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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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 동녘 | 2018년 12월 2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 9.5 (3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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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 사회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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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을 치우자! 평점10점 | a*******5 | 2018.08.18 리뷰제목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성별 이원제의 젠더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이들 가운데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 여자가 "여자로 태어나 손해"라는 생각은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혐오, 여성멸시를 남녀가 제각기 느끼는 방식이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성차
리뷰제목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성별 이원제의 젠더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이들 가운데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 여자가 "여자로 태어나 손해"라는 생각은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혐오, 여성멸시를 남녀가 제각기 느끼는 방식이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성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페미니스트다.

 

  우리 사회가 완벽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듯 완벽한 페미니즘도 환상일 뿐 모두 과정 속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의 페미니즘을 온라인상에서 활동하는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전부인 양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며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검증하려드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나는 '메갈'이나 '워마드'로 오해받을까 봐 조심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조심하도록 만드는 권력이 바로 내가 대항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치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소수자를 향한 구별과 차별, 그리고 억압이 얼마나 다양하게 이루어지고있는지 말한다. "몸의 구별은 차별의 기초"로 작동한다. 우리와 다른 피부색, 장애인, 다른 방식의 성관계를 갖는 사람을 차별하고, 남자가 아니면 여자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성애'만 정상으로 간주한다. '성역할'에 따른 차별은 차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이루어진다.

"구별의 기준이 선명해질수록 차별이 문화로 안착하기 쉬운 환경이 된다. 혐오는 주로 이러한 구별과 밀접하다. 이분법은 혐오를 설계하는 중요한 지침서로 작용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다. 칭찬은 고래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하지만 칭찬을 누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칭찬은 권력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성은 주로 외모와 차림새에 대한 칭찬을 많이 듣는다. 또 요리솜씨를 칭찬하며 "이제 시집가도 되겠다"고 한다. 이러한 칭찬은 모두 성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또 여자에게 '몸매'와 '애교' 많음을 칭찬하며 기존의 여성성에 가둔다. 지금도 많은 여자들이 '요즘 여자들과 다르다'고 칭찬받는다. 그러나 '요즘 여자들'은 대체 어떤 여자들인가.

"칭찬은 평가의 다른 방식이다." "어떤 칭찬은 발화자의 고정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성별 고정관념, 지역에 대한 차별적 의식, 세대에 따른 편협한 관념을 비춘다. 그래서 '여자 치고, '젊은 사람 치고', '전라도 사람 치고' 등의 말이 붙은 칭찬을 한다."

 

 진짜와 가짜,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 순수와 비순수의 구별은 '우리'와 '타자'를 나누는 차별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완벽한 진짜'만 허락된다는 생각은 다양한 목소리의 경합을 막고 성장을 억압하는 것이다. 시위의 배후를 찾고, 전문 '꾼'으로 몰고가며, 남성혐오자로 낙인 찍고, 진짜 유가족, 진짜 페미니스트를 헤아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은 신이 기성품으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경합하고 성장하면서 완성해가는 것이다.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 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 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열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원히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무엇으로 불리든, '메갈리안'이든 '온라인 페미니스트'든 '게이'든 '남성 페미니스트'든, 그 누구든 일단 페미니즘에 대해 더 참여적으로 발언하는 현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보다 낫다."

 

