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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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른들을 위한 심리수업

리뷰 총점 9.7 (23건)
분야
인문 > 심리/정신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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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해석’을 바꾸면 ‘해법’이 보이고 ‘해답’도 달라진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y***u | 2020.04.12 리뷰제목
‘해석’을 바꾸면 ‘해법’이 보이고 ‘해답’도 달라진다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를 읽고  ‘해석’을 ‘해석’한다: 《해석에 반대한다》를 해석한다“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 니체의 말이다.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실은 별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중립적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진심이 담긴 진실이
리뷰제목

해석을 바꾸면 해법이 보이고 해답도 달라진다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를 읽고 

 해석을 해석한다해석에 반대한다를 해석한다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 니체의 말이다.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실은 별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중립적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진심이 담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세계는 해석자의 관점적 차이에 따라 사실을 넘어 사기가 담길 수도 있고 진실이 담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진리는 그래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뜨거운 열정과 철학, 신념과 가치로 이미 오염된 편견의 산물이다. 그래서 니체는 모든 진리는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고 했다. 진리는 직선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객관적 지식의 과학적 표현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의 산물이다. 동일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의 이런 주장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있다, 바로 수전 손택이다. 그녀는 《해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해석에 대한 그녀의 독특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25쪽).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평가하지만 그런 해석은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창작 의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집하려는 불온한 음모에 불과하다.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예술작품을 자신의 이론적 신념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 니체의 말이다.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실은 별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중립적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진심이 담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세계는 해석자의 관점적 차이에 따라 사실을 넘어 사기가 담길 수도 있고 진실이 담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진리는 그래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뜨거운 열정과 철학, 신념과 가치로 이미 오염된 편견의 산물이다. 그래서 니체는 모든 진리는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고 했다. 진리는 직선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객관적 지식의 과학적 표현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의 산물이다. 동일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의 이런 주장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있다, 바로 수전 손택이다. 그녀는 《해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해석에 대한 그녀의 독특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25쪽).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평가하지만 그런 해석은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창작 의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집하려는 불온한 음모에 불과하다.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예술작품을 자신의 이론적 신념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해석은 예술작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잔인한 호전 행위”(26쪽)이거나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26쪽).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는 작품성을 자신의 입장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해석 행위를 거듭할수록 예술적 의미와 가치와는 무관하게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희석시켜 오히려 예술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호전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석은 그래서 “작품에 대한 불만사항, 그래서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꿔놓고픈 희망 사항”(28쪽)이다. 예술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본래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자가 자기 주관대로 작품성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희망하는 사항을 편파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해석은 작품에 대해 해석자가 지니고 있는 불만사항을 전달하는 방편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34쪽). 해석을 거듭할수록 작품을 창작한 오리지널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의 다양한 의지가 반영됨으로써 순수한 예술작품은 본래의 색깔과 의도를 잃어버리고 해석자의 해석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정치적 입김에 수전 손택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해석은 예술작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잔인한 호전 행위”(26쪽)이거나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26쪽).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는 작품성을 자신의 입장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해석 행위를 거듭할수록 예술적 의미와 가치와는 무관하게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희석시켜 오히려 예술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호전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석은 그래서 “작품에 대한 불만사항, 그래서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꿔놓고픈 희망 사항”(28쪽)이다. 예술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본래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자가 자기 주관대로 작품성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희망하는 사항을 편파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해석은 작품에 대해 해석자가 지니고 있는 불만사항을 전달하는 방편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34쪽). 해석을 거듭할수록 작품을 창작한 오리지널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의 다양한 의지가 반영됨으로써 순수한 예술작품은 본래의 색깔과 의도를 잃어버리고 해석자의 해석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정치적 입김에 수전 손택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해석은 예술작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잔인한 호전 행위”(26쪽)이거나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26쪽).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는 작품성을 자신의 입장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해석 행위를 거듭할수록 예술적 의미와 가치와는 무관하게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희석시켜 오히려 예술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호전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석은 그래서 “작품에 대한 불만사항, 그래서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꿔놓고픈 희망 사항”(28쪽)이다. 예술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본래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자가 자기 주관대로 작품성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희망하는 사항을 편파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해석은 작품에 대해 해석자가 지니고 있는 불만사항을 전달하는 방편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34쪽). 해석을 거듭할수록 작품을 창작한 오리지널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의 다양한 의지가 반영됨으로써 순수한 예술작품은 본래의 색깔과 의도를 잃어버리고 해석자의 해석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정치적 입김에 수전 손택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해석을 바꾸면 능력도 바뀐다

 

"해석의 부정적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해석은 여전히 순기능을 갖고 있다. 똑같은 사실도 그걸 누가 어떤 관점으로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사실에 대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해석을 바꾸는 방식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능력이다……새로운 해석도 그 사람의 새로운 능력을 이끌어내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97쪽). 누가 어떻게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보잘것없었던 능력도 새로운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능력은 해석자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서 다른 능력으로 인정된다, 부정적인 기운에 휘둘려 늘 골방에 처박혀 역기능과 폐해로만 보였던 능력이 우연한 기회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의 능력을 고루하게 해석했던 틀에 박힌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로운 해석을 발견해내고 자신과 주변을 바꾸기 시작할 때까지 사람은 고루한 해석 안에서 고민하고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야 한다. 고루한 해석으로 도저히 자신이 직면해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일종의 절망감 속에서 마음은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 안에서 숙성되고 절망이라는 현실적 검증을 견뎌내며 탄생하는 것이다”(98쪽). 해석이 고루해질수록 해답은 지루해진다. 해석을 바꿔야 해법을 찾는 접근 논리도 달라지고, 접근 논리가 달라져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해답도 바뀐다.

해석의 부정적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해석은 여전히 순기능을 갖고 있다. 똑같은 사실도 그걸 누가 어떤 관점으로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사실에 대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해석을 바꾸는 방식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능력이다……새로운 해석도 그 사람의 새로운 능력을 이끌어내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97쪽). 누가 어떻게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보잘것없었던 능력도 새로운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능력은 해석자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서 다른 능력으로 인정된다, 부정적인 기운에 휘둘려 늘 골방에 처박혀 역기능과 폐해로만 보였던 능력이 우연한 기회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의 능력을 고루하게 해석했던 틀에 박힌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로운 해석을 발견해내고 자신과 주변을 바꾸기 시작할 때까지 사람은 고루한 해석 안에서 고민하고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야 한다. 고루한 해석으로 도저히 자신이 직면해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일종의 절망감 속에서 마음은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 안에서 숙성되고 절망이라는 현실적 검증을 견뎌내며 탄생하는 것이다”(98쪽). 해석이 고루해질수록 해답은 지루해진다. 해석을 바꿔야 해법을 찾는 접근 논리도 달라지고, 접근 논리가 달라져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해답도 바뀐다.

