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생 : 초라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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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생 : 초라한 진실

초라한 진실

리뷰 총점 9.9 (1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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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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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어느 인생」, 오랫만에 다시 읽는 「여자의 일생」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h*****a | 2019.12.01 리뷰제목
오래된 독서록을 펼친다. 88년 1월로 기록되어 있는  「여자의 일생」. 여성의 삶에 대해 한참 고민하고 궁금해하던 어린 나이의 나는 이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었다. 독서록에는 왜? 라는 질문들이 많이 써있었다. 아무리 우리나라와 다른 환경의 이야기라지만 난,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도 해보고 “ 왜 남자들은 바람을 필까? “ 라는 깜찍한 질문을 적어두기도 했더라는.이
리뷰제목

오래된 독서록을 펼친다. 88년 1월로 기록되어 있는  「여자의 일생」. 여성의 삶에 대해 한참 고민하고 궁금해하던 어린 나이의 나는 이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었다. 독서록에는 왜? 라는 질문들이 많이 써있었다. 아무리 우리나라와 다른 환경의 이야기라지만 난,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도 해보고 “ 왜 남자들은 바람을 필까? “ 라는 깜찍한 질문을 적어두기도 했더라는.



이제 2019년. 독립된 여성으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여성의 삶을 오롯이 살아온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어본다. 원제가 「여자의 일생」이 아니라 「어느 인생(Une Vie)」 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름 모를 배신감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여자의 일생」 과  「어느 인생」 . 제목부터 주는 느낌은 매우 다르지 않은가. 모파상이 그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가 있었을테니 말이다. 제목부터 바로잡고 다시 읽는 이 책은 이제, 여성으로 받아왔던 차별이라던가 불공평함에 대한 후천적 방어 실드(!)를 살포시 걷어두고 읽어보려 했다. 마음가짐부터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부제가 ‘초라한 진실’ 이라는 것도 기억해두면서.



어느 인생 

기 드 모파상 

새움 


험한 세상의 진실을 되도록이면 늦게 알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비슷하다. 그러나 깨끗한 자연 속에서 살던 아마존의 원시부족들이 문명사회로 나오자마자 생소한 질병들에 쉽게 감염 되었듯, 비단 질병이 아니라도 어떤 일에 면역이 없다는 것은 나중에 더욱 크게 앓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의 초반의 여주인공의 부친의 교육방식을 보며 한탄했다.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나 수녀원에서 교육받는 배경 등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환경과 구조 속에서 자라난 잔느가 시대가 요구한 것들을 수긍하고, 수동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딸은 열두 살까지 집에서 지내다가 어머니가 울며 반대했지만 샤크레쾨르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딸이 그곳에 엄격히 유폐되어 인간사를 모른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게 했다. 딸이 열일곱살이 되어 순결한 상태로 돌아오면 자신이 직접 딸을 합리적인 시로 흠뻑 적시듯 감싸주고 싶었다. 비옥한 대지 한가운데 들판을 거닐며 딸의 영혼이 열리고 동물들의 순박한 애정, 천진한 사랑, 삶의 평화로운 법칙을 보며 딸이 무지에서 서서히 깨어나기를 바랐다. 


- p12


이 작품은 1883년에 처음 출간되고 톨스토이로부터 레미제라블 이후 프랑스 문학의 최고 걸작 이라는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로 불린다. 낭만주의에 반하여 파생된 사조이자, 사실주의의 연속선상에 있는 이 자연주의의 특징은, 주인공의 비극적인 인생을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수녀원에서 낭만주의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삶을 꿈꾸는 잔느의 일생을 그녀의 상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게 한다. 자연주의자들이 생각하기에 낭만주의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의 초반 온통 (요즘의 표현으로 치면) 핑크빛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세계가 얼마나 위태하게 보이는 지. 사실 어릴 때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다. 아마 내 머릿 속도 온통 꽃밭이었을테니. 


사랑! 벌써 2년 전부터 사랑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이 점점 더 커져 가며 그녀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이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만나기만 하면 된다. 그를!


어떤 사람일까? 그를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그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가 '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뿐이다.


- p33


그리고 그녀의 기대는 곧 현실에 마주치게 된다. 인생은 낭만으로 가득하지 않으며, 늘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이제 아무 할 일이, 영원히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수녀원에서 보낸 젊은 시절엔 미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몽상하느라 분주했다. 그 시절엔 연신 솟구치는 희망이 시간을 채워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끼지 못했다. 그 후 그녀의 환상이 꽃을 피웠던 엄격한 수녀원 담을 벗어나자마자 사랑에 대한 기대는 실현되었다. 꿈꾸던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갑작스러운 결단으로 성사된 혼례처럼 단 몇 주 만에 결혼까지 했다. 남자는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아 데려가 버렸다 


그런데 이제 신혼 초의 달콤한 현실은 무한한 희망에, 매혹적인 미지의 불안에 문을 닫는 일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다. 이제 기대는 끝났다.


- p129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배역을 끝낸 배우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잔느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에게 말할 때조차 그랬다. 사랑의 흔적은 홀연히 사라졌다. 


- p137



애초에 사람관계에, 아니 남자에 대해 지나치게 순진했던 잔느인지라 더더욱 '나쁜 남자'를 만나고 만 것일지도 모른다.  잔느의 체념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잔느는 스스로도 놀랄 만한 태도로 체념한다. 이제 남편은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다. 영혼도 마음도 그녀에게 닫혀 버린 낯선 사람이었다. <중략>


그녀는 그렇게 만나서 사랑하고 애정의 격정 속에 결혼한 그들이 어떻게 갑자기 함꼐 잠을 잔 적이 없는 것처럼, 거의 모르는 사람처럼 되었을까 하고 종종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고도 어떻게 훨씬 더 괴로워하지 않을까? 이런 게 인생일까? 그들이 착각한 걸까? 그녀에게 이제 미래는 없는 걸까? 