 미투운동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페미니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다양한 구별과 차별이 어떻게 성차별로 이어지는지, 예술사회학을 연구하는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명화와 영화를 다르게 보는 뜻밖의 경험도 만난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의 한국 페미니스트가 과하게 지적받고 있는 현실에 왜 저항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진행되는 한국 페미니즘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3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23 댓글 39
종이책 페미니스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이 책은 그것을 어렵게 한다. 평점8점 | 이달의 사락 j****3 | 2018.08.13 리뷰제목
이런 글은 서평 쓰기도 쉽지 않다. 독자들의 생각이 천차만별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식에 따라 생각이 많이 다를 수 있다. 여성이 밤에 밖에 나가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 보면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마음이 없을 수도, 어떤 사람들은 걱정의 마음이 될 수도, 어떤 사람들은 질책의 마음이 될 수도, 어떤 사람들은 경멸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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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은 서평 쓰기도 쉽지 않다. 독자들의 생각이 천차만별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식에 따라 생각이 많이 다를 수 있다. 여성이 밤에 밖에 나가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 보면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마음이 없을 수도, 어떤 사람들은 걱정의 마음이 될 수도, 어떤 사람들은 질책의 마음이 될 수도, 어떤 사람들은 경멸의 마음이 될 수도......자신의 관점에 따라 그 일을 보면서 판단을 한다. 어느 것이 맞은지는 알 수가 없다. 또 어떤 자는 말한다. 걱정이 되는 상황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차별의 의미가 아닌가? 라고.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사실을 바라봐야 할 것인지 그 뿌리가 든든히 서있지 않으면 생각들이 마구 흔들릴 수 있다. 이 페미니즘의 문제도 그런 것이 아니랴 생각이 된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에 조심스럽다. 책의 내용을 옮겨보려고 노력하지만 내 생각이 가미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나는 딸만 둘 두고 있다. 그러기에 걱정 아닌 걱정을 많이도 하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봤다. 물론 세상이 안온하고, 질서가 잘 잡혀져 있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아니 인간들이 가지는 본성의 문제가 조금 정리되면, 믿음의 기반 위에 우리들의 삶이 이루어지리라. 하지만 오늘의 세상은 그렇게 믿음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내내, 구속 아닌 구속을 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난 뒤는 모든 생활을 그들에게 맡겼지만, 그래도 귀가 시간이 늦고 하면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세상이 잘못 된 세상이라고 여기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나에게 문제점을 좀 가지라고 충고를 하고 있으리라.

 

이 책은 페미니스트를 논하는 글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진짜 페미니스트를 찾기는 정말 어려울 듯하다. 그러기에 제목도 그렇게 명명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며 살고, 사회를 형성해서 살아가는데 관계가 만들어 지지 않을 수 없다. 그 관계가 성별의 관계가 되니 이렇게 문제가 된다. 성별로 보면 생득적인 요소도 차이가 있고 물리적인 힘까지 작용하다 보니 뒤처지는 여성들의 권한이 축소되는 삶이 이루어져 왔다. 더구나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면서 힘을 가진 남성들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이 성별에 따른 힘의 균형은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가고 그것이 관계의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남성본위주의가 되고, 여성들은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놓이게 되기도 하고, 그것을 당연시 여겨온 많은 세월들이 있었다. 오늘날 이런 문제를 발견하고 수정하면서 관계의 재정립을 이루어 나가고자 하나 워낙 뿌리 깊이 이어져 온 역할들이 쉽사리 고쳐지기가 힘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이 모든 문제를 역할 분담의 관점이 아니라 역할 동일시의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에 봉착에 있다. 오늘의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기에 이 문제는 그 해결책이 요원하게 여겨진다.

 

저자는 많은 작품 속의 인물들과 사실들을 재료로 하여 인간관계를 조명해 나가고 있다. 정말 많은 책들이 인용되고, 많은 인물들이 불려 나온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이 시대를 거스르지 않기에 여성들의 관점에서 보면 수동적이고 피지배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 것들이 저자는 무척이나 못 마땅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차이가 나기에 격분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작품 테스에서는 테스가 겪은 강간과 그로 인해 꼬여가는 인생을 운명처럼 그리고, 또한 테스의 외모를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그런 운명을 타고난 여성으로 만들어 나간다.” 테스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자신의 외모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훼손하여 덜 아름답게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력적인 몸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알지만 모른 척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의 역사다. 이처럼 지속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들어온 관계의 세계가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속박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문제가 성별 문제가 될 때 더욱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고, 인격을 저해하는 일까지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남성은 보편적으로 지도자의 자리를 꿰찼지만 하층계급의 남성이 사라지진 않았다. 우리는 이를 두고 남성지도자의 존재 유무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어떤 선거에서도 남성이 대통령이 된다고 모든 남성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습니다.”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 인간을 다스려도 되는 보편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여성 지도자와 여성 전체의 삶의 질이 무관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여성 권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 화법을 좋아한다.(p36) 이 단락은 남성 본위의 삶의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조그만 문제가 있어도 들 현장에 불려 나온다. 여성 대통령이 되고, 여류작가가 되고, 여자 연예인이 된다. 여성 판사가 되고, 여군이 된다. 남성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남성을 보편적인 사람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언어적 상황이 된다. 저자는 이것이 무척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수정되기엔 지금으로선 요원하다.

