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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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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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살아서는 역사 죽어서는 수많은 민담의 소재가 된 릉속의 주인공들 -조선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평점8점 | e****0 | 2019.02.27 리뷰제목
왕릉하면 초등학교 4학년 때 태릉으로 소풍갔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때는 그곳이 왕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왕비의 무덤이란 것도 누구의 능인지도 몰랐다. 이어 중학교 때에는 동구릉하고 서오릉으로 소풍갔었고. 그때는 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역시나 누구 무덤인지 몰랐다.이렇게 소풍으로 어렸을 때부터 접해서 그런지  릉은 왕의 무덤이라지만 엄숙하거나 진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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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하면 초등학교 4학년 때 태릉으로 소풍갔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때는 그곳이 왕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왕비의 무덤이란 것도 누구의 능인지도 몰랐다. 이어 중학교 때에는 동구릉하고 서오릉으로 소풍갔었고. 그때는 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역시나 누구 무덤인지 몰랐다.

이렇게 소풍으로 어렸을 때부터 접해서 그런지  릉은 왕의 무덤이라지만 엄숙하거나 진지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친숙한 공간이라는 인상으로 남아았다. 릉 이름이 한자(漢字) 한자로 지어져서 릉이름을 알아도 묻혀있는 왕이나 왕비가 누구인지 바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이 책은 '조선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왕릉 40기, 원 13기, 묘 16기를 답사한 뒤 묻힌 이들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현 왕릉의 풍경과 보존상태를 전하고 있다. 그가 언급한대로 이렇게 한 왕조의 무덤이 온존하게 보존된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일이라는 것, 그리하여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음을 알려주고 산책과 역사를 동시에 음미할 수 있는 공간임을 일러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왕릉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게 없구나 하는 점이었다. 동구릉이 단 1명의 릉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에 알았는데 정확하게  6명의 왕, 추존왕 1명, 10명의 왕후 모두 17위 유택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중 1위가 합장이라 능침이 모두 16개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됐다.

그리고 왕릉만 둘러봐도 갈 곳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주말에 왕릉을 답사하는 데 7개월이 걸렸다는 것만 봐도 테마  답사지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릉의 주인공들의 살아서의 행적이나 죽은 뒤 운명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추존돼  릉의 주인이 되는 인물이 등장하는 가하면 왕좌에서 쫓겨난 광해군이나 연산군은 릉이 아닌 묘의 주인공으려 격하돼야했으니. 묘는 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만큼 규모나 설치가 초라할 정도이다.

 

릉을 둘러싼 사연들을 알 수 있게된 것도 소득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릉 조성하는 과정에서 벌어졋던 일들. 왕옆에 비, 계비 누구 릉을 배치할 것인지를 두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 곁에 묻히기를 소원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중종과 원비, 계비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문정왕후도 단신 태릉에 안장되었다.  문득 오늘 읽는 신문 기사 제목 '디자인, 배치는 권력이다'란 말이 생각났다. 왕과 왕비 후궁 세자는 모두 죽어서도 권력의 틀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릉에 얽힌 사연은 이렇게 다양했다. 영원히 누릴 것 같았던 권력은 영원하지 않았고, 죽은 뒤에 부침을 겪기도 했다. 명당을 찾아서 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이장되기도 했고. 가만히 보면 죽은 자라고 그냥 고이 릉을 조성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 살아있는 권력에 의해 우여곡절을 겪는 상황도 종종 빚어졌다.

 

봉건시대 왕의 무덤은 철저한 신분사회적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살아서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렸던 이들도 살아있는 권력의 틀이나 시대적 변화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단종처럼 무덤의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가 사후 왕의 신분을 되찾아 릉으로 조성되거나 추존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장되기도 했다.

