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카슨은 두 눈먼 시인 호메로스와 스테시코로스 차이를 서두에서 꺼낸다. ‘호메로스는 세상 만물에 그것의 가장 적절한 속성을 나타내는 고정적인 형용사를 붙여 서사적 소비를 한다. 호메로스적 방식에는 열정이 있는데, 그것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소비는 실체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기호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에 반해 스테시코로스는 전통적인 형용사구의 걸쇠를 벗겨내는 이였다. 호메로스가 영웅 서사를 공고히 한 반면 스테시코로스는 영웅에 가려진 인물에 더 집중한다. 호메로스가 ‘헤라클레스’의 12과업에 집중했다면 스테시코로스는 헤라클레스가 열 번째 과업에서 만난 에리테리아(빨강 섬)에 사는 괴물 ‘게리온’에 집중해 시를 쓴다. 스테시코로스는 그 아름다움에 찬양의 대상이던 헬레네가 간통한 자라는 시를 쓴 뒤 눈이 멀자 바로 ‘철회의 시’를 씀으로써 다시 시력을 찾는다. 카슨은 스테시코로스가 원인을 더 정확히 찾아보려 한 이였다고 말한다.
많은 작품이 유실된 스테시코로스의 뜻을 이어받아 카슨은 이 책에서 현대판 게리온의 서사를 펼치고 있다. 그녀는 “우리 모두 거의 항상 자신이 괴물이라고 느끼니까요”라고 말하며 게리온의 괴물성에 매료된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그 괴물성은 ‘특별함’이기도 했다. “그 빨강 날개가 그의 괴물성을 나타내는 육체적 표식이라면, 극단적인 비사회성과 동성애적 성향은 괴물성의 정신적 발현이다.”(해설, p253)
가정과 세계 어디에서도 친화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소년 게리온은 헤라클레스를 만나 동성애이면서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고 동시에 자신을 깨부수는 여정을 겪게 된다. 단순히 이 작품이 그리스 고전을 재해석하기 때문이 아니라 로맨스(중세 유럽의 기사 모험담을 다룬 문학 장르)이자 자기 극복의 영웅 이야기로 해석되는 이유이다.
이 소설은 왜 ‘빨갛다'는 형용사를 적극 수용했는가. 카슨은 말한다.
“형용사란 무엇인가? 명사는 세상을 이름 짓는다. 동사는 이름을 움직이게 한다. 형용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다. 형용사(adjective, 그리스어로는 epitheton)는 그 자체가 ‘위에 놓인’, ‘덧붙여진’, ‘부가된’, ‘수입된’, ‘이질적인’이라는 형용적 의미이다. 형용사는 그저 부가물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다시 잘 보라. 이 수입된 작은 메커니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특정성 속에서 제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형용사의 존재는 걸쇠다.”
(<빨강 고기 : 스테시코로스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中)
게리온의 고통은 바로 그러한 ‘형용사’의 걸쇠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명사이고 사랑하다는 동사인데, 게리온이 헤라클레스를 사랑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허용된 방식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는 ‘은밀하다’, ‘자유롭다’, ‘어둡다’, ‘빽빽하다’, ‘(냄새를) 맡다’, ‘끔찍하다’ , ‘뜨겁다’ 같은 ‘형용사’들이 설명해준다.
동사는 외부적이고 형용사는 내부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내부적인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모두 기록하기로 결심해 자서전을 쓰려 한다. 그러나 글로써가 아니다. 사진은 결과가 아니라 오직 그때의 상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형용사적이다. 이 세계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채 사는 그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가 마주하게 되는 이칸티카(*) 화산도 하나의 상태이자 상태를 시험하는 곳-명사이다.
(*)이칸티카Icchantika는 산스크리트어로 ‘욕망을 가진 사람’, 영구히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중생’을 뜻한다. 이칸티카스는 실제로 페루에 있는 화산 이름이 아니라 가상의 지명이다.
