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이란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살가죽의 겉면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살갗 아래’란, 이 가죽을 비롯하여 이것으로 에워싸인 것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독특한 이름을 가진 책은 담낭에서 콩팥 등 장기 및 기관, 더불어 혈액, 갑상샘에 이르는 사람의 몸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시(詩)적인 움직임과 그 독창성에 대한 기록”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일상적 언어인 ‘피부’가 아닌 ‘살갗’인 것은 이처럼 문학적 뉘앙스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 같다.
이 말을 신뢰하고 정말 순진하게 ‘시적(詩的)’이라는 문학적 향취를 쫓으려는 의지는 그리 쉽게 달성되지 않는다. 또한 독창성은 몸의 요소에 대한 15인의 영국 작가들의 글에서가 아니라 그 장기(기관) 자체가 지닌 오묘한 구조와 기능에 대한 수식어에 가깝다. 그렇다. 의학적 정보도 있으며 사람들의 보편적 자기연민의 흐느낌과 어울린 신변잡기도 있다. 이를테면 “이 세상에는 반드시 무언가 잘못되어야만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는 문장처럼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그로인한 고통이 발생되어서야 비로소 돌아보게 되는 질병적 관심에서 연원하는 단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발견하게 된다. 하찮음 속의 그 독특한 개성이 있음을.
뚱딴지같은 얘기가 되겠지만 별 볼 일없는 무미건조한 인간에서조차 흥미로운 독특함이 있듯이 평이한 글들의 모음에서도 또한 발견할 새로움이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책을 읽으며 더욱 이러한 자기 종용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러한 인내의 결실로서 134쪽에 이르러 지적 쾌락을 갈구하던 내 뇌를 보상해주는 글을 발견했으니 이 책의 미덕이라면 ‘문학적 독창성’이 가뭄에 콩 나듯 한다는 희소성의 가치일 것 같다. 그런데 그 몇 편의 글이 꽤나 대단하다는 것이다.
재미와 섬세함과 통찰력을 갖춘 작가라고 유명세를 지닌, 국내에는 『불복종(Disobedience)』이라는 소설 작품으로 알려진 ‘나오미 앨더먼(Naomi Alderman)’이 쓴 ‘인간 생물학이 하는 지독한 농담’으로서 「창자」에 대한 에세이는 그야말로 황홀한 시적 아름다움, 문학적 은유의 풍요로운 세계를 선사해준다.
“항문이 생식기에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사람이 겪는 노이로제의 모든 원인은 아니라 해도 확실히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슬쩍 인용하면서, 항문과 항문이 생산하는 배설물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테러’라고까지 비유하고, 이윽고 어떤 황홀경에 휩싸이든지 본질적으로 언제나 (창자는) 똥으로 가득 차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국 “항문과 항문이 만드는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한 생산물을 물리적 결정론과 관계뿐 아니라, 육체를 가진 모든 존재의 숙명인 ‘부패와 죽음’을 나타낸다.”며 창자와 배설과 인생의 그 신비로운 연계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는 ‘몸의 철학’, 세계 이해의 주체로서 신체가 발하는 지각에 대한 내 신념을 강화시켜주기까지 했다.
아마 이 풍성한 지적보상과 겨루는 글이라 할 수 있는데, 2016년 맨부커상 후보작이었던 『Serious Sweet(아주 달콤한)』를 쓴 스코틀랜드 소설가 ‘A. L. 케네디’의 「코」 는 읽는 내내 즐거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떤 의도를 담지 않고 사용하더라도 ‘냄새’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어떤 의미가 담긴다고 포문을 연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평가할 때는 어딘지 모르게 구린내가 난다거나 썩은 내가 진동한다.”고 표현한다. 이는 뇌가 “은유적인 역겨움도 진짜로 역겨운 자극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인간 진화와 관련하여 발달한 나쁜 냄새의 재빠른 인식의 중요성이 만들어낸 인간의 오래된 인식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명화와 냄새의 단절을 향한 노력의 역사, 게다가 상스럽고 추잡한 온갖 것들과 관계하는 코에 얽힌 이야기들은 재미와 철학적 사유의 선물들을 안겨준다.
