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지식 계보학
최연식
옥당/2015.02.16
저자 최연식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같은 대학 국학연구원 부원장과 동아시아고전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는 역사를 정치 동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2003년 저서 <창업과 수성의 정치사상>을 통해 여말선초의 시대적 특징을 탐구했으며, 이후 한국사의 다양한 인물과 분야를 탐구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중국 북경대와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의 역사 속에서 살핀 권력의 메커니즘에 관심을 두고 한·중·일 삼국의 개국과 근대화 과정을 비교하는 연구를 기획하고 있다.
<조선의 지식계보학>은 그의 이런 관심사를 대중적으로 드러낸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조선의 역사를 지식인의 국가공인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 암투의 역사로 보고, 힘의 논리에 따라 역사를 조망한다. 조선의 지식인 15명이 문묘에 종사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일이 조선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하게 살핀다. 문묘에 종사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정몽주를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문묘 종사는 이들을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공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대표적 지식인의 국가 공인은 임금과 지식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p.7) 종묘가 왕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라면, 문묘는 지식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다. 문묘는 종묘와 함께 유교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에 태조는 종묘를 완공한 이후 문묘 건립을 서두러 추진해 태조 7년 7월에 완공했다.(p.190)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성공시킨 주역은 조광조와 그의 추종 세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한 김굉필의 문묘 종사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안으로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킴으로써 부당한 권력에 맞서다 희생된 지식인의 절의 정신을 치세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으로 부활시켰다.(p.207) 기대승은 선조에게 우리나라 도학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했다.
동방의 학문이 전해진 순서로 말하면,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시조 이며, 길재는 정몽주에게 배웠고, 김숙자는 길재에게서 배웠으며, 김종직은 김숙자에게 배웠고,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배웠으며,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배웠으니, 본래 원류가 있습니다.(p.208)
사화의 희생자들
이황이 문묘 종사를 청원한 지식인들은 모두 사화의 희생자들이었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연산군의 폭정에 희생되었고, 또 다른 정의의 수호자들에게도 똑같은 희생이 반복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김굉필과 정여창의 우의정 추증을 주도한 조광조가 <소학>의 무리라는 참소를 받고 기묘사화로 몰락했고, 이언적 마저 을사사화의 여파로 희생되었다.(p.217)
<선조실록>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 종사 청원 기록이 선조 3년(1570)에 처음 등장한다. 이때 이들이 제기한 문묘 종사 논의의 핵심은 정몽주의 문묘 종사 논의 때와 마찬가지로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된 사림 세력의 신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사림의 기상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한 상징적 조치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 네 명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었다.(p.241)
사현의 문묘 종사 자체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국조유선록>을 편찬함으로써 네 명으로 압축된 대표적 조선 지식인의 위상을 국가가 공인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황의 글을 <국조유선록>에 편입시키려는 제자들의 노력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선조 6년(1573)부터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이황을 포함한 5현의 문묘 종사 청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p.242)
선조는 재위기간 내내 5현의 문묘 종사를 시기상조라며 거부했고, 광해군도 재위 초반에는 선조와 같은 입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문묘 종사를 결정하자 광해군은 종전의 입장을 번복했다. 5현의 문묘 종사는 정몽주가 종사된지 93년 만의 일이었고, 그것도 다섯 명이 한꺼번에 종사되는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유생들의 상소로 시작된 5현의 문묘 종사 청원에 예조를 중심으로 정부의 대신들이 가세하고 이를 국왕이 수용함으로써 지식권력의 국가 공인이 확정된 것이다.(p.251)
14세에 즉위한 숙종은 남인 집권세력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성년이 된 후 경신환국을 단행해 남인 세력을 몰아내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허용했다. 이로써 이황 중심의 남인 학맥과 이이 중심의 서인 학맥이 국가가 공인하는 조선 지식계보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p.216)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는 인조 1년(1623)에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이후 서인 세력의 정치적 부침과 함께 종향-출향-복향을 반복한 끝에 71년 만인 숙종 20년에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로써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학맥과 이이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 학맥이 국가가 공인하는 조선 지식권력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 확정된 5현의 문묘 종사가 지식인 사회의 정치적 희생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이루어낸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면, 이때의 문묘 종사는 특정 정치 세력의 문묘 종사를 둘러싼 정치투쟁의 산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식권력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둘러싸고 왕권에 맞설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p.292)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는 성년이 된 숙종이 남인 세력의 전횡을 제어하기 위해 서인 세력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성사된 환국 정치의 산물이었다. (p.287)