“다시 동물의 으르렁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뒤이어 멜론이 땅에 떨어지는 듯한 쿵쿵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앙카시를 보았다.
높은 곳의 공기가 너무 뜨거워서
새들 날개가 타서 떨어지는 거야. 앙카시가 말을 멈췄다.
그와 게리온은
서로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날개’라는 말에 두 사람 사이에 진동 같은 게 지나갔다.”
(<빨강의 자서전> ⅩⅩⅩⅢ. 빨리감기 中)
날개가 있어서 무사할 수도 있지만 날개마저 떨어질 수 있는 화산에 뛰어들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는 이상한 이야기.
“앙카시가 말하고 있었다.
우아라스 북쪽 산지에 주쿠라는 마을이 있는데 주쿠에는
이상한 믿음이 있지.
거긴 화산 지역이야. 지금은 활화산이 아니지만. 옛날에 주쿠 주민들은
화산을 신으로 숭배했고
사람들을 거기 던지기도 했어. 제물로? 담요에서
머리를 내민 게리온이 물었다.
그건 아냐. 그보단 하나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었지. 그들은 화산 내부에서 온 사람을
찾고 있었어. 현자들을.
성자라고도 할 수 있겠지. 케추아어로는 ‘야스콜 야스카마크Yazcol Yazcamac'인데
‘가서 보고 돌아온 사람들’이라는 뜻이야ㅡ
인류학자는 ‘목격자들’이라고 하겠지.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어.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목격자들. 게리온이 말했다.
그래. 화산 내부를 본 사람들.
그리고 돌아온.
그래. 어떻게 돌아왔는데
날개.
날개? 응 야스카마크는 날개 달린 빨간 사람이 되어 돌아 온대.
모든 약점이 다 타서 없어진 상태로ㅡ
인간의 유한성까지도 말이야.”
(<빨강의 자서전> ⅩⅩⅩⅦ. 목격자들 中)
헤라클레스 신화에서는 게리온도 소년의 작은 개도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
방식은 다르다 해도 게리온 선택에 헤라클레스가 영향을 미쳤다는 점 때문에 이 소설이 아름답고 슬프게 자꾸 느껴진다. 영화 <아이다호>나 <춘광사설(해피투게더)>을 보면서 그랬듯.
“긁힌 3월 하늘에서 내려
눈먼 대서양의 아침으로 빠져드네 작은
빨강 개 한 마리 저 아래 해변을 달리네
자유를 얻은 그림자처럼”
(<빨강 고기 : 스테시코로스의 단편들> Ⅻ. 날개 中)
1998년에 쓴 소설을 2017년에 사서 2022년에 읽었다.
당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다고 느껴놓고 몇 페이지 못 가 홀랑 다른 책으로 넘어갔다.
이번에 각 잡고 제대로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는 채로 읽었고, 좋았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24년 전 쓴 소설의 세련에 압도당했다.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 10번째 과업인 '게리온의 황소떼를 데려올 것'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다.
그리스 신화와 각종 고전을 알면 더 재미있다는데 모르고 읽어도 환상이다.
내가 반한 세련을 두서없이 나열해 보겠다.
첫째
로맨스
세상에, 이 작가 미쳤다. 게리온과 헤라클레스를 연상연하 커플로 맺어줘버렸다.
캐릭터 설정부터 이래버리면 소설 내내 특별한 사건 없어도 독자의 머릿속엔 강렬한 서사가 전진할 지경인데, 심지어 첫눈에 반한다.
때는 금요일 새벽 3시 버스터미널이었다. 게리온은 엄마에게 전화 걸 잔돈을 바꾸기 위해 터미널에 들어갔다.
하필 그때 뉴 멕시코발 버스에서 내린 헤라클레스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물었다. 1달러 잔돈으로 바꿔줄 수 있니?
이탤릭체처럼 게리온을 알아본 헤라클레스가 대답한다. 아니.
