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느닷없이 던지는 낯선 이의 절박함을 어쩌지 못했다는 저자의 회고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사실 왜 자신을 삶을 타인에게 결정지어주길 바랐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면서 흥미로워진 책이다.
사실 우린 답을 찾기도 전에 끊임없이 산다는 '것'에 질문을 늘어놓는다. 늘 새로운, 어쩌면 새롭게 포장됐지만 같은 질문을 말이다. '왜 살지?', '잘 살고 있는 걸까?' 같은.
그래서 이 책이 그런 불안한 삶에 대한 철학을 살짝 가볍게 해주길 바랐다. 세계 100인의 지성에게 삶의 철학을 묻는다니 기대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솔직히 삶에 정답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지성이라니 분명 뭐가 있지 않을까.
1930년 대에 기획되고 출판된 이 책이 소멸하는 것이 안타까워 재발행을 결심했다는, 이 책이 비록 자살률을 감소시킬 수 있다거나 삶에 이미 지친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거나 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삶에 진지한 질문에 대한, 삶에 도움이 될 무언가 하나쯤은 건넬 수 있다는 편집자의 확신과 비장함이 설레게 한다.
그리하여 듀런트의 삶의 철학적 질문 7가지에 대한 답을 듣는다.
그가, 듀런트 자신이 비관적이지 않다고? 인류의 생존을 고작 '울프 부인'의 발정과 새끼를 떨구는 사이클로 보는데도? 게다가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그것도 희한한, 갖게 되는 모든 생각은 망상이고 거의 모든 인식은 편견일 것이라 보는데도? 살짝 빈정 상한다.
"자연은 인간과 벼룩 중에 어느 한쪽을 편애하지 않는다." p37
듀런트가 세계 지성들의 편지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아 이렇게 진지하게 비관적인 현대 인류와 문명을 고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페이지가 넘어가도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매미의 우렁찬 울음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대는 문장에 잠시 고개를 든다.
"우리는 산아 제한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지성인은 불임이 되고 무식자는 증가했으며 사랑은 방탕으로 가치 절하되었다. 교육자는 좌절하고 선동가에게 힘이 실리고 인류의 상태는 저하되었다." p44
나는 지성인 혹은 무식자 어느 쪽의 후예이며, 내 사랑은 과연 방탕한가? 하여 내 아이들은 그 소산물인가. 꽤 불편한 의미론이지 않은가. 당시의 사회상이 남성 중심의 절정이었다는 걸 인식한다 하더라도 이런 저급한 차별적 발언은 목구멍 속 이물감처럼 불편하다.
앙드레 모루아의 답변,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일 뿐이다."라는 삶에서 보면 이보다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또 쓸모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일을 극도로 혐오하는 현대의 흐름과는 다르게 뉴욕 타임스 발행인인 아돌프 옥스는 '부모나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기쁘고 만족스럽고 그런 쓸모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서 행복과 위안을 얻는다.'라고 적고 있다.
그 시대와 현대가 인간 효용에 대한 가치를 다르게 측정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타적 행동이 '쓸모'로 평가될 수 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오늘의 쓸모가 좀 더 팍팍한 현실에 개인적 집중을 불러온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주목하게 만든 편지는, 편견일지도 모르지만(또 듀런트도 그런 뉘앙스를 표현했지만) 바로 종신형 죄수 79206번의 답변이다. 그 어느 지성인보다 높은 철학을 보이고 있다.
삶이란, 감방 안이나 밖이나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어디서 건 흥미롭고 가치로울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다. 아울러 행복에 관해서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야 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모두 행복해야 한다. (…) 행복은 인종, 경제 상태, 사회 계급, 지리적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다.(p168)"라고 하고 있다.
이 철학자를 보면 듀란트가 언급한 지식인의 불임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교육자도 아닐뿐더러 노동자도 아니고 심지어 죄수 아닌가. 이런 그는 어느 층에 분류되어야 하는지 듀런트 입장은 어떠했을까.
이 책이 철학과 사상이라는 딱딱한 주제임에도 술술 잘 읽히는 이유는 듀런트의 필력이라기보다 번역의 매끄러움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덕분에 기분 좋은 철학적 사유의 시간이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일상에 공허함과 무기력이 찾아올 때가 있다. 유명한 사람이 되거나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는 어린 시절 꿈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지 그뿐일까. 명예와 부를 얻는다면 행복해질까, 삶의 진정한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고민도 해보지만 난 너무도 게으르기 때문에 의문을 의문으로만 남겨둔다.
