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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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리뷰 총점 9.3 (3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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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세계각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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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크리스마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평점9점 | g*******7 | 2020.01.02 리뷰제목
캐롤과 트리, 선물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는 일종의 축제와 같다. 종교적인 날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날이 크리스마스이다. 종교에 상관없이 이제 연인 또는 가족간에 크리스마스 선물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맛있는 식사 또는 술 역시 이날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곤 한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우리의 설날처럼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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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롤과 트리, 선물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는 일종의 축제와 같다. 종교적인 날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날이 크리스마스이다. 종교에 상관없이 이제 연인 또는 가족간에 크리스마스 선물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맛있는 식사 또는 술 역시 이날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곤 한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우리의 설날처럼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 한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크리스마스는 변화를 겪었다. 사실 내가 어렸을 적의 크리스마스를 요즈음과 비교해도 확연히 차이가 느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마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19세기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14인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에 그 시기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과연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싶다. 헤르만 헤세, 안데르센, 오스카 와일드와 같이 쟁쟁한 작가들이 들려주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과연 어떠할까?

 

 익숙한 작품이라서 그런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결말에서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슬픈 결말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안데르센의 작품은 [인어공주]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이 반드시 해피엔딩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결말이 더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누구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한 소녀는 추위 속에서 오로지 성냥을 켰을 때의 환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그토록 어린 소녀가 결국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할머니와의 재회를 통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 따뜻한 집이라는 공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 소녀는 아버지에 의하여 성냥을 팔도록 강요받았으며, 주변의 사람들은 그 소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심지어 그녀의 신발마저 빼앗아 가는 일마저 벌어졌으니 작품을 통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한 사회의 양면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간밤에 소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을 보았는지를.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밝게 빛나는 광채 속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환희에 가득 찬 새해를 맞이했다는 것을.

 - p. 31 中에서 -

 안데르센의 결말에 동조하는 것은 왠지 소녀의 죽음에 대한 회피인 것 같아서 마음이 참 불편하다. 주위에서 조금만 더 관심을 주고, 자신이 누리는 것을 조금만 양보해도 이러한 일은 없을텐데 죽은 소녀 앞에서 혀를 차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야속하게 느껴진다. 동화였으니 이렇게 소녀의 죽음을 포장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현실이라면 우리로서는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힘들고 못사는 것을 그저 무능하다는 것으로 몰아치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안데르센의 [전나무 이야기]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처음 읽게 되었지만, 역시나 그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현재에 만족하고 또 즐기라는 주변의 조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면서 자신이 인간들에 의하여 선택되기를 바라던 전나무의 삶이 마치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결코 가벼운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의 트리로 선택되어 황홀한 밤을 보내지만, 다음날 창고에 보관되는 신세가 되고, 결국 시간이 흐른 끝에 불쏘시개가 되어서야 후회하는 전나무의 모습을 보니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삶을 조용히 돌아보게 된다. 미래에 대한 꿈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에 대하여 소홀히 한다면 그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현재를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현재를 충분히 즐기면서 또 충실히 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낮도둑 : 어떤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읽으니 새삼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극히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결말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인간의 탐욕과 베푸는 것에 대한 의미가 현재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마을 중 유독 한 마을에서만 풍년이 들게 된다. 처음에는 풍년이 든 마을에서 주변의 농사를 망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마지못해 도움을 주었지만, 이내 그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이 노력하여 얻은 결실을 굳이 그들에게 나눠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당한 노력과 신의 도움으로 인한 것이기에 그들은 이제 오로지 자신들을 위하여 온갖 사치를 부리기 시작한다. 표도스라는 현자가 동네 주민들을 설득하지만, 당장 자신의 친족들마저 그러한 표도스에 대하여 반발할 뿐이었다. 이들은 표도스의 충고를 무시한 채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된다. 이들의 운명은 결국 '소돔과 고모라'의 뒤를 따르게 된다.

 

 판에 박힌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이 과연 지나친 것일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하여 풍년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이 누리는 부를 통한 사치와 향락은 당연한 것이고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흉년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것에 인색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능력에 따라 좋은 집에서 살고 온갖 것들을 누리는 것이 당연시 되었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무능력자로 치부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표도스와 같이 빈곤한 사람들을 돕자는 주장에 대해서 그의 과거 전력을 언급하며 동네 사람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이 역시 누군가를 돕기 위한 주장을 하거나 정책을 취한다면 자본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하는 오늘날의 소위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앞서 그 이면에 가려진 사회적인 부조리에 대한 저자의 일침에 우리는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 책 속의 작품이 모두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하여 처음 접한 작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얼음 절벽]은 한 남매의 기이한 모험을 다루고 있다. 주기적으로 외할머니를 방문하던 남매가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길을 잃고, 얼음으로 둘러싸인 산에 가게 되면서 벌어진 이야기는 일종의 모험소설에 가깝다. 그 가정에서 남매가 서로 의지하는 모습에서 훈훈함을 느끼다가도 길을 계속 잃고 고생하는 모습에 안쓰러움이 느껴지게 된다. 자칫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 책에는 수록되지 않았다.)과 마찬가지로 남매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결국 구조된다. 그리고, 그 구조의 과정을 통하여 두 마을의 관계 역시 돈독해졌으니 진정 크리스마스의 의미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서양에서 우리의 설날과 같은 의미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다보니 크리스마스에 대한 과거 그들의 기억을 엿볼 수 있는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라든지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이집트로의 도주],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 또한 교훈을 포함한 동화 [별아이]와 같이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다양한 작품들을 한권의 책으로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크리스마스가 주는 축복이 아닌가 싶다.