 

"해석은 언제나 또 다른 해석과 싸운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할 때 탄생된다. 고루한 해석이 새로운 해석을 낳는 법이다. 평온했던 해석의 세계에 타자의 새로운 해석이 불법침입할 때 낯선 해석의 씨앗이 잉태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 (310-311쪽).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기존 해석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관문을 열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전대미문의 질문이 시작된다. 고루한 해석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성인이 되기 위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해석이며 하루하루를 보다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해석이었다”(103-104쪽). 고루한 해석에 머무는 사람은 사고가 고리타분하다. 변화보다 안정, 도전보다 안주를 택한다. 기존의 해석을 능가하는 색다른 현상의 출몰에 관심이 없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안빈낙도의 삶에 물들어 있고 타성과 관성에 빠져 식상함과 통념을 주로 먹고 산다. 하지만 성인의 해석에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는 이제까지 오르막길을 힘겹게 뛰어오르는 목표 달성과 성과를 놓고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에서 추락하지 않고 인생 후반부를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르막을 해석하는 방식과 내리막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없다면 내리막길에서 추락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언제나 또 다른 해석과 싸운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할 때 탄생된다. 고루한 해석이 새로운 해석을 낳는 법이다. 평온했던 해석의 세계에 타자의 새로운 해석이 불법침입할 때 낯선 해석의 씨앗이 잉태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 (310-311쪽).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기존 해석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관문을 열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전대미문의 질문이 시작된다. 고루한 해석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성인이 되기 위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해석이며 하루하루를 보다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해석이었다”(103-104쪽). 고루한 해석에 머무는 사람은 사고가 고리타분하다. 변화보다 안정, 도전보다 안주를 택한다. 기존의 해석을 능가하는 색다른 현상의 출몰에 관심이 없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안빈낙도의 삶에 물들어 있고 타성과 관성에 빠져 식상함과 통념을 주로 먹고 산다. 하지만 성인의 해석에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는 이제까지 오르막길을 힘겹게 뛰어오르는 목표 달성과 성과를 놓고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에서 추락하지 않고 인생 후반부를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르막을 해석하는 방식과 내리막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없다면 내리막길에서 추락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언제나 또 다른 해석과 싸운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할 때 탄생된다. 고루한 해석이 새로운 해석을 낳는 법이다. 평온했던 해석의 세계에 타자의 새로운 해석이 불법침입할 때 낯선 해석의 씨앗이 잉태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 (310-311쪽).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기존 해석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관문을 열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전대미문의 질문이 시작된다. 고루한 해석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성인이 되기 위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해석이며 하루하루를 보다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해석이었다”(103-104쪽). 고루한 해석에 머무는 사람은 사고가 고리타분하다. 변화보다 안정, 도전보다 안주를 택한다. 기존의 해석을 능가하는 색다른 현상의 출몰에 관심이 없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안빈낙도의 삶에 물들어 있고 타성과 관성에 빠져 식상함과 통념을 주로 먹고 산다. 하지만 성인의 해석에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는 이제까지 오르막길을 힘겹게 뛰어오르는 목표 달성과 성과를 놓고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에서 추락하지 않고 인생 후반부를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르막을 해석하는 방식과 내리막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없다면 내리막길에서 추락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언제나 또 다른 해석과 싸운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할 때 탄생된다. 고루한 해석이 새로운 해석을 낳는 법이다. 평온했던 해석의 세계에 타자의 새로운 해석이 불법침입할 때 낯선 해석의 씨앗이 잉태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 (310-311쪽).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기존 해석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관문을 열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전대미문의 질문이 시작된다. 고루한 해석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성인이 되기 위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해석이며 하루하루를 보다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해석이었다”(103-104쪽). 고루한 해석에 머무는 사람은 사고가 고리타분하다. 변화보다 안정, 도전보다 안주를 택한다. 기존의 해석을 능가하는 색다른 현상의 출몰에 관심이 없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안빈낙도의 삶에 물들어 있고 타성과 관성에 빠져 식상함과 통념을 주로 먹고 산다. 하지만 성인의 해석에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는 이제까지 오르막길을 힘겹게 뛰어오르는 목표 달성과 성과를 놓고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에서 추락하지 않고 인생 후반부를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르막을 해석하는 방식과 내리막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없다면 내리막길에서 추락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가 고루하면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하다

 

"성인 이후 걸리는 마음의 질병은 주로 고루한 해석이 낳은 질병이다. “마음의 질병은 고루한 해석 안에 갇혀 있었다는 데 원인이 있다. 마음의 질병을 해결하려면 자신이 직면해있는 새로운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111쪽)”. 해석이 고루하니 마음도 고루하다. 해석이 지루하면 사고도 지루하다. 내 생각으로 해석할 때 등장하는 고정관념과 타성, 통념과 관례가 고루할수록 생각도 낯선 사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해석이 틀에 박혀 있으니 생각도 마음도 다른 대안을 찾아 탈출할 방법이 없다. “’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사고방식’에 상상으로 동조할 수 있는 능력, 이를 ‘논리성’이라 부른다”(113쪽). 우치다 타쯔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에 나오는 말이다. 내 생각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한시라도 빨리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에 접목해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잉태해야 한다.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어야 새로운 해석이 나온다. 고루한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으로 낯선 사유체계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 대형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 없었던 사람은 내 인생은 이제 끝이라고 단정하고 시종일관 부정적인 자세와 태도로 삶을 일관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 창문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에서 희망을 보았고 그 빛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순간적인 충동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건을 경험한다. 불치의 질병이라고 해석하고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나락의 끝자락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이 책에서는 ‘질병 수용’이라고 한다. 질병을 수용하고 살아갈 자세와 의지를 고쳐먹을 때, 불행한 사건은 과거로 흘러가고 이제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자세와 의지가 생긴 것이다. 그 순간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프레임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동반된다.  성인 이후 걸리는 마음의 질병은 주로 고루한 해석이 낳은 질병이다. “마음의 질병은 고루한 해석 안에 갇혀 있었다는 데 원인이 있다. 마음의 질병을 해결하려면 자신이 직면해있는 새로운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111쪽)”. 해석이 고루하니 마음도 고루하다. 해석이 지루하면 사고도 지루하다. 내 생각으로 해석할 때 등장하는 고정관념과 타성, 통념과 관례가 고루할수록 생각도 낯선 사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해석이 틀에 박혀 있으니 생각도 마음도 다른 대안을 찾아 탈출할 방법이 없다. “’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사고방식’에 상상으로 동조할 수 있는 능력, 이를 ‘논리성’이라 부른다”(113쪽). 우치다 타쯔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에 나오는 말이다. 내 생각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한시라도 빨리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에 접목해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잉태해야 한다.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어야 새로운 해석이 나온다. 고루한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으로 낯선 사유체계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 대형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 없었던 사람은 내 인생은 이제 끝이라고 단정하고 시종일관 부정적인 자세와 태도로 삶을 일관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 창문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에서 희망을 보았고 그 빛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순간적인 충동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건을 경험한다. 불치의 질병이라고 해석하고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나락의 끝자락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이 책에서는 ‘질병 수용’이라고 한다. 질병을 수용하고 살아갈 자세와 의지를 고쳐먹을 때, 불행한 사건은 과거로 흘러가고 이제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자세와 의지가 생긴 것이다. 그 순간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프레임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동반된다.  

