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톨스또이 지음 | 석영중·정지원 옮김 | [열린책들]
톨스토이가 자신의 80 인생 중에서 절반인 40여년에 이르는 동안 ‘죽음’이라는 무형의 진실과 대면하고 이 주제에 천착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마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등법원 판사 이반 일리치의 부고 기사를 신문에서 확인한 동료의 대화로 시작한다. 다시 소설 속의 장면은 이반 일리치의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가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의 생애를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이 소설이 발표된 당시(1886년, 당시58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씌여 발표된 <광인의 수기>(1884년, 당시 56세)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50대 후반에 발표된 소설이다. 전체적인 인상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는 한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대면하여 삶을 성찰할 기회를 준다면, <광인의 수기>에서는 짧지만 ‘삶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작가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나아가 <부활>이나 <안나 카레리나>에서 살며시 드러나는 삶의 태도, 진실을 추구하려는 흔적이 집약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결혼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소설 속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관리의 아들로서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이자 집안의 자랑이었다. 톨스토이가 표현했듯이 ‘유쾌하면서도 품위있는 엘리트의 삶’을 누리는 것이 중요한 삶의 가치이자 목적이었다. 사교모임에서 부인을 만나긴 했으나 사람에 대한 사랑없이 결혼을 하고, 더 높은 연봉이 보장된 자리를 찾아 기회를 노리는 부류가 되어갔다. 이반 일리치에게 결혼은 한 마디로 안정적인 보험이자 사회(상류층 사회)의 통념에 바람직한 방향을 따르는 통과의례일 뿐이다. 이반 일리치는 한 마디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궤도에서 평생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아내의 임신 이후 나날이 심해지는 아내의 변덕과 질투, 트집은 이반으로 하여금 일에 더 매진하도록 하였다.
“중요한 것은 사회 통념이 정해 놓은 외적인 품위와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37면)
개인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강요에 스스로를 밀어넣는 사람들은 이후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결국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 쉽다. 삶의 의미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일 속에서만 삶의 재미를 느낀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장들과 많이 닮아있다. 가족을 위해 평생 직장에 평생을 바친 가장들이 은퇴한 이후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많은 가장들이 은퇴이후 잃어버려 흔적만 남은 자신의 자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한다.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평생 사회의 고정관념을 따라 사는 삶을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그래서 끔찍한 삶’이라고 톨스토이는 생각했던 것 같다. 130여 년 전 러시아의 대문호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들이 여전히 빛을 바래지 않고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삶의 조건들은 개선되고 향상되었는지 반문해볼 수 있다. 아니 외적인 삶의 조건에 대해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여전히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면 될 일이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활동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53면)
겉으로 보이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사회의 덫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현재보다 연봉이 더 높은 자리로 가기위해 청탁을 하고, 더 큰 집을 구하고 집을 꾸미기 위해 지출을 늘리고 자주 만찬을 열어 사교계 사람들을 초대해야만 한다. 오늘날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대출을 받고, 고가의 외제차를 할부로 구입하여 살면서도 언제나 돈이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반 일리치로 대표되는 인물상과는 상당한 유사점을 갖는다. 사회의 통념에 따라 결혼하고, 상류층의 사람들이 믿는 바대로 행동한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죽음을 둘러싼 풍경 - 금기시된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원인모를 병으로 한 인간이 갑자기 죽어가는 풍경은 때론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강력한 진실성을 담고있다. 죽음이라는 무지가 주는 거대한 공포는 근원적이고 모든 생명체에게 해당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이반의 직장 동료들이 이반의 부고 기사를 보고 자신의 죽음이 아닌 것에 안도하고, 남편의 사망으로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궁금해하는 것은 속물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오늘날의 우리도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동들이다. 장례식장에서 화투를 밤새 치는 우리의 장례식 풍경처럼 이반의 직장 동료/지인들은 어떻게하면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카드 게임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강박적으로 떠올렸던 이 ‘죽음’이라는 문제는 특히나 오늘날 언급을 하거나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마저 금기시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다. 과거에는 ‘죽음’이라는 삶의 행사가 보다 더 우리 주변에 가까이 존재했다. 아픈 이들은 대부분 집에서 요양을 하다가가 돌아가신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죽음’의 처리가 외주화되었다고 해야할까. 집에서 맞는 죽음이 금기시되어버린 느낌이다. 문명 속 사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죽음이란 병원에서 맞아야하는 사건이 되었다. 톨스토이가 기록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둘러싼 풍경은 매우 현실적이다.