 저작권 문제로 인하여 과거와 같이 신나는 캐롤송을 거리에서 듣기란 쉽지 않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좀 덜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차라리 그로 인하여 보다 차분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책과 같이 글을 통하여 크리스마스를 보다 다양하게 바라보고 느껴본다면 자기만의 크리스마스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3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3 댓글 18
종이책 따스하고 감사한, 크리스마스ㅡ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평점8점 | k****e | 2019.12.31 리뷰제목
'크리스마스'가 되면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클로스', '루돌프', '캐롤송' 그리고 TV를 틀면 꼭 나오는 영화, '나홀로 집에'를 떠올리는데 앞으로는 따스하고 감사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크리스마스ㅡ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여기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14인 작가의 16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가장 인상깊은 작품 몇 편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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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되면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클로스', '루돌프', '캐롤송' 그리고 TV를 틀면 꼭 나오는 영화, '나홀로 집에'를 떠올리는데 앞으로는 따스하고 감사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크리스마스ㅡ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여기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14인 작가의 16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가장 인상깊은 작품 몇 편을 잠시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한스 안데르센 : 전나무 이야기, 성냥팔이 소녀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성냥팔이 소녀는 특히 유명해 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시간이 지나고 다시 접하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었다.

 

소녀는 그렇게 하루종일 서있었다. 하지만 소녀에게서 성냥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불쌍한 소녀의 모습에 한 푼이라도 거저 쥐여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가엾은 소녀! p21

 

성냥불은 작은 빛이었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p28

 

이 이야기 역시 소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더라면, 성냥불이 되어줄 수 있었다면... 앞으로 그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전나무 이야기는 어디선가 본 듯하긴 했지만 좀 생소했는데 정말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젊은 걸 기쁘게 생각해!
지금 네 나이, 아직 청춘인 네 삶을 즐기라고!"
햇살이 말했다. p11

 

"이제 다 끝났어. 끝났다고!
즐길 수 있을 때 내 삶을 즐겼어야 하는 건데!
이제는 다 끝났어, 끝났다고!"
가엾은 전나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p24

 

이제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다.
전나무의 일생도 끝났고, 전나무의 이야기도 끝났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끝나는 것이다. p25

 

그토록 빨리 되고 싶었던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었지만 결국 쓰임을 다하게된 전나무가 그러했듯 우리의 삶도, 우리의 이야기도 언젠가는 그 끝이 다가올 테니 지금 이 순간을 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 얼음 절벽

 

독일의 높은 산악지대에 위치한 마을, '그샤이트'와 조난 기둥을 중심으로 반대편 아래쪽에 있는 '밀스도르프'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그샤이트의 구두수선공과 밀스도르프의 염색공 딸은 결혼을 하게 되고 둘 사이에는 아이들이 태어난다. 어느 정도 자란 콘라트와 수잔나는 할머니댁이 있는 밀스도르프로 산을 넘어 곧잘 놀러갔는데 크리스마스이브날 역시 둘이서 다니러 가게 된다. 헌데 돌아오던 중 눈이 펑펑 내리고 집으로 가는 이정표가 되는 조난 기둥을 찾아 둘은 계속 걷고 또 걷던 중 얼음 절벽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결말 부분을 읽으면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쩐지 화합하지 못하는 두 마을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 때문에라도 이 책은 반드시 꼬옥 만나봐야한다. 아마 만나지 못한다면 엄청 후회할 것이다.

 

그외...

 

셀마 라겔뢰프의 '크리스마스 밤', '크리스마스 이야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불쌍한 아이들의 크리스마스트리'

빌헬름 라베의 '종소리'

펠릭스 티메르망의 '이집트로의 도주 : 크리스마스 전설'

안톤 체호프의 '방카'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케스트너에게 보내는 편지'

테오도르 슈토름의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낮도둑 : 어떤 크리스마스 이야기'

헨리 반 다이크의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

헤르만 헤세의 '두 개의 동화가 있는 크리스마스'

오스카 와일드의 '별아이'

기 드 모파상의 '크리스마스 이브'

 

... ...까지 크리스마스와 얽혀 교훈적이면서도 개성 강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았다.