 

“고루한 자세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치환해야 한다. 고루한 자세는 새로운 상황 아래에서도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124쪽). 자세가 고루하니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할 뿐이다. 새로운 해석을 낳을 터전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남루한 환자복을 입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고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세를 바꾸는 계기를 맞이하는 순간 나와 내가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바라볼 해석이 인생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기존의 고루한 해석을 넘어 새로운 해석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슬프지만 슬픔을 반추해보고 성찰하면서 지금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주어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는 전망하되 현재는 절망하는 능력, 과거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첫째, 슬픔의 뒤안길을 오솔길로 만들어 걸어가면서 지금 당장의 아픔을 초극하려는 능력이 바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벗어나려면 내가 입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성의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두 번째 절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붙잡고 아등바등 대지 않고 깨끗하게 야망을 내려놓고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욕망을 키우는 능력이다. 절망은 주로 고루한 성인의 해석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을 때 탄생된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느끼는 능력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쓰면서 즐겁고 기쁜 방향으로 마음이 흐르려는 성향을 따라가려는 능력이다. 마음은 밝고 따뜻하며 기운이 넘치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걸 따라가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고루한 자세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치환해야 한다. 고루한 자세는 새로운 상황 아래에서도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124쪽). 자세가 고루하니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할 뿐이다. 새로운 해석을 낳을 터전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남루한 환자복을 입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고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세를 바꾸는 계기를 맞이하는 순간 나와 내가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바라볼 해석이 인생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기존의 고루한 해석을 넘어 새로운 해석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슬프지만 슬픔을 반추해보고 성찰하면서 지금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주어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는 전망하되 현재는 절망하는 능력, 과거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첫째, 슬픔의 뒤안길을 오솔길로 만들어 걸어가면서 지금 당장의 아픔을 초극하려는 능력이 바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벗어나려면 내가 입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성의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두 번째 절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붙잡고 아등바등 대지 않고 깨끗하게 야망을 내려놓고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욕망을 키우는 능력이다. 절망은 주로 고루한 성인의 해석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을 때 탄생된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느끼는 능력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쓰면서 즐겁고 기쁜 방향으로 마음이 흐르려는 성향을 따라가려는 능력이다. 마음은 밝고 따뜻하며 기운이 넘치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걸 따라가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고루한 자세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치환해야 한다. 고루한 자세는 새로운 상황 아래에서도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124쪽). 자세가 고루하니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할 뿐이다. 새로운 해석을 낳을 터전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남루한 환자복을 입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고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세를 바꾸는 계기를 맞이하는 순간 나와 내가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바라볼 해석이 인생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기존의 고루한 해석을 넘어 새로운 해석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슬프지만 슬픔을 반추해보고 성찰하면서 지금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주어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는 전망하되 현재는 절망하는 능력, 과거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첫째, 슬픔의 뒤안길을 오솔길로 만들어 걸어가면서 지금 당장의 아픔을 초극하려는 능력이 바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벗어나려면 내가 입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성의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두 번째 절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붙잡고 아등바등 대지 않고 깨끗하게 야망을 내려놓고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욕망을 키우는 능력이다. 절망은 주로 고루한 성인의 해석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을 때 탄생된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느끼는 능력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쓰면서 즐겁고 기쁜 방향으로 마음이 흐르려는 성향을 따라가려는 능력이다. 마음은 밝고 따뜻하며 기운이 넘치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걸 따라가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고루한 자세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치환해야 한다. 고루한 자세는 새로운 상황 아래에서도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124쪽). 자세가 고루하니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할 뿐이다. 새로운 해석을 낳을 터전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남루한 환자복을 입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고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세를 바꾸는 계기를 맞이하는 순간 나와 내가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바라볼 해석이 인생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기존의 고루한 해석을 넘어 새로운 해석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슬프지만 슬픔을 반추해보고 성찰하면서 지금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주어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는 전망하되 현재는 절망하는 능력, 과거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첫째, 슬픔의 뒤안길을 오솔길로 만들어 걸어가면서 지금 당장의 아픔을 초극하려는 능력이 바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벗어나려면 내가 입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성의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두 번째 절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붙잡고 아등바등 대지 않고 깨끗하게 야망을 내려놓고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욕망을 키우는 능력이다. 절망은 주로 고루한 성인의 해석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을 때 탄생된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느끼는 능력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쓰면서 즐겁고 기쁜 방향으로 마음이 흐르려는 성향을 따라가려는 능력이다. 마음은 밝고 따뜻하며 기운이 넘치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걸 따라가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해석이란 “우리가 잃어버린 주관성을 되찾을 수 있는 해석”(146쪽)이다. 갓 태어난 유아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주관적인 세계였다. 배고프면 울고 욕구가 극에 달하면 또 울고 그럼 바로 엄마가 나타나 자신의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해소해주었다. 점차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람은 성인으로 성숙해간다. 30세의 성인이 되기까지 나의 주관대로 움직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객관적 존재나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거친다. 저자는 객관적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유아기처럼 모든 걸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성인의 해석은 다시 주관성을 회복할 때 새로운 해석 능력으로 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관성은 말 그대로 내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인 판단에 근거해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주도적인 삶을 살 때 생기는 긍정적인 의미의 관성이다. 관성(慣性)에 매몰되면 타성에 젖어 틀에 박힌 고루한 삶을 살지만 주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관통(貫通)하는 마음으로 올곧게 세상을 바라볼 때 주관성(主觀性)은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체성이자 주춧돌이다. 주관성이 고집으로 전락하면 순식간에 쉽게 바꿀 수 없는 관성으로 타락한다. 관성은 생각하지 않아도 반자 동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습관의 산물이다. 반면에 주관성은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수많은 다른 주장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릴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해석이란 “우리가 잃어버린 주관성을 되찾을 수 있는 해석”(146쪽)이다. 갓 태어난 유아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주관적인 세계였다. 배고프면 울고 욕구가 극에 달하면 또 울고 그럼 바로 엄마가 나타나 자신의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해소해주었다. 점차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람은 성인으로 성숙해간다. 30세의 성인이 되기까지 나의 주관대로 움직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객관적 존재나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거친다. 저자는 객관적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유아기처럼 모든 걸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성인의 해석은 다시 주관성을 회복할 때 새로운 해석 능력으로 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관성은 말 그대로 내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인 판단에 근거해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주도적인 삶을 살 때 생기는 긍정적인 의미의 관성이다. 관성(慣性)에 매몰되면 타성에 젖어 틀에 박힌 고루한 삶을 살지만 주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관통(貫通)하는 마음으로 올곧게 세상을 바라볼 때 주관성(主觀性)은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체성이자 주춧돌이다. 주관성이 고집으로 전락하면 순식간에 쉽게 바꿀 수 없는 관성으로 타락한다. 관성은 생각하지 않아도 반자 동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습관의 산물이다. 반면에 주관성은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수많은 다른 주장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릴 수 있다.