- p138



신사라고 생각했던 남편을 부정을 목격한 잔느. 그 시기에 임신을 했던 터라 어머니가 된 사실에도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으나, 이내 아들 폴에게 맹목적인 엄마가 된다. 남편의 두번째 부정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척 하기로, 통상적인 애정에는 마음을 닫기로, 오직 폴과 부모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폴에 대한 집착은 그를 응석받이로 자라게 만들고, 이후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온다. 


샤를 페로의 동화 중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의 숨겨진 의미에 대한 해석이 떠오른다. 샤를 페로의 동화는 당시 사회가 요구했던 여성의 순종을 강조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한데,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경우 물레에 찔리는 것으로 상징되는 신혼 첫날밤에 대한 은유, 결혼한 후 '잠자는 것'처럼 순종하라는 이야기 이면에 숨긴 의미, 그렇게 결혼 생활동안 순종하면 왕자로 대변되는 '아들' 이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여기서 당시 배우자에게 행복을 얻지 못했던 많은 여성들이 아들에게서 대안적인 행복을 찾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 속 잔느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미련하다고, 순진했다고 비난하기 어렵다. 그녀의 삶을 하나의 거울로 삼아 내 삶도 함께 비춰보며 돌아볼 수 밖에 없다. 책 후반부의 묘사된 그녀의 심리는 내 삶의 일부를 읽어내는 것 같더라.


길어지는 비와 흐린 하늘, 먹구름을 동반한 가을이 돌아왔을 때 삶에 대한 지독한 권태가 엄습해서 그녀는 풀레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제대로 기울여 보기로 결심했다. - 348


그녀는 기차의 속도에 질겁한 채 들판이, 나무가, 농가가, 마을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며 새로운 삶에 휩쓸린 채, 평온했던 젊은 시절과 단조로운 삶의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실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 353



풀숲에 웅크린 데이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수레바퀴 자국이 만든 웅덩이에 비친 푸른 하늘을 보면 젊은 시절 들판에서 꿈을 꿀 때 느꼈던 감동의 메아리처럼 아득한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마음이 설레고 뭉클해지고 동요했다. 


미래를 기다리던 시절, 그녀는 이런 포근한 날들의 혼곤한 취기와 감미로움을 음미했고, 똑같은 동요에 전율했었다. 미래가 닫혀 버린 지금에 와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되찾았고, 마음속으로 다시 만끽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문에 괴로웠다. 깨어난 세상의 영원한 기쁨이 그녀의 메마른 살갗 속에, 식어버린 피 속에, 짓눌린 영혼 속에 스며들면서 이제는 미약하고 고통스러운 매혹밖에 안기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 주변의 곳곳이 어딘지 조금씩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청춘기 때보다 태양은 조금 덜 뜨겁고, 하늘은 조금 덜 파랗고, 풀은 덜 푸르며, 꽃은 훨씬 창백하고 덜 향기로워서 예전처럼 완전한 취기를 안기지 못했다.


- p369~370



그녀가 좀 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다면 그녀의 인생을 조금 달랐을까. 잔느와 달리 오히려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낸 것 같은 하녀 로잘리는 무엇이 달랐던가. 로잘리가 말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p380



문득 드라마 「눈이 부시게」 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한동안 이 글로 나도, 주변의 많은 이들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여자의 일생' 보다는 지금의 책 제목인 '어느 인생'이 훨씬 마음에 와닿는다. 그럼에도 읽는 내가 여성이기에 결국 다시 여성의 삶으로 돌아와 생각할 수 밖에 없나보다. 제목에서 '여자' 를 떼고 읽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내 삶은 때론 휑했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 눈이 부시게, 마지막 대사 중에서


 

책 속의 잔느에게도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란 말을 전해주고 싶다. 


아직 그녀의 삶은 끝나지 않았기에. 이전에는 비극인 결말이라 생각하고 덮었던 소설이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마지막 문장을 그리 적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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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기 드 모파상 -어느 인생 평점10점 | l*******8 | 2019.12.09 리뷰제목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380p)1883년에 발표된 기 드 모파상의 첫 장편소설 '어느 인생'.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이 작품의 제목이 '여자의 일생' 알려져 있는데 저자가 붙인 원제목은 'Une vie'로 '어느 인생' 혹은 '일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과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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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380p)

1883년에 발표된 기 드 모파상의 첫 장편소설 '어느 인생'.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이 작품의 제목이 '여자의 일생' 알려져 있는데 저자가 붙인 원제목은 'Une vie'로 '어느 인생' 혹은 '일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과거에 중역하는 과정에서 잘 못 붙여진 제목이 수많은 번역본에 그대로 쓰였는데
이번에 새움출판사에서 그것을 바로잡아 작가의 의도가 담긴 제목으로 새롭게 출시 하였다. 19세기 노르망디 시골을 배경으로 한 여자의 불행한 삶을 다룬 이야기인데, 이 책의 부제 '초라한 진실'을 보면 단순히 여자의 일생 보다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과 고뇌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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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하고 부유한 귀족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난 잔느는 수녀원 학교 졸업 후 여자로서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잔느는 신부님의 소개로 만난 쥘리앵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남편은 냉담하고 치졸하게 변해버린다. 육체적 욕망만 가득한 그는 아내를 잠자리 대상으로 여기고 그것도 모자라 하녀 로잘리를 임신시키고도 뻔뻔하게 나오며 이웃 백작의 아내와도 불륜을 저지르는 등 책을 읽는 내내 분노하게 만들었다.
신혼 초의 달콤함도 잠시 변해버린 쥘리앵으로 인해 절망과 고통 속에 살던 잔느는 아들 폴이 태어나자 모든 관심과 사랑을 아기에게 쏟게 된다.
이제 잔느에게 남편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였는데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후 홀로 아들을 키우지만 아들 마저도 잔느를 불행한 삶으로 이끄는 존재가 된다.
한 여자의 인생이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하다니... 책을 읽는 내내 같은 여자로서 잔느에게 김정이입이 되어 분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책의 말미를 통해 그녀의 인생에도 끝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이 피어나고 있어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결국 저자는 잔느라는 한 여자를 통해 우리 삶에 담긴 초라한 진실과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헛된 욕망을 섬세하고 감성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100년이 훨씬 넘은 작품임에도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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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어느 인생 -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 아니라 어느 인생이다 평점10점 | s*****0 | 2019.11.28 리뷰제목
<어느 인생>은 '여자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어 온 모파상의 작품의 제목을 바로잡아 번역가 백선희가 번역한 책으로 인상적이다. 이 책의 역자인 백선희는 이 작품에서 19세기 한 여성이 혹은 여성 전체가 산 불행한 삶을 읽을 수도 있겠으나, 저자의 시각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을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파상은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인생 전반에 대한 그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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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생>은 '여자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어 온 모파상의 작품의 제목을 바로잡아 번역가 백선희가 번역한 책으로 인상적이다. 이 책의 역자인 백선희는 이 작품에서 19세기 한 여성이 혹은 여성 전체가 산 불행한 삶을 읽을 수도 있겠으나, 저자의 시각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을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파상은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인생 전반에 대한 그만의 통찰을, 삶의 '초라한 진실'을 보여 주려 한 것으로 읽힌다. 모파상은 일상의 공허가 여주인공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도록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이 특정 시대 여성의 사회적 조건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삶 자체를 통찰하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이 작품을 통해 모파상이 말하려는 건, '보라, 이 여자의 일생을'이라기보다는, '보라, 이것이 인생이다'인 셈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저자가 왜 제목을 '어느 인생'으로 정했으며, 왜 이런 문장으로 소설을 끝맺었는지도 이해가 된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이 작품은 1883년에 처음 출간되고 톨스토이로부터 "<레미제라블> 이후 프랑스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후로도 많은 이들이 모파상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라거나, "이미지의 생동감에 있어서 그를 따라갈 자가 없고", "본능적으로 삶의 디테일을 발견해 내는 경이로운 예술가"라는 말로 극찬했다. 시간이 흘러도 모파상의 글이 늙지 않고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를 이런 찬사들이 설명해 준다." - 역자 백선희