 


***

 


안데르센을 비롯 몇몇 작가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나머지는 모르다시피 했는데 각 이야기마다 단편 제목과 14인 작가의 생애와 작품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어 어떤 작가인지 알고 읽어볼 수 있어 좋았다. 눈여겨볼 만한 몇몇 작가를 만나기도 했고.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지만 아직 겨울은 지나지 않은 지금, 따스한 기적과 감사한 마음이 가득 담긴 이 이야기들을 꼬옥 만나보길...☆♡★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1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1 댓글 22
종이책 크리스마스, 내가 만드는 기적 평점9점 | YES마니아 : 로얄 j*****3 | 2019.12.23 리뷰제목
아이들이 어릴 때는 산타가 되어 선물도 주고, 카드도 쓰고 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갈수록 실속을 따지게 되면서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리를 다니면서 만나는 캐롤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구나 실감이 나고, 여전히 마음은 설레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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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어릴 때는 산타가 되어 선물도 주고, 카드도 쓰고 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갈수록 실속을 따지게 되면서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리를 다니면서 만나는 캐롤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구나 실감이 나고, 여전히 마음은 설레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데는 이 책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싶다. 문학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4명의 작가의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마법같은 소설들' 16편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크리스마스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안데르센의 < 전나무 이야기> 에는 빨리 자라 멋진 모습이 되길 꿈꾸느라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전나무가 주인공이었다. 작고 귀엽다는 아이들의 말에도, 아직 젊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라는 햇살의 말에도 기뻐하지 않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잘려나간 나무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는 참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꿈꿨다. 드디어 전나무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자신이 원하던 모습이 된 전나무는 과연 행복했을까?

 

"이제 다 끝났어. 끝났다고! 즐길 수 있을 때 내 삶을 즐겼어야하는 건데! 이제는 다 끝났어, 끝났다고! " 가엾은 전나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p 24

 

 누군가 가르쳐준다고 해도 귀에는 들어오지 않고, 지나간 후에야 알게되는 것들이 있다.타인의 말에도 귀를 좀 더 귀를 기울이고, 현재를 항상 소중히 여기는 마음. 짧은 동화에 참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성냥팔이 소녀>와 도스토옙스키의 <불쌍한 아이들의 크리스마스트리>에서 만난 소녀와 소년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작은 성냥이 주는 온기로만 만날 수 있었던 소녀의 할머니, 죽은 이후에나 가질 수 있었던 크리스마스트리. 누군가 그들을 위해 조금의 마음이라도 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 주말 다녀왔던 서울에서 추운 바닥에 엎드려 상자를 놓고 구걸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화려한 시내 한 복판과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쩌면 내 마음 편하자는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상생활에서 긍정적 가치를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독일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작가'라는 테오도르 슈토름의 <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는 작가 소개와 딱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친척들의 소중함, 현재 가족의 행복한 일상을 클스마스를 배경으로 그려낸 소설은 마음 깊숙히 따뜻함이 퍼져나가게 했다.

 

 동방박사는 세 명이지만 네 명이었다는 전설이 페르시아와 러시아 지역에서 전해내려온다고 한다. 그 전설을 배경으로 쓰여진 헨리 반 다이크의 <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에는 고통당한 사람들과 핍박받는 사람들을 도우는 것이 결국 신을 섬긴것이었다는 종교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예수의 탄생의 순간을 만난 세 명의 동방박사와 달리 죽음의 순간을 함께 했던 네 번째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신을 진정으로  섬긴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가르침 또한 말하고 있는듯했다.

 

 빌헬름 라베의 짧은 소설 <종소리>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시가 서서히 깨어나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모습을 잔잔히 그려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괴테는 <케스트너에게 보내는 편지>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기쁨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셀마 라겔레프의  <크리스마스 밤>에서 할머니는 손자에게 양치기의 특별한 경험을 이야기해주었다.

" 이 이야기는 지금 내가 너를 보고 있고, 또 네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전부 분명한 사실이란다. 진실을 보는 눈은 촛불이나 등불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고, 달빛이나 햇빛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란다. 그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렴 ! "-p 44

 

 하느님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는 수백 년 전에 생명수를 마시고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등장을 했는데, 그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야. 수백 년 전에 생명수를 마시고는 그 이후로 죽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전쟁 말이야." p 51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면서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것때문에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더 부각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의미도 되새기고, 감동도 주는 글들이 많았지만 기 드 모파상의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웃픈 소설도 있었다.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는 바람에 생긴 일 때문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된 남자이야기였다. 이 외에도 안톤 체호프, 헤르만 헤세,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등 작품 하나 하나가 그들만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상상하게도 되고, 멋진 동화속 주인공을 만나기도 하면서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소설이었다.

