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의 휴가는 케이트 쇼팽의 '각성'을 읽으며 보냈다. 처음 접하는 소설가. 그녀의 이름 앞에는 선구적 패미니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각성이라는 책을 읽게 된 동기 역시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그녀의 작품이 궁금해서였다. 여성의 부도덕한 일탈을 그리며 당시 여성상에 어긋나는 가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출간 후 독자와 비평가들의의 거센 항의와 비난을 받았던 작품. 병적이고 천박하며 공감할 수 없는 소설이기에 결국 절판되었다가 사후 6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로 조명되며 찬사를 받기 시작했던 '각성'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작품 속에는 작가 케이트 쇼팽의 삶과 정신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오스카 쇼팽과 결혼을 해 뉴올리언스에 정착해 살았던 그녀에게 정신적이고 예술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어린 시절 함께 보낸 외증조할머니였다. 삶의 문제에 솔직하고 용감하게 직면하라는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각성'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 에드나의 행보는 자신의 삶이 가정주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서 살아가는 것에 반기를 들고 자신을 포장했던 거짓 자이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에드나는 부유한 상류층 여성으로 여름 휴가를 가족과 함께 그랜드 아일에서 보낸다. 그곳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이곳을 찾은 아델 라티뇰 부인이 있다. 라티뇰 부인은 에드나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아직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확립되지 않았던 19세기 후반 미국의 남부 뉴올리언즈. 그 당시의 여성은 자식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남편을 공경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없애고 가정의 수호천사가 되어 날개 펼치는 걸 신성한 특권으로 여겼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부합되는 인물이 바로 라티뇰 부인이며, 나중에 에드나의 일탈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애들을 생각하라는 말을 한다. 그 당시로 본다면 라티뇰 부인은 박수를 받기 충분한 전통적인 여성상이다.
하지만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는 너그러운 친절과 한결같은 헌신을 보여주지만 자신을 현모양처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남편에게 행복함보다는 마음 속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던 차에 그랜드 아일에서 로베르를 만나고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대로 행동한다. 남편이 있음에도 아로뱅과 가까이 하며, 가정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일을 우선시 생각한다. 그리고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그만 집을 마련해 이사를 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그녀가 그랜드 아일에서 그토록 무서워했던 바다에 들어가 스스로 수영을 하게 될 때부터가 아닐까.
어떤 여성도 가보지 못한 머나먼 곳까지 헤엄쳐 가고 싶었다.
어느 여성도 가보지 못한 머나먼 곳까지 에드나는 꿋꿋하게 걸어나갔다. 하지만 에드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한 로베르는 사회적 관습을 깨뜨릴 용기를 내지 못한 채 그녀 곁을 떠나고 만다. 로베르는 진정 그녀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난 사랑의 결말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에드나는 주체적인 자아를 찾는데 결국 실패한다. 자신을 구속했던 관습의 틀에서 깨어나 영혼이 이끄는대로 살아가려 했던 그녀는 너무도 높은 사회 규범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하고 스스로 그랜드 아일의 바다에 몸을 내던진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했던 사회의 관습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졌던 케이트 쇼팽. 그러나 사회는 이 소설가를 비난하고 만다. 역자의 말마따나 19세기 후반 미국의 청교도 사회에서 남성 우월주의에 반기를 들고 여성이라는 주체적 자아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케이트 쇼팽..... 선구적인 패미니즘 작가임에 알게 해 준 작품 '각성'이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 각성 』
케이트 쇼팽 / 열린책들
정말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소설이었다. 흔히 엄마들이 "돈 있지, 등 따뜨한 방도 있지, 니가 굶는 것도 아닌데 힘들긴 뭐가 힘들어!!"라고 하면서 과거에 힘들었던 자신의 처지를 주저리하며 한탄섞인 말을 들어야했던 시절... 당시에는 또 잔소리 시작이라며 시대가 다름을 탓하시라 버릇없이 말대꾸를 했던 때가 있었다. 이 잔소리를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바로 <각성>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있으니 주인공 에드나가 가장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열린 마음으로 오로지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한탄을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으로나 그녀의 집을 거대 저택이라 말하는 것을 봐서는 전혀 부족함없는 삶을 살고있는 그녀였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배부른 소릴하듯 말이다. 그런 에드나가 허무와 권태를 느끼며 무책임한 행동을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저 활자로만 읽어내기만해서는 전혀 알 수 없을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온순했던 그녀의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결혼반지까지 내던져 짓밟았던 지경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자신의 심중을 드러냈던 메세지들이 있었다. 그랬던거구나~라고 공감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찾지못한 해답이 있었으니 시간이 주어진다면 재독하고 지인과 대화하고픈 소설이었다.
<각성>은 그랜드 아일의 휴가지를 배경으로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 부인을 통해 자신만의 진정성을 찾고 원하고자 했던 삶을 추구하기위한 실천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과연 그녀가 바라던대로 이상적 삶을 성취했을지 아니면 삶의 허무를 느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지 몹시 궁금해진다.
전통과 편견이라는 평원 위로 날아오르려는 새는
강한 날개를 가져야 해요.
약한 새들이 상처 입고 지쳐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지상으로 낙하하는 모습은
서글픈 광경이에요.