소설 <어느 인생>은 불운과 불행에 좌절하면서도 희망을 품었던 어떤 인생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가난한 귀족 출신의 바람둥이 남편 쥘리앵, 불순하다며 분만 중인 어미 개를 죽이는 신부, 그런 신부를 비난하며 자연법칙을 예찬하는 아버지, 가엾은 엄마가 남겨 놓은 비밀스러운 편지, 온 가족의 과한 사랑을 받으며 엇나가는 아들, 살아 있는 가구처럼 존재감이 없는 이모, 낮에는 내내 졸다가 밤이면 배회하는 늙은 개. 주인공 잔느의 인생에는 여러 삶이 겹친다. 무엇보다 잔느와 함께 젖을 먹고 자라 여동생이나 다름없었지만 쫓겨난 하녀 로잘리를 빼놓을 수 없다. 불운과 불행을 겪으며 혼자 남게 된 잔느를 찾아오는 로잘리. 그녀의 늙고 투박한 손이 절망에 빠진 잔느의 손을 잡아주고, 두 사람이 함께하며 서로의 삶을 얘기하는 모습은 다정하고 눈물겹다.


귀족의 외동딸인 잔느는 수녀원을 벗어나 자유와 사랑과 행복을 꿈꾸며 결혼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그녀의 소중한 기대는 파괴된다. 첫날밤 굶주린 사람처럼 자신을 안는 남편의 난폭함보다 입을 반쯤 벌린 채 평온하게 잠든 얼굴이 그녀를 더 화나게 했다. 그녀는 능욕당한 기분이었고, 하찮은 여자 취급을 받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남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행복이 깨진 환멸 앞에서 그녀는 마음속 깊이 절망해야 했다. 이어지는 인생은 쉽지 않았다. 악착스럽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운명을 탓하면서도 어떤 날에는 삶의 행복이 마음속에 파고들어 그녀는 다시 몽상하고, 희망하고, 기대하기도 한다. 운명이 제아무리 가혹해도 화창한 날에는 희망을 품어 볼 수 있는 법이니까.


"잔느는 이 달 밝은 밤처럼 자신의 마음이 속삭임으로 가득 채워져 넓어지는 것 같았고, 밤짐승들의 떨림이 그녀를 에워샀듯이 떠도는 온갖 욕망이 별안간 마음에 우글거리는 듯했다. 어떤 친화감이 그녀를 이 살아 있는 시와 이어주고 잇었다. 밤의 말랑한 흰 빛 가운데 초인적인 전율이 질주하고, 붙을 수 없는 희망이, 행복의 숨결 같은 무엇이 펄떡이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그녀는 사랑을 꿈꿨다."


"잔느는 행복에 겨워 미칠 것만 같았다. 만물의 광휘 앞에서 광적인 기쁨과 무한한 감동이 마음을 적셔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태양이었고, 그녀의 여명이었다. 그녀 삶의 시작이었다! 그녀 희망의 돋음이었다! 그녀는 태양을 끌어안고 싶어 눈부신 천공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이 빛의 발현처럼 신성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무력한 열광에 휩싸여 마비된 채 그대로 머물렀다. 그 순간, 그녀는 두 손을 이마로 가져가다가 자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달콤하게 울었다."


"그녀는 스스로 열정이라고 믿는, 온 존재의 격렬한 동요, 광적인 황헐감, 내면 깊은 동요는 아직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 그를 생각하면 이따금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끊임없이 그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곁에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와 눈길이 마주치면 얼굴이 빨개졌다가 창백해졌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전율이 일었다."


리종 이모는 가족에게조차 자리를 조금도 차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탐험되지 않은 땅처럼, 낯선 사람으로 남는 그런 존재였고, 그녀가 죽는다 해도 집안에 구멍이나 빈자리가 생기지 않을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삶 속에도, 습관 속에도, 곁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 속에도 들어갈 줄 모르는 그런 존재 중 한 사람이었다.