대신 친절의 가치를 믿는 사람으로서 공중전화 값 25센트를 그냥 준다.
이대로 헤어져 버리면 아련할 수야 있겠지만, 로맨스도 끝. 헤라클레스는 열여섯의 패기로 잔망을 좀 떨기로 한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밤이 어둠 방울을 흩뿌리며 지나가"는 와중, 너무 차갑다며 자신의 셔츠 속에 게리온의 손을 묻어버리는 헤라클레스의 플러팅. 하. 그때 게리온은 열네 살이었다.
마침 이 책을 읽던 2022년 2월 1일 새벽엔 눈이 진창 내렸다.
대도시의 사랑법까지 안 가도 24년 전 소도시의 낭만 퀴어가 펼쳐진다.
둘째
행간
행간에 숨겨둔 이야기의 층위가 두껍다. 이건 발굴한 사람만이 간직할 수 있는 화석.
내가 발굴해 짐작한 층위는 이런 거다.
열네 살 게리온 너 왜 새벽 3시에 터미널 근처를 배회했니. 멀리 떠나고 싶었니?
혹시 17페이지에 나온 "자기가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소년들이 많을까?"라는 문장과 관계있니?
행간. 층위. 이런 단어는 이 소설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과 긴밀하다.
분명 인물 간 사건이 있었고, 사건이 감정에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관계가 어긋났다.
하지만 독자는 사건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없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사건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청자로서의 나는 화자가 거세한 사건이 미치도록 궁금하냐. 전혀.
문장과 문장 사이에 묻어놓은 비밀을 길어올리는 게 내가 이 독서에서 획득한 재미이므로 오히려 놀이로 느껴졌다.
예를 들어보자.
p. 192
화물칸에 타면 돼.
화물칸?
총 가방에 넣으면 돼. 페루에 총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들 많아.
앙카시는 회전목마 가장자리에 앉아 두 팔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는 헤라클레스를 쳐다보았다.
게리온은 앙카시를 쳐다보았다.
게리온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 둘이 나를 여기 남겨두고 뒤도 안 돌아보고 페루로 간단 말이지 - 그때 둔중한 덜컹거림이 오싹한 소리를 덮쳤다.
· 10대에 헤어진 게리온과 헤라클레스. 20대가 되어 우연히 재회한 둘. 헤라클레스 곁엔 -현재 연인으로 짐작되는- 앙카시가 있다. → '해롯 백화점' 챕터 자체가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 '쳐다보았다'라는 서술로 교차하는 시선. → 둘에서 셋으로 바뀐 관계의 지정학은 시선으로 보여주고.
· 그 뒤에 따라오는 "둘이 나를 여기 남겨두고 뒤도 안 돌아보고 페루로 간단 말이지." → 세 남자가 펼칠 관계의 모험은 게리온의 독백이 예고하고.
· 그리고 아홉 문장 후에 등장하는 "그렇게 그들은 페루로 갔다." → 셋은 결국 '함께' 페루로 떠난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런 재미를 느꼈다.
셋이 같이 페루행 비행기 티케팅 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겠냐고.
게리온이 은근슬쩍 그들한테 묻어가려고 겉으론 고고한 척했겠지만, 속으론 얼마나 비참했겠냐고.
그럼에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심정은 또 어땠겠냐고.
이런 거 하나도 안 보여주고 그렇게 그들은 페루로 갔다며 퉁치다니.
하, 작가님 배포 진짜 헤라클레스 저리 가라.
셋째
엄마
남자아이들이 로맨스와 에로스 사이에서 줄타기할 동안 어른 여자들은 그들을 사랑으로 안아준다.
이 부분이 24년 전 세련의 백미다. 나는 게리온의 엄마와 사랑에 빠졌다.
p. 60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학교에 안 다니는 아이라고 들었는데, 나이가 많니?
게리온은 어머니의 목에 카메라 초점을 맞췄다.
