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라틴어 원전 완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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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라틴어 원전 완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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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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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번역서 비교해 읽기 평점7점 | YES마니아 : 로얄 h****h | 2018.06.15 리뷰제목
<보에티우스는?>   보에티우스는 6세기의 철학자이다. 정치가이기도 하고 문학가로 보아도 된다. 로마식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치적인 희생양이된 그는 종교와 이성의 갈등 속에서 이성을 택한 자의 패배로 보인다. 중세는 서로마의 멸망과 함께 시작된다고 하지만, 나는 보에티우스의 죽음이 상징적인 로마 정신의 몰락으로 보인다.
리뷰제목

<보에티우스는?>

 

보에티우스는 6세기의 철학자이다. 정치가이기도 하고 문학가로 보아도 된다. 로마식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치적인 희생양이된 그는 종교와 이성의 갈등 속에서 이성을 택한 자의 패배로 보인다. 중세는 서로마의 멸망과 함께 시작된다고 하지만, 나는 보에티우스의 죽음이 상징적인 로마 정신의 몰락으로 보인다. 로마 원로원을 비호하고 테오도리쿠스를 모함하는 알비니아누스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과 부패한 정치인들과 야합하지 않는 정직성으로 인해 많은 원수를 두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지만 종교적인 믿음을 갖지 않고 로마와 결탁하여 테오도리쿠스를 축출할 것이라는 의심이 테오도리쿠스 왕의 분노를 촉발해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보에티우스는 자신이 비호했던 로마 원로원의 배신을 받고 유배지로 유폐되고 결국 잔인하게 교살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로마의 합리적 이성이 막을 내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의 위안'에 영향을 미친 것들>

보에티우스의 사상에는 플로티누스로 대변되는 신플라톤주의가 가장 깊게 배어 있고, 키케로의 인생관이나 수사학적 표현 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철학의 위안'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의 초년과 중년기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그가 모든 것을 잃고 배신을 당한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신의 절망적인 운명을 감내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통찰은 신플라톤주의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도 닮아 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철학(여신)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철학적인 논점을 대화식으로 전개한 문학적인 작품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플라톤)>투스쿨룸(키케로)>철학의 위안(보에티우스)로 명맥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각 권의 내용 요약>

 

제1권

절망에 빠진 보에티우스를 시의 여신들이 위로하고 있는데, 철학의 여신이 나타나 쫓아낸다.(내용을 오페라의 무대에서 전개되는 극처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제2권

운명의 여신이 준 과거의 행운을 왜 빼앗아 갔는지 원망하는 보에티우스에게 철학의 여신은 운명의 여신의 말을 인용해 운명의 여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운명은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운이 왔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아니고 불행이 닥쳤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그 변화가 운명의 원래 모습이기 때문이다.

 

제3권

부, 권력, 명성, 육신의 쾌락, 육신의 아름다움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고 운명의 변화에 따라 잃어야 할 것이므로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철학의 여신은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단편적인 것들만을 추구하고 있지만, 진정 참된 선은 '일자(The One)'로서의 '선'을 표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4권

세상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고 비이성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보에티우스는 주장한다. 왜 선한 자들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원망스럽다고 말한다.

철학의 여신이 대답한다. 선을 추구한 자는 선에 도달하여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나 악을 추구함으로써 인간 이하의 존재로 몰락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적 지성은 '섭리'와 '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정연한 질서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다. 그 큰 그림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이해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상당히 스피노자적인 철학임을 알 수 있다.)

 

제5권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섭리가 조화를 이루는 방법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에 따라 답변한다. 세상은 창조되고 종말이 오지 않는 한 영원히 영속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 아니고 세상은 무한히 분할하는 정수의 속성처럼 현재 이곳에서 지금 무한한 가능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 무한한 가능성 전체를 조망하는 신의 앎이 진정한 영원성이며 그 신적인 앎을 깨닫는다면, 무한한 시간을 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인간의 비탄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며 끝을 맺는다.

 

<이 책의 장점과 단점>

박문재 님의 번역은 믿을 만하다. 언제나 일정한 퀄리티를 보장한다. 현대지성사에서 최근에 명상록과 자유론이 출간되어서 일말의 불안이 있었다. 내가 부지런하지 못해 기존의 번역본을 새롭게 출간한 것인지 모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빠른 번역 작업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찾아 본 2권의 번역본과 비교하여 볼 때 가장 나은 번역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번역이 난맥상을 이루는 부분만 찾아 비교해 본다.