 

 '사실주의의 영향으로 이전까지의 낭만적 경향에서 벗어나, 절제된 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16편의 소설들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19세기 크리스마스 풍경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는 출판사의 소개글에서도 알 수 있듯 모든 작품들은 19세기에 쓰여진 작품들이었다. 기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나' 이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적은 행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이라는 말을 듣고보니  기적은 누군가가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드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크리스마스에 대해, 기적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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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8 댓글 10
종이책 크리스마스에 읽는 크리스마스 이야기 평점8점 | t*******y | 2019.12.28 리뷰제목
삶에 있어 종교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캐롤송이 흐르고 화려한 장식이 거리 곳곳을 메우며 선물을 받는 기쁜 날이라는 어릴 적 기억과는 달리 근래 몇 년간 크리스마스는 하루의 휴일에 지나지 않았다. 휴일이라는 반가움은 잠시 스쳐가버린다. 이런 나에게 이 책에선 옛 기억을 끄집어낸다. 이야기가 비극이든 희극이든 작가들이 크리스마스를 보
리뷰제목

삶에 있어 종교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캐롤송이 흐르고 화려한 장식이 거리 곳곳을 메우며 선물을 받는 기쁜 날이라는 어릴 적 기억과는 달리 근래 몇 년간 크리스마스는 하루의 휴일에 지나지 않았다. 휴일이라는 반가움은 잠시 스쳐가버린다. 이런 나에게 이 책에선 옛 기억을 끄집어낸다. 이야기가 비극이든 희극이든 작가들이 크리스마스를 보는 애정어린 시선이 가장 좋았다.


대체로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책을 통해 당시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생각해본다. 연중 중요한 행사였기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족들과 모여 '그 어떤 날보다 더 훌륭한 만찬을 즐'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순수하게 이런 행복을 나열하진 않는다. 


순수하게 크리스마스를 통해 얻는 추억이나 기억, 행복한 순간의 묘사도 있지만 작가들은 이를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한다. 크리스마스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왔던 예수를 기리며 만인의 행복을 비는 날이지만 이 행복의 이면이 분명 존재한다. 시대의 모습에 예민했던 작가들이 이를 놓칠리 없다. 가난, 배고픔, 인간의 이기심과 모순을 크리스마스의 외면적 화려함에 대비해서 표현하는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모파상의 크리스마스이브나 안데르센의 두 단편, 도스토옙스키의 불쌍한 아이들의 크리스마스트리 등이 이런 크리스마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두 개의 동화가 있는 크리스마스>였다. 자신의 경험을 표현한 점에서 에세이라고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이야기'에 대해 생각한다. 손주가 보낸 이야기를 통해 기억난 본인이 처음 썼던 동화를 선보이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 짧은 수필은 이야기의 탄생과 순수성을 상기시켰다. 


지금 나는 모든 이야기들을 다시 읽고 싶다는 소망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p.197 

헤르만 헤세 개의 동화가 있는 크리스마스> 중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동화 속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지만 이들의 묘사가 단조로웠던 현실의 크리스마스를 가득 메웠고, 덕분에 새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다.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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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와 전나무 평점10점 | o*****s | 2019.12.30 리뷰제목
1. ‘성냥팔이 소녀’는 왜 죽었을까 -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한 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날입니다. 맨발에 모자도 쓰지 않은 소녀가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혹시 집에서 쫓겨나기라도 한 걸까요? 아닙니다. 소녀는 성냥을 팔러 거리로 나왔습니다. 부모가 시킨 일이지요. 성냥을 팔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매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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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냥팔이 소녀는 왜 죽었을까 

-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한 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날입니다. 맨발에 모자도 쓰지 않은 소녀가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혹시 집에서 쫓겨나기라도 한 걸까요? 아닙니다. 소녀는 성냥을 팔러 거리로 나왔습니다. 부모가 시킨 일이지요. 성냥을 팔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매를 맞습니다. 소녀는 어떻게든 성냥을 팔아 돈을 벌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냥이 팔리지 않습니다. 집집마다 창문에서는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옵니다. 거위 굽는 냄새도 풍기네요. 소녀는 따스한 집안에서 가족들과 어울려 맛있는 거위를 먹고 싶습니다. 이 성냥을 팔면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는 걸 소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소녀가 사는 집이라고 해봐야 짚과 넝마로 사방을 막아놓은 곳에 불과하니까요. 집에 들어간다고 해도 틈새로 들어오는 세찬 바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래저래 소녀는 지금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 들어가기도 싫습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그에 따라 소녀의 몸도 얼어갑니다. 소녀는 걷기조차 힘들어 처마가 쑥 나와 있는 집 귀퉁이에 몸을 웅크리고 앉습니다. 바람이라도 피해볼 요량인 것이지요. 소녀는 언 손에 입김을 불어넣습니다. 입김은 이내 찬바람이 되어버립니다. 곱은 손으로 소녀는 성냥 한 개비를 빼냅니다. 성냥불이라도 켜면 좀 낫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치직 소리를 내며 성냥불이 따뜻하고 밝은 빛을 냅니다. 소녀는 성냥불 위에 손을 올립니다. 따뜻한 기운이 올라옵니다. 번쩍이는 놋쇠발과 장식이 달린 커다란 난롯가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성냥불은 이내 꺼지고 찬바람이 다시 소녀의 곱은 손을 스칩니다. 불이 꺼지면서 따뜻한 난로도 사라집니다.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얼마 만에 난롯불을 쬔 것인지. 상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소녀는 그 따뜻함을 못내 잊지 못합니다.