 

그것은 가정에서의 남녀관계가 완전히 부정되고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가부장제 속에서 부부는 동반자 관계가 아니라 수유 관계에 더 가깝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자존감을 낮게 만들고, 여성이 남성에게 의지하도록 이끌며, 여성에 대한 보호와 통제를 자연스러운 규범으로 정착시킨다.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는 그렇게 탄탄히 유지되고 있으며, 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동성애 혐오는 여성혐오와 더불어 필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약자와 소수자를 존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p67)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관계의 현실이다. 가정에서부터 여성들에 대한 역할과 태도가 바꾸어지지 않을 때, 완전한 페미니즘의 실현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문제를 곳곳에서 발견해 내고 찾아나간다. 하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세상의 반이 되는 기득권자인 남자들의 인식 변화를 기대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는 한계를 보인다. 그것은 만성적이고 누적된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세계관들이 젊은이들을 통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기존의 여성의 몸은 공간, 남성의 몸은 도구라는 인식으로부터 서로의 존재 이유 정도로 인식해 가면서 어느 누가 우위가 아니라 결합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성별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갈 것이라 여겨진다. 성별로 해야 할 역할은 구분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 주면서 서로를 존중해 나가는 일이 가정에서 이루어질 때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문제도 조금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저자의 다양한 지식, 그 생각들, 그 예화들이 마음에 많은 생각을 불러오게 한다. 숱한 사람들에게 오늘날 사회의 문제를 거론하는 장으로 함께 읽었으면 한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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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철저한 페미니즘의 관점을 만나다 평점10점 | a*******5 | 2020.02.27 리뷰제목
최근 신정철의 <메모 독서법>을 다시 꺼내 읽다 "좋은 책은 다시 읽을 때 더 좋다"는 문장을 만나고 무척 공감했다. 그의 <메모 독서법>을 다시 읽으며 좋았지만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를 다시 읽으며 더욱더 좋았기 때문이다. 두 책은 처음 읽을 때보다 전체 내용 이해면에서 수월하게 다가와 다시 읽기의 힘을 느낀다. 이 책은 그만큼  철저하게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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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정철의 <메모 독서법>을 다시 꺼내 읽다 "좋은 책은 다시 읽을 때 더 좋다"는 문장을 만나고 무척 공감했다. 그의 <메모 독서법>을 다시 읽으며 좋았지만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를 다시 읽으며 더욱더 좋았기 때문이다. 두 책은 처음 읽을 때보다 전체 내용 이해면에서 수월하게 다가와 다시 읽기의 힘을 느낀다. 이 책은 그만큼  철저하게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며 쓴 글이기에 다시 읽는 가치와 보람을 느낀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와 닿은 곳이 많은데 그 중 몇 곳을 소개한다.

 

남성적 '나'들이 보편적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 '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더욱 확장하길 갈망한다. ...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11p)

 

'지금, 여기에'는 항상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권력이 지배자다. '나중'은 실체가 없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결국' 영원히 나중'이 된다. 그렇게 저항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에서 점령당한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하는 순간은 나중으로 밀려나는 목소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리도록 만드는 그 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이들이 바로 사회의 약자다. 소수자들의 '저항 축제'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시적 해방'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 지금 여기의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며, 그 목소리를 묵살시키지 않는 것이 최선의 진보다. '우리'는 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52p)

 

