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를 읽는가'는 시를 읽는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쓸모 있는 증거를 엮은 책이다.
부자가 되는 법, 힘든 세상에서 각자도생 하는 법, 상처받지 않고 뻔뻔하게 잘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들이 환영받고 있는 요즘에도 시를 읽는 사람들은 있다.
시인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더듬이로 획득한 고유한 언어로, 어떤 곳, 어느 시대, 누구인지 모르는 대상을 향해 말을 건다. 전달되어지는 그 말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수 있고 전혀 다른 말로 듣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애당초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활시위를 떠나버린 화살과 어딘지도 모르는 과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같은 것을, 부지불식간에 작동을 멈춰버리는 마음을 말해야 한다. 그 말을 하기 위해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였다.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말하는 그들의 말이 정확히 어떤 지점에 착륙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폭죽이 터지듯 환하게 되는, 밤의 천장에 콕콕 박혀 있는 반짝이는 별처럼
봄바람이 살랑사랑 가슴을 설레이 듯, 어두운 시냇가를 떠도는 반딧불이처럼
빛나고 환한 때로는 적요한 시.공간 안에 나를 도착하게 만든다.
"시에 어떤 효용이 있냐는 질문을 들으면 당황스럽다. 시를 어떻게 이용하는가, 시가 무엇에 좋은가? 이상한 질문이다. 시는 노래다. 노래를 어디에 쓰는 지, 새가 무슨 소용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시는 무용하기 때문에 중요하다"(리오폴드 프렐리크)
"신문 칼럼과 만화 그리고 시는 서로 연관된 문학 형태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보기보다는 서로 다르지 않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는 똑같은 것을 추구한다. 언제나 닿을 듯 닿지 않는 지점에서 힘을 발휘하는 공간에 의미를 만드는 것 말이다"(메리 슈미츠)
"모르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신문이 크게 도움이 됐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지도 모르지만 말할 수 없는(또는 말하지 않을 것) 것들을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시라고 생각한다. 시는 공감을 일으킨다...외과의사들이 타인의 운명과 죽음을 책임진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일부 밖에 보이지 않는 우주를 정처 없이 떠돌 뿐이며, 우주의 나머지에 대해서는 계속 짐작만 할 뿐이다"(리처드 랩포드)
"시는 시를 뺀 모든 것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시는 내가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걸 아는 것이 시작이며 끝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위대한 건 이성이 아니다. 무의 지점에서부터 세계가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세계는 선언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다 세계는 품고 앉아서 주변을 쿡쿡 찌르며 반드시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약간의 중력을 가질, 심지어 새롭게 느껴질지도 모를 생각들을 형성해 갈 가치가 있는 저 무상한 감각을 일깨워준다"(지아 톨렌티노)
"시를 경험하는 것은 현실 너머를 보는 것이다.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 지 찾는 것이며, 다른 삶과 다른 층위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젊고 늙고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타인과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자주, 늦은 밤, 잠을 자야 할 만큼 피곤하지는 않지만 뭔가 '진지'하거나 새로운 것을 계속 흡수하거나 파악하기에는 너무 피곤할 때, 나는 적절한 책장으로 걸어가 검증된 책을, 절대 내게 실망을 주지 않을 시집을 꺼낼 것이다. 그러고는 늘 그랬듯이 의도했던 것보다 아주 늦게까지 잠들 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가 손으로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시는 이름없는 것들이 사고될 수 있도록 이름을 부여하는 걸 돕는 방법이다. 우리 희망과 공포의 가장 먼 지평은 우리 일상의 굳건한 경험들이 빚어낸 시로 다져진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고될 수 없는 것을 뚫고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말들이 필요하다. 시는 우리 뇌를 덮은 천장을 들어 올려 자유를 상상하도록 돕는다"(매리엄 카바)
"자기소멸을 결심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생명이 무작위로 꺽여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을까? 그 압박과 그 대학살과 그 외로움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으려면 누구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까? 그런 악몽같은 고통 속에서 누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줄까? 어느 정도까지는 아무도 없다....위대한 시와 소설과 수필을 읽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 우리 내면의 아주 깊숙한 곳, 뚜렷하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숙한 곳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해준다. 저 작가들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정의하고 그들이 아니었다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을 슬픔과 고통과 기쁨에 말을 건넬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독서는 사람을 무디게 만드는 교과서적인 비평과 위대한 예술의 심장과 영혼을 무력화시키고 파괴하는 상아탑의 속물근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크리스 헤지스)
이렇듯 읽는 사람들의 끝 없는 고백을 통해 시는 어떤 지위를 갖는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안 읽을 뿐더러 시집을 사고 시를 읽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간혹 시집을 선물로 주는데 받는 이의 얼굴은
'시집을 읽다니' '선물이 시집이라니' 외계인 보듯 하는 사람도 있고
'아, 학교 다닐때는 좀 읽었지요' 순간 밝은 표정으로 환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집을 읽어 볼 사람은 한자리 수의 확률일 것이다.