 

다시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벽에 긋습니다. 불꽃이 환하게 타오르며 벽을 비춥니다. 불빛을 받은 벽이 투명해지더니 방안이 들여다보입니다. 깨끗한 식탁보가 깔린 식탁 위에는 거위 구이를 비롯한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있습니다. 사과와 자두로 채워진 거위 구이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오릅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십니다. 이런 음식은 본 적도 없습니다. 당연히 먹어 본 적도 없습니다. 거위 구이에 손을 뻗는데 갑자기 거위가 접시에서 뛰어내려 뒤뚱거리며 방바닥을 걸어 다닙니다. 가슴에 칼과 포크가 꽂혀 있네요. 놀라서 어~ 하는 사이에 성냥불이 꺼집니다. 두껍고 차가운 벽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매서운 바람이 다시 소녀의 얼굴을 때립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까 봤던 거위 구이 생각이 납니다. 보자마자 달려들어 먹어야 했다며 소녀는 가만히 자기를 꾸짖네요.

 

성냥개비 하나에 또 불을 붙입니다. 이제 소녀에게 성냥은 단순히 추위를 가시게 하는 사물이 아닙니다. 성냥을 켜면 환상이 펼쳐집니다. 그 환상 속에서 소녀는 자기가 그토록 고대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경험합니다. 환상이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환상입니다. 하지만 추위에 몸을 떨고, 배가 몹시 고픈 소녀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은 어쨌든 남의 집 처마 아래서 견뎌야 합니다. 집집마다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지만, 그것은 소녀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소녀를 맞아주지 않을 겁니다. 그 해의 마지막 날을 거지가 와서 방해했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지요. 환한 불빛 아래로 멋진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납니다. 성탄절 전날 밤에 부잣집 유리문을 통해 본 나무보다 더 크고 화려합니다. 소녀는 그 아래 앉아 푸른 가지에서 수천 개의 불꽃이 타오르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그린 풍경이 환상으로 드러나 소녀를 위로합니다. 소녀가 나무를 향해 손을 뻗자 생명을 다한 성냥불이 다시 꺼집니다.

 

성냥불은 소녀에게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냥불이 사라지면 이 추운 겨울밤을 소녀가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아무도, 정말 아무도 소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부모는 눈보라가 치는 밤에 아이를 밖으로 내쫓았고, 사회는 소녀가 죽든 말든 관심이 없습니다. 따뜻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 아들을 챙기기 바쁘고, 길가를 오가는 사람들은 어서 따뜻한 방으로 돌아가 언 몸을 녹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 처마 아래 앉아 그저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소녀에게는 참 힘들고도 모진 시간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밝히던 촛불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듯하더니 이내 긴 꼬리를 그으며 지상으로 떨어집니다. 소녀는 유성이 떨어지면 한 영혼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이야기해 주던 할머니를 떠올립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소녀를 사랑해 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할머니가 그리워 소녀는 다시 성냥불을 켭니다. 주위가 환해지면서 할머니가 온화하고 다정한 얼굴로 나타납니다. 얼마 만에 할머니 얼굴을 보는 것인지요. 따뜻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봐주던 유일한 사람을 소녀는 지금 마주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할머니마저도 따뜻한 난로처럼, 맛있는 거위 구이처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이번만은 할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있고 싶습니다. 소녀는 성냥더미에 불을 붙였습니다. 주위가 대낮같이 환해졌습니다. 그 속에서 소녀는 해맑은 웃음으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할머니를 봅니다. 저 품안에 안기면 매서운 추위도, 이 지독한 배고픔도 모두 잊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할머니 품에 안긴 채 소녀는 미소를 짓습니다. 소녀를 안은 할머니가 밝은 빛을 내며 지구 너머 먼 곳으로 올라갑니다. 하느님 곁입니다.

 

할머니는 성모(聖母)를 닮았습니다. 성모를 꼭이 종교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에 성모를 지니고 있는 법이니까요. 성냥팔이 소녀에게 성모는 바로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소녀는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졌습니다. 성냥더미가 불타면서 내보이는 따뜻함보다 더 큰 따뜻함=사랑을 소녀는 할머니에게서 느낍니다.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소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 또한 죽는 것보다 나아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죽으면 배도 고프지 않고, 추위에도 떨지 않을 겁니다. 할머니 품에 안기면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을 소녀는 느낍니다. 소녀에게는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어서야 소녀는 고통스런 삶에서 벗어난 셈입니다. 불쌍하다고요? , 맞습니다. 불쌍하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한 소녀가 왜 이리도 비참하게 죽어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더 빨리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가난하지만 예수를 마음 깊이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탐욕에 빠진 사람은 결코 마음이 가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려면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니까요. 다음날 새벽에 사람들은 벽에 기댄 채로 죽은 소녀를 발견합니다. 죽은 소녀는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할머니를 따라 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타버린 성냥 다발을 손에 쥔 채 죽은 소녀를 보며 사람들은 애도의 기도라도 올렸을까요? 죽은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요? 부모에게 인계되어 장례라도 잘 치렀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살아서도 사랑을 받지 못한 소녀가 죽어서 사랑을 받을 리 없지요. 할머니를 따라 올라간 그 세상에서 소녀는 정말로 안식을 얻었을까요?

