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참 염세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고. 개인적으로 '부유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아니, 그대가 생각하는 경제 논리가 아니다. 나 그렇게 밝히는 놈 아니다. 이런 쓰고 보니 이것도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막 내려앉기 전에 한 번 더 바람에 쓸려 가거나 정착할 곳을 찾아 둥둥 떠다니'는 그런 감각적 느낌이다. 이래 봬도 섬세하다. 그런데 작가가 떡하니 써놓은 '수디르 벤카테시'라는 이름도 어려운 누군가의 문장 속에서 그 부유가 떠올랐다.
"우리는 답을 다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았다. 떠다녀야 했다." p5
잠깐 생각한다. 입 닥치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라던 '하인츠 라이트바우어'의 말에 어쩌면 '이왕이면'이라는 뒷말이 묵음처럼 생략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거면 열심히 제대로처럼. 먹을 거면 천천히 꼭꼭 빨리 씹어 먹어야 하는 우리 밥상머리처럼.
주연이던 조연이던 하다못해 그도 못되면 엑스트라던 어쨌거나 자기 일을 묵묵히 한다는 건 그 처지에선 이를 악물고 있지 않을까 싶은. 그렇게 이를 악무니까 페라리도 타는 거고. 그런 게 아닌 다음에야 피 말리면서 이를 악물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좀 더 여유와 풍족한 삶이 노력으로 얻어진 다음에야 폐라리 뚜껑을 열고 달릴 때 지나가는 놈이 던지는 '부모 잘 만나서'라는 비아냥도 개의치 않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살자라고 말하는 것 같은 작가의 말에 내가 너무 멀리 가버린 느낌이 들지만 난 페라리는 별로 타고 싶지 않긴 하다.
묘한 매력이 있다. 그게 작가인지 작가의 필력인지 그도 아니면 제프리의 인생에 자신의 인생을 빙의하는 서글픔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뭐 하나는 있긴 있다. 눈이 아파 그만 덮어야 하는데 계속 이러고 있다. 나나 작가나 제프리나 인생이 왠지 서글픈 버전뿐이라는 느낌이 짙어졌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할수록 하고 싶은 일과는 멀어질 뿐이었다." p51
머리칼이 쭈뼛 섰다. 늘 하고 싶은 하는 일을 하기 위해 '때려치우는 것'을 보면서 지는 일임을 알면서도 부러워했는데 작가의 현실 문장은 뼈 때렸다. 하고 싶은 일도 막상 생계라면 역시나 사표를 품고 해야 하나보다. 근데 먹고사는 일이 아닌 다음에야 그건 일이 아니라 취미일 뿐 아닌가? 도대체 어찌 살아야 하는지. 작가의 염세주의가 스멀스멀 옮겨 오는 듯하다.
"개인이 자아를 완성시키려 스스로의 신념을 조직에 걸었을 때의 이야기는 거의 모두 비극이다." p59
그다지 조직에 걸었다기 보다 자신의 신념을 꼿꼿하게 세우며 일하는 사람을 안다. 참 거시기한 사람이다. 본인이 얼마나 웃긴지 모른다. 혹시 아나? 설마 그럼 그건 정말 웃긴데.
"마음속에 자신만의 잉어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잉어는 지금 맡은 일일 수도, 평생을 걸쳐 이루고 싶은 목표일 수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픈 능력치일 수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사랑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그 잉어를 소중히 대하는 건 아니다. 잉어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하루에 서너 번 먹이를 주면 전부인 그걸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람. 중요한 건 자기 연못 속의 자기 잉어고 그 잉어를 소중히 대하는 자기 자신의 정신이다. 그런 걸 조금씩 깨닫게 됐다." p97
제길. 와하하 웃어버린 카투사와 잉어의 이야기는 카투사도 잉어도 아닌 내 이야기 아닌가! 한 명으로 안 되는 일이 그에게 작동되는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해내지 못하는 자질의 문제로 보는 불평등한 시선을 가진 부류에 속한다. 내가 그럴 거다. 아마도. 그래서 아들에게 자꾸 미안해지는 일을 만든다. 그게 다 그놈의 잉어를 중요하게 보지 못하는 탓이겠지.
"돈을 내고 인사를 할 때 평소보다 허리를 조금 더 굽히게 되는 맛이었다." p108
TV에 나오는 유명 셰프들이 맛집이라고 떠벌려 가보면 입맛에 맞는 집은 별로 없다. 맛을 연마한 그들의 고급 진 입맛과 그냥 죽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의식쯤으로 배를 채우는 내 입맛과 같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의 맛집은 나의 맛집은 아니다. 근데 내 돈 내고 먹었는데 조금 더 허리를 굽혀야 하는 맛이라는 작가의 표현이 얼마나 쌈빡한지. 그런 일이 부산 초량동 고려 반점에서 일어난다 하니 부산에 가게 되면 허리 한번 굽혀 보려 한다.
어지럽다. 작가가 점입가경이라 한 도심의 곳곳은 사실 내 관심 밖의 공간이고 더더구나 그 안에 있는 20대와 30대의 생각을 공유하려 애쓰는 만큼 멀어지는 듯하다. 게다가 작가가 말하는 곳들 단 한곳도 알지 못한다. 이게 단순히 인스타그램을 안 해서라는 말로 합리화가 될까? 작가는 또 어떻고. 이 사람이 책 만드는 에디터인지 도시 재생 활동가인지 헷갈린다. 놀라운 건 도시의 흥망성쇠를 예측하고 있다. 참으로 점입가경이다. 용문동, 대흥동, 신수동, 청량리가 뜰 거라고? 난 청량리에서 5분 거리에서 일한 지 4년이 넘었다. 힙은 무슨. 물론 작가가 헛다리라고 반성도 했다. 무릎은 꿇었나 모르겠다.
"어른이 되는 건 밤의 세계를 떠나 낮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p263
어른! 늘 고민을 한 움큼씩 던져주는 저 정체성은 어른이 되고 싶었던 10대로부터 어른이 되길 부정하던 30대를 지나 이젠 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형식적 수용으로 포장하고 있는 50대에 이르러서야 애초에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꼬나 통찰력은 있는 듯하다. 그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낮의 세계에 허비하고 있지만 정작 존재의 뿌리는 밤의 세계에 두고 있으니 아직은 어른이 되지 않았음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는 일도 많은데 어른까지 돼야 하는 건 참 피곤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를 떠올리면 회색이라든지 영화 '비열한 거리'를 떠올릴 만큼 삭막하고 적막한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한강이 뷰포인트였던 한남동 산꼭대기(예전엔 달동네라고 불렸다.)에서 나고 자라다 이주 정책으로 떠밀리듯 위성도시로 밀려났다. 몇 해 이 도시 저 도시로 부유하다가 다시 그 근처의 강동과 광진, 동대문을 전전하고 있다. 나고 자라는 동안 시티라이프를 비자발적 고집하고 있는데 실은 작가처럼 그다지 적응각은 나오지 않는다. 시골의 기준도 모르면서 그곳을 꿈꾼다.
도시에 대한 희로애락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말할 순 없지만 도시에 대한 깊이가 느껴진다. 어쩌면 건축가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3부작의 연장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뭐 개인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아무튼 에디터던 편집자던 책 만드는 사람에게서 이렇게 도시의 다채로운 맛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재미나게 읽었다. 근데 이 정도면 주인공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