‘불결함과 창피함과 냄새가, 그리고 용변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너무나 괴롭혔다.’(<이반 일리치의 죽음>, 85면)
이반 일리치가 원인 모를 병으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데도, 이반의 부인과 딸은 연민은 커녕 죽어가는 이를 비난한다. 나아가 자신들이 오히려 고통받는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의사마저도 병자에게 솔직하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진단에만 관심을 두는 것같다. 죽음에 대한 금기는 여전히 병원에서도 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금기로 인하여 죽어가는 모든 이들, 오늘날 또 다른 이반 일리치들은 오히려 더욱 고립되고 절대 고독 속에서 절망하며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존엄’역시 방치되고 있다.
그나마 이반에게는 방치된 ‘존엄’이 추락하지 않게 붙들어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농부 출신 게라심의 존재 때문이다. 오직 게라심만이 이반의 처지를 이해하고 연민을 보낸다.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이에 대해 진실한 이 농부의 말과 행동에 이반은 심지어 위안을 느끼고 있다. 이 배운 것 없는 농부에게 풍부한 학식과 재산을 가진 판사 출신 이반 일리치가 느낀 위안은 우리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게라심은 죽음 또한 삶의 일부로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91면)라고 담담하게 이반 일리치에게 털어 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놀랐던 것은 톨스토이가 죽음의 과정에 대해 기술한 일련의 묘사들이 너무나 사실적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죽어가는 이들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점이나,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간 이후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빛’을 보는 과정과 최후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죽어가는 환자 1000여 명을 17년 간 관찰하고 기록한 스위스의 의사 모니카 렌츠가 저술한 책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에 나타난 죽음의 과정과 너무나 흡사한 것 같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점점 더 대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어느 소설이나 ‘죽음’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광인의 수기>에서처럼 보다 직접적으로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을 드러낸 작품에서 ‘죽음’의 이미지가 더욱 비범하고 강렬하게 분출된다. 특히 <광인의 수기>에서 하인과 멀리 떨어진 곳의 영지를 매입하러 가는 길에 네모난 ‘하얀 집’에서 덮져온 발작증세, 그리고 겨울 눈 속 사냥을 하다 흰 눈으로 덮힌 사방 천지에서 길을 잃고 경험했던 발작의 장면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두 장면 모두 주인공은 ‘나는 왜, 여기에 왔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를 자문하고 있다. 실제적인 공간에서 주인공이 느꼈을 법한 방향감각의 상실과 ‘백색 공포’는 곧 ‘죽음에의 공포’로 이어지고 있다. 미완성인 이 자전적 소설을 읽노라면, 절대 진실인 ‘죽음’이란 실체 앞에서 모든 인간들의 허위와 거짓의 삶은 아무런 존재이유를 상실해 버린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카이사르도 죽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 필멸의 존재다. 톨스토이의 두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광인의 수기>을 보노라면 50대 후반에 이미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했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톨스토이의 진지한 모습과 젊은 시절 주색잡기와 방탕한 생활을 했던 젊은 톨스토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않는다는 세속화된 믿음을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격차이자 큰 변화이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극적인 삶을 살아보았기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으며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의 과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삶에 대한 명민한 관찰과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거치기 힘든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자각 이후에 ‘삶’이 크게 변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소설 속 이반 일리치는 모든 ‘평범한’ 인간을 대표한다. 사회가 정한 통념에 의문없이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반의 죽음으로부터 톨스토이는 한 인간의 보편적인 생애를 더듬어 나가며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절대 고독’을 고찰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이반 일리치의 죽음>, 126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모습을 보노라면 평범한 인간들의 마지막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써내려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끝나버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 책을 덮으면서 톨스토이는 마치 나에게 ‘바로 지금 진정으로 살아있는가 ’라고 묻는 듯했다. 이반 일리치가 생의 마지막에 생각한 ‘그것’이 무엇인지 톨스토이는 명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가 겪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 톨스토이는 각자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허구의 거미줄을 모두 걷어낼 것. 그리고 삶의 본질을 바라보고 삶을 누리라는 것이 이반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작년 12월 중순에 처음 읽었을 때, 죽어가며 아등바등 하는 중년남자 이반 일리치의 찌질함을 감히 비웃고 싶었다. 아무리 죽기 싫어도 그렇지 이렇게 비참할 수 있으랴 하는 마음이었다. 한창 잘 나가던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죽음을 앞두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며 단순히 반면교사로 삼으려 했다.