 

"저자의 인간의 마음은 5가지 위계로 계층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얕은 층이 없으면 깊은 층은 발휘될 수 없고, 깊은 층은 얕은 층을 자유롭게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장 밑바닥의 원초적 감정은 감각이다. 어린 시절 주로 발달하는 1차원적 신체적 움직임, 예를 들면 배고프면 엄마 젖을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울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는 점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감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감정이 욕구다. 감각적 깨달음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갈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욕망하는 대상을 지향하는 본능이 생긴다. 사람은 모든 욕구를 충족해서 살아갈 수 없다. 그걸 인식하고 통제하며 조정하는 높은 마음의 계층이 지성이다. 욕구는 나를 끌고 가지만 지성은 나를 거기서 떨어져 나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한다. 식욕이 강하게 발동하지만 지성은 그만 먹으라고 끊임없이 명령한다. 성욕이 치솟지만 자제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음을 지성은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경고장을 날린다. 지성과 욕구가 충돌하는 사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한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지만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시어머니는 논리적으로 차가운 지성이 작동하고 친정 엄마는 지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감정이나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는 감성이 작동한다.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을 때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시키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감성적으로 설득당할 때 감동받고 감동받으면 행동한다. 세상은 머리를 움직이는 사람보다 심장을 움직이는 사람이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키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저자의 인간의 마음은 5가지 위계로 계층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얕은 층이 없으면 깊은 층은 발휘될 수 없고, 깊은 층은 얕은 층을 자유롭게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장 밑바닥의 원초적 감정은 감각이다. 어린 시절 주로 발달하는 1차원적 신체적 움직임, 예를 들면 배고프면 엄마 젖을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울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는 점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감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감정이 욕구다. 감각적 깨달음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갈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욕망하는 대상을 지향하는 본능이 생긴다. 사람은 모든 욕구를 충족해서 살아갈 수 없다. 그걸 인식하고 통제하며 조정하는 높은 마음의 계층이 지성이다. 욕구는 나를 끌고 가지만 지성은 나를 거기서 떨어져 나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한다. 식욕이 강하게 발동하지만 지성은 그만 먹으라고 끊임없이 명령한다. 성욕이 치솟지만 자제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음을 지성은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경고장을 날린다. 지성과 욕구가 충돌하는 사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한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지만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시어머니는 논리적으로 차가운 지성이 작동하고 친정 엄마는 지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감정이나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는 감성이 작동한다.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을 때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시키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감성적으로 설득당할 때 감동받고 감동받으면 행동한다. 세상은 머리를 움직이는 사람보다 심장을 움직이는 사람이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키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저자의 인간의 마음은 5가지 위계로 계층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얕은 층이 없으면 깊은 층은 발휘될 수 없고, 깊은 층은 얕은 층을 자유롭게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장 밑바닥의 원초적 감정은 감각이다. 어린 시절 주로 발달하는 1차원적 신체적 움직임, 예를 들면 배고프면 엄마 젖을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울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는 점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감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감정이 욕구다. 감각적 깨달음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갈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욕망하는 대상을 지향하는 본능이 생긴다. 사람은 모든 욕구를 충족해서 살아갈 수 없다. 그걸 인식하고 통제하며 조정하는 높은 마음의 계층이 지성이다. 욕구는 나를 끌고 가지만 지성은 나를 거기서 떨어져 나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한다. 식욕이 강하게 발동하지만 지성은 그만 먹으라고 끊임없이 명령한다. 성욕이 치솟지만 자제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음을 지성은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경고장을 날린다. 지성과 욕구가 충돌하는 사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한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지만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시어머니는 논리적으로 차가운 지성이 작동하고 친정 엄마는 지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감정이나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는 감성이 작동한다.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을 때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시키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감성적으로 설득당할 때 감동받고 감동받으면 행동한다. 세상은 머리를 움직이는 사람보다 심장을 움직이는 사람이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키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저자의 인간의 마음은 5가지 위계로 계층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얕은 층이 없으면 깊은 층은 발휘될 수 없고, 깊은 층은 얕은 층을 자유롭게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장 밑바닥의 원초적 감정은 감각이다. 어린 시절 주로 발달하는 1차원적 신체적 움직임, 예를 들면 배고프면 엄마 젖을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울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는 점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감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감정이 욕구다. 감각적 깨달음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갈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욕망하는 대상을 지향하는 본능이 생긴다. 사람은 모든 욕구를 충족해서 살아갈 수 없다. 그걸 인식하고 통제하며 조정하는 높은 마음의 계층이 지성이다. 욕구는 나를 끌고 가지만 지성은 나를 거기서 떨어져 나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한다. 식욕이 강하게 발동하지만 지성은 그만 먹으라고 끊임없이 명령한다. 성욕이 치솟지만 자제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음을 지성은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경고장을 날린다. 지성과 욕구가 충돌하는 사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한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지만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시어머니는 논리적으로 차가운 지성이 작동하고 친정 엄마는 지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감정이나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는 감성이 작동한다.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을 때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시키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감성적으로 설득당할 때 감동받고 감동받으면 행동한다. 세상은 머리를 움직이는 사람보다 심장을 움직이는 사람이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키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지성은 밖의 기준에 따라 흔들리지만 감성은 안의 기준으로 중심을 잡는다

 

저자의 주장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감정과 감성의 구분, 감성과 지성의 구분이다. 저자는 감성은 감정보다 성숙한 단계의 마음이라고 이해한다. 감정이 상황적 분위기나 사람의 기분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감성은 타자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때 생기는 측은지심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참조해야 한다. 법률에 합치되거나 윤리에 근거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참조해야 한다. 그러나 감성은 그것이 발생했을 때부터 자신의 가치 판단을 가지고 있다. 외부에서는 감성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리고 감성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주관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189쪽). 가치 판단을 내부와 외부의 기준 중에서 무엇을 판단기준으로 삼는지에 따라 지성과 감성이 구분된다. 외부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지성은 논리적이지만 판단 기준이 외부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주시한다. 반면에 감성은 직감적이지만 판단의 기준이 내부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주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적 흐름에 주목한다. “지성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판단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외부의 다양한 기준에 비춰보아야 한다”(213쪽). 지성은 판단기준을 늘 안이 아니라 밖에 찾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환경 의존적이며 자신감이 없다. 판단을 내렸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여전히 불안하다. 반면에 세련된 감정과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감성에 비추어 사물이나 현상 또는 관계를 판단하는 주관성이 높은 사람은 주변의 판단과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다. 가치 판단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심연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환경 독립적 사유를 즐긴다. 이들이 내리는 “판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감성의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의 온 힘을 다 쏟아부은 것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214-215쪽). 

 

저자의 주장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감정과 감성의 구분, 감성과 지성의 구분이다. 저자는 감성은 감정보다 성숙한 단계의 마음이라고 이해한다. 감정이 상황적 분위기나 사람의 기분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감성은 타자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때 생기는 측은지심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참조해야 한다. 법률에 합치되거나 윤리에 근거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참조해야 한다. 그러나 감성은 그것이 발생했을 때부터 자신의 가치 판단을 가지고 있다. 외부에서는 감성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리고 감성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주관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189쪽). 가치 판단을 내부와 외부의 기준 중에서 무엇을 판단기준으로 삼는지에 따라 지성과 감성이 구분된다. 외부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지성은 논리적이지만 판단 기준이 외부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주시한다. 반면에 감성은 직감적이지만 판단의 기준이 내부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주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적 흐름에 주목한다. “지성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판단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외부의 다양한 기준에 비춰보아야 한다”(213쪽). 지성은 판단기준을 늘 안이 아니라 밖에 찾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환경 의존적이며 자신감이 없다. 판단을 내렸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여전히 불안하다. 반면에 세련된 감정과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감성에 비추어 사물이나 현상 또는 관계를 판단하는 주관성이 높은 사람은 주변의 판단과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다. 가치 판단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심연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환경 독립적 사유를 즐긴다. 이들이 내리는 “판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감성의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의 온 힘을 다 쏟아부은 것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214-215쪽). 