"리종 이모는 선한 인상이지만 마흔두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늙어 보였으며, 눈이 순하고 슬퍼 보였다. 그녀는 집안에서 어떤 일로도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조차 예쁘지도 않고 소란스럽지도 않아서 그녀를 안아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구석에 조용히 얌전하게 머물렀다. 그 후로도 그녀는 늘 희생하며 살았다. 처녀가 되었어도 아무도 그녀에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그림자가 친숙한 사물처럼, 우리가 매일 보는데 익숙해져서 신경 쓰지 않는, 살아 있는 가구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언니도 친정에서 들인 습관 때문에 그녀를 없는 존재처럼,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처럼 여겼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친근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지만, 그 태도엔 멸시 어린 선의가 감춰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즈였지만, 그녀 스스로도 상큼하고 젊은 그 이름을 거북해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결혼하지 않는 걸 보고서, 아마 앞으로도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서 리즈라는 이름을 친근하게 리종으로 바꿔 불렀다. 잔느가 태어난 뒤로 그녀는 '리종 이모'가 되었다. 언니와 형부에게조차 지독히 수줍음을 타는, 말쑥하지만 하찮은 친척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것은 무심한 애정, 무의식적인 연민, 혹은 천성적인 호의에서 비롯한 모호한 애정이었다."


잔느는 결혼이 꿈꿔 온 도취와 너무도 달라 소중한 기대가 파괴되고 행복이 파열된 환멸 속에서 마음 속 깊이 절망했다. 쥘리앵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잔느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사랑의 흔적은 홀연히 사라졌다. 쥘리앵은 재산과 가사의 관리를 맡아 쥐고서 임대차 계약을 재검토하고 농부들을 들볶아 비용을 줄였고, 스스로 농민 귀족처럼 행세하고 다녀서 약혼자 시절의 반짝이던 외양과 우아함은 잃고 없었다. 쥘리앵은 영혼도 마음도 그녀에게 닫혀 버린 낯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과 헤어져, 다른 땅으로 떠나온 것만 같았다. 자신의 삶과 생각 속 모든 것이 전복된 것 같았다. 심지어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걸까?' 문든 남편이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석 달 전만 해도 그녀는 그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햇는데,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발밑에 팬 구멍 속에 떨어지듯 결혼 속으로 이렇게 빨리 떨어졌을까?"


잔느는 남편 쥘리앵이 결혼 첫날부터 하녀 로잘리를 탐하여 로잘리가 쥘리앵의 아이를 낳은 사실을 알게 된다. 잔느는 음울하고, 느리고, 깊고, 무한한 절망이 온몸을 파고드는 느낌을 받는다.


"잔느는 기진맥진해서 팔을 늘어뜨리고 누운 채 눈을 멍하니 뜨고 앞만 바라보며 고통스럽게 생각했다. 로잘리가 한 말이 다시 떠올라 영혼을 할퀴고 송곳처럼 심장에 박혔다. '저는 그분이 신사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 역시 그를 신사라고 생각했었다. 바로 그래서 자기 몸을 내주며 일생을 걸었고, 다른 모든 희망을, 어렴풋이 예감한 모든 계획을, 미지의 미래를 포기했다. 그녀도 로잘리처럼 그를 신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디디고 올라설 발판도 없는 심연 같은 이 결혼 속에, 이 비참함, 이 슬픔, 이 절망 속에 떨어진 것이다."


"남작은 당황해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그도 그랬다. 그것도 자주 그랬고, 그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부부가 사는 지붕 아래서도 그랬다. 예쁘기만 하면 아내의 하녀들 앞에서도 망설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비열한 인간이었던가? 자신의 행실은 범죄라고 한 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 없으면서 왜 쥘리앵의 행실에 대해서는 그렇게 엄격하게 판단했을까?

여전히 흐느낌으로 숨을 헐떡이던 남작 부인은 남편의 탈선을 떠올리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연애 사건을 삶의 일부라고 여기며, 감상적이고 쉽게 감동하고 너그러운 그런 부류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쪼글쪼글하고 인상 찌푸린 채 살아 움직이는 태아를 만져 보았을 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덮쳐 와 잔느는 자신이 구원받았고, 모든 절망에 대한 보호를 보장받았으며, 다른 일에 정신을 팔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할 대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에겐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 아이. 돌연 그녀는 사랑에 실망하고 희망에 배신당한 만큼 열성적이고 극성스러운 어머니가 되었다. 아기 요람은 항상 그녀의 침대 옆에 있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창을 등지고 아지 요람 곁에 앉아 요람을 흔들며 온종일 그 자리에 머물렀다."


잔느는 남편인 쥘리엥이 하녀 로잘리에 이어 푸르빌 백작 부인인 질베르트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잔느는 인간에 대한 경멸과 공허감이 점점 커져서 자신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감각이 꺼져 버린 잔느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고, 상처 입은 그녀의 마음, 감상적인 영혼만이 따뜻하고 풍요로운 봄바람에 흔들리는 듯했다. 욕정 없이 들뜨고, 꿈에는 열정적이지만 육체적 욕구에는 죽어 버린 그녀의 마음은 증오심 어린 혐오감에 가득 차서 그 추잡한 동물성에 질겁했다.


생명체의 교접은 자연에 반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그녀를 분노에 빠뜨렸다. 그녀가 질베르트를 원망하는 건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취해서가 아니가 그 보편적인 진창에 빠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잔느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 외에 연인을 두었던 어머니의 비밀 편지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집안의 모든 편지들을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잔느는 죽음이 요구하는 온갖 슬픈 일들을 처리하느라 하루를 보냈다.


"다른 기억들도 떠올랐다. 로잘리, 질베르트 등, 씁쓸한 환멸을 안겨 준 그녀 삶의 기억들이었다. 모든 것이 비참하고, 속이고, 슬픔이며, 불행이고, 죽음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배신하고, 속이고, 고통과 눈물을 안겼다. 어디서 조금이나마 안식과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다른 생애서나 가능할 것이다. 지상의 시련에서 영혼이 해방될 때나 가능할 것이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쥘리앵은 잔느의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잔느는 신부의 조언대로 쥘리앵에게 자신이 임신하도록 믿게 했고,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뭐라고? 당신 미쳤소? 아이를 더 갖겠다고? 아! 절대 안 될 일이지! 빽빽거리고 울고, 모든 사람을 정신없게 만들고, 돈도 드는데, 하나로도 많아. 아이를 하나 더 갖겠다고! 안 되지!"


