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과 통하는 기쁨
지난번에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읽으면서 무척 행복했던 적이 있다.
읽는 과정이 마냥 쉽지는 않았지만 책장을 덮었을 때 무언가 뿌듯했다.
수백년전의 고전 소설.
그 때 당장의 효용은 잘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고두고 떠올리면 흐믓했다.
이번에 감사하게 <올리버 트위스트>를 당첨으로 읽었는데 동일한 뿌듯함을 느꼈다.
오스틴의 ‘엠마’가 좀 어려웠다면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상대적으로 무척 편안하고 더 빠르게 읽혔다.
아주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나 아무튼 겨울에 영화를 자주 해줬던 기억이 난다.
해리 포터 이후에는 까마득히 잊었는데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으면서
영국 소년 소설 이랄까 그 기원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폭발적인 성장 중이었다.
빈민을 구제하는 구빈원이 있었지만 그는 허울 뿐인 제도였다.
빈민가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고 아기 엄마는 가엾게도 출산 직후에 죽고 말았다.
아이는 이름도 없어서 교구의 말단 직원인 범블씨가 임의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알파벳 순으로 T 차례여서 Twist 가 성이 되고 이름은 Oliver가 된 아이.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구사일생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빈민가에서 자라 구빈원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올리버의 한 시절을 그렸다.
1839년 작으로 181년 전 소설인데 이 환상적인 가독성 무엇.
괜히 축약하거나 의역하거나 하지 않고, 온전히 완역 完譯 한 출판사의 노고가 빛을 발한다.
지금은 영국과 런던에 올리버 같은 아이는 거의 없을 정도로 복지가 발전했다.
그렇지만 작가 디킨스의 치밀하고 정교하고, 해학적인 글로 묘사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빈민가와 사창가, 소매치기 소굴 등 밑바닥 인생들을 가감 없이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가장 궁핍한 어린 아이들을 보여준다.
정말 놀라운 게 디킨스의 풍자와 해학이었다.
영국인 특유의 비꼬는 미학이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그것이 풍자를 위한 풍자가 전혀 아니다.
산업 혁명의 명 明이 큰 만큼 이면의 암 暗도 뚜렷이 존재함을 그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고아 소년들, 매춘부로 살 수밖에 없는 소녀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
찰스 디킨스의 해학이 놀라운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시니컬 한데 또 한없이 따뜻하다는 것이다.
아, 이것을 내 설명으로 설명을 잘 못하겠다. >_<
이래서 찰스 디킨스가 영국 독자들이 사랑하는 톱 소설가 상위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그런 정도로 표현할 수가 있겠다.
사회의 제도에서 외면 받고 사악한 어른에 이용당하면서 타락의 길을 걸을 뻔하기도 하는 올리버.
그러나 따뜻한 사랑과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돌봄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희망을 품은 10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반부에는 소년의 모험이라는 장르적인 매력을 뿜뿜 하기도 한다.
몹시 어두운 이야기, 밑바닥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을 그리면서
한없는 연민과 재치 넘치는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디킨스.
아, 정말 이 한편으로 반해 버렸다.
현대 지성의 클래식 시리즈의 일환인데 다른 고전들도 읽어보고 싶다!
올리버 트위스트! 그리고 찰스 디킨스!
흔히 대문호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굉장하기는 해도 뭔가 어렵게 느껴졌는데
디킨스는 천재가 맞으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1870년 58세로 사망하고 웨스트민스터에 묻힌 그의 묘비명처럼
평생 소설을 통해 ‘가난하고 궁핍하고 박해받는 이들을 동정’했던
디킨스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다.
가슴 벅찬 읽기였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가져서 행운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찰스 디킨스를 가져서 더 행복하다." 고 영국인들은 말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문호인 셰익스피어보다 더 자국민이 사랑하는 작가란. <위대한 유산>으로 찰스 디킨스를 만난 적이 있는데, 아직 <두 도시 이야기>는 읽지 못했고 이번에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게 됐다.
찰스 디킨스는 25세(무려 25세다!, 역시 대문호는 다르구나)의 나이부터 약 2년간 월간지 『벤틀리 미셀러니』에 『올리버 트위스트』를 연재하였다. 첫번째 장편소설인 『피크윅 클럽의 기록』이 폭발적 인기를 누리게 되어, 무명없이 단 번에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된 후였다.
두번째 장편소설인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그의 이러한 예술적 자신감과 최고의 작품을 향한 야망이 더욱 잘 나타난 수작이다.
