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물리적 특성이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개념은 매우 흥미롭다. 이런 사례들을 쭉 훑고 있으면 역시 물질이 우선, 관념이 나중이라는 철 지난 유물론이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영화 <매트릭스>를 보자마자 다시 뒤집히긴 하지만.
언젠가 신도시의 도시 계획이 어떻게 인간을 살찌게 만드는지 읽은 적이 있다. 이는 추정과 주장이 혼합된 선언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었다. 현대의 도시 구조는 상업 지구와 주거 지구가 명확히 나뉘어 있다. 대형 마트는 도시 외곽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이런 마트에 매일 가는 건 어려워 사람들은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한다. 1+1 상품은 이득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불필요한 상품 1개를 추가로 얻어온 것이다. 이 상품은 냉장고 안에서 썩거나 당신의 몸으로 들어가 뱃살 축적의 주역이 된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정육점과 채소 가게, 작은 마트가 있다면 사람들은 필요한 게 있을때 마다 걸어 나가 소량만 사 올 것이다. 휘발유를 쓸 일도, 그걸로 공기를 더럽힐 일도, 운동 부족의 될 일도 없다. 옆집, 윗집, 아랫집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얼굴을 익히는 건 덤이다. 현대의 도시 구조는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비하고, 인간을 돼지로 만들고, 파편화시킨다.
도시의 구조를 바꿔 얻을 수 있는 변화는 이밖에도 많다. 동네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 공원, 도서관, 체육관 등을 만들면 범죄율과 주민 간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주차 문제나 층간 소음으로 시비가 붙어 심심찮게 칼부림이 나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이웃이 매일 체육관에서 인사를 나누고,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며 새로운 사료에 대한 정보를 나눈 사람이라면 그의 뱃속에 칼을 찔러 넣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파편화된 인간은 서로를 더 쉽게 증오한다. 증오는 소통을 방해하고 부족한 소통이 증오를 고착화시키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경계가 없는 곳에 서로 모이게 되면, 비록 살가운 대화나 친밀한 감정이 오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계에는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그는 매너 없는 미친 또라이가 아니라 멀쩡하게 생긴 이웃인 것이다.
폭압을 일삼는 독재국가가 정보과 국경을 살벌하게 통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외부인을 적으로, 뿔이난 도깨비로 정의함으로써 내국인의 마음에 분노의 씨앗을 심는다. 그 분노는 주민들을 결속시키는 열쇠가 된다. 그런데 외부 사람들이 하나둘 왔다 갔다 하며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고 삶을 공유하면 자기 생각이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계층 간 갈등, 빈부 격차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도시가 빈자와 부자의 도시로 양분화되면 끝끝내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부자 도시 사람들은 막대한 세금을 들여 가난한 도시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삶에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공감할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책 매우 지루하고, 그저 사례를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음에도 주장하는 바가 그렇게 공허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에게 행동의 변화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책은 사람들에게 도서관에 가라거나 공원으로 나오라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가고, 공원에 나갈 수 있도록 도시의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도시 설계를 담당하는 몇몇 입안자들의 생각만 바꿔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지 내에 텃밭이 있고 세대마다 일정한 공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자기 땅을 가꾸며 이웃과 만나고, 그 땅에서 난 것들을 서로 나누지 않을까?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세요, 만나면 인사를 나누세요 라는 포스터를 붙이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이 책이 아쉬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그 변화를 이끌 공공 혹은 민간 사업자에게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정량적 고찰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금싸라기 땅에 왜 상업용 빌딩 대신 도서관을 지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왜 아파트 한 동을 더 짓는 대신 텃밭을 만들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답을 줘야 한다. 입법으로 강제할 수도 있지만 입법자들의 표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이루는 법이다. 공공의 이익, 민주주의의 발전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는 인간을 바꿀 수 없다. 자본주의 세상에선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더 교활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갖는 가능성을 고찰하지 않는 점도 많이 아쉽다. 최근에 20~30대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의 교류 사례를 본 적이 있는데, 이들은 익명의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혼자 먹거나 쓰기엔 양이 많은 음식물과 물건을 나누고 있었다. 교류를 나눌 물리적 공간이 없음에도 이러한 활동은 활발하게,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 정책을 입안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효과가 크지만 그만큼 느리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은 이러한 제약을 뛰어넘는 잠재력을 지닌다. 아주 작은 물리적 변화만으로도(예컨대 현관 앞에 거주민들만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공용 락커룸을 비치하는 것) 이러한 활동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도시를 바꾸는 일은 다학제적 협업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특정 행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해내는 일은 오랜 시간 어포던스를(affordance) 연구해온 UX 디자이너보다 잘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건축법도 모르고, 어떻게 집을 지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UX 디자이너, 건축가, 엔지니어, 공무원, 입법 전문가 등이 거대한 콜래보레이션을 이루기 위해선 이들의 노력이 시장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 도시가 한두 개 진행될 뿐 전국으로 확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쉽게 말해 이렇게 지어진 도시의 집값이 다른 곳 보다 훨씬 비싸고,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래서 이게 장사가 된다는 판단이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혹자는 이런 생각을 대단히 속물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 좋은 세상 같은 공허한 캠페인으론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인간의 행동은 더 쉽고, 더 편하고,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