"이제 그녀는 다시 행복하다고 느꼈고, 어머니의 죽음이 남긴 고통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에 놀랐다. 위로받을 길 없는 슬픔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생한 상처가 겨우 두 달 만에 아물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그녀의 인생에 슬픔의 장막처럼 드리운 아련한 우수뿐이었다. 앞으로는 어떤 사건도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자랄 테고,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기쁨 마음으로 늙어갈 것이다."


잔느의 삶의 모든 추억과 이어져 있는 피코 신부가 떠나가고 젊은 신부인 톨비악 신부가 마을에 찾아왔다. 톨비악 신부는 사랑에 격노하며,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냉혹한 불관용의 태도를 보였고 고장의 모든 청년들은 미사에 가는 걸 그만두었다.


"젊은 신부의 엄격함과 난폭함에 대해, 타고난 본능과 자연법칙에 그가 가하는 박해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남작은 신부를 향한 증오심이 깨어나는 걸 느꼈다. (...)

그에게는 번식이 보편적인 위대한 법칙이요, 보편적 존재의 한결같은 난해한 의지를 실현하기에 존중받아 마땅한, 신성하고 성스러운 행위였다. 그래서 그는 이 농가 저 농가를 다니면서 생명을 박해하고 관용을 모르는 신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개시했다."


"톨비악 신부는 처음엔 어리둥절한 채 서 있다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커다란 우산을 들어 올리더니 모여 있는 꼬마들의 머리통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놀란 아이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났다. 신부는 분만 중인 개와 마주하게 되었다. 개는 일어서려고 애쓰고 있었다. 신부는 어미 개가 다리를 딛고 설 여유조차 주지 않고 미친 듯이 팔을 휘둘러 개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묶인 개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맞고는 바둥거리며 끔찍한 신음 소리를 냈다. 우산이 부러졌다. 그러자 빈 손이 된 신부는 개 몸에 올라가 미친 듯이 밟고 뭉개고 짓이겼다. 그 압박에 마지막 새끼가 세상 밖으로 튀어 나왔다. 눈도 뜨지 못하고 깨갱거리고 젖꼭지를 찾고 있는 갓난 새끼들 틈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아직 꿈틀거리는 어미 개를 신부는 뒤축으로 광포하게 밟아 죽였다."


잔느의 남편인 쥘리엥과 아내인 질베르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푸르빌 백작은 두 사람을 살해하고 사건을 은폐한다. 그리고 잔느는 딸을 사산한다. 잔느는 아들인 풀레가 열 살이 되어서도 한 살쯤 된 아기처럼 대했다. 잔느는 아이가 걷고, 달리고, 작은 어른처럼 말한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잔느는 풀레를 시골 사람으로 키워서 영원히 함께 지내고 싶었다. 잔느는 자신의 행복에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는 아버지인 남작의 조언을 듣고 아들을 중학교에 보낸다.


"그녀를 품에 안았던 이 남자가 죽고 나서야 그에 대해 막연하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 잔느는 행복한 순간만 생각하기 위해 고통은 용서했다. 게다가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한 달 한 달 쌓여 가는 세월은 켜켜이 쌓이는 먼지처럼 그녀의 모든 기억과 고통을 망각의 먼지로 덮었다. 그녀는 아들에만 온전히 몰두했다.

아들은 그를 에워싼 세 사람의 우상이며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전제군주처럼 군림했다. 그가 거느린 세 노예 사이에 일종의 질투심마저 생겨났다. 잔느는 남작이 아들을 무릎 위에 얹어 말을 태워 주고 나서 아들의 입맞춤을 듬북 받는 걸 신경질적으로 바라보았다. 리종 이모는 모든 사람에게 늘 무시당해 왔듯이 아이에게도 무시당했고, 아직 말도 잘 못하는 그 지배자에게 종종 하녀 취급을 받고는 자기 방으로 가서 자신이 구걸해서 얻은 보잘것없는 어루만짐과 아이의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받는 포옹을 비교하며 울었다."


"저 애가 많은 걸 알 필요가 뭐 있어요. 저 애를 시골 사람으로, 시골 신사로 키워요. 다른 많은 귀족들처럼 자기 땅을 가꾸고 살면 되죠.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고 죽게 될 이 집에서 살면서 행복하게 늙으면 되지요. 그 이상 바랄 게 뭐 있어요?"


"저 아이가 스물다섯 살이 되어 네게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답할 거냐? 저는 어머니의 잘못으로, 어머니의 이기적인 모성애 때문에 아무것도 못 되었다고,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일할 능력도 없고, 중요한 인물이 될 수도 없어요. 제가 어둡고 비천하고 죽도록 슬픈 삶을 살도록 태어난 건 아니잖아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머지의 애정이 내게 이런 삶을 살게 만든 겁니다."


"점점 커져 가는 불안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공허감에 빠져 몽상하며 개 마사크르만 데리고 홀로 며칠 동안 주변을 배회하고 다녔다. 때때로 오후 내내 절벽 꼭대기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때로는 숲을 가로질러 이포르까지 내려가서 추억을 좇아 옛 산책을 다시 하곤 했다. 처녀 시절 꿈에 취해 그곳을 거닐던 때가 참으로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들을 다시 볼 때마다 마치 10년 동안 아들과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여겨졌다. 아들은 나날이 어른이 되어 갔다. 그녀는 나날이 늙어 갔다. 아버지는 그녀의 오빠 같았고, 리종 이모는 스물다섯 살에 시든 그대로 더 이상 늙지 않아서 그녀의 언니처럼 보였다."


예순여덟 살이 된 리종 이모는 폐렴이 악화되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후 하녀였던 로잘리가 잔느를 찾아와 잔느 곁에 남겼다고 말한다.


"오! 나는 운이 나빴어. 모든 불행이 내게 쏟아졌지. 운명이 평생 악착스레 나를 따라다녔어."


"그런 말씀 마세요, 마님. 그렇게 말해선 안 되죠. 결혼을 잘못 하신 겁니다. 그뿐이에요. 그런 식으로, 약혼자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결혼하면 안되지요."


