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미리보기 공유하기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리뷰 총점 8.5 (4건)
분야
인문 > 서양철학
파일정보
EPUB(DRM) 20.61MB
지원기기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 PC(Mac)
이용안내
TTS 가능?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3건) 회원리뷰 이동

종이책 긍정의 진수 평점10점 | l*******5 | 2022.12.03 리뷰제목
니체에 빠졌다.  작년에 처음 읽은 니체 책은 이해되지 않는 말들만 많았다.  왜냐하면 난 그때 니체를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안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싸우고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폭력적이고 이기적이어 보였다.  그러나 실존철학을 공부하며 니체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깨달았다. 니체에 대해 나
리뷰제목

니체에 빠졌다. 

작년에 처음 읽은 니체 책은 이해되지 않는 말들만 많았다. 

왜냐하면 난 그때 니체를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안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싸우고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폭력적이고 이기적이어 보였다. 

그러나 실존철학을 공부하며 니체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깨달았다.

니체에 대해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크나큰 오해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순간 니체에 대한 관심은 그 어떤 관심보다 많아졌다. 

중학교 때 빠졌던 플라톤에 대한 관심은 그때 당시 대단했다. 

그런데 지금 니체에 대한 관심과 비교하면 비할 바가 안 된다고 느낀다.

다양한 책을 읽어오다가, 백승영 교수의 강의를 듣고 니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책을 읽어봤지만 뭔가 내 머릿속은 중구난방이었다. 

니체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란 꽤나 어려웠다. 

그 이유는 니체철학의 '비체계성' 때문이다.

니체 스스로도 체계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개념, 용어들을 충분한 설명 없이 사용했다. 

그러는 바람에 니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 때 눈에 띈 책이 바로 백승영 교수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이다. 

저자는 해체되어있는 니체의 철학을 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체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이 책이다.


철학은 곧 삶이다. 

니체는 철학의 가치가 ‘삶의 실천’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가치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모든 것은 삶을 기준으로 고려된다는 그의 주장은 니체철학을 ‘생철학’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말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신은 죽었다”이다. 

간결 명료하고 너무나 충격적인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말이 니체 철학의 핵심은 아니다. 

니체철학의 결론을 나타내는 문장은 그의 <유고>에 있다.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 

니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필연성과 유의미성을 도출해내어, 그것에 대한 조건 없는 긍정을 철학적으로 보증하고 싶어한다.


니체는 모든 것이 오직 ‘힘에의 의지’로 이루어져있다고 설명한다. 

이 개념을 통해 항상 생성하고 변화하는 이 세계를 조건없이 긍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존재론, 인식론, 도덕론 등 모든 영역에 힘에의 의지를 적용한다.

힘에의 의지는 “힘을 원하고,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의지작용”이다. 

다시 말해 항상 힘 상승의 느낌을 받기 위해 현재 상태를 극복하려 하는 의지다. 

그런데 힘이 향상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힘을 넘어서는 것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는 단 하나만 있을 수 없고, 항상 여럿이 있다. 관계적 존재다.

힘에의 의지는 모든 순간에서 수행된다. 매 순간 자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온다. 

‘힘’의 본질상, 힘 상승을 위해서 최대한을 발휘하며, 힘 상승을 달성하는 즉시 다시 힘상승을 하고자 한다. 

힘상승을 갈망하는 본성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을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불렀다.

또한 힘에의 의지는 소위 사회학의 ‘복잡계’와 같이 우리가 정확히 인식할 수 없는 활동으로 작용한다. 

니체는 이것을 “서로 인과로 조건짓지 않은 상입이자 연속의 형태”로 활동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힘에의 의지의 작용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의 진정한 원리,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과학적 진리나 일상의 현상들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은 힘에의 의지기 때문에 인식하는 것 또한 힘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식은 철저히 인간중심적-실용적인 측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학적 진리들은 우리가 복잡해서 인식할 수 없는 세계를, 인식하기 쉽게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과학도 결국 해석적 진리’다.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논증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시프트, 포퍼의 논리실증주의, 반증가능성은 과정적 진리를 대변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발견하고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창조하고 가상을 산출하는 것이 해석과 진리의 기능이다. 해석이 끝없이 전개되는 과정이듯이, 진리 역시 추구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이성은 인식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성이 모든 것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인간의 ‘과도한 순진함’ 이었다. 