 

   (장점)

 

    

(필로소픽 출판사의 이세운 님 번역) -42~43쪽

 

      내가 당신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죄를 부정해야 할까요? 하지만 나는 원로원이 안전하기를 원했고 계속해서 그러길 원할 것입니다. 내가 죄를 인정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 밀고자를 방해할 기회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니면 원로원의 질서와 안녕을 바랐던 것이 잘못이었다고 이야기할까요? 원로원 스스로가 나에 대한 판결을 통해 원로원의 안녕을 바란 것이 죄가 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 자신을 속이는 무지함은 사물의 가치를 바꿀 수 없고, 나는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진실을 감췄다거나 거짓을 용인한 것이 정당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육문사의 박병덕 님 번역) -37쪽

 

     당신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나의 죄목을 부정해야 할까요? 하지만 나는 원로원의 안전을 원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아마도 나는 자인해야겠지요. 그 밀고자를 방해하려는 나의 시도가 계속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로원의 안전을 염려한 것을 범죄로 여겨야 할까요? 어쨌든 그들 자신의 판결로써 그것을 범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무분별함은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겠지만 사물의 참된 가치를 변경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에 동의하고 진실을 감추는 것은 아주 그릇된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내가 진실을 숨기거나 거짓에 동조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현대지성사의 박문재 님 번역) -50쪽~51쪽

  

      내가 당신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원로원의 안전을 내가 원했다는 사실을 부인했어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실제로 원로원의 안전을 원했고, 앞으로도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원로원을 반역죄로 고발하고자 한 소장을 제출하는 것을 내가 방해했다는 것을 자백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것을 자백함으로써, 사실 고발자를 방해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원로원의 안전을 위해서 자백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것을 자백한 것이 범죄입니까. 원로원은 나에 대한 결정을 통해서 그것을 자백한 나를 유죄라고 확정하였습니다. 미리 내다보고 예견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속임을 당하여 피해를 입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일의 가치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원로원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나는 진실을 은폐하거나 거짓에 동의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번역의 길이가 차이나는 이유는 파란색 부분의 번역이 누락되었거나 축약되었기 때문이다. 문맥을 살려 번역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박문재 님은 가끔 의역을 하는 경우가 있다.)보에티우스는 원로원을 비호했으나 테오도리쿠스의 추궁을 받았을 때 자신이 로마 원로원을 비호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발자들이 자신을 고발하고 자신이 거짓을 말한다고 했을 때, 그것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자백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진실 고백에 대해 로마 원로원은 배신을 때리고 보에티우스가 유죄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로마 원로원의 비열함을 까발리는 해석이 이 번역에 잘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박문재 님의 번역이 좋다고 생각한다. (정의채 님 번역본은 구하지 못했다. 이 책도 번역이 나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라틴어 원전 번역이기 때문이다.)

 

 

    (단점)

1. 역시나 급하게 번역되고 책이 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5권을 제외하곤 어렵지 않은 내용이라 쉽게 읽힌다. 그래서 책의 앞에 놓인 전체 해설이 중요한데, 그 부분의 설명이 조금 아쉽다. 로마 황제와 테오도리쿠스 왕의 관계, 콘스탄티노플과 라벤나의 관계, 그리고 로마 원로원과 오도아케르 공격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읽으면서 혼란스러울 것이다. 해설이 좀더 쉽게 정리되면 좋겠다.

 

2.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초록색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다.(하지만 이 책은 인문 고전 시리즈라서 바꾸기 어려울 것 같다.)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글자 포인트가 0.5 정도 더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역시 다른 책들과의 일관성 때문에 변경은 쉽지 않을 듯하다.)  글꼴이 예쁘긴 한데, 조금 더 굵으면 어땠을까 싶다. 벌써 노안인지 읽기 힘들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20 댓글 18
종이책 구매 철학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 철학의 위안 (라틴어 원전 완역본)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h****9 | 2022.01.29 리뷰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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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목

철학은 무엇일까?

가치관?

혹은 신념?

아니면 믿음?

그것도 아니면 끊임없는 질문?

