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의미인데요..
그러나 우리는 유독 '일본'을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하더라구요..
이런 모습이 결코 좋은 '현상'만은 아닙니다..
이미 그러다가 '큰코'를 다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임진왜란'때지요..
당시 우리나라는 200년동안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전쟁'이 없었고, '평화'에 길들여 있는 순간..
늘 깔보던 야만족인 '왜'는 오랜 '전란'을 통일하고
'대륙'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요..
그러나 '조선'의 '신하'들은 그동안 '조공'을 바치던
'왜'가 감히 '전쟁'을 일으킬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던 것이지요
물론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했고
'징비록'을 쓴 '류성룡'도 역시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지요.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말 그대로 '반대'를 위한 '반대'...ㅠㅠ
'국익'이 우선이어야 할텐데..
상대파가 '주장'한것은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이..
그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말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킬것인지 확인하려 간
두 '통신사'는 하필 '라이벌'파였고
서로 '선조'에게 다른 '의견'을 내는데요..
'카산드라'증후군처럼, '사람'들은 '나쁜소식'보다는 '좋은소식'을 원했고
결국 '조선'은 '파멸'의 길로 향합니다.
'조선'에서 가장 어리석은 왕이라고 하면 보통 '선조'와 '인조'를 말합니다
둘다 '적통'이 아니였는데 말입니다
'선조'는 최초의 '방계'였고, '인조'는 '반정'으로 왕이 되었고
그렇다보니, '정치'를 잘하기보단, 자신들의 '앞길'만 생각하였고
이 '자리'를 빼앗길지만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둘다 '아들'들을 '적'으로 생각했고..
'신하'들을 믿지 못했다는 점이 같았던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참...아무리 뛰어난 '명신'들이 있어도
'왕'이 어리석으면 소용이 없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한일들..
'류성룡'이 그렇게 뒷수습을 했음에도
'간신'들은 '전쟁'중에도 그를 공격합니다.
'간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욕'말고는 '생각'이 없는거 같아요
'나라'의 앞길이 어떻게 되든
자신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고 생각했는지..
마치 '이완용'처럼 말입니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피로 쓴 7년의 지옥'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상황을 기록한 작품인데요.
참..아이러니한게 ..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잊혀진 작품이엿고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기록'인데 잊어버렸고 말이지요
그래서 '임진왜란'이후 또 다른 '치욕'의 '역사'를 만난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그래서 '징비록'을 읽으면서 다신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화'에 더욱 '전쟁'을 대비해야되며..
'지난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는 말을 되새겨야 함을
징비록,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관한 사료들 중에 가장 생생한 기록이 담긴 책이다.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 여러 면들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임진왜란을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선, 무능한 선조가 서인 황윤길의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적극 대처 주장을 물리치고, 동인 김성일의 말을 듣고 안일한 대처를 한 것이 큰 화를 불렀다. 그러나 류성룡과 이순신이라는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고, 많은 의병들도 일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류성룡이 기록한 임진왜란의 전개와 그 안에 담긴 당시의 분위기들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선조는 항상 자기의 자리와 안위만을 생각하였고 간신들의 말에 휘둘리기 십상이었다. 우리가 잘알고 있듯이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을 압송하여 가두어 고문하였다. 류성룡은 선조가 피란하여 조선을 버리고 중국에 의탁하려고 할 때, 임금이 나라를 버리면 인심이 와해될 것을 알고 그것을 막는 등 지혜로운 선택을 한 충신이었으나, 류성룡 또한 마지막에 사사로운 일로 억울하게 자리에서 물러가 낙향하기도 했다. 선조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징비’란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징비록을 통해 배워야 할 점은 경제, 안보, 외교, 국방 여러 모든 면에서 면밀히 살피고 나라를 든든히 지켜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가 신음하고 있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이어 대한민국이 코로나 확진자가 2위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과 인접한 홍콩과 대만은 선제조치를 잘 취하여 확진자도 적고 사망자도 적다. 몽골 또한 중국과 인접해있으나 철저한 선제조치를 통해 확진자가 외국인 1명이다.