이런 나에게 이 책의 존재는 감사했다. 의문에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나보다 먼저 삶을 산, 좀 더 현명한 사람의 해답이 듣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 책은 비록 정답지가 없는 질문이지만 하나의 질문에 수많은 대답이 모여있으니 그 중 하나 두개가 내 마음에 들어온다. 나는 그 편지들을 내 마음의 이정표 삼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참 위안이 되는 책이다.
대단한 사람들의 수려한 답변 속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편지는 25살의 테니스 선수인 헬렌 윌스의 것이었다. 현학적이고 어렵고 고지식한 답변을 좋아하는 내가 그녀의 답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는다. 허나 그녀의 편지엔 '생명력'이 있었다. 어렵고 추상적인 말보다 그녀의 생명력과 열정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내게 충분한 물감과 커다란 작업실과 적당한 빛만 있다면 (그릴 소재야 항상 무궁무진하니까요)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활동으로 한껏 행복한 나머지 천문학자들이 뭐라고 예언하든, 생물학자들이 뭐라고 선언하든, 사랑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종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나느 짜증나게 이기적인 사람이로군요. (163)
--
이 책은 1930년대, 1차 세계대전이란 참상을 겪은 이후 쓰여졌다. 칼 융의 책이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비극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애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그 시대의 책들이 이 시점에 출간되고 있다는 점과 꽤나 울림을 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전쟁 이후 만큼이나 불행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다시 해결하기 위한 초석인 걸까?
어쨌든 이 책은 초심을 잃지 않고 극적이고 충실하게 답을 찾아 나선다. 인간은 무엇을 삶의 동력으로 살아가는지. 아니 각자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작가의 몇몇 논지는 지금의 상황과 맞지 않은 점이 있다. 특히 여성에 대한 태도는 주먹을 쥐게 만들었지만 그저 당시 사회상에 걸맞게 살아간 사람이라 생각하며 넘어가시길. 그런 단점을 제하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흥미롭고 재미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진짜 왜사는지 모르겟습니다. 왜살까요?
책의 구성이 재미있다. 저자는 각분야의 저명인사들에게 편지를 쓴다. 왜사는지 에 대한 중심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세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이를 바탕으로 그 시대(1930년대)의 유명인사들이 각자의 대답을 한다.
우선, 그 대답을 읽기전 내 생각을 먼저 생각해보자면,
살아있는데는 이유가없고 의미도 없다라는 것이다. 저자는 분명히 이부분을 짚고 넘어간다. 생명과학자들에게는 유기체의 집합일 뿐이고 천체물리학자에게는 한순간의 티끌뿐이라는 것이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유명인사들과 비관론자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던졋다. 별반다를것없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크게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그냥사는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와 같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나와 달랏다.
내가 생각했던것은 무의미한 삶, 무의미하게 살자 라는 허무주의 적인 태도엿다면, 당대의 사람들은 무의미한 삶임에는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대답이었다.
책을 읽고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그 대단한 사람들도 잘 모르는듯 해보이지만, 당대의 사람들처럼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의구심이 들게 돼었다.
그냥 주어진 삶에서 내가 할수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보자
“내가 왜 계속 살아야하나요?”
어느 날 갑자기 한 미국의 철학자를 찾아온 남자는 이렇게 물었다. 자신에게 살아야할 이유를 말해 줄 수 없다면 자살하겠다는 날카로운 말과 함께 말이다. 집 앞에서 낙엽을 긁어모으고 있던 철학자는 나름대로 일을 구해보라든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라든가 하는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벼랑 끝에 서있는 남자에게는 그게 삶의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 후,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고통 받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살게 하는 건 대체 무언가. 당시 그가 살고 있던 시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구원과 진리를 위한 수단이었던 과학에게 배신당했던 시기였고, 그 과학이 진보와 함께 새로운 절망을 가져다주었던 시기였다. 과학이 만들어낸 기술은 인간의 자리를 뺏고 무기가 되어 많은 이들을 해쳤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인간은 우주의 먼지이자 분쟁을 일으키는 지구의 바이러스일 뿐이었다. (1930년대 미국이 대공항으로 혼란스러웠던 것도 한 몫 했을 거다.)