이 책은 빈자와 노동자의 편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풍자소설의 고전과 같은 책이다. 물론 풍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작품이지만 뭔가 재미있는 막장소설(사실 이런 표현을 쓰면 안되는데 이 표현말고 와닿는 말이 없어서 사용했다, 막장소설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과 같은 극의 전환도 빠르고 결국 어떤 삶의 역경 속에서도 선한 심지,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happy Ending으로 끝난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같은 소설이다.
이 책은 19세기 산업혁명이 한창 전개중인 영국에서 한 고아 소년의 인생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구빈원이나 범죄 현장같은 사회적,도덕적 악을 더욱 깊이 다루면서 당시 영국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불평등의 폐해를 작가는 디테일한 시각으로 그리면서 비판하고 있다.
1834년 영국은 빈민 구제법을 새로 개정한다.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은 '신구민법'을 통해 사회를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빈민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 공리적 원칙에 집착한 탁상행정의 폐단을 디킨스는 통렬히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책이 단지 소년의 인생이야기에서 명작이 되는 요소를 갖추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위정자들은 빈민 계층의 출산을 막기 위해 남편과 아내를 격리 수용한다던가, 구빈원에 의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수용자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해서 비인간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이런 때 동서양 가리지 않고, 같은 인간을 못살게 굴고 힘들게 굴어야 할까? 사실 나는 이런 구조로 세상을 만든 것을 보면 신이 크게 잘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통해 찰스 디킨스는 잘못된 법과 제도야말로 사회의 구성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일련의 행위들이 공적이라는 성격 또는 방패로 더욱 악랄하게 전개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약자를 더욱 열악하고, 힘들게 만든느 사회구조는 19세기의 영국이나 오늘의 많은 선진국, 우리나라 역시 똑같다.
또한 그 사회체제 안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역들을 통해 이 소설은 특히 당시 영국의 빈민과 노동자 계층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며 셰익스피어와 비견되는 작가로 떠오른다.
이 책은 영국 작은 마을의 구빈원에서 태어난 올리버 트위스트가 주인공이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태어날 때 조차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로 태어나 비참한 환경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죽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가 벌을 받는다.
(죽을 더 달라고 이야기하는 올리버)
"림킨스 이사장님, 죄송하지만, 올리버가 더 달라고 했답니다!"
다들 깜짝 놀랐다. 모든 이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더 달라고 했다고!" 림킨스 이사장이 소리쳤다. "범블, 일단 진정하게. 그리고 내 말에 똑바로 대답하게. 지금 그 아이가 규정대로 배급받은 저녁을 다 먹고서도 더 달라고 했다는 말인가?"
"네, 그랬답니다, 이사장님." 범블씨가 대답했다.
"그 녀석은 앞으로 교수형을 당하겠군. 장담하건대, 교수형을 당할 거라고." 흰 조끼를 입은 신사가 말했다.
아무도 이 예언자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당자 올리버를 가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에 구빈원 대문에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데려가주는 사람에게 5파운드를 지급하겠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직종이나 업종, 직업이건 간에 도제를 원하는 사람이면 남녀 누구에게나 올리버 트위스트와 5파운드를 준다는 내용이었더. ---p.37
오 마이 고쉬! 무슨 이런 세상이 다 있단 말인가! 어린 애가 밥 한 번 더 달라고 했다는 걸로 사람과 돈을 묶어서 누군가에게 팔아버리다니!
올리버는 결국 인근 장의사의 도제로 팔리게 되는 것이다. 이 장의사 역시 어린 올리버를 이용해서 어린 소년의 슬픈 표정을 앞세워 장삿속을 채우면서도 학대와 모욕을 일삼는다.
이 장의사를 피해 올리버는 런던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산업화의 피폐한 대도시에서도 올리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악당 페이긴이 이끄는 범죄집단이었다. 이 악당 페이긴은 악한 유대인으로 돈 밖에 모르는 정말 이 소설에서 순도 99%의 악인으로 그려진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위험한 생활을 구해주려는 노신사 브라운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발을 들인 범죄집단, 범죄 소굴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든 올리버에게 악행을 가르치려는 지하 세계 악인들의 위협과 그럼에도 선한 본성을 잃지 않으려는 올리버의 대립이 그의 출생의 비밀을 품고 수 많은 유혹과 또한 반대로 구원이 공존하는 런던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숨가쁘게 전개된다
처음 올리버의 상태를 설명하고 할 때는 조금 지루하다가 금세 빠져든다. 완역본으로 600페이지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술술 잘 넘어간다.