철학을 정의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철학의 사전적 정의는 

네이버 사전 기준으로 요약하면

인간과 세계의 근본,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또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어쩌면 인간과 세계, 삶에 대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인생관이나 신조를 형성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정의해도 될까?

철학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한다.

돈이 많을 때도, 돈이 없을 때도,

고난이 있을 때에도,

모든 일이 다 잘되는 시기도 있다.

과연 운명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

과연 운명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가운데 철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현대는 점점 돈의 노예가 되고 있다.

돈이 행복의 가치가 되고

돈이 있고 없고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 가운데 철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철학은 자신의 인생관, 행복을 결정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가

사람의 운명과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학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삶의 본질이 돈이 될 수는 없다고 철학은 말한다.

운명의 여신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지금 현시대는 돈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

그 가운데 우리는 철학을,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

행복을 찾아 살아야 한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운명이다.

그 가운데 주어지는 것은 운명의 선물이다.

그래서 삶에 감사를 가져야 한다.

철학이 주는 위안은 무엇인가?

그런 철학은 참된 행복에 대해 질문한다.

참된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만의 철학은 행복을 줄까?

돈이 행복을 줄까?

어쩌면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우리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돈이 최고의 가치관이 된 세계에서

우리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현대 사회는 물질만능주의의 극단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면 인간은 결핍때문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정말 현대 사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기에

현대인들이 늘 무언가 알 수 없는 갈증을 느끼며

삶을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부자는 돈이 많아도 더 많은 돈을 원하고

사실 돈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도 없다.

참된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돈을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권력과 명예는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까?

철학은 더 나아가 행복에 대해 묻는다.

최고의 선이 행복이라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가?

최고의 선은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가?

사람마다 다른 답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최고의 선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부족하다고 말할 것이다.

최고의 선이 행복이라면

그 행복은 결국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더 최고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

최고선을 향해 믿고 끊임없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철학은 계속 질문을 한다.

최고선이 곧 신이라면 신이 악도 행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신의 뜻에 반하는 것이 악이고

신은 절대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최고선을 믿고 그 뜻을 알려 노력하며

그 뜻을 따라가는 것이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참 어렵다.

신의 섭리는 무엇일까?

신은 선한가? 혹은 악한가?

인간의 기준으로 신을 평가할 수 있는가?

가끔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중심에서 생각한다.

운명은 과연 정해진 것인가?

마지막으로 신은 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10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0 댓글 4
종이책 구매 참된 행복, 최고선을 향해서 평점8점 | k**u | 2020.05.17 리뷰제목
"세상의 욕망의 바람들이 불 때마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근심도 측량할 수 없도록 무한히 커져가는 도다."  - P 39 중에서올바름, 타인에 대한 동정과 배려, 탐욕의 배제, 후학과 동료 시민을 위한 진실한 학문의 추구, 권력의 오만함을 잊지 않는 태도와 같이 신을 향해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도록 정진했던 인간이 터무니없는 모함과 배신으로 유배되어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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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욕망의 바람들이 불 때마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근심도

 측량할 수 없도록 무한히 커져가는 도다."  - P 39 중에서


올바름, 타인에 대한 동정과 배려, 탐욕의 배제, 후학과 동료 시민을 위한 진실한 학문의 추구, 권력의 오만함을 잊지 않는 태도와 같이 신을 향해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도록 정진했던 인간이 터무니없는 모함과 배신으로 유배되어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그 고통과 비탄을 형언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서기 475년에 로마 근방 명문 가문의 자식으로 출생하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테오도리쿠스'의 '마기스테르 오피기오룸'(오늘날 비서실장)이었으나 일순간 역적이 되어 526년 유배지인 파비아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집필한 참된 선(善), 운명과 의지에 대한 치열한 자기 물음의 사유가 이 책이다. 역자의 해제에서 설명 되듯이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책이 아니라, 운명의 파란에도 불구하고 신 안에서 위안을 받고자 했던 철인이자 정치가이며 신학자였던  한 인간의 간절한 철학적, 종교적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과연 정의로 다스려지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그의 첫 의심이었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는 신의 피조물로서의 동일한 질문일 것이다. 이전에 누렸던 영화, 그 행복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어찌 쉬이 떨쳐낼 수 있으며, 악이 세상을 장악하는 그 불의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잠재울 수 있겠는가. 