그 후 숙종은 송시열의 청원이 시작 된지 36년 만인 재위 43년(1717)에 공의가 형성되었다며 김장생의 문묘 종사를 윤허했다.(숙종실록 43영 2월29일) (p.295)
영조 재위 기간에 단행된 양송(송시열, 송준길)과 박세채의 문묘 종사는 당파 간 극한 대립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탕평정책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지식 권력의 자율성이 왕권에 의해 위축되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p.301
정조 20년(1796)부터 노론 측 유생들에 의해 조헌과 김집의 문묘 종사가 잇달아 건의되자 정조는 김장생과 김집 부자를 함께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다며 거부했다. 결국 정조는 김인후만 승인을 하고 그의 위패를 이이의 위패 앞에 배치하도록 정한 후 종사 의식을 거행했다. (p.301)
정조는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헌과 김집이 문묘 종사를 거부하고 대신에 김인후의 문묘 종사를 승인함으로써 탕평의 효과를 거두고자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김인후의 문묘 종사는 탕평이라는 명목하에 지식권력의 자율성을 제약했던 왕권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한다. (p.302)
예컨대 영조는 박세채의 문묘에 종사하라고 명령하며 향후에는 문묘 종사에 관한 어떤 상소도 올리지 말라고 엄명했고, 정조는 “사도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단언하며 문묘 종사 문제에 관해 지식인 집단이 독자적으로 의견을 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결국 조헌과 김집의 문묘 종사 논의는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 10년 뒤인 그의 재위 20년(1883)9월에 다시 거론 되었고, 논의가 시작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고종의 허가를 받아 전격적으로 실행되었다.( p.302)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성리학의 신기원을 수립하기 위해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켜 충신의 예로 받들었고, 사화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직, 이황을 종사시켰다. 정치투쟁의 산물로 이이, 성혼, 김장생을 종사시켰으며, 탕평책의 일환으로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를 종사시켰다. 마지막 정치적 산물로 조헌과 김집을 종사시킴으로 모두 15인의 문묘 종사를 완성했다.
동국 18현과 도통의 계승을 시대별 정리
▲ 고려시대 문묘에 종사된 지식인
설총 : 신라인-고려 현종13년(1022) =우리말로 중국의 아호병서를 풀이함, 원효의 아들
최치원 : 신라 ?고려 현종11년(1020) =문장가
안향 : 고려 ?충숙왕 6년(1319) =학교 설립에 힘씀
▲ 조선시대 문묘 종사 : 8차에 걸쳐 단행
1차 = 정몽주 : 중종 12년(1517)조선 건국에 반대, 조선 성리학 계보의 신기원 수립
-폭정으로 훼손된 건국 정신을 회복하려 함
2차 = 5현 : 학맥;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김굉필 광해군 2년(1610) 연산군의 폭정에 희생
정여창 : 광해군 2년(1610) 연산군의 폭정에 희생
이언적 : 광해군 2년(1610)<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구인록>을사사화
조광조 : 광해군 2년(1610)기묘사화 희생자
이 황 : 광해군 2년(1610) 남인 학맥의 대표자
3차 = 이이 : 숙종8년(1682) 서인학맥의 대표자
성혼 : 숙종8년(1682) 서인학맥의 대표자
4차 = 김장생 : 숙종43년(1717) 특정 정치집단의 정치투쟁의 산물
5차 = 송시열 : 영조32년(1756) 탕평책의 소산
송준길 : 영조 32년(1756) 탕평책의 소산
6차 = 박세채 :영조40년(1764) 탕평책의 소산
7차 = 김인후 : 정조 20년(1796) 탕평책의 소산
8차 = 조헌 : 고종 20년(1883) 정치적 산물
김집 : 고종 20년(1883) 정치적 산물
조선의 지식 계보학
최연식
옥당/2015.02.16
sanbaram
저자 최연식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같은 대학 국학연구원 부원장과 동아시아고전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는 역사를 정치 동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2003년 저서 <창업과 수성의 정치사상>을 통해 여말선초의 시대적 특징을 탐구했으며, 이후 한국사의 다양한 인물과 분야를 탐구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중국 북경대와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의 역사 속에서 살핀 권력의 메커니즘에 관심을 두고 한·중·일 삼국의 개국과 근대화 과정을 비교하는 연구를 기획하고 있다.
<조선의 지식계보학>은 그의 이런 관심사를 대중적으로 드러낸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조선의 역사를 지식인의 국가공인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 암투의 역사로 보고, 힘의 논리에 따라 역사를 조망한다. 조선의 지식인 15명이 문묘에 종사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일이 조선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하게 살핀다. 문묘에 종사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정몽주를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문묘 종사는 이들을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공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대표적 지식인의 국가 공인은 임금과 지식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p.7) 종묘가 왕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라면, 문묘는 지식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다. 문묘는 종묘와 함께 유교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에 태조는 종묘를 완공한 이후 문묘 건립을 서두러 추진해 태조 7년 7월에 완공했다.(p.190)
조선 성리학의 신기원을 수립하기 위해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켜 충신의 예로 받들었고, 사화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직, 이황을 종사시켰다. 정치투쟁의 산물로 이이, 성혼, 김장생을 종사시켰으며, 탕평책의 일환으로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를 종사시켰다. 마지막 정치적 산물로 조헌과 김집을 종사시킴으로 모두 15인의 문묘 종사를 완성했다.
