 근데 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음 독서 모임도 기대가 된다. 사실 비문학은 독서가 쉽지는 않지만, 읽고 나면 뭔가 뿌듯해지고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