저술은 그의 감정에 공감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들을 내치는 철학의 은유로 등장하는 여인(철학의 여신인 아테나 이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에 나오는 필로소피아를 모델로 했다는 견해들이 있음)과 보에티우스의 대화로,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운 활용을 위해 시와 산문을 번갈아 쓰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총 5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보에티우스의 유배된 상황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 배경에 대한 진술로 이후의 물음들이 제기되는 바탕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장과 3장의 '참된 행복'에 대한 논의와, 제4장과 5장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와 운명,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과 보에티우스의 질문과 답변은 삶의 진리에 대한 간절한 앎이 더더욱 절절하게 울려온다고 할 수 있다. 


1. 참된 행복에 대해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슬퍼하는 일에 힘을 소진하는 것은 범인(凡人)인 우리네에게 으레 먼저 다가오는 사념이다.  여인은 말한다. "부귀, 명성, 권력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진정으로 인간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네가 다시찾고자 하는 것들이 너의 소유였음을 인정 할 것이다."라고.  사실 붙들고 싶어도 붙들어둘 수 없고 떠날때면 불행만 남기는 행운이라면 그런 덧없는 행운은 단지 다가올 불행의 전조 이외에 무엇이며, 단 한순간에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생사에 어떤 변함없는 것이 존재하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한 무엇이겠는가! 


"행복이 이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최고선'이라면 행복은 빼앗길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빼앗길 수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즉 '선'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 93中에서


우리는 재물을 '부'라 부르고, 권력을 '힘'이라 부르며, 관직을 '영예'라 부른다. 그리곤 이러한 것들과 멀어질 때면 행복이 사라졌다고 슬퍼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원래 그것들에 속하지 않은 거짓된 이름들로 부르기 좋아하는 인간의 자기무지에서 오는 탐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 명예, 권력, 영광, 쾌락은 인간의 정신에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다시말해서 그 어떤 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이끌어준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얻게 될 때 행복해진다. 


결국 이 다섯 가지가 동시에 완전하게 충족될 때 그것을 선이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완전한 것도 존재해야 한다.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완전한 행복이 참된 선이라면 그 완전한 것은 최고신 이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논리는 보에티우스가 위로를 구할 대상인 단일성, 근원적 존재인 '신'으로 향하게 한다. 그것이 종교의 유일신이든, 어떤 범신론적 대상이든,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근원성이든 말이다. 그런데 오직 선만을 갈구하는 신의 나라에서 악은 번성하고 미덕은 짓밟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대체 신의 섭리란 무엇이며, 운명이란 무엇인가? 완전성, 선의 총체라는 신이라며 어찌 이러한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2.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에 대해서


책 바깥으로 잠시 뛰쳐나가야 겠다. 선거에서 낙선한 한 인간이 충혈된 눈자위와 온갖 혐오의 표정을 짓고서는 부정선거라 악을 써댄다.  그에게서 '악(惡)'의 현현을 보게된다. 미덕을 버리고 악을 추구하는 것은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니 무지로 인한 맹목이다. 이보다 악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한 욕망에 사로잡혀 자제력을 잃은 것이라면 결핍의 악이다. 그런데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힘이 없다는 것이니 존재하기를 멈추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극악을 향한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내재된 완전성, 선의 총체는 대체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만물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든 방식을 포괄하는 불변의 단일한 형태인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충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욕망이 그들의 심장을 비틀어

독기어린 탐욕을 분출시키고,

회오리바람이 바다 물결을 채찍질하듯

분노가 그들의 정신을 채찍질하니

고통과 비탄에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붙잡고 몸부림친다네."    - P 199中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밭을 갈다가 금덩이를 발견한 경우가 우연인가 묻는 일화가 있다. 이것이 무(無)에서 생겨난 것인가? 일련의 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느닷없이 제멋대로 생겨난 어떤 움직임에 의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연이라 정의한다면, 이런 '우연'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일은 분명 여러 원인들(누군가 금덩이를 밭에 묻어놓았으며, 밭을 갈기 위해 땅을 파는 행위 등등)이 결합되어 일어난 긴밀하게 연결된 연쇄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신의 단일한 정신이 작성한 것이 시간 속에 안배된 만물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 질서가 우연이며 운명"이라면,  인간 의지의 자유는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과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사유의 깊은 심연을 지나가야 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경유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버려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며, 미래는 아직 소유하지 못했으며 현재는 단지 신속하게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따라서 삶 전체를 동시적으로 완전히 향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에티우스와 철학이 우연과 신의섭리의 문제를 논하다-P 221 삽화 발췌】