“신경외과학에 관한 주제로 에세이를 쓸 수 있다는 미친 생각”을 하게 하는 바로 그 뇌의 오묘함을 의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맛깔나게 지펴낸 소설가 '필립 커(Philip Kerr)'가 쓴 「뇌」를 이야기하며 맺어야 할 것 같다. 아버지 조 케네디(Joe Kennedy)가 자기주장이 강하고 반항적인 딸이었던 로즈메리 케네디(존 F. 케네디의 여동생)에게 강제로 실행한 전두엽절제술의 야만성으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당시 지적으로 최상의 기반을 지닌 가문에서 조차 예외가 되지 않는 가부장제가 지닌 여성에 대한 폭력성의 단면이다. 수술 후 그녀가 말하지도 걷지도 변을 가리지도 못하는 두 살 박이로 퇴화했음은 굳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권력과 과학이 결합했을 때 발산하는 그 폭력성의 전형일 것이다.
1962년 발표된 ‘켄 키지(Ken Kesey)’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랜들 P. 맥머피’에게 행하던 수술이 바로 전두엽절제술이다. 수술 후 “불은 켜져 있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음을,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게에 진열해 놓은 마네킹 같았다.” 과학의 무모함과 야만성이다. 이 기술로 노벨의학상을 탄 사람도 있었으니 인간의 역사 또한 실로 아이러니와 무지의 역사, 오만의 역사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지금, 현재의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인양 떠드는 꼴들을 생각하면 어떤 모멸과 자괴감이 휩쓸고 지나간다. 요즘은 장비의 발달로 ‘전방 측두엽 절제술’이라 보다 구체적인 부위의 이름으로 수정해서 간질환자의 치료에 제법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짧은 리뷰로 마치려 했음에도 제법 긴 감상이 되고 말았다. 알지 못하는 것,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통절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몸, 인간 신체에 대한 각양의 해석과 정보, 사연을 엿듣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이 책은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학적 철학적 보상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정말 감질(疳疾)나는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만약 이와 같은 글을 의뢰 받는다면, 나는 콩팥에 대해 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콩팥을 주제로 글을 쓴 애니 프로이트(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증손녀이다)는 구약성서에 서른 번 이상 나오는 콩팥에 대해, ‘신성함과 감춰진 위치 때문에 내밀한 윤리와 감정적 충동이 자리하는 곳’이라고 멋있게, 그리고 아주 추상적으로 쓰고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콩팥은 어린 시절 내 삶을 완전히 지배했던 장기다. 내가 어느 시점부터 거기에 문제가 생겼는지도 몰랐다. 멀리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의사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각오하셔야 할 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분명하게 굿판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기도 했다. 한참 전에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그때는 내가 어쨌는지 모르고, 지금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안에 앉혀 놓았던 부모님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한다. 아니 고마워한다. 그리고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지만 괜찮아졌다. 아니, 괜찮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 병은 재발했다. 중학교 1학년 한참 친구들과 매일 농구를 하고, 다음 해에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전국단위체육대회(전국소년체전)에서 개막식에 선보일 매스게임 연습으로 수업도 단축시키는 와중에 그 병이 와 버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그 병이 오는지,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낱낱이 인지할 수 있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마루에 뻗어버리는 자식을 보고 부모님은 아뿔싸 싶어 병원에 데려갔고, 아마 예전과 똑 같은 진단명을 받아 들었을 것이다. 병원에 입원을 권하는 의사의 말을 나는 집요하게 부정했다. 매일 학교에 갔고, 매일 병원에 들렸다. 매일 주사를 맞고, 매일 소변을 받아 검사를 했다. 김치 한 조각을 먹지 못하고, 계란에도 소금을 치지 못했다. 어느 날 병원에 들렀다 집으로 갔는데 아무도 없는 집안의 냉장고를 열었을 때 시큼한 신 김치 냄새에 나도 몰래 꺼내 한 조각 입에 넣고는 눈물을 흘렸었다. 일년 여가 지나자 이제 그만 병원에 와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투병기는 끝났다. 그때는 신장병이라고 했고, 지금 다시 표현하자면 콩팥염. 그러나 그보다 더 정확한 병명은 나도 잘 모른다.
