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를 두고 "청소년용"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호되게 야단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헤세의 작품은 청소년 시절에
읽어야 그 촉촉한 감성이 충만히, 읽는 이의 마음밭에 와 닿고, 깊숙히, 그리고 넉넉히 뿌려질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저는 어느
중국 속담을 그 출처로 삼는 "명언"을 접했는데, "나무를 심을 가장 좋은 때는 20년 전이었다."라는 게 있더군요. 20년 전에
심어진 나무라야, 지금 한창 귀한 땀방울을 흘리고 쉼터를 찾을 나무꾼에게 그늘을 드리워 줄 수 있다는 말이죠.
헤
세의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동양 종교에서 그 소재를 취하여, 헤세의 개인 능력과 그가 속한 문화권의 저력을 남김 없이
발휘하여 장편 소설로 빚어낸 역작입니다. 바로 이 책, 학원사문고판의 역자 후기에도 나와 있지만, 서양인의 시각이라는 게,
더군다나 헤세의 당대라면, 동양의 심오한 정신 세계를 바로 봄에 있어 그 한계가 뚜렷합니다. 이 학원사 문고판의 역자는, 이
작품에 드러난 헤세의 불교관에 대해 "피상적"이라는 평가까지 주저 않고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에 작품을 처음 접했던 저는, 대체 이
차분하고도 역동적이며, 세속의 풍진을 감각적으로 터치하면서도 (헤세의 다른 작품만큼이나) 에고와 초자아를 자유로 넘나드는 능란한
심리 묘사를 선보이며, 지극히 도덕적이면서도 사춘기 소년의 단잠을 방해할 만큼 말초적, 육감적 서술로 가득했던 이 작품의 대체
어디가 "피상적"이라는 말씀인지 통 이해를 못 했습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를 독후감으로 정리해서 과제로 제출했더니, 학년 대표
최우수상 수상이라는 영예도 얻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힌두교도 그렇고, 힌두교의 성립에 강한 자극을 주었던 인류
최초의 고등 종교인 불교도 그렇고, 이 책에 나오는 "옴~"을 읊으며 깊은 단계의 명상을 통해 피안을 접하는 "수련술" 따위를
훨씬 넘어선 단계에, 이미 그 성립 당시부터 도달해 있었습니다. 헤세가 설사 아무리 독일 민족 특유의 사변적이고 빈틈 없는
철학체계에 정통했다고 해도, 수천 년을 이어 오며 가지에 가지를 치고, 달콤한 열매는 그것대로 풍성하게 맺어 내어 이미 비옥한
토양의 성분을 이루고 그를 따먹은 수많은 유기체의 생태 낙원을 이룬 과거의 곡절이야 어찌 다 FOLLOW UP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마치 베르톨루치가, 키아누 리브스를 기용하여 딴에는 차원 다른 시도로 자신의 필모그래피 한 구석을 채우려 한
<리틀 붓다>가, 마치 자신이 접한 티벳 불교식의 환생 테마가 불교 정신 세계의 전부인 양 착각과 오류의 행진을 벌인
예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르톨루치와는 달리, 헤세의 이 작품은 소재를 바로 보지는 못했을망정, 소재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부처님의 방황과 구도,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궁극의 안식과 각성은, 이 시대에 나왔던 여타의 어드벤처물 못지 않게 박진감 있고, 여느 로맨스물 저리 가랄 만큼
나른하게 독자의 마음을 들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