그러나 신은 존재해 온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의 본성의 단일성에 비추어 모든 피조물에 선행한다. 결코 지나가지 않는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을 알며, 미리 앞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한 눈에 다 보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은 미래에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게 될 일들을 현재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에 이 일들은 신의 인식이라는 조건으로 필연적인 일들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그 일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단일성에 의거해서 모든 것들을 자신의 현재 안에서 즉자(卽自)적으로 본다는 이 의미를 심상에 담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어떤 위안이라도 매달려야 할 사람에게는 간절함에 맞닿았을 것이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명성, 그리고 쾌락에서 자유로워지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다고 악인의 현현이 되야 하겠는가. 자기를 살피는 일이란 지고한 자기물음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더구나 물질의 쇄도에 짓눌려 정신의 저 깊은 곳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운명의 범주가 아니라 미덕의 범주인 우정과 사랑, 지고한 선을 향한 참된 행복, 우주의 본성에 대한 겸허를 얘기하기란 또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러나 우리네 인간은 불행이,  삶의 일상적 안온함이 물러날 때 그 허기와 상실의 고통으로 또 얼마나 아파하는가? 아마도 그러한 때가 되었을 때 이 책은 그 비탄의 통로를 빠져나가는, 죽음의 멍에를 떨쳐 버리려는 헛수고를 멈추게 해 줄것 같다. 삶의 진실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의 평온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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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과 다르다(철학의 위안)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c***a | 2018.06.17 리뷰제목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과 다르다(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다.굳이 철학으로부터, 철학에 의해, 철학의 어떤 면에서 위안을 바랐을까 제목이 상당히 궁금했다.     책에서는 ‘철학님’이 직접 말을 한다.철학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생각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위안을 받아야 하고, 위안을 받고 싶어 하는 어떤 사람과 철학이 직접 대화를 한다.‘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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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과 다르다

(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다.

굳이 철학으로부터, 철학에 의해, 철학의 어떤 면에서 위안을 바랐을까 

제목이 상당히 궁금했다.  

 

 책에서는 철학님이 직접 말을 한다.

철학에 대한 어떤 이론이나 생각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위안을 받아야 하고, 위안을 받고 싶어 하는 어떤 사람과 철학이 직접 대화를 한다.

철학이 사람이 되어, ‘철학이 육신을 입고 인격을 갖추어 세상에 드러난 셈이다. 이 점에서 책은 여느 철학서와는 다른, 참신한 느낌을 준다. 참신함이라니, 무려 1500년 전에 쓰인 책인데도 불구하고...  

 

 ‘철학님은 선과 악, 행복, 최고신, 선한 자들과 악인, 미덕과 악덕 등 대조적이고 반대적인 개념을 펼쳐 보이며, 결국은 신의 섭리대로 운명이 엮어지고 진행되며, 이는 반드시 선한 결과에 이른다는 내용을 대화한다.

특히, 선과 악의 대립과 관련하여 선도 악도 신의 섭리 안에서 최종적으로는 선을 이루는 도구로써 작용하는 원리를 설명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존재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악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절망하고 분개하는 , 마치 말로써 쓰다듬듯 위로하듯 조곤히 타일러 준다.  

 

 또한,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질서를 지키고 자신의 본성을 유지하는 것, 따라서 자신의 질서와 본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이며, 이에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인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 당한다.(196p)

, 책에서는 단순히 눈에 보인다는 사실과 존재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신의 섭리,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해 깊고 치열한 고민을 펼친다.

 

 신이 이미 다 알고 있고, 신에 의해 완벽하게 예정되어 있는 삶이라면 애당초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나 한 것인지, 왜 필요한지, 무엇을 희구하고 탄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지.

모든 일이 확고하게 정해진 것을 따라 일어나는데, 인간이 어떤 일이 있기를 희구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탄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254p) (‘철학님과 대화하고 있는, 혹은 철학님으로부터 배우고 설득당하고 있는 의 절망이 엿보이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곳에 도달하면 철학님께서는 절대 신이 되거나, ‘절대 신대변자역할을 한다.