 

 

“감성은 언어를 넘어 언어와 기존의 개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지성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므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다”(189쪽). 감성으로 다가온 느낌은 언어화를 거부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느낌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냥 육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 나의 믿음과 신념을 부추긴다. 객관적 자료도 없고 논리적 검증도 없다. 그냥 저 사람 정도면 되겠다는 판단이 든다, 그 논리적 근거는 없다. 느낌이 나를 확신에 찬 신념으로 무장시킬 뿐이다. 지성은 논리적 언어로 설명력을 지닌다. 설명이 강해질수록 이해도는 높아지지만 확신에 찬 신념으로 가슴에 꽂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설명자 본인이 체험적으로 느낀 점을 설명문으로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예 설명할 느낌조차 없기 때문이다. 설명이 관계를 이해시키지만 설득은 관계를 뜨겁게 달군다. 설명이 (인과) 관계 안에서 꼬리를 물고 어떤 관계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설득은 관계 밖에서 뜨거운 연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설명하는 두뇌는 허공을 맴돌 때 설득하는 심장은 동공을 파고든다. “지성이 자신의 틀 안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성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것이 감성과 직감이다”(190쪽). 지성은 한계에 직면했을 때 한탄하지만 감성은 한계를 넘어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감탄과 경탄을 금지 못한다. 한계를 책상에서 논리적으로 넘으려는 지성은 일상에서 한계를 몸으로 넘으며 온몸으로 겪으려는 감성에 언제나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 

 

“감성은 언어를 넘어 언어와 기존의 개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지성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므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다”(189쪽). 감성으로 다가온 느낌은 언어화를 거부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느낌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냥 육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 나의 믿음과 신념을 부추긴다. 객관적 자료도 없고 논리적 검증도 없다. 그냥 저 사람 정도면 되겠다는 판단이 든다, 그 논리적 근거는 없다. 느낌이 나를 확신에 찬 신념으로 무장시킬 뿐이다. 지성은 논리적 언어로 설명력을 지닌다. 설명이 강해질수록 이해도는 높아지지만 확신에 찬 신념으로 가슴에 꽂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설명자 본인이 체험적으로 느낀 점을 설명문으로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예 설명할 느낌조차 없기 때문이다. 설명이 관계를 이해시키지만 설득은 관계를 뜨겁게 달군다. 설명이 (인과) 관계 안에서 꼬리를 물고 어떤 관계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설득은 관계 밖에서 뜨거운 연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설명하는 두뇌는 허공을 맴돌 때 설득하는 심장은 동공을 파고든다. “지성이 자신의 틀 안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성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것이 감성과 직감이다”(190쪽). 지성은 한계에 직면했을 때 한탄하지만 감성은 한계를 넘어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감탄과 경탄을 금지 못한다. 한계를 책상에서 논리적으로 넘으려는 지성은 일상에서 한계를 몸으로 넘으며 온몸으로 겪으려는 감성에 언제나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

 

 

“감성은 언어를 넘어 언어와 기존의 개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지성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므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다”(189쪽). 감성으로 다가온 느낌은 언어화를 거부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느낌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냥 육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 나의 믿음과 신념을 부추긴다. 객관적 자료도 없고 논리적 검증도 없다. 그냥 저 사람 정도면 되겠다는 판단이 든다, 그 논리적 근거는 없다. 느낌이 나를 확신에 찬 신념으로 무장시킬 뿐이다. 지성은 논리적 언어로 설명력을 지닌다. 설명이 강해질수록 이해도는 높아지지만 확신에 찬 신념으로 가슴에 꽂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설명자 본인이 체험적으로 느낀 점을 설명문으로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예 설명할 느낌조차 없기 때문이다. 설명이 관계를 이해시키지만 설득은 관계를 뜨겁게 달군다. 설명이 (인과) 관계 안에서 꼬리를 물고 어떤 관계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설득은 관계 밖에서 뜨거운 연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설명하는 두뇌는 허공을 맴돌 때 설득하는 심장은 동공을 파고든다. “지성이 자신의 틀 안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성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것이 감성과 직감이다”(190쪽). 지성은 한계에 직면했을 때 한탄하지만 감성은 한계를 넘어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감탄과 경탄을 금지 못한다. 한계를 책상에서 논리적으로 넘으려는 지성은 일상에서 한계를 몸으로 넘으며 온몸으로 겪으려는 감성에 언제나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

 

"“감성은 언어를 넘어 언어와 기존의 개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지성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므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다”(189쪽). 감성으로 다가온 느낌은 언어화를 거부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느낌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냥 육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 나의 믿음과 신념을 부추긴다. 객관적 자료도 없고 논리적 검증도 없다. 그냥 저 사람 정도면 되겠다는 판단이 든다, 그 논리적 근거는 없다. 느낌이 나를 확신에 찬 신념으로 무장시킬 뿐이다. 지성은 논리적 언어로 설명력을 지닌다. 설명이 강해질수록 이해도는 높아지지만 확신에 찬 신념으로 가슴에 꽂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설명자 본인이 체험적으로 느낀 점을 설명문으로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예 설명할 느낌조차 없기 때문이다. 설명이 관계를 이해시키지만 설득은 관계를 뜨겁게 달군다. 설명이 (인과) 관계 안에서 꼬리를 물고 어떤 관계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설득은 관계 밖에서 뜨거운 연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설명하는 두뇌는 허공을 맴돌 때 설득하는 심장은 동공을 파고든다. “지성이 자신의 틀 안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성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것이 감성과 직감이다”(190쪽). 지성은 한계에 직면했을 때 한탄하지만 감성은 한계를 넘어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감탄과 경탄을 금지 못한다. 한계를 책상에서 논리적으로 넘으려는 지성은 일상에서 한계를 몸으로 넘으며 온몸으로 겪으려는 감성에 언제나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  

 

 주관성(主觀性)을 넘어 간주관성(間主觀性)으로:

주관이 객관을 지배하지 않고 주관이 다른 주관을 만나 합의를 이룬다

 

"감정이나 감성보다 더 깊은 심연에 바로 주관성이 존재한다. 주관성은 지금까지 설명한 감각, 욕구, 지성, 감정 등 네 가지 수준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조율해낼 수 있다. 주관성에 도달한 사람은 주변의 감정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장의 무게중심을 잡고 나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객관적인 관찰능력은 사실 주관을 배제한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내 입장만 고수하지 않고 타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하며 편파적 의견을 넘어서려는 안간힘이다. 복잡한 관계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며 세상을 관조하는 능력이다. 객관적인 관찰 능력을 지닌 사람은 유머감각이 풍부하다고 한다. “유머란 보통 무언가를 믿고 그 세계 안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만들어진다. 무엇인가를 믿고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자신의 모습과 그런 모습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212쪽). 주관성의 깊이에 이른 사람은 몰입과 이완, 지성과 감성, 내부와 외부, 음지와 양지,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고 가면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각성과 촌철살인의 지혜를 몸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는 적재적소에서 다른 사람을 관찰하면서 언제 어떤 표현을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여유를 갖고 자신을 돌보게 할 수 있을지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 순간의 포착과 적확한 언어구사는 사람들에게 혀를 내두르는 촌철살인의 지혜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큰 깨달음의 미소를 전해준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현실로부터 일단 분리시킬 줄 안다. 유머는 행동의 필연성을 분리시켜 관찰하는 여유와 포기의 입장에서 탄생한다. 즉,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틈새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탄생하는 것이 바로 유머다”(213쪽). 유머가 있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도 여유만만하고 긴장 속에서도 한 템포 늦춰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틈새를 제공해주는 사람이다. 틈새를 통해 추임새를 넣어 줌으로써 힘든 삶 속에서도 미소를 잊지 않게 만들어준다. 