살아서는 권력 중심부의 역사였고, 죽어서는 민담과 전설, 수 많은 이야기에 등장하게 된 릉의 주인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이들에게도 못다한 말들이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말이 무엇일까 왕릉을 돌아보면서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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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왕릉, 지친 도시인들의 힐링 공간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z******8 | 2017.06.28 리뷰제목
무덤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저승의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공간일까? 난 아무래도 무덤이라는 것이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인 것 같다. 죽은 이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무언가 하나라도 죽은 이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만들어졌어야 할텐데, 그런 무덤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비단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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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저승의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공간일까? 난 아무래도 무덤이라는 것이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인 것 같다. 죽은 이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무언가 하나라도 죽은 이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만들어졌어야 할텐데, 그런 무덤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비단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도 '죽은 이'들의 의견이 반영된 무덤은 없다. 피라미드와 같이 살아생전에 자신이 묻힐 무덤을 미리 만들어놓은 경우에도 '산 사람'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지, 죽고 난 뒤에 '막상 죽고 나니 이러저러한 곳이 마음에 흡족하다'고 '죽은 이'의 만족도를 평가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밑도 끝도 없이 개똥철학부터 써내려간 까닭은 문득 우리 나라만큼 많은 무덤을 가진 나라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이래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무덤 양식을 만들어냈다. 너무 많기에 왕조의 무덤들만 나열한다해도 고조선의 고인돌부터 해서 삼국시대인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왕조의 무덤들이 현재까지 잘 보전되어 있으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의 무덤인 왕릉이 즐비하다. 더구나 조선왕릉의 경우에는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해져서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로 자못 자랑스럽기까지 한 유적이다.

 

  우리 나라의 왕릉이 오늘날에는 도심 속의 자연생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기에 의미는 더욱 뚜렷해진다. 돌아가신 임금이 모셔져 있는 거대한 언덕(봉분) 주위에 조성된 산림에, 제례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형물은 자못 경건함을 뽐내기에 도시인들의 여가와 휴식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아닌게 아니라 웬만한 자연생태공원으로 만들어진 곳보다 가까운 왕릉으로 마실을 나가면 힐링의 품격이 천양지차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물론 다른 나라의 무덤들도 유명 관광지와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겸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맛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암튼 이 책은 서울과 경기 일대에 조성된 '조선왕릉'을 직접 답사한 저자가 에세이 형식으로 나름의 감흥을 소개한 책이다. 필자도 경기도 구리시에 거주하고 있는 탓에 가까운 '동구릉'을 지인들과 함께 마실을 간 적도 많고, '구리문화원'에서 시행한 왕릉답사를 경험하는 행운도 얻었기에 일반 입장객보다는 더 가까운 곳에서 관람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유독 동구릉에 관한 내용이 많았기에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재미가 솔솔했으나 에세이 형식의 한계로 인해 더욱 자세한 내용을 탐독할 수는 없었기에 한 편으로 아쉬움도 컸다.

 

  기회가 된다면, 책 속에 소개된 또 다른 조선왕릉을 직접 답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 책의 진정한 의의는 역대 조선의 왕릉을 집대성한 것일지도. 이전의 책들은 일부만 소개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 책은 1대 태조부터 27대 순종까지 모두 소개함은 물론 왕조의 족보가 무색할 정도로 세세하게 나열하였기에 더욱 그렇다.

 

  혹시나 아직도 왕들의 무덤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 가진 분들이 계시다면 동구릉과 광릉수목원을 추천한다. 도심 속 자연공원이란 의미가 어떤 것인지 직접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왕릉은 죽은 자들을 모아놓은 오싹한 공간이 아니라 산 사람들이 찾아와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평안 속에서 망자를 예우하는 착한 마음씨까지 지닌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말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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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왕릉으로 살펴보는 조선사..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k*****1 | 2017.06.23 리뷰제목
조선의 왕릉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래서 일까? 조선의 궁궐과 함께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잘 모르는 유적지인 것 같다. 말로만 듣던 왕릉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학교 다닐 때 소풍을 그곳으로 갔기 때문이다. 소풍을 가서도, 그리고 그 후 어쩌다 친구들과 혹은 가족과 함께 왕릉을 가기도 했지만 왕릉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자 했던 적은 없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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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왕릉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래서 일까? 조선의 궁궐과 함께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잘 모르는 유적지인 것 같다. 말로만 듣던 왕릉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학교 다닐 때 소풍을 그곳으로 갔기 때문이다. 소풍을 가서도, 그리고 그 후 어쩌다 친구들과 혹은 가족과 함께 왕릉을 가기도 했지만 왕릉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자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그곳에 왕릉이 있으니까 한번 둘러보고 또 휴식을 취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로 능이 42, 원이 13기 그리고 묘가 64기라고 한다. 조선의 왕릉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 왕과 왕후가 죽은 후 안장된 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왕은 모두 27명이다. 학교 다닐 때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현철고순하고 외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중 연산군과 광해군은 반정으로 쫓겨나면서 묘로 격하되어 왕릉에서 빠지고 추존된 왕 5명을 포함하여 30명의 왕이 왕릉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왕후 역시 원비 27명과 계비 13명으로, 40명 중에서 폐비 2명이 빠지고 추존된 왕후 5명이 추가되어 43명이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처럼 왕 30명과 왕후 43, 모두 73위의 무덤이 봉분 64개를 이루면서 능 42기로 조성된 조선왕릉은,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한 왕조의 왕릉이 모두 보존된 경우로, 이중 북한 개성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 전체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능과 달리 원은 왕의 사친과 세자, 세자빈의 무덤이고 묘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이다. 광해군과 연산군의 무덤은 호칭이 말해주듯 묘로 조성되어 있다.