잔느는 집을 나가 빚에 허덕이는 아들 폴레로 인해 돈이 고갈되자 로잘리의 조언대로 성을 팔아 바트빌로 떠난다.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그리워한 건 바다였다. 25년 동안이나 가까이 지냈던 바다와 그 짠내 품은 공기와 성난 파도, 으르렁 거리는 파도 소리, 세찬 바람이었다. 매일 아침 그녀가 푀플의 팡문 너머로 바라보던 바다, 밤낮으로 호흡했던 바다, 가까이에서 느껴 온 바다, 의식하지 못한 채 사람처럼 사랑했던 바다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 삶에서 기억할 만한 날짜들에 줄을 그어 두었는데, 그래서 중요한 사건에 앞서거나 뒤이은 모든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하나씩 재구성하고, 한데 모으고 서로 결부시켜, 때로는 한 달 전체를 온전히 되살리기도 했다.

집요한 관심을 기울여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의지를 집중해서 푀플에서 산 첫 두 해는 거의 고스란히 복원해 냈다. 그녀 삶의 먼 기억들은 이상하리만큼 쉽게 부각되어 떠올랐다.

그러나 그다음 해들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뒤섞이고, 포개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종종 달력을 향해 머리를 기울이고 정신을 옛날에 집중한 채 무한히 머물렀지만, 떠올리려는 기억을 그 달력에서 되찾을 수 있는 건지조차 기억해 내지 못했다."


"미래를 기다리던 시절, 그녀는 이런 포근한 날들의 혼곤한 취기와 감미로움을 음미했고, 똑같은 동요에 전율했었다. 미래가 닫혀 버린 지금에 와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되찾았고, 마음속으로 다시 만끽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문에 괴로웠다. 깨어난 세상의 영원한 기쁨이 그녀의 메마른 살갗 속에, 식어버린 피 속에, 짓눌린 영혼 속에 스켜들면서 이제는 미약하고 고통스러운 매혹밖에 안기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마간 넋이 나간 채 머물렀다. 얼마 지나서 서서히 정신이 들자 자신이 미쳐 가는 건지 겁이 나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길이 우연히 몸을 기대고 있던 장식 널에 닿았다. 그리고 풀레의 눈금을 보았다.

희미한 눈금 자국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무늬 위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칼로 새긴 숫자는 아들의 나이와 달, 키를 가리키고 있었다. 때로는 조금 더 큰 남작의 글씨였고, 때로는 좀더 작은 그녀의 글씨였으며, 때로는 살짝 흔들린, 리종 이모의 글씨였다. 마치 옛날의 아들이 키를 재도록 금발을 찰랑이며 작은 이마를 벽에 대고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잔느는 편지를 통해 아들인 풀레의 아내가 어린 딸을 낳고 죽어가고 있으며 아들에게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로잘리는 풀레의 딸을 잔느에게 데려온다. 잔느는 감미로운 온기가, 생명의 열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어 다리에 닿더니 살 속까지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무한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녀는 별안간 포대기를 열고 아직 보지 못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 아들의 딸이었다. 여린 생명체가 밝은 빛에 놀라 파란 눈을 뜨고 입술을 오물거리자 잔느는 광적으로 아이를 끌어안았고, 품에 안고 들어올려 마구 입맞춤을 쏟았다.

로잘리가 기뻐하면서도 퉁명스레 그녀를 말렸다. "자, 자, 잔느 마님, 그만하세요. 그러다 아기가 울겠어요."

그러곤 아마도 자기 생각에 대답하려는 듯 덧붙였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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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어느 인생』 기 드 모파상 평점10점 | s******e | 2019.11.27 리뷰제목
이 책 『어느 인생』 은 당연한 말이지만, 기 드 모파상의 신간이 아니다. 기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의 일생』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한다. 잘못됐던 제목을 바로잡고 이번에 새로 출간된 책이다. 원어 제목은 UNE VIE 프랑스어다. 나는 프랑스어를 잘 모른다. 다만 지인에게 물어보니 프랑스어로 '인생'이라는 단어가 여성명사로만 쓰인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번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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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어느 인생』 은 당연한 말이지만, 기 드 모파상의 신간이 아니다. 기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의 일생』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한다. 잘못됐던 제목을 바로잡고 이번에 새로 출간된 책이다. 원어 제목은 UNE VIE 프랑스어다. 나는 프랑스어를 잘 모른다. 다만 지인에게 물어보니 프랑스어로 '인생'이라는 단어가 여성명사로만 쓰인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번역이 될 때 여자의 일생이라고 번역이 됐을까?

 

『어느 인생』 의 저자 모파상은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고전 작가라고 한다. 생텍쥐페리,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 등이 뒤를 잇는다고 하니 (나는 잘 몰랐던 작가지만) 대단한가 보다. 책의 주인공은 기존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자다. 모파상은 19세기의 한 여성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인생을 이야기하려 했다.

 

 

"이 작품을 통해 모파상이 말하려는 건,

'보라, 이 여자의 일생을'이라기보다는,

'보라, 이것이 인생이다'인 셈이다."

 

 