인식은 힘에의 의지의 규제를 받는다. 

따라서 인식은 자기극복과 자기상승적 삶의 도구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삶의 유용성”을 기반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삶의 유용성을 추구하면 자칫 불공정하게, 이기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정하게 인식할 수 있는가?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현명한 인간은 모순을 가장 풍부히 갖는 자일 것이고 동시에 모든 종류의 인간에 대해 촉각 기관을 갖는 자다 : 그리고 때때로 장엄한 화음을 이루는 위대한 순간을 경험하는 자다.” 

결국 ‘해석지평’이 넓어야한다. 

많은 종류의 충동이 존재해 서로 부딪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해석에도 매달리지 않고, 기존의 해석과 그 해석의 담지자인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둘 수 있는” 거리 두기의 파토스를 가질 때야말로 진정한 ‘창조’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에서 벗어나 주체적 존재, 창조적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가 다리이기 때문이며, 사랑받을만한 존재인 것은 그가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정이다. 

한 철학자는 ‘자기서사적 삶’을 살라고 하듯이, 내가 써내려가는, 위버멘쉬가 되어가는 삶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힘에의 의지’로 내세운다.

이 본성을 따르는 운명을 긍정하고, 창조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사랑해야한다. 

즉, 항상 현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렇게 극복해나가는 자신의 모습에 행복을 느끼며, 모든 존재를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에의 의지”의 본성에 충실하라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 “신을 죽었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도구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신은 죽었다”의 전략은 신에게서 빼앗은 속성을 인간에게 다시 되돌려주려는 목적이었다.

따라서 신이 기능적으로 부정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니체는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도교성을 제시한 최초이자 최후의 그리스도교인으로 지목한다. 


사실 글을 쓰는 도중에도 계속 내가 제대로 정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유기적으로 내용을 구성했는지 고민이 크다. 

너무나 복합적이고 설명할 것이 많은 니체철학은 내 평생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니체의 철학은 내 삶을 열발자국도 더 나아가게 해준 감사한 존재라는 것이다. 

네이버에서만 간단히 서핑해도 니체에 대한 오해가 많다. 

이런 오해는 종식되고 사람들이 니체를 좀더 바람직하게 이해하길 바란다. 이로써 모두가 위버멘쉬가 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댓글 0
종이책 [독서노트]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평점10점 | d******e | 2014.04.19 리뷰제목
[독서노트]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를 읽었다. 앞서 읽은 정동호 『니체』에 이어 두 번째 독서목록이다. 정동호의 책이 600쪽 양장본이라면 백승영의 것은 700쪽에 달한다. 두 권을 포개면 목침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내 인생에 이렇게 두꺼운 책을 완독한 일은 처음이다. 저녁 때 화타오금희
리뷰제목

 

[독서노트]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를 읽었다. 앞서 읽은 정동호 『니체』에 이어 두 번째 독서목록이다. 정동호의 책이 600쪽 양장본이라면 백승영의 것은 700쪽에 달한다. 두 권을 포개면 목침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내 인생에 이렇게 두꺼운 책을 완독한 일은 처음이다. 저녁 때 화타오금희를 하고 나서 읽었다. 졸려서 마루에 서서 읽은 적이 많았다. 술을 덜 마시기 위한 독서 습관이 거의 두 달째 이어지고 있다.

 

 

정동호의 책이 평생 니체를 연구한 점잖은 원로교수의 저작물이라면 백승영의 책은 끈덕지게 니체의 사유를 좇아가는 패기 있는 젊은 학자의 결과물처럼 보였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백승영은 여자교수였다. 싸움바둑을 즐기는 곱상하게 생긴 여류프로기사를 연상케 했다.