오히려 그래서 듀런트는 펜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개개인이 왜 살아야하는지 알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기 위해 말이다.
“
존경하는 OO님께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저와 철학 게임을 해 보시겠습니까?
저는 우리 세대가 과거 어느 세대보다도 간절히 묻어 싶어 하지
만 결코 대답하지 못할 것 같은 질문을 하나 제시하려 합니다.
인생의 의미 혹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당신에게 삶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이 당신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지,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가 제게 무척 소중합니다.
존경을 표하며
윌 듀런트 드림
”
철학적인 질문을 담은 편지는 세계 각국에 발송된다. 수신자는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약 100명의 지성인. 편지를 받은 지식인은 하나둘씩 미국으로 답신을 보내온다. 각각의 삶과 철학이 담긴 답변에 감명을 받은 그는 차분히 자신의 답을 써 내려간다. 윌 듀런트의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는 그렇게 모인 100인의 편지와 저자인 듀런트의 서신을 엮은 책이다.
책이 담고 있는 100인의 편지는 각각의 비슷하지만 다른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문인, 교육자, 음악가, 과학자, 배우, 종교인 등 셀럽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와 가치를 제시한다. 선한 삶 그 자체로 직결되는 지적 노동, 불안을 잠재워줄 만큼 좋아하는 일, 소중한 대의 등 각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가치들이 가득하다.
물론 그 외에 회의론자들의 휘갈긴 답장도 존재한다.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아느냐.’는 식의 답은 허무하면서도 조금은 인간적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종신형으로 수감 중인 죄수의 편지도 있다. 감옥에 갇혀 모든 가능성을 차단당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편지는 놓치지 말고 읽어봐야 할 부분이다. 아마 일상에서도 절망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읽어 볼 만한 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
내게 인생은 부단히 앞으로 움직이는 강과 같습니다.
소용돌이도 있고 역류도 있겠지만,
강줄기 자체는 계속 나아가는 것이지요.
"
<내가 왜 계속 살아야합니까> P.170
모든 서신을 읽은 듀런트는 다시 한번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여태까지 왔던 100개의 의견을 정리하고 본인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꽤 긴 글을 써내려간 그는 마지막에 수신인을 초대하는 것으로 편지를 마무리 짓는다. 이 구성은 독자들이 다시 한 번 질문을 곱씹게 만든다. ‘나’를 살게 하는 게 무엇인지, ‘나’를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이나 원동력이 무엇인지, ‘나’의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만약 윌 듀런트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뭐라고 말 할 수 있을지.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의 진가는 여기에서 나온다.
가벼운 힐링 서적을 읽으며 소비적인 치유만을 해왔다면 한 번쯤은 듀런트가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하나의 답이 아닌, 다양한 삶의 태도와 의미를 전해주는 편지를 통해 ‘내 삶’에 대한 철학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 입니다.
이 책 제목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는 자살을 생각하는 어떤 이가 듀런트에게 다가와 건넨 질문이기도 했다. 시대 분위기가 그럴 만했다. 1920~1930년대는 제1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으로 서구인은 큰 트라우마에 빠졌고, 19세기까지만 해도 굳건했던 종교가 힘을 잃은 것에 반해 기계론 혹은 유물론과 다윈 이론이 사회사상으로 대두되면서 사회 변화가 컸으며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회의에 빠져 있었다. 1부는 듀런트가 삶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각적으로 살펴본 발문이고, 2부는 사회를 이루는 여러 인물(철학자, 작가, 시인, 성인, 종신형 죄수, 운동선수, 노벨상 수상자, 대학교수, 심리학자, 연예인, 음악가, 지도자)에게 서신을 보내 받은 답장이 소개되었으며, 3부에서는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자신의 답장을 실었다.