"조국을 버리고 사랑하는 남자와 뜻을 함께한 여자"로 가네코를 소개하는 방식은 성차별적이다. 조국을 버리고 남자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와 뜻이 맞는 남자를 만난 것이다. 게다가 '박열의 연인'은 그의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다. 누구의 여자라는 시각에 갇혀서 보면 이러한 편협한 틀에서 기록된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한 개인을 떠나 20세기 초에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성장한 여성의 기록이 그 자체로 너무도 귀하다. (60p)

 

마땅히 필요한 분노 표출을 '갈등'이나 '대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 역시 악의적이다. 여성혐오는 여성을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문화이다. 여성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거나 언어폭력을 사용해야만 혐오가 아니다.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저지하려는 언어 중 '남성혐오'와 '잠재적 가해자'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63p)

 

'처녀막'이라는 명칭은 마치 여성의 질 입구에 얇은 막이 하나 있어서 남성기가 '들어오면' 구멍이 뻥 뚫리고 피가 흐르는 구조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이런 막은 없다. 질 내부 입구에 점막의 주름이 있을 뿐이다. '처녀의 피'에 대한 신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지만, 이 '피'는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관계를 가져도 생길 수 있다. 출혈 여부가 '처녀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영화는 '첫경험'을 담을 때 이불 위에 묻은 여성의 피를 상징적으로 써먹는다. (72p)

 

 근대 도시는 공공장소와 집을 공과 사의 영역으로 구별했다. 정숙한 여성들은 사적인 집 안에 있어야 했고, 남성들은 거리와 바에서 시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밤에 거리를 걷는 독신 여성은 성매매 여성으로 오해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 편안할 '안 安'은 집에 있는 여성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집에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편하다는 의미다. (143p)

 

 언론은 피해자의 관점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범죄를 서술하고, 일러스트 속에는 무력한 피해자의 모습이 자극적으로 그려진다. <한국언론정보학보>에 개재된 [한국 신문에 나타난 강간보도의 통시적 분석]에 따르면, 주요 신문사 네 곳의 강간 보도가 주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 2007년의 기사들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의 입장(39.5%)'에서 서술된 기사의 비율이 모두 높게 나타난 반면, 피해자의 관점에서 서술된 기사는 전체의 18.6%에 불과"하다고 한다. (173p)

 

 "밥하는 동네 아줌마를 왜 정규직화하느냐"던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이 속마음을 들켰을 뿐, 아줌마 멸시는 많은 이들에게 체화되어 있다. '집에 가서 밥이나 해', '애나 봐', '밥하다 나온 아줌마 같아', ' 동네 아줌마처럼' 등등. 밥하고 애 보는 아줌마에 대한 멸시는 온 세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통일된 담론을 이룬다. 살아 있는 한 멈출 수 없는 노동이지만, 밥하는 일은 아예 노동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그냥 무시, 멸시다. (193-194p)

 

  피해자보다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서술하는 언론의 관점에 우리는 아직도 익숙하다. 가부장제 사회의 문화와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성차별을 느낄 수 있다. 이제 웬만큼 페미니즘의 시각에 익숙해졌다고 여겨왔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익숙한 생각, 즉 남성중심적 관점에 서있기 십상이다. 가부장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 있다는 캐럴 길리건의 말이 생각난다.

 

 

10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0 댓글 8
종이책 구매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l*****5 | 2020.03.02 리뷰제목
가짜 휘발유를 만들려면 물을 섞는다고 했다. 그런데 물을 많이 섞으면 차에 시동이 안 걸리니진짜 휘발유를 물보다 더 많이 넣어야 된다고 우스갯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진짜 같은 가짜, 진짜에 가깝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야 되겠지. 진짜에 버금가는 아류들로. 진짜에 가까운 가짜, 얼마나 많을까?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그래서 '본가/명가/원조' 이런 말들이 접두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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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휘발유를 만들려면 물을 섞는다고 했다. 그런데 물을 많이 섞으면 차에 시동이 안 걸리니

진짜 휘발유를 물보다 더 많이 넣어야 된다고 우스갯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진짜 같은 가짜, 진짜에 가깝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야 되겠지. 진짜에 버금가는 아류들로.