한 없이 시의 쓸모 없음을 쓸모 있는 말로 설득하는 이 책이 참 좋다.!
무용이 유용이 되는,,
태어난 것이 내 뜻도 아니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온전한 나의 의지도 아니었을테지만
시 또한 생에 대한 의문과 고통에 대한 명확하게 답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시를 읽는 것은 주체적인 나의 선택이다.
나의 삶을 환하게 하는 스위치를 켜버린,
모처럼 대견한 길로 방향을 틀어버린,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은 기획이 반 이상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역할 반에 편집자 역할이 반 아닐까도 생각한다. 특히 이런 기획된 책을 읽으면 그 생각이 더 또렷해져서 글 쓰는 일보다 편집 일에 보다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이 책은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대답한 내용을 싣고 있다. 대답한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미국의 유명한(그렇다고 하니까) 시 전문지 <시> 편집자 두 명이 시단 외부인들에게 시에 대한 글을 쓸 지면을 주었다. 좋은 노래는 누가 들어도 좋은 것을 아는 것처럼 좋은 시는 시에 문외한이라도 감동을 받는다. 시와 관련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시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임금님은 벌거숭이!'외침을 들을 수 있는 용기있는 길이라는 것을 저자들은 알았다. 시인이 아닌 사람들이 시에 대해 정의하는 말을 들여다보는 것은 몹시 흥미롭다. 색깔이 다른 50벌의 옷을 눈앞에 두고 살펴보는 것 같았다.
생물학자인 헬렌 피셔는 시인들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뇌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감정의 일부를 감지하고 느끼고 이해할 수있게 해준다'라고 했다. 시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창작자의 흥분한 체험을 간접경험함으로써 우리 삶을 보다 풍성하게 해준다는 뜻으로 읽었다.
우리가 시에 대해 곧잘 부여하는 '아름답지만 쓸모없는' 이미지에 대해 편집자 리오폴드 프릴리크는 '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시는 무용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어서 시인인 브로드스키의 말을 인용해서 무용지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시를 읽거나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사회는 스스로를 열등한 표현의 상태, 정치인이나 상인이나 협잡꾼의 상태로, 간단하게 말해서 그 자신의 상태로 밀어 넣을 운명에 처한다."
그런데 아프리카 브룬디의 전 국회의원인 에티엔 응다이쉬미예는 자신의 나라 대통령에게 시를 들려줌으로써 좋은 땅을 얻은 경우를 들려주어서 재미있었다. 대통령의 지시로 주지사는 주민들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그리나 땅을 받은 주민들은 분노했고, 항의의 뜻으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아래의 시를 노래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우리에게 땅을 주시다니
먼지와 돌만 가득한 땅을.
아래의 시도 독자들에게 희생당한 사람을 증거하는 유용한 사례를 만들었다.