나는 이 소설을 읽을 때 생후 50일이 지난 아이 두명의 육아를 한창 하고 있었는데, 우리 아이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지 말아야지, 잘 키워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었다.
사실 올리버라는 인물 자체는 입체적인 인물은 아니다. 과거 1800년대의 소설답게 정말 평면적인 주인공일 수 있다. 우리가 올리버의 입장에 감정 이입을 할 때는 특별히 놀라운 순간 순간 뿐이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올리버는 어떤 상징으로 존재한다.
초반에는 구빈원 시스템의 희생양에서 후반부로 갈 수록 때가 묻지 않은 완전무결한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디킨스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많은 등장인물들을 선보이면서 이야기 시작의 배경이 된 구빈원을 끝까지 잊지 않는다. 계속 범블씨와 노아 클레이폴 같은 악역들을 런던이라는 도시 배경에까지 연결하면서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들이 후반부에는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나나태는데 이용해서 인물들을 희석시킨다.
페이긴의 소굴은 악의 장소자만, 범죄를 둘러싼 동료의식과 선한 감정이 충돌하는 곳이다.
책 말미에 디킨스는 악당들이 낸시를 배신하는 모습을 통해 행여나 남아 있을 수 있는 악당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지워버린다.
올리버의 출생의 비밀과 악당 페이긴은 점점 미쳐가고, 후에 올리버는 부자의 양자로 들어가서 행복하게 잘먹고 잘 살게 된다는 어찌보면 뻔한 전개의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시종일관 작가의 넘치는 유머감각과 극적전개. 대중이 좋아하는 요소를 작품 곳곳에 배치해 디킨스를 '경악할만한 신파극'을 잘 쓰는 작가로 만든다.
2005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영국에서 드라마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심리 묘사나 상황을 잘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자 유수아님의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고, 중간중간 삽화가 인상적인 책이다.
재미있는 고전을 찾는다면 이 소설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동정했다.
이 사람의 죽음으로 세상은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
- 찰스 디킨스의 묘비명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니, 작가양반. 우리 애는 좀 내버려 둡시다. ㅠ 페이지 넘길 때마다 어찌나 간이 떨리는지 ㅠ
<두 도시 이야기>로 한 번 만난 적 있는 찰스 디킨스의 책이라 무척 기대했다. 탄탄한 전개와 흥미 진진한 스토리, 거기에 매력적인 인물들까지. 고전이라고 하기엔 너무 재밌는 책이어서 신나게 읽었다. 그래서 <올리버 트위스트>도 무척 기대했다. 어떤 이야기를 펼칠까, 어떤 묘사가 있을까, 저자의 풍자적 기술도 기대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책을 워낙 천천히 읽어서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도 이틀만에 시간을 들여 다 읽었다. 이 책은 고전이 아니다. 이렇게 재밌다니. 역시 요즘 나오는 소설보다 훨씬 더 재밌다.
제목만 보고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낸 성장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읽다 보니 올리버 트위스트는 그저 사건이 일어 나게 해주는 중심 인물일 뿐이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권선징악을 이야기 한다.
- 우리의 보편적 본성에는 최상과 최악의 색조들이 뒤섞여 있다. 상당 부분이 추악한 색조를 띠지만, 가장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자, 변칙이며, 일견 불가능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16)
저자의 인간에 대한 통찰엔 감탄이 나온다. 인물 하나 하나가 다 각기 다르고, 그 다름을 미묘하고 세밀하게 관찰되도록 묘사한다. 그런 모습들을 하나씩 보며 나를 돌아보고, 타인에 대한 묘사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런 관찰과 묘사들에서도 저자는 한결같이 인간 본연에 대한 성찰에 부디 긍정적인 면이 빛을 발하기를, 좋은 사람들이 많고,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보인다. 권선징악, 결국 좋은 마음으로 끝까지 올 곧게 살았던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까진 않더라도 자신들만의 행복을 찾게 된다. 그래서 저자의 책이 언제나 더 끌린다.