 

감정이나 감성보다 더 깊은 심연에 바로 주관성이 존재한다. 주관성은 지금까지 설명한 감각, 욕구, 지성, 감정 등 네 가지 수준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조율해낼 수 있다. 주관성에 도달한 사람은 주변의 감정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장의 무게중심을 잡고 나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객관적인 관찰능력은 사실 주관을 배제한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내 입장만 고수하지 않고 타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하며 편파적 의견을 넘어서려는 안간힘이다. 복잡한 관계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며 세상을 관조하는 능력이다. 객관적인 관찰 능력을 지닌 사람은 유머감각이 풍부하다고 한다. “유머란 보통 무언가를 믿고 그 세계 안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만들어진다. 무엇인가를 믿고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자신의 모습과 그런 모습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212쪽). 주관성의 깊이에 이른 사람은 몰입과 이완, 지성과 감성, 내부와 외부, 음지와 양지,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고 가면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각성과 촌철살인의 지혜를 몸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는 적재적소에서 다른 사람을 관찰하면서 언제 어떤 표현을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여유를 갖고 자신을 돌보게 할 수 있을지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 순간의 포착과 적확한 언어구사는 사람들에게 혀를 내두르는 촌철살인의 지혜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큰 깨달음의 미소를 전해준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현실로부터 일단 분리시킬 줄 안다. 유머는 행동의 필연성을 분리시켜 관찰하는 여유와 포기의 입장에서 탄생한다. 즉,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틈새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탄생하는 것이 바로 유머다”(213쪽). 유머가 있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도 여유만만하고 긴장 속에서도 한 템포 늦춰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틈새를 제공해주는 사람이다. 틈새를 통해 추임새를 넣어 줌으로써 힘든 삶 속에서도 미소를 잊지 않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의 교류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상대성을 이해한다”(224쪽). 주관성이 상대성을 이해한다는 말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자기 주관에 빠져 나와 다른 주관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주관은 독단이나 고집이다. 나의 주관이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장단점을 보유한 것처럼 나와 다른 주관의 고유한 특성과 다른 측면에서의 장단점이 있음을 인정할 때 주관은 독립된 주관이 아니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또는 간주관성에 비추어 주관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이런 점에서 주관성의 깊이는 혼자 파고들어간 자기주장의 깊이나 넘볼 수 없는 내공의 높이라기보다 다른 주관과 만나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한 합작품의 깊이다. 함께 깊이 파고든 이력이 솟아오른 경력의 높이인 셈이다. 주관의 깊이는 주인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전문성은 주관과 주관이 만나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진공관 속에서 혼자 외롭게 전문성을 연마한 결과 생긴 산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관적인 전문성은 또 다른 주관적인 전문성과 갈등과 충돌, 대화와 합의를 통해 형성된 간주관적(間主觀的) 합의의 산물이다. 주관은 주인의 관점이지만 주인이라는 인간이 혼자 외롭게 쌓아 올린 독립적 성과가 아니라 다른 주관과 만나서 합작한 사회적 산물이다. 하지만 그런 주관도 주관이 만나 만들어가는 간주관성도 환경과 무관하게 주관적으로 생길 수 없다. 주관을 둘러싼 다른 주관뿐만 아니라 주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력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이나 환경과 같은 비인간과의 부단한 네트워크의 산물이 바로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이다.

 

“자신의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의 교류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상대성을 이해한다”(224쪽). 주관성이 상대성을 이해한다는 말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자기 주관에 빠져 나와 다른 주관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주관은 독단이나 고집이다. 나의 주관이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장단점을 보유한 것처럼 나와 다른 주관의 고유한 특성과 다른 측면에서의 장단점이 있음을 인정할 때 주관은 독립된 주관이 아니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또는 간주관성에 비추어 주관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이런 점에서 주관성의 깊이는 혼자 파고들어간 자기주장의 깊이나 넘볼 수 없는 내공의 높이라기보다 다른 주관과 만나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한 합작품의 깊이다. 함께 깊이 파고든 이력이 솟아오른 경력의 높이인 셈이다. 주관의 깊이는 주인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전문성은 주관과 주관이 만나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진공관 속에서 혼자 외롭게 전문성을 연마한 결과 생긴 산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관적인 전문성은 또 다른 주관적인 전문성과 갈등과 충돌, 대화와 합의를 통해 형성된 간주관적(間主觀的) 합의의 산물이다. 주관은 주인의 관점이지만 주인이라는 인간이 혼자 외롭게 쌓아 올린 독립적 성과가 아니라 다른 주관과 만나서 합작한 사회적 산물이다. 하지만 그런 주관도 주관이 만나 만들어가는 간주관성도 환경과 무관하게 주관적으로 생길 수 없다. 주관을 둘러싼 다른 주관뿐만 아니라 주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력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이나 환경과 같은 비인간과의 부단한 네트워크의 산물이 바로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이다. 

 

“자신의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의 교류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상대성을 이해한다”(224쪽). 주관성이 상대성을 이해한다는 말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자기 주관에 빠져 나와 다른 주관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주관은 독단이나 고집이다. 나의 주관이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장단점을 보유한 것처럼 나와 다른 주관의 고유한 특성과 다른 측면에서의 장단점이 있음을 인정할 때 주관은 독립된 주관이 아니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또는 간주관성에 비추어 주관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이런 점에서 주관성의 깊이는 혼자 파고들어간 자기주장의 깊이나 넘볼 수 없는 내공의 높이라기보다 다른 주관과 만나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한 합작품의 깊이다. 함께 깊이 파고든 이력이 솟아오른 경력의 높이인 셈이다. 주관의 깊이는 주인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전문성은 주관과 주관이 만나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진공관 속에서 혼자 외롭게 전문성을 연마한 결과 생긴 산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관적인 전문성은 또 다른 주관적인 전문성과 갈등과 충돌, 대화와 합의를 통해 형성된 간주관적(間主觀的) 합의의 산물이다. 주관은 주인의 관점이지만 주인이라는 인간이 혼자 외롭게 쌓아 올린 독립적 성과가 아니라 다른 주관과 만나서 합작한 사회적 산물이다. 하지만 그런 주관도 주관이 만나 만들어가는 간주관성도 환경과 무관하게 주관적으로 생길 수 없다. 주관을 둘러싼 다른 주관뿐만 아니라 주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력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이나 환경과 같은 비인간과의 부단한 네트워크의 산물이 바로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이다. 

