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이 우연하게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반대로 작정하고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선은 만나야 할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굳이 헤어진 연인을 만나고 싶은지 말이다. 주고받아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 가능할까. 아니, 그것도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산뜻하고 좋은 이별은 없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별은 더더욱 없다. 버리고 싶은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만남은 가능할까.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말라비틀어진 감정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으지도 모른다. 정용준의 짧은 소설 『세계의 호수』속 무주와 윤기처럼 7년이란 시간이라면 가능할까.
소설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헤어진 연인이 7년 만에 만나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아니다, 나의 마음도 모르는데 상대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오만이다. 소설처럼 둘 사이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이 아닌 먼 타국에서의 만남이라면 그런 감정에 연연하지 않을까.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윤기는 빈에 왔다. 빈의 대학 한국학과에서 자신의 시나리오를 번역해 연극을 하는 행사에 초정을 받은 것이다. 그곳은 7년 전 떠난 무주가 사는 스위스의 장크트갈렌과 가까운 곳이었다. 빈에 왔으니까 무주가 산다는 곳이 생각났고 그래서 메일을 보냈다. 연락하지 말라는 무주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기는 무주가 자신을 떠났다고 확신했다. 권태기 정도로 여겼던 연애 4년, 이별은 예정된 게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니 무주에게 묻고 싶었다. 왜 나를 떠났냐고,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무엇이냐고. 만날 사람이 있다며 떠난 스위스에서 그 사람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살고 있는 무주는 7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느낌, 그 묘한 감정이 어떤 형태의 것일지 설명할 수 없지만 조금 알 것 같다. 아직 삭제하지 못하고 휴대전화에 남겨진 전화번호의 주인공을 만나는 상상을 하니 그랬다.
무주는 장크트갈렌의 삶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조로우면서도 평온한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윤기가 뭔가 더 깊게 알려고 하면 틈을 주지 않았다. 단단한 알맹이는 보여주지 않으려 계속해서 껍질만 벗기고 있다고 할까.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무주와 윤기는 서로에서 속했던 시간에 대해 추억하는 동시에 그것이 과거일 뿐이라는 걸 인정했다. 과거를 살아가는 건 윤기뿐이었다. 무주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을 선택한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주는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을 갖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고 속이 비치지 않는 바다와 같다. 무주는 마음을 말하지 않고 묘사도 하지 않았다. 간혹 무슨 말을 하더라도 눈동자와 표정에서는 어차피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어두운 전망이 보였다. 말해보라고, 설명해보라고 채근하면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그저 나를 안아줬다. 걱정 마, 괜찮아, 이런 말만 했다. (101~102쪽)
한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소설은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온몸을 다해 마음을 전해도 상대에게 닿지 못한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7년 전 무주가 윤기에게 받은 상처가 그러했지만 윤기는 정작 알지 못했다. 상대와 나 사이의 감정이 완벽하게 전달될 수 있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빈에서 번역을 도와주던 민영이 장크트갈렌의 ‘세 개의 호수’를 추천했을 때 윤기가 ‘세계의 호수’로 들은 것처럼 그 차이는 엄청나다.
난 너와 다시 연락하고 싶어 친구처럼 지내고 싶고. 또 난 너와 다시는 연락하고 싶지 않아 친구처럼도 지내고 싶지 않고. 어떻게 하면 너와 연락하고 친구로 지내기 위해 연락하고 싶지 않은 이유와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없앨 수 있을까? (135쪽)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 단단했다고 믿었던 사랑은 한순간 물컹해지고 괜찮다고 여겼던 마음은 괜찮지 않다. 소설 속 윤기가 하는 말놀이처럼 말이다. 어떤 이유로 헤어졌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이들이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내가 그러하듯 그들도 나를 잊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린다. 이별의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을까. 나만의 유효기간을 정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어진다.
이별은 같은 세계의 양끝을 향해 걸어가는 거라면 작별은 각각 다른 세계로 걸어가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헤어진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작은 책상에 앉아 혼자만 펼칠 수 있는 책 한 권을 갖는 일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바다나 강이라면 몰라도 '호수'는 듣기만 해도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모든 이의 그림자를 그러안을 만한 포용력이 느껴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특히 그 앞에 '세계의'라는 수식어구가 붙으니 직접 보지 않아도 그것의 넓이와 깊이가 생생하다. 이만치 거대한 '세계의 호수'는 '세 개의 호수'-무주, 유나, 윤기-가 모여 조성된다. 그들은 자유롭게 뻗어 나가는 개체임에 틀림없지만, '외로움'이라는 공통된 세계를 공유한다. 그들의 외로움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는 모국에 대한 그리움에서, 또 누구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면서,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있지 않다는 박탈감으로 인해서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쓸쓸하게 흐르던 '세 개의 호수'가 우연한 만남으로 이뤄낸 '세계의 호수'는 오랫동안 한데 섞이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을 주면서도, 질긴 인연으로 엉겨 붙는다. 이 호수가 어디로 흘러 갈지는 소설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또 거리를 두면서도 끝끝내 함께 흘러 제 나름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세 개'와 '세계'가 가진 발음상의 유사함처럼 얼마간 '세 개'였다가 하나의 '세계'가 되기를 반복하지 않을까. 관계의 책임을 상대에게 두면서도 그리움과 불쑥 차오르는 고마움으로 '이별'과 '작별'을 거듭하게 되지 않을까.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세 개'와 '세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보면, 작가의 말처럼 "감출 기억도 없고 쓸 감정도 없고 입에 담을 이름도 없는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란 예정된 세상과의 작별을 앞둔 채로 살아가므로, 이별이든 작별이든 좀체 끝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결국 나와 한 세계를 이루었던 그 사람과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의 '이름'에 끝도 없이 얽매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헤어진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작은 책상에 앉아 혼자만 펼칠 수 있는 책 한 권을 갖는 일이다.
이별은 어떤 색깔로 보일까?
문득 책을 읽고 나니 드는 질문이었다.
왠지 표지의 파란색이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남자 주인공은 일을 위해 떠난 곳에서 과거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 갔기 때문에 그녀가 떠올랐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그녀를 만나게 된다. 현명하지 않은 판단이란 것을 알면서도 이끌리듯 그녀에게 연락한다.
사실 이별을 한 연인을 다시 만난다는게 과연 맞는걸까? 그리고 그 인연을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해야할까?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주인공으로 인해 그런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잘 하셨어요. 여행지에서 뭔가를 결정하는 용기는 항상 옳아요. 하지만 그 용기는 한 번만 내세요. 그곳에선 뭔갈 결정하면 안 돼요. 그건 용기가 아니에요. 어리석은 거지."(p42)
어쩌면 어리석다고 생각되면서도 우연이라도 이별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기도 하다.
양면성이 있긴 하지만 기억들은 그런 상상을 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허나 충분히 고민은 되는 상황일테다.
그래서 남주는 어느 것 하나 빠르게 전개되지 않는 분위기의 그곳에서 혼자만 초조해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 이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것으로 보여 고민하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다시 만난 과거 연인인 무주의 마음은 이해가 된다.
여전히 과거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현실을 자각하는 말을 해주는 그녀를 보며 또한번 깨닫는다. 현실은 재미난 인생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별은 꼭 사람과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사람과도 어떤 상황과도 그리고 물건과도 어느 순간 이별은 필요할지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