 

사람들의 무관심이 결국은 한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가난한 부모가 관심을 기울였다면, 가난한 부모를 대신해 사회가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 가난한 소녀가 이리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전 사회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냐고요? 21세기 지금 사회에서는 가난한 소녀를 향한 무관심이 사라진 것일까요? 우리는 무한 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은 상대를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상대를 이겨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논리가 여기에는 스며들어 있지요. 성냥팔이 소녀처럼 굶어죽는 사람은 없어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는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피워 올린 불꽃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대가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요?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제도는 불가능하다고요 

 

, 맞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옛날부터 진실처럼 사람들 입을 타고 번졌으니까요. 굶어죽는 사람은 이제 없으니 가난이 구제된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빈자는 더욱 빈자가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지요.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논리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당연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능력 없는 사람이 돈을 못 버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능력 없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라는 주장까지 펼칩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그만큼 부지런해지라는 것이겠지요. 한겨울에 언 손을 부비며 성냥을 팔러 나온 성냥팔이 소녀는 게을러서 얼어 죽은 걸까요?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성냥팔이 소녀는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사회복지가 얼마나 필요한지 새삼 느꼈습니다. 지금도 가난한 아이들은 사람들 눈치를 보며 끼니를 때우고 있습니다. 초중고 무료급식을 쓸모없는 일이라며 흰 눈을 치뜨고 보는 사람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들은 왜 부자 학생들까지 무료급식을 시키느냐고 이야기합니다. 예산 낭비라는 것이죠. 무료 급식 제도의 필요성을 일부러 곡해하는 것입니다. 사회복지 제도는 언제나 약자를 중심으로 마련되어야 합니다.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제도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제대로 실행될 수 없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무료로 급식을 제공하는 제도는 무엇보다 이러한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마음이 살아 있어야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상황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이 사회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야기에는 정말로 끝이 있을까 

- 안데르센의 「전나무 이야기」

       

먼 숲속에 작고 귀여운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한 아기 전나무는 주위에 있는 크나큰 나무들처럼 쑥쑥 자라나길 소망했다. 아기 전나무의 소망을 이루려는 듯, 한 해 한 해 시간이 흐를 때마다 전나무는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해마다 키가 크는 데도 전나무는 마음속으로 더욱 더 크기를 바랐다. 어서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새들이 가지 사이에 둥지를 틀었으면 했다. 폭풍우 앞에서도 여유를 지키는 우아한 나무가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 해결될 문제였지만, 전나무는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게 참으로 지루했다. 하긴, 어디 전나무만 그렇던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시간이 빨리 흘러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들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 더 이상 얼굴에 주름이 생기지 않기를 원한다.

 

아침이면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고, 새들이 즐거이 노래하는 데도 전나무는 행복하지 않았다. 전나무의 마음은 바깥을 향하고 있다. 지금 자기가 사는 현재보다 어른 나무가 되어 펼칠 미래를 전나무는 그리워하고 있다. 늦가을이 되면 벌목꾼들이 나타난 키가 제일 큰 나무들을 베어갔다. 이제는 제법 하늘 높이 자란 전나무는 그럴 때마다 벌벌 떨었다. 가지가 잘려 나간 나무들은 수레에 실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어딘가로 가는 나무들을 볼 때마다 전나무는 나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할지 궁금했다. 이듬 해 봄이 되어 찾아온 황새가 궁금증을 조금은 풀어주었다. 이 숲으로 오는 길에 황새는 배에 달린 커다란 돛대를 봤다고 했다. 소나무 냄새가 나는 돛대가 참으로 멋있었다며 감탄을 했다.

 

전나무는 멋있다는 말에 꽂혔다. 빨리 키가 커서 바다 건너로 나아가고 싶었다. 황새가 말하는 드넓은 바다를 보고 싶었다. 따뜻한 봄 햇살이 그런 전나무를 보고는 아직 젊은 걸 기쁘게 생각해! 지금 네 나이, 아직 청춘인 네 삶을 즐기라고!”(11) 말했다. 나이가 어린 전나무가 햇살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청춘을 보낸 사람들은 늘 청춘을 그리워한다. 그 시절로 돌아가면 나이 들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거라고 다짐한다.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으니 나이 든 이들은 더욱 더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한다. 나이 든 이들이 그리워하는 시간을 지금 이 순간 살고 있는전나무는 청춘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 줄을 모른다. 전나무는 오로지 어른이 되어 뭇 생명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오면 아주 어린 나무들이 잘려나갔다. 숲에서 가장 예쁜 나무들이었다. 전나무는 자신보다 작은 저 나무들이 어디로 가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참새들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아랫마을로 간 어린 나무들은 화려하고 멋진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어린 나무를, 사람들은 아주 멋진 물건과 황금 사과와 과자와 장난감 그리고 수백 개의 촛불로 장식을 했다. 전나무는 환호성을 지른다. 자신은 무료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마을로 간 어린 나무들은 전나무가 경험하지 못한 찬란한 인생을 이미 살고 있다. 다른 나무들이 사는 화려한 삶을 자신은 왜 살지 못하는지 열등감이 들기도 한다. “기쁘게 생각해! 이 숲속에서 풋풋한 네 삶을 즐기라고!”(13) 말하며, 공기와 햇살이 격려하지만, 전나무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다시 시간이 흘러 전나무는 드디어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아름다운 나무가 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자 사람들은 제일 먼저 전나무를 베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몸속 깊은 곳에 밀려왔다. 전나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토록 떠나고 싶은 곳이었지만, 전나무는 오랜 세월을 보낸 숲을 떠난다는 게 슬펐다. 다른 나무들처럼 전나무 또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다른 나무들과 함께 마당에 부려지고 나서야 전나무는 정신을 차렸다. 정장을 입은 하인 두 명이 전나무를 크고 화려한 홀로 옮겼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무엇일지 몰라 불안했지만, 전나무는 예전에 들었던 화려한 삶을 상상하며 애써 마음을 갈무리했다.