코로나 초기 대응을 볼 때, 현 정권의 지나친 낙관과 섣부른 방심이 마치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동인 김성일의 말을 듣고 안일한 대처를 한 것이 큰 화를 불렀던 것과 같다. 결국 일본은 쳐들어와서 무방비의 조선을 휘집어놓았고, 코로나바이러스도 지나친 낙관으로 대처하던 대한민국을 휘집어놓았다.
2월 25일 기사에는 중국인 유학생 관리비에만 42억을 책정했으며, 3월 9일 기사에는 WHO에 300만 달러(약 36억)를 기부했다.
(대통령, 3월 13일)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 (국무총리, 3월 13일)"이런 데는 마스크 안 껴도 돼요.",,, 거기에 코로나 19 첫 사망자가 나온 날, 대통령 부부가 영화 '기생충' 제작진에게 짜파구리 오찬을 헌정하고 파안대소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76만의 국민청원과 전문가집단인 의사협회, 감염협회 등의 거듭된 권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무증상 바이러스 고위험군인 중국인 입국금지를 하지 않고 있다. 그 동안 국민과 의료진이 써야 할 충분한 양의 수많은 마스크와 방호복들이 또한 중국으로 다 건너가버렸다.
거기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고위 당정청협의회 결과를 브리핑하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대책으로 '대구·경북 최대 봉쇄조치'를 언급했었다. 정부가 지금까지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지금 와서 마치 모든 전파 원인이 대구·경북에 있는 듯, 정부책임을 떠넘기는 듯 하는 ‘프레임’에 분노를 느꼈다. 중국은 왜 안 막고 있으면서 대구경북을 막으라는 말이 나오는지 대구시민으로써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홍 수석대변인은 이 일로 물러났지만, 집권 여당 수석대변인의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외국인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은 이번 우한 코로나 사태로 다른 국가들이 중국인 출입금지 하는 것에 대해 이해한다고 밝힌 바 있다. 중국은 모든 외국인 출입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문 정권은 중국에 대해서는 굴종적인 모습을 연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인 출입금지 한 것에 대해 분노와 실망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인은 자기 돈으로 검사, 치료 받는 반면에 외국인은 호텔 등 무료로 검사, 치료,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다. 감염학회장은 전세계 각국을 망라하고 외국인이 일부로 치료받으러 온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인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정부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한 때, 폐쇄적이고 거짓말을 일삼는 신천지에게 화살을 돌아가더니, 그들은 모든 것을 속이고 은폐하면서 당국의 방역에 비협조적인 자세를 일관되게 보여왔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구상권이나 강제력 행사는 매우 합당한 처사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교회에 모든 화살을 돌리고 있다. 이단 신천지와 달리 한국 교회는 코로나 사태가 확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방역 당국의 지침에 따라 주일예배를 최소화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모바일예배나 가정예배로 대치하고 각종 집회와 활동을 중단하고 교회 출입을 금지하는 등 코로나가 확산 되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모바일예배와 가정예배로 드리도록 전국교회에 공지한 것은 정부의 강압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코로나 확산을 막고자 하는 자발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주일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방역당국의 지침에 따라 일반사회 기관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면서 교회가 금번 코로나의 확산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왔다(손소독제 배치, 체열 확인, 외부 방문자 통제, 교회 다중 시설의 방역, 공동 식사의 제한, 보건 마스크 착용, 2m 거리 유지 등 솔선수범해오고 있다). 그 결과로 전국 교회 가운데 확진자가 나온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부나 언론은 코로나 확산의 책임과 위험이 마치 한국교회가 주일에 예배를 드려 발생한 것 마냥 호도하면서 예배를 범죄시하고 있으며, 한국교회가 코로나 확산을 막는 일에 관심 없고 헌금에만 집착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조기 종식을 위해 적극 협조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정세균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통해 국민의 국익을 위한다면서 ‘교회폐쇄, 예배금지, 구상권 청구’ 등으로 위협하고 한국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의사협회의 권고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대응하여, 조기 진압에 실패한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은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정신적, 인명 피해에 대해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세계가 중국에 구상권을 청구하겠다는 분위기 속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예방수칙을 어기고 드린 예배로 인해 감염되면 교회에 비용을 청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교회 감염은 교회 밖에서 감염되어 들어오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근본적 방역 조치를 하지 않은 정부와 지자체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유독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교회 예배에만 강행이라는 표현을 쓰고, 매일 사람들이 모여드는 기업, 카페 등에는 강행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면서, 연일 교회를 비방하고 때리고 있다. 정부는 위협과 무례한 언동을 즉시 중단하고 한국교회에 사과해야 한다. 교회는 국민의 적도 아니요, 정부의 반대세력도 아니다.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나라가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신앙 공동체이다.