이 근방에서는 아무도 그 아이를 못 봤다는데, 그 아이가 트레일러촌에 사는 게 맞니?
너 밤에 거기 가는 거야?
게리온은 카메라 초점링을 3미터에서 3.5미터로 바꿨다.
내가 계속 얘기하다가 똑똑한 얘기가 나오면 그걸 사진으로 찍으면 되겠구나, 어머니는 담배를 빨아들였다.
난 밤에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넌 믿어. 난 밤에 침대에 누워 너에게 왜 실용적인 걸 가르치지 않았는지 후회한단다. 글쎄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담배를 빨았다- 어쩌면 네가 섹스에 대해 나보다 많이 알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담뱃불을 끄려고 싱크대로 몸을 돌리는데 게리온이 찰칵 셔터를 눌렀다.
어머니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오, 마이, 갓.
나 이런 엄마 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게리온의 엄마는 '엄마'로만 불린다. 게리온의 엄마는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나라도 게리온 엄마에게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넷째
문장
문장, 문장, 문장.
미치도록 아름다운 문장들.
p. 40
그날은 그가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게리온은 이 작품에 내적인 모든 것들을 특히 자신의 영웅적 자질과 공동체에 큰 절망을 안겨줄 이른 죽음에 대해 썼다. 외적인 것들은 멋지게 생략했다.
p. 60
어머니 목소리는 그가 이 방에서 보낸 모든 세월에 동그라미를 쳤다.
p. 64
"거리가 어떻게 보이는가?" 단순 솔직한 질문이다. 거리는 공간 없는 내면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의 가장 자리까지 뻗어 있다. 그건 빛에 의존한다.
p. 83
고가도로 위에는 밤이 활짝 열려 있었고 질주하는 전조등 불빛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바람을 등지고 서서 바람이 자신의 껍질을 깨끗이 벗기게 했다.
p. 88
7월의 달그림자들이 잔디밭에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게리온은 그 그림자들에서 하나의 존재가 스며 나오는 걸 지켜보았다.
p. 99
할머니가 휘청거리자 게리온이 할머니의 남은 팔을 잡았다. 한 줌의 가을 같았다. 그는 거대하고도 나쁜 존재가 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의 팔을 잡은 후 언제 놓아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걸까?
p. 154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레이저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밤의 돌풍 한 줄기가 문으로 밀고 들어왔고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들판의 풀줄기처럼 한차례 흔들렸다가 대화를 이어갔다.
p. 206
게리온은 불안이나 슬픔 같은 감정 상태에는 단계가 있지만 권태에는 단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난 대단한 존재는 될 수 없을 거야. 그가 라마들에게 말했다. 라마들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
하루 만에 다 읽었다.
다음 날, 밑줄 그은 문장을 다시 한번 읽었다.
이 책 읽은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독서 모임 나가고 싶다. 없다면 내가 만들고 싶다. 사랑 얘기 쓰고 싶다. 또 읽고 싶다.
앤 카슨 작품 중 처음 읽어본 책인데, 주변에서는 많이들 이 책이 최고인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앤카슨을 잘 모르는 상태라서.. 뭣도 모르고 전자책으로 읽었다가 지금 머릿속에 남은 내용이 없어 종이책으로 다시 구매했습니다. 와닿는 부분 줄 치고 메모해가면서 다른 사람들 리뷰도 살펴봐가면서 다시 한 번 읽어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혹시 종이책 메모하는 거 싫어하시는 분들은 두권 구매하시길 추천드려요..)
평소에 아주 좋아하는 민음사 유튜브를 보고 내용이 흥미로워서 구매하게 되었다. 일단 표지 자체가 너무 예뻐서 마음에 든다. 형식이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형식이라 굉장히 새롭고 좋았다. 항상 헤라클라스의 입장에서 서술되던 이야기를 게리온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신선했다. 앤 카슨의 손에서 재창조된 신화의 이야기는 낭만적이었다. 이 새로운 이야기가 너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