올리버가 끊임없이 범죄 행위에 연루 될 때마다 조마 조마한 마음으로 봤다.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범죄를 저질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안 되 얘야 ㅠ 착하게 살아야지 하다가도 범죄 연루되었다가 잘못되어 더 안 좋은 일이 있을까봐 걱정하기도 하는 등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 무릎을 꿇고 이런 짓은 절대 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만약 이토록 무섭고 경악스러운 범죄를 저지를 운명이라면 차라리 당장 죽게 해달라고 말이다. 올리버는 차츰차츰 안정을 되찾으면서 나지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지금 처한 위험으로부터도 구해주실 것을 빌었다. (231)
- 올리버는 처음으로 살인은 아닐지라도 도둑질이 이 원정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슬픔과 두려움에 미칠 지경이 되었다. 올리버는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자기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눈에는 안개가 낀 듯 눈물이 차올랐고, 잿빛 얼굴에는 차가운 땀이 맺혔으며, 팔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251)
- 올리버는 그 짧은 순간에 정신을 바짝 차려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계단을 올라가 저택 사람들을 깨워보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이런 생각에 가득 차서 즉시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253)
올리버는 전체적으로 순수 그 자체이다. 언제나 올곧게 살고, 범죄에 연루될 바에는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마음마저 보여준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범죄에 연루되는 순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커져 더 고생하기도 하고, 전화위복으로 잘 풀리기도 한다. 올리버가 순수함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잘 살고자 노력했기에 좋은 일이 생긴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가장 밑바닥 이야기를 그려, 그 곳에서도 좋은 점을, 아름다운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 나로서는 가장 추하고 불쾌한 이야기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선한 교훈이 얻어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10)
- 현실에서 실재하면서 거짓 광채로 둘러싸인 무언가에 대해, 그것의 추하고 역겨운 모습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그 광채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15)
결국 올리버도 높은 가문의 아이였다. 처음에는 길거리 아이라도 선한 아이로 잘 자라서, 잘 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선함을 지닌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 것 같다. 올리버는 엄마도, 아빠도 귀족 가문이었고, 환경이 그러하였다 하더라도 올곧은 그 훌륭한 성품이 어디 가지 않는다를 보여준 것 같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게 몹시 아쉬운 느낌.. 처음에는 어떻게 그런 밑바닥의 삶을 살면서 저런 성품을 가질 수 있을까? 저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저자는 그것이 모두 부모의 성품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 아이가 엄마의 따뜻한 마음씨와 고귀한 성품을 닮을 것이라고 확신했지. (575)
어떻게든 자신을 더럽히려고 노력하는 페이긴과 멍크스의 악마적 괴롭힘에도 자신을 지켜낸다. 이는 인간 본성일까? 아니면 그저 좋은 기질을 물려 받았던 순수한 올리버였기 때문일까
이런 빛 같은 순수성에 끌리는 인물이 있다. 그만큼 타락하지 않았겠지. 혹은 순수성의 싹은 남아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 “그 아이를 보기만 하면 나 자신과 당신들 모두에게 억한 심정이 든단 말이에요.” (290)
- 이렇게 타락한 존재조차도 자존심 때문에 여성스러운 감정을 미미하게나마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낸시는 이런 감정이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감정이야말로 낸시에게도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닳고 닳아서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된 인간성이었다. (448)
- 하물며 나처럼 관뚜껑 말고는 확실한 지붕도 없고, 병들고 아플 때 의지할 친구도 없는 여자들이 어떤 남자에게 타락한 마음을 내준 경우라면 어떻겠어요? 그 남자가 비참한 삶의 텅 빈 자리를 메워주고 있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말릴 수 있겠어요? 아가씨, 우리를 가엾게 생각해줘요. 가엾게도 우리에게는 여자로서의 감정 중에 단 하나만이 남아서, 위안과 행복이 아니라 폭력과 고통의 원천이 되어버렸거든요. (455)
이 책을 읽는 많은 엄마들이 낸시에게 끌리지 않을까 한다.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어떻게든 살아 남게라도 해주고 싶었던 낸시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을 보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올리버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 어쩌면 여기서 가장 순수하면서도 안타까운 인물이 낸시가 아닐까. 순수성을 지켜주고 싶어 하면서, 자신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스톡홀름 증후군일지도 모르지만, 사익스에게 품은 정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거다. 가장 슬픈 인물이어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다.
하나 거슬리는 표현은 ‘교활한 유대인 노인’ 페이긴이다.