진짜에 가까운 가짜, 얼마나 많을까?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

그래서 '본가/명가/원조' 이런 말들이 접두사처럼 붙는다. 진짜 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아무리 이런 단어들을 붙인다고해서 진짜일까?

하물며 페미니스트 책 읽기를 달마다 해왔는데, 2월은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이다.

진짜를 표방하지만 이 진짜도 시간이 흘러 깊숙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면 편견과 수없이 부딪히고

타협하게 되고 결국은 정치화되고 도구화의 이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속적인 연대와 목소리를 내어왔지만 페미니즘은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의 토대 위에 있음을 느낀다.

가부장제 틀 속에서 오랫동안 지탱해왔던 억압과 편견들은 얼마나 공고한데.

 

처음보다 읽기는 수월해졌다. 하지만 글로 적는데 애를 먹는다. 읽고 이틀이 지났다.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책에서는 1장 '진짜'는 없다 편에서 책 제목과 자연스레 연결이 되는구나

하며 읽었다. 그러나, 2/3/4장에서는 생각과 다르게 여자의 몸에 대한 우리사회 시선이 이분법적으로

적나라하게 나눠져있음을 이야기한다. 차별과 폭력의 수단과 결과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래서 읽는 내내 답답했구나 싶다. 장소를 향한 폭력은 더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여자라서.

거기에 있으면 안 되었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 남자였으면 달라졌을까? 그럴지도.

같은 공간인데, 다른 자리에 있는 아내와 여자들, 미친년도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렇게 보는 시선은 다르지 않다.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순간은 당연한 권리를 요구했거나, 그저 내 생각을 말했을 때

페미니스트라 불렸다. 낙인의 의미로 페미니스트가 되기는 너무도 쉽지만

'진짜' 페미니스트는 너무도 숭고하여 셀 수 없이 많은 판관들의 인증을 거쳐야 한다."

페미니스트라 말한 적 없다. 그냥 예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당연한 권리를 이제서야 요구했고,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잘못된 부분을 잘못됐다고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쳐다본다.

'전에는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달라졌다고.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리고 심중에 낙인을 찍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곁눈질로) 페미니스트인가 보다.

왜 사람들은 바른 말, 옳은 말 하는데 불편해할까?

페미니스트의 의미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바로 알면 페미니스트에 대해 낙인찍는 것 없이 그냥 자연스레 받아들일텐데..... 이런 점이 아쉽다.

그래서 진짜 페미니스트는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없이는 당연히 없겠구나 생각이 든다.

'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라서 좋아요'

뭔가 평가를 받는 듯한 이 말 속에 우리 일상 속 페미니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여자들이라도 관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도대체 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는 뭘 하는 인간인가? 자문한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면 그들은 기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칠 즈음 곧장 이런 반응을 보인다.

당신은 남성을 혐오하고 늘 화가 나 있는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다고. 당신은 다른 것 같다고 말이다.

이에 나는 나야말로 누구보다 진짜고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며,

페미니즘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덮어놓고 짐작했던 모습과는 다를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를 선호하는 이들은 사회 개혁보다는 페미니스트 재교육에 관심이 많다.

페미니스트 감별사가 되어 페미니스트를 얌전하게 길들이려 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 또는 선량한 시민임을 증명하도록 강요받지만, 증명한다고 이해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해는 불공정하게 돌아간다.

 

이유야 어떻든 '진짜와 가짜' 페미니스트 논쟁은 소모적이라 생각한다.

늘 강요받고, 이해받지도 않는 불안정한 위치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은 제 위치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한다. 진짜는 없더라도 페미니스트가 불편하지 않다면....

그건 정체성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다시 페미니즘에 대해 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될 듯 하다.

페미니스트는 탄생할 때마다 밟히기 때문에 매번 새로 태어난다.

언제나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죽은 페미니스트다.