나는 보았다
어린 흑인 소년 셋
묘지에 누웠다
노는 중인지
예행연습 중인지 알 수 없었다 (바바 루카타, <예행연습>
우리는 다리 위에서 걸음을 늦추고
밀랴츠카 강가에서
인간의 시체를 찢어발기는 개들을 지켜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 안의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이빨 사이에서 으깨지는 사과처럼
눈이 자동차 바뀌에 깔려 뭉개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문득 비웃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졌다
너를
넌 이곳을 지옥이라 부르고는
여기서 달아났지
사라예보 바깥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서 (『사라예보 블루스』중 <시체>
미국의 저널리스트 제프리 브라운은 재소자들에게 시를 가르친 적 있는 셸턴의 말을 소개하면서 시의 유용성을 얘기했다. 제소자들은 시를 배우면서 "언어를 향한 태도, 언어를 정직하게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스스로에게도 정직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태도다. 그러면 예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제소자 뿐만 아니라 시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있다.
이 책을 통해 시의 유용성을 말하는 쉰 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알고보면 시가 이렇게나 쓸모많구나 싶어서 다음부터는 시에 대해 '아름답지만 쓸모없는'이라는 말은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에 관한 말 중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것은 중국의 활동미술가 아이 웨이웨이의 문장이다. 내가 듣고 싶었던 시의 유용성과 가깝다고 생각해서다.
시를 경험하는 것은 현실 너머를 보는 것이다.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 길이며, 다른 삶과 다른 층위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젊고 늙고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타인과 나누는 것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매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에 접했던 시는 늘 시험의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를 읽으면서도 주제나 특이한 표현 등 주로 시험에 나올만한 요소를 먼저 살피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품을 자신의 관점에서 즐기지 못하고, 단지 분석하고 이해해야 하는 자료로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를 그렇게 대하면 정작 시의 참맛을 알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를 가르칠 때, 읽고 난 느낌을 먼저 말하라고 권한다. 재미가 있었는지, 어려웠는지 혹은 인상 깊은 구절은 무엇이었는지 등등. 일단 작품이 어렵고 재미가 없게 느껴졌다면, 그 시를 포기하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다시 한 번 찾아보도록 권하기도 한다. 그리고 전문가가 쓴 해설서를 참고하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에서 작품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꺼내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의 작품 해설은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이지만, 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수능이 끝나면 출제된 시를 쓴 시인을 찾아가 문제를 풀게 하고 그에 대한 기사를 쓴 글들이 종종 화제가 되곤 했다. 기사의 마무리는 천편일률적으로 작품을 쓴 시인조차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냈다는 평가가 곁들여진다. 도대체 왜 시를 이해하는데, 직접 쓴 시인의 의도를 시시콜콜 알아야 하는가? 때로는 시인의 의도를 아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시인과 독자는 작품을 이해하는 관점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인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독법으로 작품을 읽어낸다면, 시인은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기사를 쓴 사람들은 정작 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문학맹’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누가 시를 읽는가>란 책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미국의 문학잡지인 <시Poetry>에 기고했던 글들 가운데, 다양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에 대한 생각들을 모아 엮은 내용이다. 시에 대해 교과서적인 지식을 나열하지 않고, 각자의 입장에서 시를 바라보는 생각들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어렵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자신에게 시란 어떤 의미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전공과 직업도 다양한 50명의 사람들이 풀어놓은 시에 대한 생각들과 자신의 그것을 겹쳐서 생각한다면, 자신만의 시에 대한 ‘철학’을 정립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이 책에 작품들이 나에게는 무척 낯설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시에 대한 대양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견은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었다.
시험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창’으로써 시를 활용해 보는 것도 시도해 볼만하다고 하겠다. 먼저 자신이 읽은 후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 작품을 먼저 선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라도 기록하거나 말해보도록 하자.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시와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차니)
리뷰를 쓰려고 자세를 잡는데 한숨이 먼저 나온다. 왜 이러나, 잠시 나를 들여다본다. 내가 왜 이러나, 왜 한숨인가. 시 때문인 것 같다. 시에 대해 뭔가 쓰려고 하니, 시에 대한 글을 읽고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니, 좀 암담하다. 뭘까? 시? 시인? 독자인 나? 무엇 때문인지 분명하게 잡히는 게 없다.