 

 

「총 6부로 구성한 이 책은 니체 자신의 글을 독자에게 직접 보여주고 그 글을 분석하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니체 철학에 대한 초보적 입문서나 개괄서가 아니라, 니체의 글을 직접 맛보고 싶은 독자나 니체와의 직접적인 맞대결을 원하는 독자, 그리고 니체 철학을 포장지가 아닌 사다리로 활용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이런 작품 내재적 니체 읽기 방식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22-23쪽)

 

 

니체를 읽어본 적이 없는 나는 이 책의 내재적 니체 읽기 방식 덕분에 간신히 니체 사상의 윤곽 정도는 그려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전까지만 해도 니체를 문학적인 사상가로 여겨왔다. 니체의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을 자주 인용하는 문인들 영향 탓인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니체 관련 저서를 읽어보니까 니체의 사상은 단장취의로 옮겨 심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사유의 산맥이라고나 할까. 사유의 마그마 아니 사유의 블랙홀이라고나 할까. 대단했다.

 

 

영원회귀나 힘에의 의지와 같은 스케일도 스케일이려니와 관점주의 인식론이나 계보학적 고찰과 같은 섬세함도 인상적이었다. 왜 니체를 벗어날 수 없는지 짐작이 됐다.

 

 

성긴 1회 독으로는 아는 체를 했다. 하지만 절주용 독서에서 적당한 만용은 다음 책을 읽기 위한 촉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쉽고 가벼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댓글 0
종이책 많이 아쉬운 니체 해설서 -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_뻑보이(ffuckboy) 평점4점 | f******y | 2014.10.24 리뷰제목
이 책은 평소 책 많이 읽고 아주 생각이 깊은 회사 선배가 정말 괜찮게 본 책이라고 추천해 줘서 읽게 되었다. ​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것이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책을 중간 정도 읽다가 나머지는 책장을 넘기지 않고 덮어버렸다. ​ 책을 더 읽어야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말이 너무나 장황하여 이해하기 어렵
리뷰제목

이 책은 평소 책 많이 읽고 아주 생각이 깊은 회사 선배가 정말 괜찮게 본 책이라고 추천해 줘서 읽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것이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책을 중간 정도 읽다가 나머지는 책장을 넘기지 않고 덮어버렸다.

책을 더 읽어야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말이 너무나 장황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잘 읽히지도 않는데, 그 내용은 별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두껍고 장황하고 잘 안읽히는 책을 통해 니체를 접하느니 니체가 직접 쓴 책을 보는 것이 훨씬 마음에 제대로 다가오고 감동이 크기 때문인 것.

주객의 전도가 너무 심한 것이다. 해설서가 있는 이유는 원저를 쉽게 설명해 주거나 뭔가 보충해주기 위해서일텐데, 이 책은 그런의미에서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나는 판단했다.

예를 들어볼까?

----------------------------------------

즉 이들은 자기 극복을 통한 자기 상승, 삶의 자율적 창조, 타인의 힘에의 의지를 강화하는 일 등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단지 다수로서의 무위험적 안락, 자기 보존, 평균성에의 안주등을 추구할 뿐이다. 이런 인간을 니체는 '무리 본능의 소유자, '약자', '천한자', '실패자', '힘겹게 살아남는 자' 혹은 '얼뜨기'등의 명칭으로 부른다. 이들에게는 자기 보존이 목적이며, 이 목적을 위해 이들은 무리를 형성하여 자기 방어적 삶을 살아간다. 이런 집단적 개인에게 최대의 위험은 주관적 개인이므로, 이들은 주권적 개인을 자신들의 집단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주권적 개인은 이들의 삶의 모습을 주권적 개인의 형태로 상승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따라서 주권적 개인과 집단적 개인 사이의 싸움은 계속 유지된다.

 ​----------------------------------------

자 반 페이지도 안되는 저정도의 분량만 봐도, 니체와 이 책 저자의 문체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냥 무리 본능의 소유자, 약자, 천한자, 힘겹게 살아남는자 이렇게 말하는게 철학자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며 쉽고 간결하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한 저자의 저 장황한 말들이란, 말을 위한 말을 만들어내서 말하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이해가 안된다는 말.

전형적인 어렵게 말하는거 좋아하는 교수 스타일인데, 니체가 저렇게 교수 스타일로 말해서 대단한것이 아님은 많은 사람이 알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저자의 부족함을 드러내기만 한 졸작이라 하고 싶다.

그리고 또한 고맙게도 이 책으로 인해 니체의 많은 책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댓글 0

한줄평 (1건) 한줄평 이동

총 평점 10.0점 10.0 / 1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