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생이던 1996년, 보수적 성향을 지닌 우리나라의 대표 신문의 사설에서 ‘요즘 대학생들의 가방에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있어 심각한 문제’라는 식의 언급을. 어린 나이의 그 때 당시에는 고작 책 한 권이 무슨 문제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1996년은 냉전 체제가 한참 전에 끝난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공산주의의 환상은 이미 깨진지 오래. 『공산당 선언』을 공산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성경으로 대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이지만, 『공산당 선언』을 우려하는 것도 그 때 당시에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확정적 예언이 비웃음거리가 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빨갱이 타령을 하는 매카시즘이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아직도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윤리교사로서 「윤리와 사상」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치면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언젠가 반드시 마주할 텍스트였다. 다행히도 내 가방에 『공산당 선언』이 있다고 해서 문제 삼을 신문사는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이해한다. 우리나라는 ‘냉전(Cold war)’ 체제 하에서 ‘열전(Hot war)’을 경험한 나라다. 피보다 뜨거운 이념 대립으로 인해 3년간의 치열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고, 식민지배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전쟁으로 인해 세계 최하위 듣보잡 저질국가로 전락했으며, ‘한강의 기적’을 통해 세계 속에 우뚝 선 지금까지도 세계 유일의 분단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이 비극의 원흉을 거슬러 올라가면 맨 먼저 김일성을 만날 것이고, 그 위에 스탈린과 모택동, 그 위에 레닌, 더 올라가면 정치인이 아닌 학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저인 - 바로 이 작은 책 - 『공산당 선언』을 최종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한국 특유의 레드 콤플렉스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변증법은 헤겔에게서 물려받고, 유물론은 포이어바흐를 계승한 마르크스가 인간소외와 계급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폭력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를 수립하여 사유재산제 폐지 및 생산수단을 공유화하고, 종국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이상사회인 공산주의의 도래를 예언했다는 사실은 (『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상식으로 아는 바. 자본주의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보편화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적(敵)’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사생아’였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목 가운데 일부는 (놀라우리만큼) 현재진행형이고, 이 사실을 무시해도 될 만큼의 지적 수준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으며, 거듭 발전해 온 자본주의 역시 아직 온전한 휴머니즘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많은 내용이 무시되더라도 이 부분만큼은 자본주의 신봉자들이 (빨갱이를 색출하여 비난할 것이 아니라) 뼈아프게 반성해야 하는 대목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폐기된 공산주의를 공부하는 것은 이상사회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내달리는 통제 불능의 자본주의가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하나 둘씩 없애버리고, 갑질하는 재벌들을 중세 귀족처럼 대우하며,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쓰고, ‘쉬운 해고’라고 읽는다.)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는 프롤레타리아들 - 오늘 날 증가하는 비정규직은 고용 안정성 측면에서 오히려 19세기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못한 측면이 있다. - 을 양산하는 이 사태에 경종을 울리는 백신을 투여하기 위함이다. 자본주의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개인의) 자유의 적은 ‘평등’이 아니라 ‘불평등’인 것을.
발표된 지 160년이 지난, 이젠 낡은 이데올로기로 간주되는 『공산당 선언』을 다시금 손에 들게 된 것은 ‘칼 포퍼’의 저술 『All life is problem solving』에서‘마르크스’에 대해 냉소주의라는 비난을 우연히 읽게 된 것이 계기라 할 수 있다. ‘포퍼’의 미국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무한한 찬송가에는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낙관주의에 기인한다. 더구나 인류사회에 마르크스가 말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그의 확신에 찬 1992년 독일‘슈피겔’지와의 인터뷰 내용은 이 땅의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의 광기를 보게 했다.
설혹 이미 지나간 과거사가 되어버린, 소련 붕괴와 동구의 몰락이 ‘공산주의’의 실패를 목격하게 하였지만, 그것이 곧 자본주의의 완결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현실적 문제를 은폐하는 수많은 기제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여전히 훼손하는 문제들을 함축하고”있음은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태생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의 방법을 가르쳐 주리라는 것이고, ‘비판’의 방향이 될 수 있는 사상으로서 긴요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마르크스의 예언처럼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에 의한 파국을 맞기는커녕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정치경제체제로 확산되었음을 부인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류가 그 이상의 체제를 발견해 내지 못하고, 또한 실현시킬만한 역량을 가지지 못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170쪽 분량의 이 작은 책자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과,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칙』, 그리고 『공산당 선언』의 중판(重版) 및 유럽 각국에 출간된 번역본에 게재된 그들의 서문, 역자인 ‘이진우’박사의「해제」로 구성되어 있다.
『공산당 선언』의 핵심골자는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그 유명한 첫 문장과,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것처럼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본의 논리로 야기되는 인간소외에 대한 고뇌의 흔적과 인간해방의 문제를 얼마나 철저하게 사유하고 있는가를 확인 할 수 있다. 한편, 권말에 수록된 이진우 박사의 「해제」는 마르크스의 생애에서부터, 헤겔을 근원으로 하는 그의 철학적 사상적 기원, 공산주의의 이념과 시민사회의 해부, 공산당선언의 현대적 의미에 이르는 탁월한 논평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적 이해를 심화시켜준다.
산업화로 인한 자본주의 도래가 경제적 효용은 증진시켰으나 인간의 불평등을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빚어지는 계층 간의 위화는 물론,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사회전반의 구별 짓기는 계속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러한 보이지 않는 차별에 놓여있 다. 시장(market)의 노예, 유행(mode)의 노예, 순간적 쾌락(moment)의 노예 말이다. 자신들의 실존 근거가 이미 자신들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이러한 근원적인 ‘사회적 불평등’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포퍼’의 낙관은 신빙성 있는 예언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이 책자는 왜곡된 인간, 억압받는 인간, 불의를 당하는 인간, 즉 무(無)의 존재로 전락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가치와 이념을 생각게 하는 하나의 사상적 기초가 되는데 기여한다.
자본주의가 시대를 관통하는 논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 특히 부동산이니 주식이니 자본 인플레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고, 코로나로 단절된 세상 속에서 현대 사회는 일종의 부에 따른 신분제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특정 사상을 지지하고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생각해보고 고민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저를 읽는 즐거움은 엄청났다.
유명하고 역사적으로 큰 임팩트를 남긴 책인 만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저자들은 몰랐겠지만, 현재 시대에 사는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공산주의가 실패했는지 문제점들이 보였다. 마르크스는 세상 그리고 인간을 너무 이상적으로 봤던 것 같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보다 정부가 자원을 더 공정하게 배분할 능력이 있을 거라고 믿었고, 각자마다 나름대로의 행복이 다를 텐데 인간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무 이상적이고 안일한 착각이었다. 인간의 한계는 분명하고, 정부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오래 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고 싶고 요즘 더더욱 생각나는 이들의 글발이라 .. 다시 구매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겪어봐야 안다더니 진짜였다는 ...
오래 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고 싶고 요즘 더더욱 생각나는 이들의 글발이라 .. 다시 구매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겪어봐야 안다더니 진짜였다는 ...
오래 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고 싶고 요즘 더더욱 생각나는 이들의 글발이라 .. 다시 구매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겪어봐야 안다더니 진짜였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