 

하인들이 가지를 손질하고는 색종이로 만든 작은 그물들을 가지에 매달았다. 그물에는 작은 사탕들이 들어 있었다. 황금 사과와 호두가 가지에 매달렸고, 다양한 색깔의 촛불들도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형들을 가지에 매단 사람들은 꼭대기에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별을 붙였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모습에 전나무는 고향을 떠난 슬픔을 잊었다. 상상으로만 하던 화려한 삶이 이제 드디어 전나무 앞에 펼쳐지고 있다. 숲을 비추던 햇살이 말한 것처럼 이제는 즐기면 된다. 이 화려한 삶을 즐기지 않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초에 불이 밝혀졌다. 전나무는 그 우아함과 화려함에 젖어 온 가지를 부르르 떨었다. 몇 개의 뾰족이 잎이 초에 닿아 불이 붙었다. 다행히 시녀들이 불을 꺼서 별다른 일이 없었다. 너무 기뻐 흥분을 한 전나무는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혔다.

 

전나무는 이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싶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잃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아이들이 무리 지어 전나무를 향해 달려왔다. 나이 든 어른이 뭐라고 외치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나무에 달린 선물들을 따기 시작했다. 전나무는 제 몸을 화려하게 수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빼앗겨야 했다. 촛불이 꺼지고, 가지에 달린 과자들도 하나하나 아이들 손에 들어갔다. 나무에 매달린 선물들을 모두 따낸 아이들은 전나무는 외면한 채 멋진 장난감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나무는 화려한 삶을 경험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화려하다는 것은 겉포장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시간이 흐르면 화려한 삶은 그저 누추해질 뿐이다.

 

땅딸보 아저씨가 나타나자 아이들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아저씨가 아이들을 전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끈다. 아직 전나무의 쓰임새가 남은 모양이다. 아저씨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으면서도 왕위에 올라 공주와 결혼을 한 클룸페-둠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전나무는 자신 또한 계단에서 떨어져 공주와 결혼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 경험한 화려한 일을 내일 또 다시 경험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내일은 절대로 떨지 않을 거라는 다짐까지 한다. 시간이 흐르면 밝혀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희망을 갖는다. 화려한 오늘이 화려한 내일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나이 든 어른은 인생에는 결코 이런 흐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오늘 한 일과 내일 할 일이 연속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깨닫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전나무는 다락방으로 옮겨진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다락방에 방치된 채 전나무는 점점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힌다. 전나무는 이 상황을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게 하려는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로 생각한다. 자기 합리화다. 화려함을 추구하는 전나무는 다락방에 처박힌 신세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화려한 시절을 현실처럼 여전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시절을 보낸 전나무가 어떻게 다락방의 외로운 삶을 견딜까? 생쥐가 코를 킁킁거리며 전나무 곁으로 온다. 생쥐는 전나무를 할아버지로 부른다. 전나무는 할아버지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이를 인정하면 더 이상 화려한 시절을 꿈꿀 수 없을 테니까.

 

전나무는 생쥐에게 숲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한다. 따스한 햇살을 말하고, 상큼한 공기를 말한다. 다락방 쥐가 따스한 햇살과 상큼한 공기를 느껴보기나 했을까? 상대가 귀를 기울여 들어주니 말하는 전나무 또한 기분이 좋다. 과자와 촛불로 장식된 크리스마스이브 이야기를 들려주자 생쥐의 반응은 최고도에 이른다. 다음 날 더 많은 생쥐들이 와 전나무 이야기를 듣는다. 클룸페-둠페 이야기를 마치 자기 이야기인 듯 전나무는 생쥐들에게 들려준다. 집쥐들까지 찾아왔지만, 전나무나 들려준 이야기는 이미 씨가 말랐다. 생쥐와 집쥐들은 전나무의 화려한 삶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놓인 과자 하나를 더 좋아한다. 쥐들은 베이컨이나 수지 양초에 대해 묻는다. 음식물 저장 창고 이야기도 들려달란다. 전나무가 어떻게 그런 얘기를 알 수 있을까? 다시 전나무는 다락방에서 혼자가 되어 외로움에 빠진다.