책은 주인공 잔느가 수녀원에서 돌아온 날부터 시작된다. 수녀원에서 돌아와 자신의 성을 갖고 이제 성인으로의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처음 만난 잔느는 밝고 희망 가득 찬 소녀로 보였다. 몇 년간의 수도원 생활 때문에 더 자유에대한 갈망이 컸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성에서 마주하는 자유에 흠뻑 취한 잔느는 앞으로의 앞날을 아주 밝게 그린다. 그리고 그 나이의 누구나 상상하는 운명같은 사랑을 찾으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쥘리앵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조금 성급한 느낌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사랑을 원하는 잔느와 마침 눈 앞에 짠하고 나타난 쥘리앵, 그리고 잔느의 부모님도 딸을 곁에 둘 수 있겠다는 생각에 둘은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쥘리앵은 잔느가 생각했던 그런 운명적 사랑이 아니었다.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진행된 결혼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잔느는 자신이 생각하던 쥘리앵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절망에 빠진다. 상상과 다른 결혼생활,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쥘리앵은 바람을 핀다. 이런 이야기가 늘 그렇듯 그 상대는 잔느와 자매와 다름없이 지내는 하녀 로잘리. 게다가 평소 친하게 지냈던 백작 부인과도 내연관계임을 알게된다. 쥘리앵에게서 마음이 완전히 떠난 잔느는 점점 아들 폴에게만 애정을 쏟으며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잔느의 삶은 급속도로 무너진다. 쥘리앵에게서 받은 상처를 아들 폴에게 치유받으려던 잔느는 폴의 사업 실패로 가세까지 기울게 된다. 결국 잔느는 자신의 성까지 팔아치우게 되는데, 이쯤에선 '이게 인생' 이라니 너무 하잖아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아들에 의해 집안이 무너졌지만, 잔느는 아들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한한 사랑은 어머니의 모성애를 너무도 깊이 보여줘서 마음이 더 아렸다. 그렇게 밝고 찬란했던 잔느가 마지막에 그렇게 무너졌음에도 폴의 아이를 보며 기쁨에 겨워하는 모습. 그 마지막 모습에 하녀 로잘리가 마지막 말을 남긴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이 책이 당시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책 속 내용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관습과, 종교의 문제들도 많이 담겨있었다. 그런 것들이 지금에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 인생에 산재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하며 내던지는 내 인생이 사실은 어떻게 되버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렇다면 내가 나가야 하는 인생은 어떤 인생이 되어야 하는지 한 번 쯤 생각을 해보게도 했다.

 

어려운 도전을 하는 내게 아빠는 너무 힘든일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하셨다. 인생 별거 없다고, 너무 어렵게 대단한일 하며 살려 하지 말고 쉽게 사는 것도 좋다고 하셨다. 당시엔 응원보다 만류를 하는 아빠에게 서운함이 더 컸지만, 차츰 해가 넘어가면서 조금씩 아빠의 말을 이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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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어느 인생(초라한 진실)_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은 게 인생이라면 평점10점 | h***s | 2019.11.24 리뷰제목
한 여자의 삶에서 우리 모두의 인생을 마주하다! 쓸쓸하고도 고독한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그늘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아름다운 고전!        프랑스 고전 작가들의 판매 부수를 집계한 《르 피가로 리테리르》지에 따르면 8년이라는 자료 조사 기간 동안 장르에 상관없이 가장 많이 팔린 작가로 모파상을 꼽았다고 한다. 몰리에르, 에밀 졸라,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 등을 제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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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삶에서 우리 모두의 인생을 마주하다!

쓸쓸하고도 고독한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그늘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아름다운 고전!

 

 

 

   프랑스 고전 작가들의 판매 부수를 집계한 《르 피가로 리테리르》지에 따르면 8년이라는 자료 조사 기간 동안 장르에 상관없이 가장 많이 팔린 작가로 모파상을 꼽았다고 한다. 몰리에르, 에밀 졸라,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 등을 제치고 말이다. 모파상이라는 이름의 유명세에 비하면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것이 다소 부끄러워지는 결과다.

 

 

 

   특히 모파상은 10년이라는 짧은 문단 생활에서 단편소설을 무려 300여 편이나 쓰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 가운데 세계인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은 작품이 ‘Une vie’, 즉 ‘어느 인생’ 혹은 ‘일생’을 의미하는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한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번역본이『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처음 출간된 판본의 번역이 영어 번역본 제목 ‘A woman's life’를 그대로 옮긴 일본어판을 번역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니, 이 작품을 단순히 여성의 일대기로 단정 짓지 않으려는 역자의 시도가 남달리 다가온다. 사실 단편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한 여성의 불운과 불행으로 점철된 기구한 삶’으로 읽힐 수 있을 법하지만, 그것을 한 개인에게 닥친 어떤 특정된 서사로만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은 일종의 연대 의식과 세대적 공감에 따라 보다 입체적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녀’가 아니라, ‘여성’을,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 380p     

 

 

 

   『어느 인생』은 주인공인 잔느의 시점에서 시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전개로 나눌 수 있다. 수녀원 생활을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잔느가 푀플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몽상하며 사랑에 대한 달콤한 꿈을 꾸는 시기가 바로 첫 번째다. 딸을 행복하고, 착하고, 바르고 다정한 여자로 만들고 싶었던 남작은 딸을 사크레쾨르 수녀원으로 보냈고, 엄격히 유폐되어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던 잔느는 열일곱 살이 되자 마침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아름다운 성에서 자유와 무한한 희망에 흠뻑 도취된다. 그녀는 긴긴 밤 동안 자신의 마음이 속삭임으로 가득 차 넓어지고, 욕망이 별안간 마음에 우글거리는 것을 느낀다. 밤의 말랑한 흰 빛 가운데 초인적인 전율이 질주하고, 붙들 수 없는 희망이, 행복의 숨결 같은 무엇이 펄떡이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고, 몸을 기댄 채, 서로의 심장이 펄떡이는 소리를 듣고, 어깨의 체온을 느끼며, 달콤한 여름밤의 소박함에 둘의 사랑을 섞으며 걸을 테고, 그렇게 오직 사랑의 힘으로 서로의 비밀스러운 생각까지 쉽게 꿰뚫어 볼 정도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을 상상하고, 꿈꾼다. 누구나 꿈꾸는 운명 같은 사랑을.

 

 

 

 

 

 

   그러던 어느 날, 사제를 통해 작년에 죽은 장 드 라마르 자작의 자제가 에투방 마을에서 작은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빚을 청산하고 소박한 거처에서 성실히 돈을 모은 데다 사교계에서도 좋은 평판을 쌓아 꽤 괜찮은 조건의 남편감이었다. 마침 미사를 갔던 남작 부인과 잔느는 그곳에서 쥘리앵을 만나고, 그들이 멀게는 친분이 있는 사이임을 알게 되면서 자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자작은 잔느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의 검은 벨벳 같은 눈이 잔느의 파란 눈과 마주치곤 했는데, 그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무엇인지 채 분별하기도 전에,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잔느의 소망과 점차 적극적으로 변하는 쥘리앵의 구애, 사랑하는 딸을 곁에 두면서 데릴사위까지 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남작 부부의 뜻이 모두 더해져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소설은 열일곱 살 무렵의 잔느를 통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결혼으로 하여금 사랑을 완성하려는 여성의 통속적인 애정관과 사랑관을 섬세한 배경묘사와 심리묘사로 표현함과 동시에 귀족들의 관습과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암시를 예고하기도 한다.