『살갗 아래』는 살갗 아래에 존재하는 우리 몸의 장기들에 대해 영국의 문인들이 하나씩 맡아 쓰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시적이고, 어떤 사람은 과학적이고, 어떤 사람은 어원을 따지고, 또 어떤 사람은 개인사를 쓴다. 개인의 경험을 쓴 글 중에서 ‘피’와 HIV에 관한 글은 감동적이고, ‘눈’에 관한 글에서는 백내장(cataract)의 어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그렇게 인상 깊지 않아도 한 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다루고 있는 장기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에게 귀란, 나에게 간이란, 나에게 눈이란, 나에게 코란, 나에게 폐란, 나에게 대장이란, 나에게 뇌란, 나에겐 자궁이란… 특히 나에게 콩팥이란…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완벽했다. 제목, 소재, 내용, 번역, 분량, 표지, 심지어 추천글까지도. 얕은 독서력이지만, 나로서는 어느 하나 흠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간만에 마음에 쏙드는 책을 만나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책 <살갗 아래>는 열다섯 명의 작가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신체 부위를 고찰하고 써내려간 글을 모아 엮은 작품이다. 신체라 하면 나는 머리와 팔다리, 몸통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떠오르는데, 이 책은 우리 몸 안에 있다지만 살면서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는 부위까지 이야기한다. 눈, 코, 귀는 그렇다치고 맹장, 담낭, 콩팥 등을 소재로 쓴 에세이라니! 참신하다.
작가들은 각 신체 부위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으며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작가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다. 피부 위의 상흔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 삶을 꿰뚫어 보고, 폐를 가득 채웠다 빠져나가는 숨을 이용해 시를 읽는다. 작가들에게 신체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거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다. 그래서 이 책 속 글들 또한 전부 아름답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는 과장이 아니게 되었다.
나만 알고 싶은 책이 있는가하면, 다른 이들과 함께 감상을 나누고 싶어 안달나는 책이 있다. 이 책은 후자다. 내가 독서모임에 들었다면, 회원들과 이 책을 같이 읽고 우리 버전의 <살갗 아래>를 만들어보고 싶다. 여기 열다섯 명의 작가들처럼 신체에 관한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고, 그것을 글로 공유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작업일 터. 지금 내 몸과 이 건강을 더욱 소중하고 감사히 여겨야겠다는 교훈도 남긴다.
살갗아래.
제목이 너무 독특해서 읽게 된 책.
일단 하드커버로 만들어진 책의 디자인이나 글씨에 새겨진 반짝이는 박지,
손에 착 감기는 사이즈에 부드러운 촉감까지
너무 맘에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에 관한 에세이.
에세이는 별로 즐기지 않는데 그 소재가 몸, 그것도 내장 기관들이라니...
대체 어떤 사람들이 몸을 소재로 에세이를 쓰는 걸까?
목차에 앞서서 글쓴이들의 캐리커쳐와 간단한 약력,
그들이 소재로 다룬 영역들이 소개되는 부분도 색달라서 좋았다.
방송인, 소설가, 시인, 화가, 게임디자이너, 배우, 장의사까지...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몸에 대한 단상들...
이 글은 모두 영국 BBC라디오 3사에서 방송된
"몸에 관한 이야기"시리즈에 나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것이라고 한다.
피부, 폐, 맹장, 귀, 피, 담낭, 간, 창자, 코, 눈, 콩팥, 감상샘, 대장, 뇌, 자궁...
평소에 공기마냥 몸에 그냥 달려 있는 기관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아프거나 병에 걸리지 않고서야 새삼스럽게 떠올리거나 생각하게 되지 않는 소재들...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할까... 너무 궁금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소설만이 재미있는 읽을 거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딱딱하고 교훈적일 것 같았던 에세이라는 장르도 이렇게 감각적이고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마치 피부가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의인화시켜서 표현해 내고 있는 글자들 속에서
마치 정말 살아있는 생물의 이야기를 듣는 것 마냥 재밌고, 매끄럽게 읽히는 글.
인생이, 삶이 거친 상흔을 남기듯이 피부에 새겨지는 흔적들...