● 힘을 잃은 종교에 대한 듀런트의 생각
“과거의 신앙에는 뭔가 잔인한 면이 있다. 부처와 예수의 온유한 복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스러운 복수에의 탐닉으로 더럽혀졌다. 천국이 있다면 지옥도 있어야 했고, 선량한 자는 삶에서 지나치게 성공한 자나 그릇된 미신을 받아들인 자를 열심히 지옥으로 떠넘겼다. 그 ‘복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삶이란 사악한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싯다르타는 개인의식의 소멸을 지복至福이라 불렀고 교회는 인생을 눈물의 골짜기로 묘사했다. 인간이 지상에 대해 비관주의자일 수 있었던 것은 천상에 대한 낙관주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문인의 답장을 받은 뒤 듀런트의 평가
“모두 기계론 혹은 유물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시대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성취는 이런 암묵적 전제하에 이루어졌다. 한 세대의 철학은 다음 세대의 문학이 된다. 우리 시대의 소설과 연극 ?토마스 만과 아르투어 슈니츨러, 막심 고리키와 허버트 조지 웰스, 시어도어 드라이저와 싱클레어 루이스, 에른스트 톨러와 유진 오닐의 작품들? 은 찰스 다윈과 허버트 스펜서, 니체와 칼 마르크스의 철학을 반영한다. 쇼는 베르그송으로 옮겨 갔고, 오닐은 쇼펜하우어에 프로이트를 추가하여 미국의 소포클레스가 되었다. 1932년의 과학이 1859년의 철학을 지극히 의심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문학계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방금 내가 한 말은 잘못되었다. 우리 시대를 주도하는 작가 모두가 기계론의 깃발 아래 모여든 것은 아니다. 존 어스킨은 그가 느낀 의구심을 특유의 세련되고 관용적인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시인이란 유물론 철학의 냉혹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마련이다?그리고 포이스는 뼛속까지 시인인 사람이다. 시인은 보통 이상주의적이며, 마치 대학 운동선수가 쓴 편지에서처럼 보란 듯이 무신론을 과시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이 부정한 신을 향해 찬송가를 부르곤 한다. 앨저넌 찰스 스윈번이 그랬고 퍼시 비시 셸리와 존 키츠도 그랬다. 시는 기계론의 손길이 닿으면 죽어 버리고 생명과 성장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번성하기 때문이다.”
● 연예인, 예술가, 과학자, 교육자와 지도자 들의 견해를 들은 뒤
“철학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실제 행동뿐인 것이다. 괴테가 그랬던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생각은 모두 질병이라고.”
● 철학자 못지않게 진지한 글이었던 감옥에서 보내온 편지 중
“철학자에게 내가, 즉 종신형을 받고 감방 벽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나에게 인생의 의미란 거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 교훈을 배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그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인생의 가치란 딱 그것을 쟁취하고 활용하려는 나의 의지만큼인 것이지요.
출판사에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삶이란, 심지어 감방 안에서도 바깥에 있는 사람의 삶만큼이나 흥미로우며 가치로울 수 있다고요.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 건전하다고 믿기만 한다면 말입니다.”(오언 C. 미들턴, 뉴욕 싱싱교도소 종신형 죄수 79206번, 1931. 6.20)
많은 이들의 진지한 회신에 비하면 내로라하는 회의론자들의 발언은 참 실망스러웠다. 정말 시간이 없어서였는지 듀런트의 추측처럼 자기 책으로 내면 냈지 다른 저자의 인세에 보탬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 대표적 회의론자들의 답변
“이렇게 말하려니 유감입니다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삶에는 의미도 뭣도 없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 진리의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버트런드 러셀의 답장, 1931. 6. 20)
“젠장, 내가 어찌 알겠소? 그런 질문에 뭔 의미가 있단 말이오?”(버나드 쇼의 답장, 1931. 6. 18)
● 그럼에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듀런트의 답장
“타락하고 허점 많은 우리의 사회생활을 공허한 낙관주의로 덮지는 않으렵니다. 현 상태를 축소하기보다는 과장하는 편이 낫지요. 우리가 불만족스러운 전망에 슬프고 분노한 나머지 무의미한 절망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우리의 부를 소수에 집중시키고 디플레이션을 불러온 바로 그 탐욕이 우리 영혼에도 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부자와 우리의 동기에 있어 유일한 차이는 대체로 양심이 아니라 기회와 수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공범입니다. 서로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 마음속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탐욕은 생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너무도 튼튼하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한 세대, 심지어 한 세기를 들여도 뽑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음식을 찾으면 바로 뱃속에 욱여넣었지요. 언제 다시 음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요. 오늘날 돼지들이 품종을 막론하고 음식을 보면 집어삼키는 것처럼 말이지요. 