퐁텔리에 부부와 그들의 두 아들... 그랜드 아일에서의 휴가는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전형적인 현모양처이면서 지적인 아름다움마저 겸비한 아델 라티뇰 부인... 그리고 타인의 눈치를 보지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독신 피아니스트 라이즈양... 이후에도 이들은 인연을 이어가며 진정한 삶에 대한 끝없는 고뇌를 하게 만들었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나이거나 오로지 나를 위한 삶을 사이에 두고...
에드나 퐁텔리에 주위에 두 명의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로베르와 아로뱅... 그랜드 아일에서 만난 로베르는 그녀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면서 성취감을 맛보게 했고 항상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안위를 걱정했다. 뉴올리언스에 돌아와 경마장에서 만난 아로뱅은 자유분방하며 가까이 할 수 없는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사랑을 느끼게 했고... 두 남자를 비교하다보니 에드나의 남편 레옹스 퐁텔리에는 정신적인 사랑도 육체적인 사랑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 바로 여기에서 그녀의 부족함을 찾았던 것이다. 권위나 돈 그리고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온전히 여성으로서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삶을 찾기위해 거대 저택에서 나와 '비둘기 집'이란 안락한 공간을 찾았고 하고 싶었던 그림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사랑에 목말라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에드나의 남편 레옹스를 다르게 보는 독자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으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각성>을 읽으며 무엇이 옳고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의미없는 듯 하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고자 했던 삶이 다르므로 행복의 기준 또한 다르니까... 그저 가련한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었던 아픈 이야기였다라고... 그렇게 다독였음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저자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궁금증도 생겼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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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선구적인 소설, 페미니즘의 시초격인 소설이라기에 궁금해서 구매해봤다. 여자의 일탈이 일상적이지 않았던 때 (일상적일 때가 있긴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제목처럼 각성한 주인공은 자신의 마음이 가는데로 솔직하게 정해진 선을 넘어간다. 어떻게 보자면 그저 흔한 불륜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시대의 눈으로 보기에는 일탈이 그다지 일탈 처럼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보자면, 이 글이 나온지 수십년이 지나서야 조망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자면 아마도 그 자체만으로도 페미니즘적인 부분을 대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재밌게 읽었다.
각성
케이트 쇼팽 지음 ㅣ 한애경 옮김 ㅣ열린책들 펴냄
사람을 「내것」 이라 하며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타인의 몸과 영혼이 자신의 것인 양 그의 삶을 마음대로 흔든다.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이들도 남편이라는 아내라는 자식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손에 리모컨을 쥔 듯 조정한다. 21세기인 지금은 그러한 의식이 많이 희석되어 사라졌지만 애드가 살아가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보편된 관념이었다. 아내이자 한 여성이 그와 같은 깊이 뿌리내린 관념들의 편견에 맞서 자신의 내면과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깨달아가며 당당히 독립된 개인으로 「각성」해 가는 과정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 용인되기 힘든 허용범위를 넘기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로베르는 몰랐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각성 P243
한 장의 편지로 인하여 이른 결말은 조금 허탈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어 19세기의 애드나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서일까? 그럼에도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애드나를 안아주고 싶다. 이제 독립의 첫걸음을 내디디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했으나 이루지 못한다. 과거든 현재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독립을 하는 것을 쉽지 않다. 독립은 경제적 독립과 함께 정신적 독립도 이루어져야 한다. 애드나가 로베르를 사랑했지만 자신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홀로 당당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면 각성의 마지막 단계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읽은 책들과 읽을 책들에 「이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사회를 따라가다 보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은 타인은 이해하고 배려하려 노력하지만 정작 자신은 소모품처럼 아무렇게나 소비한다. 소모품은 사용하다 보면 닳아 없어지나 비워지기에 다시 채워야 한다.
애드나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지금까지 잘 해왔다고... 자신을 더 사랑해 주라고...
케이트 쇼팽 스스로는 페미니즘을 표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각성」과 「한 시간 이야기」 등 대표작에서 남성 중심의 억압된 미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을 드러내며 여성주의 작가로 알려지게 된다. 쇼팽은 기 드 모파상의 열렬한 팬으로 그의 문체에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취향에 맞는 글을 쓰기 위해 모파상의 기법과 스타일을 초월한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단어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쇼팽의 작품을 우연히 여자로 태어난 한 개인이 일상적인 감상이라고 인식했지만. 제인 르 마퀀드는 쇼팽의 글을 새로운 페미니즘의 탄생이라 보았다. 마퀸드는 「쇼팽은 타자인, 여성에게 개인적인 정체성, 자아 감각을 부여함으로써 가부장제를 훼손한다. 그녀의 작품은 이러한 여성의 깨달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녀의 삶의 '공식적인' 모습은 주변의 남자들에 의해 구축돼지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이야기 속 여성을 통해 재평가 받고 전복된다.'라고 평했다. 쇼팽은 여성의 힘을 믿었으며 그 믿음을 자신만의 문학적 창작 능력을 활용하여 표현했다. 이는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소설을 통해 표현한 자신의 이야기를 의미 있게 전달하기 위해 현실을 과장하는 허구적 표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성적 욕망과 일탈을 그리며 결혼 제도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거센 반발을 받으면 출판이 금지되어 절판이 된다. 이후 그녀는 왕성하던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04년 뇌출혈로 사망한다. 쇼팽 사후 60여 년 후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로 조명 받으며 재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