그 흔적들이 치열한 삶을 살아온 증거인것처럼
그런 상흔속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말
어린시절 조그만 여드름 하나에도 깜짝 놀라고 소란을 피우던 이가
어느새 세월의 흐름에 굴복하고 순응해야하는 인생을 말하는 것 같다고 할까...
피부가 세월을 가장 잘 말해준다고 했던가?
요즘엔 현대의학의 힘을 빌어 나이를 세월을 벗어나는 이들도 있다고 하지만
오롯이 그 흔적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있다면...
거친 손등과 주름투성이 얼굴도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을 참 잘 살았다고 할 수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의 글이라서일까.
폐를 가리켜
"일상의 고됨을 내뱉고 아름다움을 다시 채우는 일"이라고 표현 할 수 있다는 것.
단순히 천식으로 고통받는 개인이 느꼈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과학이나 질병의 시각으로가 아니라 시의 풍성함으로
읽는 사람들이 제대로 숨쉴 수있게 해주는 게 시라고,
시의 호흡이 곧 폐의 호흡이라고 연결짓는 작가의 말이
본인이 천식환자이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쩌면 이토록 깊이있게 고찰하고 상상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지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시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은 호흡이라는 압력을 조절하는 시인의 통제력 안에 있다"는 찰스 올슨의 말을 인용하며 '압력'이 가해져 시가 노래가 된다는 생각이 맘에 든다는 작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귀지를 파는 상상, 그 과정을 하나하나 열겨하는 관찰력과 서술력.
'귀'라는 기관을 서술하면서 '헴릿이라는 작품을 떠올리고, 베토벤의 귀와 음악을, 가짜뉴스와 신생아의 청각에 이르기까지 달팽이관이 나오고, 거리의 소음에 피아노의 건반에 연결고리 없이(?) 연결되는 상념들....귀를 통해 듣는 소리, 추억,
이런게 에세이의 매력이었던가?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가는 글인것 마냥 보였는데 그게 나에서 우리가 되고, 세계가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온다.
인간의 신체가 그런것이 아닐까...
각각의 기관들이 다 모여 하나의 몸이 되고, 그 몸들이 모여 인류가 되고, 세상이 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어쩌면 이렇게 작가들 한명한명이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롭게 끌어 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과, 그게 논리적인 글이되었든, 추상적인 글이 되었든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읽힐 수 있냐 하는 것이었다. 번역이 아주 잘 된 덕분일까? (번역가님께 찬사를...)
그러고보니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들이, 오감이라는 것이, 모든 기관이...
다 삶과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아로새겨진 흔적들이야말로
냄새의 추억으로, 소리의 감각으로, 피부의 촉감으로, 겉으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내 안에 감추어진 것들까지도 한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의 생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이야기 거리가 한보따리 쯤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보고, 듣고, 먹고, 싸고, 아프고 즐거웠던 모든 추억들이 내 몸 여기저기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기에...
작가들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몸 속 이야기들을 읽고 나니
내 몸이 들려주는 또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부터 나도 내 살갗 아래 있는 기관들의 목소리들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들어볼까?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피부도 새로운 세포를 쏟아낸다. 우리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피부는 계속해서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내고 상처 입으면 낫는다. 흉터가 남더라도 피부는 상처를 낫게 하지만, 복숭아 같은 뺨은 더는 남지 않을 수도 있다. 더 많은 생을 살아갈수록 피부는 복숭아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더 오래 살아갈수록 이 세상과 당신을 가르는 이 탄력적인 장벽은 당신이 싸우고, 결국 이겨낸 전투의 흔적을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상흔들 속의 아름다음울 볼 수 있어야 한다.
- 피부
모든 글꼭지들이 우리의 몸에 대한 예민한 관찰 결과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그 중 몇몇은 관찰을 넘어 몸과 삶에 대한 감동적인 해석에 이르고 있다. 잠자리에서보다는, 흐린 날 허리를 세우고 앉아서 차근히 읽어내려가는게 좋을 책.
우리는 자신이 똥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창자는 똥을 만드는 법을 안다. 어떻게 죽을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몸이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알 필요는 없다는 것, 그것을 알면 된다.
- 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