그래서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인가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가 새로운 목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밟혀지지만 묻혀지고 사라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

용기있는 사람이 세상을 조금씩 천천히 변화시킬 수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전통적인 페미니즘도 여러 부침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렇게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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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평점8점 | e******i | 2018.08.23 리뷰제목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나의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리뷰제목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진짜’를 정의하고 선택하는 권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진짜 여성, 진짜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진정한 여성의 삶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의 충고는 사양한다. ‘진짜’는 모르겠으나 내 삶과 나의 길, 나의 자리, 나의 역할,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은 각각의 ‘나’들이 찾아야 한다. 이 ‘나’들은 문화와 관습이 정해주는 자리가 아닌, 충분히 다른 세계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p. 10  들어가는 말)

 

이 책의 제목을 왜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라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유는 더 있다. 이라영 작가 자신을 위한 제목이기도 하지만, 다른 여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과연 ‘진짜’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만 이러한 걱정 속에서 혹시 자신이 페미니즘에 민폐를 끼치거나 페미니즘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봐 위축되는 여성들도 있다. 스스로 ‘완성형’ 페미니스트는 ‘이 구역의 보안관’이 되어 페미니즘을 걱정하면서 페미니스트 단속에 앞장선다. 가정을 지키려고 가족을 억압하듯이, 페미니즘을 걱정하느라 정작 삶을 외면한 검증이 난무한다. 페미니즘은 걱정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이다. ‘페미니스트라면 이래야 한다’는 굴레가 무의미하지는 않으나, 페미니스트를 단속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서는 곤란하다.     (p. 46)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구역의 보안관’에게도 외치는 제목 같다.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으니까 이제 그만 단속하라고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오세라비의『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를 읽었다. ‘진짜 페미니스트’와 ‘그 페미니즘’, ‘없다’와 ‘틀렸다’가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이라영은 오세라비가 틀렸다고 주장한 그 페미니즘에 쉽게 규정짓거나 판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발언을 뱉기도 한다. 하지만 그 행동을 교정하려 하기보다, 그러한 행동이 발생하도록 만든 감정의 맥락을 수용하는 것이 먼저다.(p. 7)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주장할 때 그 권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동안 ‘특권’을 누려왔다는 뜻이다. 조심과 불편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았으며, 안전은 특권화되었다. “어디 여자가”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말은 여성 살해까지 그 고리가 이어져 있다. 언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싸워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익명으로 사라진 수많은 ○○녀’들의 ‘원통한 혼’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p. 67)

 

결국 이 책은 ‘진짜 페미니스트’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연대하자는 의도로 쓰여진 게 아닐까 싶다.

 

차별은 악의로 벌어진다기보다 무지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관계’를 성찰하고 이에 대해 질문하여 관계의 재구성, 곧 권력과 관념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통념적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동물과 인간, 다른 성과의 관계,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를 성찰하는 데 여성주의적 시각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p. 222)

 

조남주의『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서도 느낀 점인데, 여성주의적 시각은 당연했던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든다. 이를테면 여자는 밤 늦게 다니면 안 된다는 게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왜 여자만 그래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순간 당연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대를 해야 한다.

 

하나의 진짜 길만 있는 사회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길이 있는 사회가 옳다. 물론 ‘잘못된’ 길에 이르거나 위험한 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길을 더럽힐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 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 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열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원히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p. 42)

 

참고로 오세라비는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잘못된 길』을 종종 거론한다. 9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으며, 애초의 목적이었던 투쟁에서 완전히 벗어나 실제로 대부분 여성들의 관심사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는 책이다. 오세라비는 잘못된 길이기에 틀렸다며 가지 말라고 주장하지만, 이라영은 잘못된 길이라도 경험을 쌓으며 알아가라고 말한다. 선택은 자유다. 다만, 다른 선택을 하는 이들에게 공격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미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에서도 참고한 문헌인데,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카롤린 엠케는『혐오사회』를 통해 증오에 대처하려면 자신과 똑같아지라는 증오의 유혹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쩌면 증오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고립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고 덧붙인다. 여러모로 연대가 필요한 것 같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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