 

“자신의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의 교류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상대성을 이해한다”(224쪽). 주관성이 상대성을 이해한다는 말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자기 주관에 빠져 나와 다른 주관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주관은 독단이나 고집이다. 나의 주관이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장단점을 보유한 것처럼 나와 다른 주관의 고유한 특성과 다른 측면에서의 장단점이 있음을 인정할 때 주관은 독립된 주관이 아니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또는 간주관성에 비추어 주관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이런 점에서 주관성의 깊이는 혼자 파고들어간 자기주장의 깊이나 넘볼 수 없는 내공의 높이라기보다 다른 주관과 만나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한 합작품의 깊이다. 함께 깊이 파고든 이력이 솟아오른 경력의 높이인 셈이다. 주관의 깊이는 주인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전문성은 주관과 주관이 만나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진공관 속에서 혼자 외롭게 전문성을 연마한 결과 생긴 산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관적인 전문성은 또 다른 주관적인 전문성과 갈등과 충돌, 대화와 합의를 통해 형성된 간주관적(間主觀的) 합의의 산물이다. 주관은 주인의 관점이지만 주인이라는 인간이 혼자 외롭게 쌓아 올린 독립적 성과가 아니라 다른 주관과 만나서 합작한 사회적 산물이다. 하지만 그런 주관도 주관이 만나 만들어가는 간주관성도 환경과 무관하게 주관적으로 생길 수 없다. 주관을 둘러싼 다른 주관뿐만 아니라 주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력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이나 환경과 같은 비인간과의 부단한 네트워크의 산물이 바로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이다. 

 

 

이 책은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한 개인의 능력이 혁명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놀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똑같은 능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해석 능력과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능력으로 부각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놓았다. 나아가 지성과 감성을 구분하고 언어화시킬 수 없는 감성이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작동하는 지성 간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있다. 나아가 감성이 이성을 움직이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 양자를 포섭하는 주관성이 사람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 혁명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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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제 인생책 중 하나예요! 평점10점 | j*****5 | 2020.04.07 리뷰제목
사람은 달라질 수 있을까?이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YES!"이다.<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은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심리학적으로 풀어서 쓴 책이다.현재의 심리학은 주로 유아기에서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에 걸친 심리발달을 주로 집중해서 연구한다.그래서 보통 30살 쯤 되면 심리발달이 완성된다고 학계는 말한다.저자는 30살 이후, 즉 심리발달이 끝난 후
리뷰제목

사람은 달라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YES!"이다.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은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심리학적으로 풀어서 쓴 책이다.

현재의 심리학은 주로 유아기에서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에 걸친 심리발달을 주로 집중해서 연구한다.

그래서 보통 30살 쯤 되면 심리발달이 완성된다고 학계는 말한다.

저자는 30살 이후, 즉 심리발달이 끝난 후에도 사람은 심리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가?

심리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를 했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도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그랬었다.

"엄마"가 되어서야 나는 내 자신과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고 있는 중이다.

나를 알아가는 중이고, 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엄마라는 자리가 자기 성장에 있어서 최고라고 하나 보다.

원치 않지만 수시로 나의 내면과 마주치게 하니까.

내 안에 있는 내면 아이와 마주하는 건 정말 괴롭고 힘든 일이다.

특히 나에게 있어서 작년 한 해는 성장통의 한 해였다.

그 지옥같은 성장통을 겪으면서 내면의 아이를 마주하고 나니 이제는 조금씩 나란 사람에 대해 알 것 같다.

아니, 알아가고 있다. 내 성장은 진행형이니까.

현대 사회에서 스트레스는 이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자,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주로 스트레스는 나를 둘러싼 외부의 상황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로 스트레스는 어떠한 상황을 해석하는 주관적인 나의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재우려고 하는데 안 잔다고 가정하자.

나는 오늘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다. 이런 마음이 있다면 이 상황이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피곤하지 않은 날에는 책도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자장가까지 불러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의해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려면 기존의 해석이 아닌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해석은 현실을 수용하고 내 능력밖에 일이라는 걸 인정할 때 발생한다.

작년에 아이의 목에 종양이 생겼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종양이었고, 대학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 후 수술 날짜를 잡았다.

처음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라고 원망도 하며 슬픔에 빠졌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도하며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음을 깨닫고 내려놓자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

이 때 내가 얻은 새로운 해석은 보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했고, 건강한 신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불어 넣어 주었다.

성인의 마음을 성장시키는 3가지 능력이 있는데 바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 <절망할 수 있는 능력>, <순수성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이 3가지 능력은 이미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갖춰져 있고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결점이나 단점을 인정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비난하고 책망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점이나 단점을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는 것이 결점이나 실패를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결점을 인정하게 만든다.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살아가고 있진 않았나?

온전한 나로써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루한 자신은 외부의 영향을 받는 자신이지만,

새로운 자신은 내부로부터의 확립되는 자신이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그저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것.

"부모"가 된다면 한 번 쯤은 통과해야 할 과정인 것 같다.

아이에게 화가 나는 그 지점, 그 상황이 나의 내면 아이가 상처받은 지점이다.

잘 생각해보면 그 화의 근원은 무엇인지 알아갈 수 있다.

이 과정이 정말 많이 아프고 힘들다.

그리고 일회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진행형이고 내 마음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독하게 아픈 첫 과정을 통과하면 좀 더 다음에는 수월해짐을 느낀다.

이젠 마음 속 화나 분노가 일어나면 "아, 이 상처가 건드려져서 내가 힘들구나."라고 생각한다.

바로 화 나게 만든 상황 탓이 아닌 "본인 내면의 문제"라는 걸 직시하게 된다.

그래서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운명은 정해져 있는 객관적인 것이지만, 일상에서 선택을 해나가는 건 우리의 주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주어진 운명을 우리의 의지로 바꿔나가는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주어진 운명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그 속에서도 변화시켜 나가려고 노력할 것인가?

순전히 당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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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k*******2 | 2020.04.05 리뷰제목
세상에는 나 자신이 달라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그러나 반드시 달라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도 필요허다.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잘 달라지지 않으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보다시피 몇 년 전 담X 값을 두배로 올리면 금연이 당연히 일어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왜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걸까, 그 질문에 대해서 심리 전문가이자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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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나 자신이 달라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그러나 반드시 달라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도 필요허다.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잘 달라지지 않으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보다시피 몇 년 전 담X 값을 두배로 올리면 금연이 당연히 일어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왜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걸까, 그 질문에 대해서 심리 전문가이자 ,정신의학자 다카하시 가즈미의 시선으로 옮겨볼 필요가 있었다.




즉 저자는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먼저 달라질 명분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인간의 뇌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생각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인다 해도 관서의 법칙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그럴 때 필요한 것이 자신의 행동이나 습관의 매커니즘, 뇌의 다양한 행동 기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즉 잉간은 생각 뿐만 아니라 욕구와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매순간 많은 것을 간직하고 살아오고 있었다.욕구와 욕망,감정과 감성, 감각과 지성이 바로 나 자신의 행동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가지만 바꾼다 해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다.즉 주변에 누가 잔소리를 해도 상대방이 바뀌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이 그 환경에 대해서 적응해왔기 때문이다.그 환경을 바꾸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바뀌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들이다.