이번에 독서모임을 앞두고 다시 읽었다. 두 번째여서 그런지 소설이 여유있게 다가왔다. 특히 그의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생활, 부부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마치 영화를 두 번째 보면 처음 볼 때 안 보이던 미장센과 각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이 더 잘 보이는 것과 같다. 훤칠한 외모에 경쾌한 느낌을 주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이 영화를 보듯 눈 앞에 훤히 그려진다. 그러고 보니 왜 이 작품을 아무도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까? 적당히 넓고 고풍스럽게 장식된 집무실 책상 앞에서 최고급 양복을 입고 서류를 들춰보는 고등법원 판사 이반 일리치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사실 이반 일리치는 표면적으로는 행복해보이지만 내면세계는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남자다. 그 대표적인 예로 그는 아내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들 부부는 화려한 사교생활에서는 죽이 잘 맞는 부부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혼 후 아이가 생길 무렵부터 소통이 단절된 채 살아왔다. 아내의 짜증과 잔소리가 거슬릴수록 그는 더욱 일과 승진에 매달렸다. 일과 책, 카드게임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은 피곤한 아내와의 대화를 피하는 좋은 구실이자 도피처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고등법원 판사로 승진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큰 집을 마련하고 새 가구들을 들여놓으며 장식하던 그는 사다리에 올라가 도배장이에게 커튼 다는 법을 가르쳐주려다 미끄러지면서 옆구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페르소나와 일치해 외적인 삶에 치우쳐 살아와 피폐해진 무의식의 정신이 좀 쉬어가라고 극단의 처방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당신의 내면세계를 돌보며 살라고 말이다.
죽음을 앞둔 이반 일리치는 힘들었다. 그의 외면 세계는 내면 세계와 너무 멀리 분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마흔다섯 살인 그는 지금 죽기 억울했다. 자기는 열심히 일했고, 유능했고, 잘 살아왔는데 그깟 옆구리 좀 부딪친 일로 시름시름 죽어가다니 말이 되는가! 최고의 의사들은 그에게 살 수 있을지 아니면 죽을지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오직 그의 병증에만 관심을 둘 뿐. 심지어 그의 아내도 환자인 자신의 고통과 거리를 두며 남들에게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는 양 생색만 내려한다. 성숙한 사람들은 알다시피 그런 그의 아내는 그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동안 그가 아내와 소통하지 않고 적대적으로 살아온 사실이 자신의 심혼인 아니마와의 단절을 의미하듯, 그의 아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니무스와 불통으로 견뎌온 시간이다. 한 마디로 자신의 역할인 페르소나에 치우친 삶이 그의 아니마를 질식시켜 사망선고를 내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 거다.
다행히 이반 일리치는 죽기 한 시간 전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의사가 가족들에게 그의 사망을 알리자 그는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비록 외적으로는 화려하게 살아왔지만 영적으로는 진정한 자기 자신과 분리된 그의 삶은 죽음과 같다. 죽기 전의 그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거짓'을 떠올리며 그토록 괴로워한 이유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죽음의 끝이 되었다.