인식 주체()는 인식 대상(인간)이 아닌,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인간을 인식한다. 과거와 미래, 어느 것도 소유할 수 없고 단지 찰나의 현재만을 살고 있는 인식 대상(인간)에 비해 인식 주체()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영원한 시간에 현재적인 존재이므로, 인간의 모든 시간(과거, 현재, 미래)현재로서 신 앞에 놓여진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침해받지 않으며 신의 예지와 섭리 또한 조화롭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철학님의 말이다 

 

  책에서는 시종일관 철학님가 대화를 한다.

주로 철학님이 말을 많이 하고, ‘는 듣고 있고, 공감하고, 탄식하고, 동의하고, 배우고, 감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10대를 거치면서 한동안 기독교에서는 말하는 절대 신(하나님)이 삶의 모든 것을 예비하고 준비하고 계획하고 관여하고 있다면, 나의 삶이라는 게 애당초 존재하기나 한 것인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는 과연 존재하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뜻밖에도 이 책에서 오래 전에 잊은 듯 살아온, 나와 같은 고민을 책에서 발견하고 반갑기까지 했다. 물론 철학님의 설명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림자의 윤곽이라도 얼핏 본 듯한 위로감을 느낀다 

 

  범죄가 넘쳐난다. 인구는 줄어든다고 하는데 범죄가 줄어들었단 뉴스는 보지 못했다. 책에서는 악인과 형벌을 같이 언급하는 있어, 악인은 곧 범죄인을 떠올리게 한다.

악인들이 벌을 받았을 때에는, 형벌 자체가 정의에 속하는 선이기 때문에 선이 그들에게 더해지는 반면에, 벌을 받지 않고 모면했을 때에는, 형벌을 받지 않는 것 자체가 불의에 속하는 악이기 때문에 악이 그들에게 더해지게 된다. 따라서 벌을 받은 악인들은 벌을 받지 않은 악인들보다 더 행복하게 된다.’(209p)

 

 벌을 받으면 선이 더해지므로 행복하게 된다는 철학님의 말에, 현대 범죄인들이 선뜻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악인의 두드러진 모습인 범죄인에게 같은 인간들이 법으로써 형벌을 정해두고, 정해진 형벌을 가하고, 이로써 재범을 방지하려 애쓰는 이 모든 노력들은 어쩌면 세상에 선을 더하고, 선을 유지하는 방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지점에서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젊은 시절에는 데미안’(헤르만헤세)에서처럼 세상은 분명히 선과 악, 두 개로 나눌 수 있었고, 나는 당연히 선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동안믿었다. 살면서 나이 들면서, 세상에는 처음부터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애매한 지점이 항상 존재하고, 누군가는 혹은 어떤 면에서는 선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악인 경우도 많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경우도 있고, 시작은 악(혹은 선)이었다가 나중에는 선(혹은 악)이 되는 경우도 있고. 아무튼 세상에서, 우리 삶에서 선과 악의 명확한 경계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범죄인을 악인으로, 존재적인 정의를 내린다면, 교화, 개선을 위한 형벌 따위는 왜 필요한가, 악인을 없애면 되는 것이지, 라는 생각에 이른다.

누구나 선한 사람 또는 악인이라는 정체성을 항상 유지할 수는 없지 않을까? (‘철학님에게 괜한 딴지 걸기를 해본다.)  

 

  그러면, ‘철학님과 대화하면서 깊고 치열한 고민을 하는 는 누구일까. 왜 이렇게까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몸서리치는 고민을 하는 것일까.

질문을 하는 , 이에 대해 조곤하면서도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철학님도 책의 저자인 보에티우스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궁지에 몰리고 역적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헤어날 길 없어 보이는 유배생활을 하던 보에티우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 신의 섭리와 예지 속에 있다는 믿음이 필요했을까. 그렇다면 신은 왜 자신에게 이러한 시련의 과정을 예비하고 허용했을까.