동국 18현과 도통의 계승을 시대별 정리
▲ 고려시대 문묘에 종사된 지식인
설총 : 신라인-고려 현종13년(1022) =우리말로 중국의 아호병서를 풀이함, 원효의 아들
최치원 : 신라 –고려 현종11년(1020) =문장가
안향 : 고려 –충숙왕 6년(1319) =학교 설립에 힘씀
▲ 조선시대 문묘 종사 : 8차에 걸쳐 단행
1차 = 정몽주 : 중종 12년(1517)조선 건국에 반대, 조선 성리학 계보의 신기원 수립
-폭정으로 훼손된 건국 정신을 회복하려 함
2차 = 5현 : 학맥;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김굉필 광해군 2년(1610) 연산군의 폭정에 희생
정여창 : 광해군 2년(1610) 연산군의 폭정에 희생
이언적 : 광해군 2년(1610)<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구인록>을사사화
조광조 : 광해군 2년(1610)기묘사화 희생자
이 황 : 광해군 2년(1610) 남인 학맥의 대표자
3차 = 이이 : 숙종8년(1682) 서인학맥의 대표자
성혼 : 숙종8년(1682) 서인학맥의 대표자
4차 = 김장생 : 숙종43년(1717) 특정 정치집단의 정치투쟁의 산물
5차 = 송시열 : 영조32년(1756) 탕평책의 소산
송준길 : 영조 32년(1756) 탕평책의 소산
6차 = 박세채 :영조40년(1764) 탕평책의 소산
7차 = 김인후 : 정조 20년(1796) 탕평책의 소산
8차 = 조헌 : 고종 20년(1883) 정치적 산물
김집 : 고종 20년(1883) 정치적 산물
선 성리학의 신기원을 수립하기 위해 정몽주를 종사시켜 충신의 예로 받들었고, 사화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김굉필, 정여창, 이언직, 이황을 종사시켰다. 정치투쟁의 산물로 이이, 성혼, 김장생을 종사시켰으며, 탕평책의 일환으로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종사시켰다. 마지막 정치적 산물로 조헌과 김집을 종사시킴으로 모두 15인의 문묘 종사를 완성했다.
문묘에 종사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정몽주를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문묘 종사는 이들을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공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대표적 지식인의 국가 공인은 임금과 지식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조선을 이해하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양반과 사대부의 나라였다는 점이다. 왕조국가인 조선을 양반과 사대부의 나라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조선이 세워지고 그 기틀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교를 근간으로 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밑바탕으로 해서 일궈온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은 왕과 양반 사대부가 권력을 나눠가지며 왕권과 신권의 권력의 기울기에 의해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들어왔다고도 볼 수 있다. 서로가 권력의 중심을 향하되 상대를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했기에 5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왕권과 균형을 이루며 국가를 이끌어 왔던 세력들 중 조선을 지탱했던 사상적 근거인 성리학의 대가들은 어떤 계보를 형성했을까? 조선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선비들을 통해 그 맥락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조선 시대의 선비는 현대사회의 지식인과도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와는 달리 조선은 지식인의 상징적 역할을 했던 것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문묘종사’가 그것이다.
“문묘(文廟)는 문성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祀堂)을 가리키는 말이며, 흔히 공자를 중심으로 그 핵심 제자들의 위패를 모시곤 한다.”조선이 개국하면서 종묘와 더불어 문묘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 곳이다. 조선에서 문묘는 성균관에서 관장하며 이 문묘에 종사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총 18명이 있으며 최치원, 설총, 안향을 빼면 조선시대에 문묘 된 사람은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 조헌, 김집 등 15 명이다.
‘조선의 지식계보학’은 바로 조선시대에 문묘종사 된 이 15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개별 인물들의 학문과 정치적 영향력에 중심을 두고 살피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들이 문묘에 종사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으나 문묘 종사와 관련되어 각 개별 인사들의 면면을 살핀다는 점에서는 미약한 점이 있다.
15명의 문묘종사 과정을 따라가는 이 ‘조선의 지식계보학’은 크게 세 번의 쟁점화를 통해 살피고 있다. 먼저 중종반정이후 조광조에 의해 제기되어 정몽주의 문묘종사 과정에서는 정도전과 정몽주를 비교하며 어떻게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가 조선의 문묘에 첫 종사자가 되었는지를 알아간다. 두 번째로는 이황에 의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에 대한 계보의 추정과 더불어 문묘종사에 대한 구체적 과정, 세 번째로는 이황, 이이 성혼 등으로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 임금과 당파사이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만들어졌던 과정을 추적한다.
“조선의 문묘 종사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자 선정 의 표면적 결과가 아니라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정치의 적나라한 속살”이라 말하며 개별 인물 연구가 아닌 ‘문묘 종사의 정치 동학’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고 있는 ‘조선의 지식계보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문묘종사를 통해 지식계보를 따져봤다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지식계보학의 내용을 채워가진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문묘종사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에서 부정적인 측면의 강조로 비춰지는 측면이 있어 문묘종사가 가지는 근본적 취지에 보다 주목한 연구와 결합 된다면 보다 풍부한 조선의 지식계보학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