 

전나무는 이 다락방에서 나가기만 하면 다시 화려한 삶이 펼쳐질 거라고 상상한다.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사람들이 전나무를 밖으로 끌고 나간다. 한데, 대접이 시원치 않다. 전나무를 아주 거칠게 마당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다락방을 나오니 어쨌든 공기는 신선하고 햇살은 따뜻하다. 이제야 살았다고 전나무는 소리를 지른다. 햇살 아래 온몸을 드러낸 전나무는 그러나 예전 모습을 이미 잃었다. 가지는 말라비틀어졌고 그 사이는 잡초와 쐐기풀로 범벅이 되어 있다. 나무 꼭대기에 달린 황금별만이 화려했던 시절을 그나마 증명해주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봤던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다. 한 아이가 흉측한 나무는 별을 꽂고 있을 수 없다며 장화 신은 발로 전나무 가지를 짓밟는다. 해방감을 느낀 것도 잠시, 전나무는 캄캄한 다락방이 한없이 그립다. 다락방에 그냥 있었으면 아이 발에 이리 짓밟히지는 않았으리라.

 

하인 하나가 전나무를 작은 토막으로 자른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커다란 가마솥이 보인다. 화려한 시절을 보낸 전나무는 이제 불에 태워질 운명에 직면했다. 가마솥 밑에서 불이 활활 타오른다. 전나무가 한숨을 쉴 때마다 총을 쏘는 듯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재미있는지 아이들이 몰려와 탁, 탁 소리를 낸다. 전나무가 제 몸을 태우며 스러지는 자리에서 아이들은 깔깔깔 웃으며 마음껏 놀고 있다. 문득 전나무는 자신에게도 저 아이들과 같은 시절이 있었음을 떠올린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뻗던 시절, 전나무는 자기 앞에 펼쳐진 화려한 삶을 상상했다. 햇살과 공기가 지금 이 시간을 즐기라고 충고했지만, 전나무는 앞으로 올 미래의 시간만 그리다 정작 그 시절을 즐기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실에 다가갈 힘을 얻는다. 나이 든 사람이 아는 진실을 어린 아이는 왜 모르는 것일까? 나이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은 살아온 시간을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 어린 아이는 살아보지 않은 시간으로 자기가 사는 세상을 해석한다. 나이 든 사람은 그래서 과거를 그리워하고, 어린 아이는 그래서 미래를 향해 뻗어 나가려고 한다. 나이 든 사람이 더 나이가 들어 죽으면, 나이 든 사람이 된 어린 아이는, 어린 시절에 하지 못한 일을 한탄하며 나이 든 자의 설움을 느낀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기를 꿈꾼다. 숲에서 화려한 거실로, 다락방과 마당으로 옮겨지는 전나무의 삶의 가만히 반추해 보라. 하나하나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전나무는 삶에 드리워진 진실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작가는 전나무의 일생도 끝났고, 전나무의 이야기도 끝났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끝나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작가의 말처럼 모든 이야기는 결국 끝나는 것일까? 이야기의 결말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머리를 끄덕일 만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게 이야기의 매력이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이어진다. 전나무의 이야기는 끝났는지도 모르지만, 전나무와 함께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낸 아이들은 오랫동안 전나무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전나무는 그렇게 자신을 떠나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여 서러워 마라. 우리가 전나무를 기억하고 있으면 전나무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네 삶 또한 그렇다.

 

전나무는 화려한 삶을 꿈꾸었다. 미래에 펼쳐질 화려한 삶에 젖어 정작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아름다움을 외면했다. 다가올 미래는 언제나 지금 현재를 통해서 가는 것이다. 지금 현재를 이르려면 과거의 어느 시점들을 하나하나 거쳐서 와야 하는 것처럼. 작가는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전나무의 경우에 나타나는 대로, 미래는 어느 순간 화려한 시절로 표현되다가도 금방 캄캄한 다락방으로 돌변한다. 마당에 나가고서야 전나무는 캄캄한 다락방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었는지 알게 된다. 시간은 늘 흐르고, 시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이 빨리 지나가길 우리는 소망하지만,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그 고통마저도 그리워하는 상황에 빠져든다.

 

지금 이 순간을 절실한 마음으로 보낸 사람은 시간이 흘러도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느니 지금 이 순간을 더 열심히 살려고 한다. 아무리 화려한 과거가 발목을 잡으려고 해도, 그들은 결코 뒤로 돌아서지 않는다. 뒤로 돌아서면 아쉬움만 더욱 더 커질 것이라는 걸 그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시간은 어차피 흐른다.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버렸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글을 쓰며 보내고 있다. 다음에 쓰면 된다는 생각을 뿌리치고 나는 계속해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쓰면 되고,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으면 다른 무언가를 하면 된다. 전나무 이야기는 이렇게 끊이지 않고 내가 쓰는 이야기=글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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