인간의 탐욕은 이런 원시 시대의 불확실성에서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악덕이 한때는 생존 투쟁에 꼭 필요한 미덕이었던 것이지요. 이는 우리의 시초에 대한 일종의 기념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유물을 나름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중략) 우리 문명의 가장 울적한 광경은 가난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뚜렷이 나타나는 도덕적 퇴보입니다. 이런 문제는 판단하기 어려운데, 한 개인의 경험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우리가 과거의 잣대로 오늘날의 세태를 재려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잣대가 농경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산업 도시 시대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잊곤 합니다. 서른까지 결혼을 미루고 도시에서 무수한 접촉, 기회, 자극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골 공동체에서의 도덕을 기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요. 시대가 다르면 도덕도 달라집니다. 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볼수록 그들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은 사실 신문이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의 절반만큼도 악하지 않거든요. 사람들은 대체로 무던히 성실하므로 복혼複婚과 사냥의 원시적 충동을 대리 만족하고 싶어 하며, 그래서 언론과 영화가 난잡함과 범죄의 악취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대인에게서는 미묘한 퇴보, 도덕 원칙보다는 인성 자체의 퇴보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입법자들의 지혜 덕분에 이제 지성인들은 피임을 하게 되었지만 무지한 자들은 여전히 자손 생산을 요구받습니다. 그 결과 교육받은(빈부를 떠나서) 소수는 차세대에서 더욱 소수가 되며 교육받지 않은 다수는 더욱 많은 다수를 차지하게 됩니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에 기여할 지성인이 탄생하지만, 우리 법률의 열생학적 효과로 그들은 다시 도태되지요. 교육은 좌절되고 미신이, 볼테르가 박살을 냈다고 자처했던 비천함이 변함없이 번성합니다. 진보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과업은 인류 중에서도 위태롭고 불모 상태인 소수의 손에 남겨지고요. 이 같은 군중의 무절제한 재생산이야말로 우리 정치가 부패한 이유이자 지방 자치라는 ‘기계’에 공급되는 원자재입니다. 민주주의가 파멸하는 것은 ‘언제나 다수의 바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나로서는 삶의 의미와 만족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총체에 참여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십시오. 삶의 의미는 우리가 보다 더 큰 존재를 위해 생산하고 기여할 수 있도록 부여받은 기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꼭 가족일 필요는 없습니다?가족은 말하자면 자연이 특유의 눈먼 지혜로써 가장 소박한 이에게도 마련해 준 가장 곧고 넓은 길이지요. 개인의 잠재된 존엄성을 이끌어 내고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대의를 부여해 주는 것이라면 어떤 총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성별을 떠나서 누구나 헌신할 수 있는 혁명적인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나 악바르 대제만큼 뛰어난 인물이 자신의 천재성과 목숨을 바쳐서 지키고 번영시키려 하는 위대한 국가일 수도 있고요. 때로는 창작자가 영혼을 불어넣어 이후 여러 세대에 선사하는 아름다운 걸작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면 그것은 개인이 자신을 초월하여 더욱 큰 설계의 조화로운 일부가 될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는 비결은 한 사람의 모든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 대가로 그의 삶을 한층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과업의 발견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문명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는 가톨릭 신자로 태어나 신학대학원을 들어갔으나 사회주의와 신앙을 조화시킬 수 없어 성직자를 포기했다. 역자의 언급처럼 여성과 비서구인에 대한 시혜적 시각, 피임과 산아 제한을 부정적으로 보는 등의 종교적 영향이 느껴진다. 또한 ‘인류 전반의 퇴보’와 ‘총체에 대한 헌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간 전체주의 시대 정서가 느껴져 섬뜩한 느낌도 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수고를 아끼지 않고 답을 구한 그의 노력은 분명 인류애가 담겨 있다.
내게 이 책은 삶의 의미에 대한 답보다 이 책 자체에 있다. 역사가가 정리한 시대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산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을 직접 읽으며 그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시대에도 이런 기획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세계 대변동이 없는 때가 없었던 것도 같지만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을 헤쳐가기 바쁘고. 세계정세 분석이나 거대 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찬찬히 글로 정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소중한 내 인생, 화이팅" 이런 거 말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