 

 

 

그들은 검소하게 생활했기에 그 정도 수입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집안에 항상 뚫려 있는 밑 빠진 독인 선량함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 선량함은 태양이 늪의 물을 말리듯이 그들 수중의 돈을 말렸다. 돈은 흐르고, 새고, 사라졌다. 어떻게? 누구도 알지 못했다. / 23p

 

 

가끔은 잔느가 로잘리를 대신해 어머니를 산책시켰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딸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얘기했다. 잔느는 그 오래전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의 생각과 욕구가 유사함에 놀라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감동을 느끼며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먼저 전율했다고 상상하는데, 사실 똑같은 감동이 이미 최초 피조물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으며, 최후의 남녀들의 심장을 뛰게 할 것이다. / 47p

 

 

어느 날 저녁, 스무 살이었던 리즈가 물에 뛰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삶에서, 그녀의 태도에서 그 무엇도 그런 광기를 예감하게 하는 건 없었다. 그녀는 반쯤 죽은 상태로 건져졌다. 그녀의 부모는 그 행동의 불가사의한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성이 나서 두 팔을 치켜들고 얼마 전에 말 ‘코코’가 구덩이에 빠지면서 발이 부러져 도살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에 대해 말하듯이 그저 “경솔한 짓”이라고만 말했다. / 80p

 

 

 

 

 

 

   잔느와 쥘리앵,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그들이 함께 시작한 삶은 어떠할까? 결혼이라는, 파기할 수 없는 이 긴 대면에서 서로에게 어떤 기쁨, 어떤 행복, 혹은 어떤 환멸을 마련해 두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서로 진지한 물음과 답변이 없이 돌입한 그들의 결혼은 첫날부터 삐걱거리고 만다. 잔느로서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고 마치 그녀를 소유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난폭하게 구는 쥘리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내라면 마땅히 남편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한다고 믿는 쥘리앵으로서는 그녀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신혼여행지인 코르시카에서는 낯선 이국의 매력이 혐오감과 모욕감을 잠시 덜어주었지만, 돌아와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그로인해 그녀는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만다. 심지어 쥘리앵이 잔느와 자매나 다름없는 하녀 로잘리와 간통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이 나고, 그의 사생아까지 낳은 사건은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뿐만 아니라, 평소 마음을 나누며 가까이 지냈던 백작 부인과 쥘리앵이 내연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걸어 닫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오로지 자신의 아들인 폴을 향한 집착만 커져갈 뿐이었다. 이렇게 불안한 결혼 생활의 서막과 함께 불행으로 점철된 결혼 생활의 연속으로 고통을 겪는 시기가 바로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인생의 감미로운 비밀에 씌워진 베일을 걷는 건 그 남자의 몫이란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이 어떤 의문도 품어 본 적이 없다면 꿈 뒤에 감춰진, 조금은 난폭한 현실 앞에서 종종 반항하곤 한단다. 영혼에 상처 입고, 몸까지 상처 입고서 법이,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이 절대적 권리로 허용하는 일을 남편에게 거부하곤 하지. 더 이상은 말해 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거라. 너는 온전히 네 남편의 소유라는 점 말이다.” / 94p

 

 

그녀는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과 헤어져, 다른 땅으로 떠나온 것만 같았다. 자신의 삶과 생각 속 모든 것이 전복된 것 같았다. 심지어 이런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걸까?’ 문득 남편이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석 달 전만 해도 그녀는 그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발밑에 팬 구멍 속에 떨어지듯 결혼 속으로 이렇게 빨리 떨어졌을까? / 96p

 

 

하녀가 바로 같은 침대 발치에서 다리 사이로 아이를, 이토록 잔인하게 자신의 내장을 찢고 있는 어린 존재의 형제가 되는 아이를 떨어뜨렸던 날을 떠올리자 다른 통증이, 영혼의 고통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쓰러진 하녀 앞에서 남편이 보인 행동을, 던진 눈길을, 했던 말을 그림자 한 점 없이 생생하게 떠올렸다. 이제 그녀는 마치 그의 생각이 그의 몸짓에 기록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행동에서 하녀에게 보였던 것과 똑같은 권태를, 똑같은 무심함을 읽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성가신 이기적인 남자의 똑같은 무심함이었다. / 200p

 

 

 

 

 

 

   끝으로 소설은 매우 가파르게 잔느의 삶이 내리막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아들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치유했던 잔느가 번번이 폴의 사업 실패와 늘어난 빚을 갚아주느라 급격하게 가계가 기울고 마침내 그녀의 성까지 팔아 작은 오두막집으로 가게 되는 장면은 서글프다 못해 애처롭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낭만적인 연애와 결혼을 꿈꾸었던 그녀의 결말이 이토록 초라한 삶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그렇게 자신을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갓난아이를 부탁한다는 폴의 편지에 또 한 번 기꺼이 손을 내미는 그녀의 맹목적이고 무모한 사랑은 읽는 사람의 억장까지 무너지게 만든다. 하지만 여린 생명체의 온기가 전하는 그 무한한 감동에 기뻐하는 로잘리와 잔느를 보며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 어떤 말보다 우리의 가슴을 명징하게 꿰뚫는다.

 

 

 

   『어느 인생』을 읽으며 모파상이 여자였던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그만큼 섬세한 감정 묘사와 유려한 문체가 유독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인공을 넘어 당대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한 작가의 통찰력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다양한 관습과 결혼, 종교, 가치관의 문제들까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은 그렇고, 그런 것. 별 거 없는 듯하지만 또 어찌 보면 별 거 있는 듯한 이 복잡한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 다른 분들도 이 책을 통해 해답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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