즉 이제는 내가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먼저 타인의 행동이 갑자기 바뀐 것을 관찰하면 그 안에 답이 나올 수 있다.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내가 바뀌려면 환경을 바꿔야 한다. 장소를 바꾸고,시간을 바고,상황을 바꾸고, 나 자신은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나자신의 지적인 수준이나 감성은 나의 행동 변화의 여러가지 변수였다.그 하나하나 바꿔 나가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지 못한다면, 기억과 기록을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매일 일기를 쓰고,하루 하루 점검하고, 명상을 하는 것은 내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내 몸이 이상하게 될 경우에도 나 자신은 바뀔 수 있지만,그럴 경우 나는 바뀌지만, 반드시 부작용이 같이 따라올 수 있다.지혜로운 변화, 나의 영향력을 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퍼트리는 방법이 이 책에 소개되고 있어서, 나 자신의 문제점과 습관들을 하나 하나 찾아 볼 수 있었다.즉 내가 바뀌어야 타인도 바뀌고, 타인이 바뀌면 지역이 바뀌고, 그러면 세사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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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수 있다 평점10점 | c*****2 | 2020.04.03 리뷰제목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을 해온 저자는 성인이후의 변화 특히 발달/발전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발달심리학자가 성인기까지 발달하고 그 뒤로는 발달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견인데 반해, 저자는 매슬로와 같은 의견으로 성인기 후에도 세련되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인정하지만 벗어 날 수 있고, 절망을 느끼고 초월하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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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을 해온 저자는 성인이후의 변화 특히 발달/발전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발달심리학자가 성인기까지 발달하고 그 뒤로는 발달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견인데 반해, 저자는 매슬로와 같은 의견으로 성인기 후에도 세련되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인정하지만 벗어 날 수 있고, 절망을 느끼고 초월하며, 새로운 순수한 마음을 따라가면 변화할 수 있다.

 

인간의 발달이란, 자신의 내부에서 좀 더 자기다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스트레스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같은 현상을 다르게 해석한다.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

새로운 사건 ? 스트레스 또는 즐거움

정신발달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자아 정체성이다. 20대에 대부분 완성된다. 자각과 수용.

보통의 성인은 자기 자신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매슬로

성인의 해석, 객관적

성인 ? 비슷한 가치관(성인의 가치관)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공통된 해석을 가지고 있지만 세밀한 부분에서는 미묘하게 다른 해석을 한다.

좁은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

성인의 마음의 터닝 포인트.

성인의 마음의 크게 바뀌고 넓어지고 깊어져가는 모습 ? 변화

변화의 힘은 마음의 내부에 존재한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 자신을 속일 수 있는가? 절망(절망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새로운 자신에 대한 감수성(순수성을 느낄 수 있는 능려)이 작용한다. 자신의 마음에 순수하게 맞서기만 하면 된다.

담담히 자신에게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마음은 정말 대단한 존재이다. 마음이 사건을 해석한다.

포기는 마음의 자유를 준다.

마음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이 책을 마음의 바이블로 추천한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눈은 빛이 나기 시작한다. 말이 많아 지기도 달변이 되기도 하고 표정이 살아나기도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신의 가능성은 정말 대단하다.

바뀌지 않는 건 앞으로도 바뀌지 않지요? 어쩔 수 없는 것은 앞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바뀌었을 때 그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포기했다. 성장과 도약.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세상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나는 항상 나라는 자신감.

다른 관점으로 관찰.

고루한 해석에 대한 결별.

사용하는 말이 바뀌면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의 말투와 표정도 바뀐다.

어떻게든 해봐야 돼.  VS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배치의 전환. 정신의 물질화 

, 신경의 기능과 마음 

마음속의 작은 사건을 계기로 인품이 완전히 바뀌었다.

신체는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이지만 주관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사람이 바뀔 수 있고 사람이 바뀐다면 만들어내는 결과물, 인생도 바뀔 수 있다.

설명(가능한 객관적) vs 해석(주관적인 조작)

고정된 성인의 해석

플라세보 ? 마음의 메커니즘. 기대와 해석.

다른 사람보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으며 자신감과 확신에 차있다.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크게 꽃피우고 자기 실현에 성공, 인생을 즐기고 있다.

마음이 죽음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감과 확신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자신의 재능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성장을 저해할 뿐 성인의 해석을 초월해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는데 평범한 성인 이상의 특별한 재능은 필요하지 않다.

마음의 충동.

질병의 수용. 자세의 재구축

고루한 자세에서 새로운 자세가 탄생할 때, 그 중개역할을 하는 것은 늘 자유로운 마음의 작용이다. 사람의 마음은 늘 자유롭게 움직인다.

마음에 존재하는 자기 발전 체계는 고루한 해석을 파괴하고 새로운 해석을 낳는 능력이다. 성인기 까지 발달이 이루어 지고 세련된 형태로 완성된다. 이 메커니즘을 자각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낯섬과 새로움을 밀어내지 않는 마음의 메커니즘)

자신을 파괴하고 지성의 층을 깊이 분석해 감정의 층을 지나 마음의 깊은 층에 존재하며 항상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주관성의 층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나만의 관점을 찾는 방법) 마음의 계층 : 감각 ? 욕구 ? 지성 - 감정/감성 - 주관성(자아)

성인은 평소에 주로 지성층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운명은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나의 인생을 결정하며, 나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나의 희망을 파괴하고 나의 자유를 제한한다. 나의 의지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자신을 바꿀 수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우리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객관성이다. 나의 운명이다. 선택의 자유도 있다.

분명히 사람은 바뀔 수 있다.

나의 의지가 없으면 신체의 복잡한 메커니즘은 발생하지 않는다. 주관성의 통제아래 있다.

의지는 운명을 지배하여 그 것을 움직인다.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포기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는 자신을 좋아하는 쪽으로 바꿔가기 시작한다.

절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마지막에 초월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아직 이번 생은 틀리지 않았어!”

우리 모두 바꿔봐요~^^

이 리뷰는 문화충전200% 서평 이벤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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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평점10점 | s*****0 | 2020.04.02 리뷰제목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읽는 순간 나는 한번 더 속아보기로 했다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 있을까? 사람은 왜 달라지기 어려울까? 나자신의 변화를 갈망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실패도 맛보았을거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여러번의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항상 희망은 갖게 되고, 실망하고 를 반복하다 보니 사람은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 책의 제목은 다시 한번 희망을 갖
리뷰제목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읽는 순간 나는 한번 더 속아보기로 했다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 있을까? 사람은 왜 달라지기 어려울까?

나자신의 변화를 갈망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실패도 맛보았을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번의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항상 희망은 갖게 되고, 실망하고 를 반복하다 보니 사람은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 책의 제목은 다시 한번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이 책에서는 개인이 달라지게 되는,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들과 그 과정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평생동안 크게 바뀌지않는다. 변화가 생긴다해도 최소 몇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라는 사실을 전제 하에 여러명의 일화를 보여주었다.

 

최근 나는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법을 몸 소 경험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현실을 부정하기 바빴고, 그 어쩔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의 스트레스 수치가 도저히 떨어지지 않을것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문제를 해석하는 눈이 달라져 결국엔 나를 괴롭히던 그 문제가 내 인생에 그만큼의 가치가 없다는것을 알게되었다.

 

나의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 책을 더 이해 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책을 통해 나의 경험, 그 과정을 글로 정리 할 수 있다는게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처럼 문제를 받아들이는 데에 어떠한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장을 통해 나 자신이 바뀔 수 있다는것을 이 책에서 알게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글쓴이는 20대 에게는 아직 마음의 성장기 이기 때문에 변화를 받아들이는데에 능숙하지 않아도된다, 30대 에게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라는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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