칼 융에 의하면 사람들은 청년기까지 사회와 자신의 직업세계에 적응하기 위하여 훌륭한 페르소나를 갖출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중년부터는 자신의 페르소나가 본연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내면 세계로 들어가 자신의 심혼인 아니마/아니무스와 접촉하며 살아야 건강하다고 한다. 융은 [인생의 전환기]에서 "죽음에의 저항은 불건강하고 이상한 것이며,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저항 때문에 인생의 후반기부터 그 목표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융은 종교가 중년의 학교라고 하며 "모든 종교가 초현세적인 목표를 걸고 있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본다."고 했다.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며 중년의 필독서로 다가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그동안 살아온 삶과 부부 사이를 되돌아보고 개선점을 찾는다면 남은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가장 대면하고 싶지 않은 공포의 시간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욱 죽음과 친해져야 하는지 모른다. 누구도 빗겨갈 수 없는 지상의 마지막 시간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가끔 은밀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죽을까...! '하고. 가장 완벽하고 평온한 마지막 순간을 꿈꾸지만 그럼에도 내 안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는 걸 보면 죽음으로부터 배울 게 더 남아있나 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는 '형처럼 지나치게 냉정하지도 계산적이지도 않았고 동생처럼 방만하지 않'아 '집안의 자랑거리'라 할 만한 둘째 아들로 자라 고등법원 판사가 됐다. 마흔다섯 한창 일할 나이에 맞이한 그의 죽음에서 나는 두 가지 진실을 발견한다. 하나는 행복의 절정에 이른 순간에 죽음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는 절대 고독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슬프게도 이 두 가지는 살아있는 사람이 수용하기에 쉽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는 대개 행복한 추억으로 채색되기 마련이지만 그 속에도 '그때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기억이 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교정하고 싶은 순간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죽음이 코 앞에 와 있다면 더 말할 게 뭐 있을까. 승진과 함께 연봉이 오르고 집을 새로 장만하면서 멋진 소품들로 실내 장식을 하며 들떠 있던 이반 일리치에게는 바로 그 시간 속에 교정하고픈 순간이 있다. 마음이 들뜨고 행복한 시간 속에서 다리 좀 삐끗했다거나 옆구리 좀 부딪쳤다고 누가 신경쓸까. 행복한 순간에 너무 행복에 빠지지 않을 지혜를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행복하게 살려고만 한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발견한 진실은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쉽게 인정할 수 없다는 데 비극이 있다는 점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죽음을 앞둔 병자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삶에의 집착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쉬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슬프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해 그로 하여금 죽음을 받아들이고 평온하게 한 물음은 이것이다.
'만약에,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의식만 지닌 채, 바로 잡을 겨를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이런 물음을 좀 더 일찍 마주한 사람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거나 사랑을 표현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다. 또 <광인의 수기>의 주인공처럼 선행을 베풀거나 종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도 있다. 병상에 누워 죽음만 기다리기 전에 이런 물음을 던지고 자신과 남은 삶에 진실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리라.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광인의 수기
레프 똘스또이/석영중, 정지원
열린책들/201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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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는 빼쩨르부르끄의 여러 관청과 부서를 두루 거치며 출세 가도를 달린 아버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법과 대학을 졸업한 후 승진을 거듭하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한 생활을 한다. 중간에 승진에서 누락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이내 두 계단이나 승진하여 지방 고등법원 판사직에 오르면서 동료들의 부러움을 산다. 마음속으로 그리던 집을 장만하여 손수 꾸미며 가구를 배치하다가 떨어져 옆구리를 다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운 직장에 잘 적응하면서 상류사회 인사들과 교류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부터 옆구리 통증이 심해져 의사를 찾게 된다. 병은 점점 심한 통증을 동반하게 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라고는 없는데 마흔다섯의 나이에 불치병이라니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다. 급기야는 직장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고 좋아하던 카드놀이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건강은 점점 나빠져 거동조차 어렵게 된다. 가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바쁘기 때문에 이반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부인과 딸은 이반이 자기들의 방해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반은 고독 속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인다. 불치병에 걸린 시점부터 몇 달 동안 그는 끔찍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일생을 반추한다. 