 

 책을 쓸 당시 보에티우스의 처지를 상상해보면, ‘철학님과의 대화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치열하며, 그러기에 더욱 희망을 붙들고 싶어했던,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결국 잔혹한 방법으로 참형을 당했다고 하니, 책에서 보이는 보에티우스의 희망과 믿음이 가엾고 애석하기 그지없다. 1500년이 시간이 흐른 지금에, 보에티우스 나이만큼 살고 있는 내가 보에티우스에게 공감하고 애석함을 느낀다면, 보에티우스가 아주 조금 위안을 삼을까 싶다 

 

 책은 라틴어 번역이란다.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읽히는 가독성을 자랑한다. 책 첫 부분인 해제를 꼼꼼히 읽어두고, 보에티우스의 정치적 배경과 현재 처지를 상상하면서 읽다보니 훨씬 풍부한 느낌을 누릴 수 있어 좋았다. 자세한 주석과 각 장 첫머리마다 간략한 설명문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인생을 가볍게 살라, 조언하고 충고하고 가르치는 책들이 넘쳐나는 요즘이다. 사는 것과 생존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 치열했던, 1500년 전에 50세도 채 살지 못했던 보에티우스, ‘철학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 책을 쓰고 철학님으로부터 위안을 받았을까.

미래의 삶은 아직 소유하지 못했고, 과거의 삶은 이미 지나가버려서’(270p) 오직 지금만을 살 수 있는 나, 삶의 진지함에 대해, 존재에 대해 돌아보니, 가슴이 떨린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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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철학의 위안 평점9점 | t****1 | 2018.06.08 리뷰제목
서기 475년경 로마 귀족가문의 집정관의 아들로 태어난 보에티우스는 다양한 학문을 수학하고 명문가인 심마쿠스를 장인으로 두고 로마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누리다 반역죄라는 누명을 쓰고 티키눔에서 유배를 떠나게 된 후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처형을 당하게 된다. 이 서적은 모든 부귀영화를 잃고 티키눔에서 유배생활을 떠나 작성한 글로서 처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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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5년경 로마 귀족가문의 집정관의 아들로 태어난 보에티우스는 다양한 학문을 수학하고 명문가인 심마쿠스를 장인으로 두고 로마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누리다 반역죄라는 누명을 쓰고 티키눔에서 유배를 떠나게 된 후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처형을 당하게 된다. 이 서적은 모든 부귀영화를 잃고 티키눔에서 유배생활을 떠나 작성한 글로서 처음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소크라테스와 키케로와 동변상련을 느끼며 감정이입하며 시로서 울분을 표현하다 철학의 여신을 만나 위안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는 내용을 담은 서적이다.

    

 

이 서적은 보에티우스의 생애와 철학과위안에 대한 배경, 참고서적을 설명한 앞부분의 해제를 제외한 총 5권으로 나누어지고 각권은 몇 페이지의 짧은 장으로 나누어져 읽기에 부담이 없다. 1권은 자신의 억울함과 비통함을 피력하다 철학의 여신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병에 대한 진단을 들으며 작은 희망을 갖게 된다. 2권에서는 그가 누렸던 부와 명예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인간의 삶에서 사소한 것이라는 내용을 철학의 여신은 문답을 통해 설명한다. 3권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한 글로서 그가 믿었던 카톨릭의 교리와 철학에서 추구하는 오나전한 선에 대한 글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인 4권에서는 신의 섭리가 비이성적이라는 보에티우스에 대해 철학의 여신은 섭리운명간의 관계를 설명하며 신의 통치에 대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여 신이 정의롭게 인간사회를 정의롭게 다스린다고 강조한다. 5권에서는 대화를 통해 정신적 자유를 도달하는 해탈의 경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서적의 각장은 산문과 시가 혼합되어 있어 철학의 여신과 대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보에티우스의 신학, 철학, 문학, 만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산문과 시를 더욱 고급스럽고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어 문장 자체가 매우 고급스럽다.

    

 

그리고 각장을 시작할 때 대략의 줄거리는 서적의 이해를 매우 도와주는 부분이었고, 서적의 하단에 역자 박문재님의 설명은 사소한 부분까지 충분히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배려하고 볼 수 있으며 박문재님 번역의 특징으로 서적의 가치를 높여주는 부분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이 서적은 철학적인 주장보다 신학적,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명제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위한 서적으로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보에티우스의 산문과 시의 명문장를 읽으며 인생에 대한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는 기회를 많은 독자들이 함께 하기를 강력 추천하고 싶다.

 

P247 인간의 영혼은 신의 정신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을 보존할 때에는 더 자유롭지만, 물질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아 흩어지면 덜 자유롭게 되고, 땅에 속한 것들에 매이고 묶이게 되면 더 한층 자유롭지 못하게 되며, 악에 사로잡혀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이성을 상실하게 되면 마침내 노예가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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