책은 좀 답답한 마음으로 읽었다. 뭐랄까, 내게 정녕 재주가 있고 실력이 있다면 영어로 된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평소 영시를 번역된 우리말로 읽을 때마다 '이건 아닌데' 했던 일이 이 책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이렇게 뜻으로만 바꿔 표현한 것으로 영시를 맛볼 수는 없는 건데, 그러다 보니 좀처럼 번역시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도 내 반응은 다르지 않았다. 글을 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마음을 울렸을 시의 구절들을 소개해 준 것일 텐데, 나는 닿지 못했다. 어렴풋한 향기가 느껴지는 구절들이 있는 것도 같았으나 다시 보면 흩어지고 말았다. 시로 읽지 못하고 멀리서만 두드려보믄 기분이었다.(한 편 건진 것만 해도 좋아서 다행이다.)
여러 명의 작가가 쓴 글을 모아 놓은 책을 읽다 보면 작가마다 다른 문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글이 주는 느낌에서 다양한 차이를 본다. 내게 와 닿는 속도도 각기 다르다. 잘 읽히는 글, 서걱거리는 글, 무모한 글, 겸손해 보이지 않는 글, 다정한 글, 친절한 글,...... 외국책일 경우 여기에 한 가지 더 걸리는 게 있다. 번역이다. 번역하시는 분에게도 각각의 글들은 이런 다양한 모습으로 가 닿지 않을까? 모든 글이 한결같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떤 글은 번역이 잘 되는 느낌으로 또 어떤 글은 지독히도 번역이 안 되는 느낌으로? 순전히 내 생각일 수도 있겠다. 나야 번역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으니, 번역가들은 이 모든 차이도 이겨 낼 만큼 실력을 갖춘 분들일 텐데, 내가 몰라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고른 마음으로 글들을 읽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들이 다 다르고, 번역가도 나도 한 편 한 편 다 다르게 접했을 테니 이런 형식의 책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실력이 섭섭하다는 말이다. 내가 원서를 바로 읽을 수만 있다면 시를 읽는 사람들의 고운 마음을 훨씬 더 많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싶어서. 한 겹 씌우지 않은 채로 말갛게 읽을 수 있었을 텐데.
글이 술술 읽히지 않을 때면 내 안의 '시'로 돌아오는 내 의식을 만나곤 했다. 눈은 책을 보고 있는데 머리로는 시를 놓고 또 다른 나와 대화를 하는 거다. 이를테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나는 왜 시를 읽고 있지? 나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 맞지? 시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지? 어떤 시는 좋다고 하면서 또 어떤 시에는 무심하지? 어쩌다가 이렇게 시에 가까워졌던 걸까?...... 답은 떠오른 듯했다가 금세 사라지고 연달아 떠오르는 질문에 앞 질문이 뭉개지고 그러기를 되풀이했다. 그 와중에도 문장들은 어김없이 내 눈을 붙잡았고 나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밑줄을 그었다. 마치 짐승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오르는 길이 여기에 있는 것처럼.
책 자체는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런데 시에 대한 관심만큼은 뚜렷하게 불러일으켰다. 이런 책, 좋은 책이라고 말해도 되나?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에서 고른 나의 좋은 시>
<책에서 옮겨 보는 좋은 문장들>
내가 처음으로 에른스트 블로흐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인 <셸로모>를 배울 때는 제목 자체이기도 한 솔로몬 왕에 대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그 작품이 내뿜는 순수한 관능에 휩싸였다. 선생님이 <셸로모>에 영감을 준 《전도서》 1장 2절부터 9절 까지를 읽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 구절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유명한 문구로 시작하여 절망으로 끝난다.
그 솔로몬은 강건하고 생명력과 사랑이 가득 찬 《아가서》의 솔로몬이 아니라 여전히 권력을 잡고는 있으나 세상에 염증이 난 말년의 솔로몬이다. 그 사실이 내가 작품을 바라보고 연주하는 방식을 극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변화시켰다. 더 느리고 지친듯한 비브라토, 중간 악절에서는 이전의 영광을 떠올리며 발버둥치는 느낌, 끝으로 가면서는 다음 음으로 이어지지도 않을 듯한 기진한 느낌, 그러다 마침내 끝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무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