현재 사람들로 가득한 전철이나 봄나들이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공원, 밀접하게 붙어있는 PC방이나 콜센터, 식당, 카페, 클럽 등 밀집 사업장들은 특별한 제재 없이 운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 정권은 공정과 형평을 잃은 행정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에 대해 모든 일차적인 책임은 정부와 방역 당국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감염학회장은 이제는 의료진들이 모두 지치고 있다며, 문 정권을 향하여 이제라도 중국인과 외국인의 입국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문 정권은 전문가와 국민들의 말을 무시하고, 연일 자화자찬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코로나 확산 사태의 위기를 극복한 것은 국민들의 힘이며, 문재인 정권이 자신들이 잘한 덕분이라며 자화자찬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의료진들은 지금도 부족한 마스크와 방호 물자를 가지고 혈투를 벌이고 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진들이 마스크 쌓아두고 싶어서 부족함을 느낀다는 망언을 했었다. 국민들 또한 마스크가 부족하여 마스크 5부제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의료체제 또한 박정희 대통령 때, 1977년 시작된 의료보험 도입으로 본격적 발전을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국민들이 보편적인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여건이 코로나 바이러스 극복의 토대가 되고 있다. 게다가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거치면서, 박근혜 대통령 때 감염병에 대한 방역 시스템도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국민들과 의료진들의 자벌적이면서 헌신적인 노력으로 현재의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무능한 선조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자화자찬하며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 나라의 충신인 이순신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의병들, 또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백성들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선조는 끝까지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며, 질투했다. 지금의 문 정권의 행태가 무능했던 선조와 닮았다는 생각은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
이 시대에 왜 갑자기 『징비록』인가.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싶었을까.
외교적 이유인지 모르지만 오래 끌어오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대법원 판결이 이제야 나왔다.
우리 대법원이 개인의 민사상 보상(배상) 문제는 여전히 남은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박정희 정부 때 대일청구권에 관한 양국의 합의에 따라 보상을 따로 논할 수 없다는 자국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보상은 양국의 정식 외교 통로를 통해 이미 합의했고, 일본은 더 이상의 청구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서 한일 외교가 초긴장 국면에 돌입한 것이다.
일본 아베 정부는 정치적, 외교적 차원에서 인정치 않고 경제 보복으로 맞섰다.
과거 식민지 정책에 따른 책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본 정부가 오히려 반성 없는 경제 보복을 강행하면서 우리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여기에 『징비록』 출판의 의의가 크다.
일본은 이웃 나라지만 '불편한 이웃'이다.
최근 일본과의 긴장이 계속됨에 따라 출판계는 『징비록』에 다시 주목함으로써 우리의 대일 시각을 고취해야 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징비록』은 임진왜란 7년에 대한 참상과 후세에 경계로 삼기 위해 쓴 '피의 기록'이다.