결국 임종의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자 그는 비로소 자기의 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평온함을 얻고 저세상으로 떠난다.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그로 인해 가능해진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운 지인의 사망소식을 접하면 으레 그렇듯이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데 모종의 기쁨을 느꼈다.(p.11)” 이반의 죽음을 접한 동료들이 모여 그 자리에 누가 갈 것인지, 그렇게 되면 또 그 비게 되는 자리로 어떤 사람들이 이동하여 승진한 자리를 메울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을 쏟아낸다. 그러면서도 불행하게 죽은 사람이 자기가 아닌 것에 안도한다는 내용이다. 마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 같다. 결국 죽음이란 당사자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승진의 자리,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기쁨을 주게 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그동안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p.125)
병이 진행되면서 고통과 늘 함께하던 죽음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그리고 죽음 대신 빛을 보면서 이반 일리치는 편안하게 죽어간다. 우리들 또한 욕심을 내려놓고 이반처럼 편안한 임종을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닐까
<광인의 수기>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자 찬란한 한줄기 빛이 나를 온전히 비추었고 나는 비로소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만일 세상의 고통이 없어진다면 내 안의 고통도 없어질 것이다. 당장 교회 입구에서 나는 가지고 있던 36루불을 모두 걸인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p.152)” 이 소설의 끝부분이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남보다 폭력에 대한 공포심이 컸기 때문에 오래 괴로워한 것이 남들과 다른 점이다. 사춘기부터 서른 초반의 나이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사회생활을 했다. 남들처럼 젊음을 누리는 행복한 생활이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여 돈을 모으고 영지를 사러 가는 도중에,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들른 여관의 온통 흰색으로 된 네모난 작은 방에 들어서면서, 잊고 있던 어렸을 때의 그 공포가 찾아왔다. 이상한 행동으로 정신감정을 받게 되지만 침묵을 지킴으로서 정상인으로 판정을 이끌어 낸다. 생각과 행동이 바뀌면서 혼란해진 것을 신앙생활로 이겨내려 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미완의 소설은 그래서 위와 같이 끝나게 된다.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는 논리적인 명제는 카이사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자신에게는 절대로 해당될 리 없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온 것이 이반 일리치며, <광인의 수기>의 주인공이다. 또한 이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도 이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산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다만 그 시기가 다를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과연 나에게 찾아온 죽음을 나는 어떻게 맞아야 할까를 생각해 봤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문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남은 생을 좀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저자 똘스또이는 1828년 러시아의 야스나야 뽈라냐에서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성장했다. 열여섯 살에 까잔 대학교 동양학부에 입학하고 이듬해 같은 대학교 법학부로 전과했지만 대학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 자퇴하고 귀향했다. 이후 1852년 문예지 <동시대인>에 단편소설 <유년시대>를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장편 <전쟁과 평화>, <안네 까레니나> 등을 출간하면서 거장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1899년 장편 <부활>을 탈고 하고 1910년 여행 중 사명하여 고향 숲에 안장되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빼쩨르부르끄의 여러 관청과 부서를 두루 거치며 출세 가도를 달린 아버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법과 대학을 졸업한 후 승진을 거듭하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한 생활을 한다. 중간에 승진에서 누락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이내 두 계단이나 승진하여 지방 고등법원 판사직에 오르면서 동료들의 부러움을 산다. 마음속으로 그리던 집을 장만하여 손수 꾸미며 가구를 배치하다가 떨어져 옆구리를 다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운 직장에 잘 적응하면서 상류사회 인사들과 교류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부터 옆구리 통증이 심해져 의사를 찾게 된다. 병은 점점 심한 통증을 동반하게 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라고는 없는데 마흔다섯의 나이에 불치병이라니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다. 급기야는 직장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고 좋아하던 카드놀이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건강은 점점 나빠져 거동조차 어렵게 된다. 가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바쁘기 때문에 이반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부인과 딸은 이반이 자기들의 방해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반은 고독 속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인다. 불치병에 걸린 시점부터 몇 달 동안 그는 끔찍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일생을 반추한다. 결국 임종의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자 그는 비로소 자기의 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평온함을 얻고 저세상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