- 한 마디로, 이 교활한 유대인 노인이 올리버를 올가미에 얽어맨 셈이다. 맨 처음에 올리버를 고독하고 우울한 상태로 내버려 둠으로써, 이제 황량한 곳에서 혼자 슬픈 생각에 잠겨 있으니, 누구라도 함께 있고 싶다는 간절함을 갖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페이긴은 서서히 올리버의 영혼에 암울한 독을 주입하면서 순수한 영혼을 더럽히려 하고 있었다. (214)
읽는 내도록 이 사악의 결정체인 페이긴을 지속적으로 유대인 노인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며 저자의 인식에 대해 의문점을 가졌다. 유대인에 대해서 정말 악감정을 갖고 있었던 걸까? 페이긴은 한결같이 나쁜 사람이다. 이 이야기에서 악을 담당하고 있다고 여겨도 될 정도인 그를 지속적으로 ‘유대인 노인’이라는 표현을 쓴다. 역자 해설에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당시에는 인종 차별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그들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다. 지금이야 많이 바뀌었다지만, 이 때 당시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들만의 생각을 안고 산다. 그 어떤 누구도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
- 이제 누렇게 변색된 낡은 무명옷을 입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는 한순간에 계급이 결정되어 낙인 찍혀 버렸다. (22)
- 주교에게서 비단 앞자락을, 말단 교구관에게 삼각모자와 레이스를 벗겨버린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한낱 인간이 남을 뿐이다. 때때로 위엄과 거룩함조차도 사람들의 상상 이상으로 외투와 조끼에 달려 있다. (399)
그런 다른 생각과 기준이기에 타인을 대할 때도 행동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좋고 나쁨의 개념이 아니라 그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 기준 자체가 삐뚤어져 있어 남을 대할 때 배려나 인정과 같은 부분을 찾아 볼 수 없다. 처음에는 범블씨가 나올 때마다 짜증이 났다. 인간이 어떻게 이따구로 생겨 먹었는가? 꼭 그래야만 하는 건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딴 식으로 생각하는 거지? 등과 같은 욕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화살표를 돌려 나를 생각해보니, 나 또한 분명히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항상 옳다고 어떻게 자부할 수 있겠는가? 타산지석이라, 그를 보며 나를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도 저자 특유의 블랙 코미디 곳곳에 숨어 있다. 종종 내가 이해를 못해서 비꼬는 건지 아닌지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도 있으리라. 그래서 당시의 시대상과 저자의 특징을 잘 알아야 좋다. 작품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테니. 두 편의 작품을 통해 조금은 그의 생각을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올리버는 메일리 부인이 애써 슬픔을 억누르며 차분하고 단단하게 몸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더 놀라운 점은 메일리 부인의 굳건한 태도가 계속 지속되었고 로즈 양을 간호하는 동안 줄곧 민첩하고 차분하게 모든 일들을 수월하게 해나간다는 사실이었다. (p.364)
과거에 읽었던 올리버 트위스트를 다시 읽었다. 학생시절, 교수님의 추천으로 읽었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마음에 닿기보다는 그저 묵직한 책, 읽으며 고전했던 책이라는 느낌이 남았었다. 친구들과 “고전이라서 고전문학이 아니라 고전하게 해서 고전문학인가”라는 농담까지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십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읽는 이 책은 전혀 다른 감상을 안겨준다. 번역의 차원이 달라서일까, 엄마가 된 탓일까, 내가 조금 더 견문이 늘어서일까 알 수 없지만 또 한번 찰스디킨스의 문장에서 놀라움을, 치밀한 묘사와 날카로운 비판을 다시 한번 느꼈다.
빈민구제소에서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태어나고, 태어나자 마자 고아로 살아야 하는 올리버는 어떤 마음으로 성장했을지, 그저 배가 고파서 죽을 더 달라는 일반가정이었다면 “당연하고도 합당한”요구 때문에 호된 매질을 당하며 어떤 마음을 느꼈을까. 운이 좋게도 여러 번 좋은 기회(물론 극적인 요소를 위해 전혀 좋지 않은 기회도 많이 만나지만)를 만나는 올리버를 보면서 과연 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올리버들은 그런 기회조차 만날 수 있었을까, 그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고 합당하지 않은” 요구라고 수없이 거절당하며 어떤 아픔을 겪어야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 올리버는 뭔가 쓸모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에 들떠 부산스럽게 책들을 한 팔로 안아 들었다. (p.167)
맙소사. 나는 이 문장에서 눈물이 났다. “엄마 제가 도와줄까요?”라며 무엇인가 도운 후 기뻐하는 내 모습에 뿌듯해 하는, 우리 아이의 선한 얼굴이 온 마음에 퍼지며 올리버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부모가 없이 태어나는, 혹은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는 그 모든 아이들은 그 기쁨을 전혀 모르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너무나 시렸다.