얼마 전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소설가 장강명은 “『징비록』은 정작 일본에서는 『조선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그 시대에 베스트셀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는 2000년대 이전까지는 잊혀진 책이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또한 김상욱 교수는 “도로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었는데 일본군이 부산에서 한양까지 20일 만에 진격했다. 백성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라고 당시의 두려움을 가늠하며 “니체의 말처럼, 『징비록』은 피로 쓰인 책이다. 단순히 읽기를 바라기보다 한 자 한 자, 기억되길 바란 책"이라고 정의했다.
『징비록』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순식간에 나라가 부수어지고, 임금은 살기 위해 도망가 굴욕적으로 무릎 꿇고, 백성들은 잔혹한 죽음을 당하고 굶주림을 참다못해 육신을 목구멍으로 넣는 일까지 발생한다.
류성룡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돌이키지 못할 비극이 발생했을 때 단지 ‘참담하다’ ‘분노를 참을 수 없다’라고 심정을 밝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엄 있는 군주가 아닌 불안에 벌벌 떨며 자리에 연연하는 왕, 역시 자기 이익을 채우는 길이 어디인가를 따라가는 관료들, 방위 사업을 귀찮아하는 백성들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으나, 그럼에도 비극의 가장 큰 책임은 최고 결정권자인 수장의 몫일 수밖에 없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기록한 연유는 과거를 회한하며 죄책감을 덜고자 함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류성룡이 지은 제목 그대로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징계하며 앞날을 도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외침의 역사는 비단 임진왜란뿐만이 아니나 정치, 경제, 군사의 중책을 맡아 나라의 요직에 앉았던 인물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에 『징비록』의 가치가 있다. 류성룡은 왜란이 일어난 원인과 전쟁의 실황, 군사 기무의 정리, 여러 사건의 논평 등을 기록하여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남겨 놓았고,
거기에 더해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문물제도까지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전란 발발 이후 7년간의 기승전결과, 그 안에서 오간 대화의 기록들은 전쟁문학의 고전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이 책에 따르면 전란 발발 이전 류성룡이 불길하게 느낀 조짐들은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첨단을 달리는 지금의 시대라도 무시하지 못할 그리고 무시해서는 안 될 자연적 암시는 존재한다. 그처럼 류성룡은 하늘의 기미들과 세간에서 드러나는 기미들을 보고 느꼈다.그중 하나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꾼 꿈이다.
경복궁 연추문에 불이 나 그가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누군가가 나타나 “다시 지을 때는 조금 높여 인근 산에 가까운 높이로 해야 한다”라고 말해 준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깨어난 류성룡은 이 불길한 꿈 이야기를 차마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다가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온 뒤에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그리하여 임금이 피란하고, 백성들은 처참히 목숨을 잃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가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고 여기며 자포자기하자, 류성룡은 지난 꿈을 언급하며 “꿈속에서 궁궐의 고쳐 지을 일을 의논하였으니 반드시 나라가 회복되리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류성룡은 평생토록 꾼 꿈 중에 징후를 경험한 바가 많았음을 스스로 밝힌 사실이 있다.
『징비록』 본문에 나와 있듯이 전쟁이 터지기 전 류성룡을 불길하게 만든 일들은 여럿이고 현실은 이미 끝나 버린 듯 비참했지만, 그날의 꿈은 분명 류성룡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현실을 기어이 헤쳐 낼 수 있게 한 중요한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류성룡의 해석처럼 왜적은 결국 물러갔다. 비록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우리는 조선 건국 후 태평한 세월이 200년 동안이나 계속되다보니 전쟁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왜적이 쳐들어오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온 국토가 넋을 잃고 말았다.
왜적은 파죽지세로 불과 열흘 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쳐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전략을 도모할 수가 없었고, 용감한 사람도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민심 또한 무너져 수습할 길이 없었으니 서울을 빼앗는 교묘한 계책이 달리 필요치 않았다.
한심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용궁 현감 우복룡이란 자는 자기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가다가 방어사에 예속된 군사 수백 명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간단 이유로 모두 죽여 버렸고, 순찰사 김수는 이 행동에 공이 있다고 임금에게 알려서 승진되도록 하였다.
파벌 싸움에 몰두하였던 지사 신잡은 나라를 잃고 임금이 피란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라를 수복할 계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께서는 마땅히 영변으로 떠나셔야 합니다. 그곳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간장이 없는 것이옵니다”라는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말을 하였다.
안타까운 죽음도 있다. 평복으로 바꿔 입고 도망다니는 다른 관원들과 달리, 경기 감사 심대는 위험한 곳을 피하지 않고 왜적이 알도록 먼저 공문을 띄워 알렸으며 내응할 사람도 모집하였다. 그러다 첩자의 말을 진짜로 믿고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참혹함을 겪은 부끄러운 우리의 지난날을 현실에 결부시켜 다시 살피면서, 앞날을 바로잡는 일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꼭 한번 읽기를 권한다.서애 류성룡이 이 책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근심하고 두려워하던 마음이 조금 진정된 뒤에 지난 일을 생각하면 황송하고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비록 볼만한 내용은 없지만 이로서나마 간절하게 충성을 바치려는 나의 뜻을 보이고 또 못난 신하가 나라의 은혜에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죄를 드러내고자 한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주자학, 양명학, 불교, 도교, 병학에 해박한 당대 최고 수재였다. 더구나 전란 당시 영의정이자 전쟁 수행을 책임지는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했기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황과 대궐의 사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었다.
일찍이 이순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정읍 현감이라는 미관말직에 있던 그를 전라 좌수사로 추천한 사람도 류성룡이었다.
류성룡은 이 책을 통해 참혹했던 전쟁의 경위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의 밀고 당기는 외교전, 전란으로 인한 백성의 피폐한 생활상, 전쟁에 나섰던 숱한 인물들의 처절한 활약상을 생생히 전한다.
여기다 민족적 재앙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왕조와 전쟁 중에도 당파싸움을 멈추지 않은 용렬한 벼슬아치들 등 당시 정치사회 상황까지 고발한다.불행하게도 류성룡의 가르침은 이후 전혀 계승되지 못했다.
‘징비(懲毖)’의 정신은 ‘역사를 잊지 말자’는 다짐에서 출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고, 적개심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전란이 끝난 뒤 류성룡은 임진왜란 같은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능력과 책임감, 비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각종 신병기와 병법 도입, 직업 군인제 창설, 무역 통상을 통한 경제 부흥 실시 등 조선의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가르침은 이후 전혀 계승되지 못했다. 불과 40년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또 한 번 국토가 쑥밭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징비록』의 교훈에 주목한 것은 오히려 일본으로, 그들은 조선보다 더 열심히 징비의 정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끌어냈다. 1712년에 일본에 간 통신사가 오사카 시장에서 『징비록』이 팔리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징비록』이 저술된 이후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이 이 책을 읽었다. 조선 시대 대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이 책을 여러 번 탐독하고 독후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꼽았다.
『징비록』은 두 차례의 왜란을 진두지휘하며 나라가 몰락해 가는 과정과 백성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던 류성룡이 낙향한 뒤에 기록한 내용이다.
류성룡은 왜란 당시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여 후대인들이 같은 잘못을 선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책은 청렴함으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전쟁을 진두지휘한 류성룡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류성룡은 어떤 인물인가’를 통해 설명하고, 또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와 ‘류성룡의 자서’를 통해 당시의 역사와 류성룡이 글을 남긴 목적을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어 『징비록』과 『녹후잡기』 본문을 싣고, 마지막에 조선시대의 관직과 관청을 정리해 이해가 쉽도록 했다. 왜란을 이겨 낸 걸출한 두 인물 가운데 재상 류성룡은 이제야 빛을 보고 있다.
전체 그림을 보며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하는 수장의 역할이 얼마만큼 중요한지에 대한 우리 대중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까닭이라 생각한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일본에서는 1695년에 교토에서 『조선징비록』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1880년 무렵 일본에 머물렀던 청나라 학자 양수경(楊守敬)이 『조선징비록』을 수집해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가면서 중국에서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조선징비록』은 모두 4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