- 벽이 흔들거리며 화염 속에 무너져 내렸고, 불에 녹은 납과 쇠가 하얀 재로 바닥에 쏟아졌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자들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러 서로의 힘을 북돋았다. (p. 536)
찰스 디킨스의 글은 마치 내 옆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기에 더욱 빠져들게 하는 엄청난 매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읽을수록 질투가 나기도 하고, 팬이 되어가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진작에 후루룩 국수라도 먹듯 다 읽어놓고 리뷰를 마무리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고민이 들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고, 빈민구제법 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보기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오랫동안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낸 건지,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하지만 절대 얇지 않은 이 책이 눈깜짝할 사이에 후루룩 넘어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지성의 <현대지성클래식>시리즈를 열 댓 권 정도 읽었다. 읽었는데 다시 읽은 것도 있고, 처음 만난 것도 있었다. 그런데 매번 읽을 때마다 번역도 너무 좋고 짜임도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꾸만 이 시리즈를 다 모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아마 올해가 가기 전 분명 내 책상의 한 켠에 초록물이 들겠구나, 하고 예상해본다.)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 아우렐리우스 이런 책을 도대체 왜 읽느냐고. 재미있는 소설도 얼마나 많은데 보기만해도 고리타분한 고전은 왜 읽냐고. 늘 웃어넘겼지만, 지성을 갖추지 못한 내가 아주 잠시라도 지성을 만나는 짜릿함 때문이랄까? 혹은 마음을 쿵쿵 울리는 고전의 묵직함 때문이랄까? 이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머리가 묵직해지는 문장으로 잠시 지성의 영역에 머무를 수 있어 감사했다. 현대지성은, 또 고전은 그렇게 나를 지성의 영영역에 초대한다. 아마 책이 없었다면 평생 닿을 길조차 없었던 먼 세계로 말이다.
책 뒤편에 있는 작가연보를 쭉 따라가다가 『올리버 트위스트』가 찰스 디킨스의 초기작이라는 걸 알았다. 소설 초반부터 푹 빠지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어서 작가 생의 끝무렵쯤 아닐까 했는데 초기작품이라니, 놀라웠다.
이 소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올리버라는 소년이 주인공이다. 부제는 고아원 소년의 여정. 올리버 트위스트가 가혹한 인물을 피해 겨우 마른 빵 한 조각과 길가의 오두막집에서 구걸해 얻어먹은 물 몇 모금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93p) 상태로 끝없이 걸어 런던으로 향하는 모험담이다. 아니, 모험 이야기라고 하기엔 그 안에 담긴 일상과 인물이 너무도 현실적이다. 아이를 푼 돈에 파는 자들과 구빈원의 민낯, 도제라는 이름으로 끝없는 착취와 학대가 이루어지는 장의사의 집, 유대인 노인 범죄자 페이긴 등. 산업혁명 시대에 벌어진 많은 문제들은 아이들이 어딘가 비틀린 채로 자라게 하고, 본성 한 켠에 감춰둔 악을 스스럼없이 꺼내도록 만든다.
이제 운명은 노아 앞에 이름 모를 고아 하나를 던져주었다. 이 고아는 가장 미천한 자조차도 손가락질하며 깔볼 수 있는 존재였다. 노아는 자기가 받은 모욕에 이자를 얹어서 실컷 되갚아주었다. 이런 상황 전개는 우리에게 아주 매력적인 명상거리를 던져준다.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가장 훌륭한 귀족에서부터 가장 비천한 자선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이 아름다운 본성은 아주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65p)
찰스 디킨스는 가볍지만 확실하게 부조리함과 당대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가감없이 드러난 문장을 읽으며 당시 산업혁명에서 벌어진 많은 문제점(아동 노동 착취, 학대, 빈부격차 등)을 그려낼 수 있었다. 이런 문제가 과거 영국에만 국한될까. 올리버의 고난은 현재까지도 누군가에게 혹은 우리에게 이어지는 문제다. 그래서 더 씁쓸했고 올리버의 성장이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올리버, 낸시, 페이긴,사익스 등 다양한 인물이 얽히고 설키며 보여주는 많은 이야기가 있어 소설이 더 매력적이고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으며 아직도 어딘가에 존재할 올리버를 도울 방법은 있는지, 가난이 만연한 영국 빈민가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얕은 상태로 더 널리 퍼져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약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었지만 정신없이 빠져든 소설이었다.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