 

   이 책 [조선왕릉, 그 뒤안길을 걷다]는 저자가 조선을 창건한 1대 태조부터 27대 순조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각 능의 주인과 주변인물들을 역사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조선시대 역사를 왕릉을 중심으로 하여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고 있는 셈이다. 조선시대 왕릉은 조선이 유교 국가였던 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러다 보니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공간의 구성이나 조성방식, 그리고 조형물 등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일정한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오례의 예법과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 또는 [경국대전]에서 규정한바를 그대로 지키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그중 흥미로운 사실 몇가지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왕과 왕후의 무덤은 사대문에서 80리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제한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왕릉 42기중 개성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원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묘 제릉, 2대 왕 정종의 묘인 후릉, 그리고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 장릉을 예외로 하면 모든 능이 서울과 경기도에 자리하고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인 여주 영릉은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 지관들이 물길로 가면 하루거리라는 논리로 합리화했고,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인 화성 융릉을 조성하면서 당시 88리였던 거리를 왕명으로 80리로 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의한 명당과 규정 사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아 흥미롭기도 하다.

  

   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갔던 능은 동구릉과 서오릉이었다. 동구릉, 그리고 서오릉이라는 이름이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9개의 능, 그리고 서쪽에 있는 5개의 능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 것을 책을 읽고서 알게 된다. 무심코 부르고, 단지 왕릉 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동구릉, 서오릉이 원래 능이름이 아니란 사실에 조금은 계면쩍어 진다. 구리에 있는 동구릉은 태조의 능인 건원릉, 문종의 헌릉, 선조의 목릉,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인 휘릉, 현종의 숭릉, 경종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빈 신분으로 죽었으나 후에 왕후로 추존된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인 혜릉, 영조의 원릉, 헌종의 경릉, 그리고 헌종의 생부로 나중에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수릉이 그것이다. 한편 서오릉은 세조의 장자로 성종대에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능인 경릉, 예종의 창릉, 숙종의 명릉,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인 익릉, 그리고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인 홍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위는 적장자 승계가 원칙이었다 그런데도 적장자로 왕위를 승계한 경우는 7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숙종을 제외하고는 일찍 죽거나 자리에서 쫓겨났다. 적장자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문종, 인종, 현종, 경종은 불과 2,3년 안에 죽었고, 단종과 연산군은 계유정난과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권력을 두고는 부자간에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 딱 들어 맞는 것 같다. 어쩌면 적장자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경쟁자라 느꼈을 조선의 군왕들이 한편으로는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런 가하면 흥선대원군이라는 칭호로 우리에게 익숙한 대원군은 조선시대 3명이 있었다. 대원군은 왕의 생부로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추존된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대원군은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이다. 이는 명종이 후손없이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써 직계로 이어지던 왕통이 끊어지고 방계로 넘어갔기에 가능했다. 두번째는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으로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면서 절손 되자 서출로 내려온 영조의 피를 받은 후손을 왕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안동김씨 가문의 정략적 목적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마지막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살아서 대원군의 칭호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정사에서 알지 못했던 의외의 사실들을 알게 된다. 왕릉이 비록 이 땅을 살았던 민중들을 도외시한 그들 만의 이야기이지만, 그들도 피해갈 수 없었던 죽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저자는 왕릉 답사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이 답사한 경험을 최대한 살려 집필했다고 한다. 이 글을 읽고서 왕릉을 다시 찾아 본다면 느끼는 것이 전과는 다를 것 같다. 오늘도 그대로 살아 숨쉬는 왕릉에 잠들어 있는 조선 왕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권력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의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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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s***h | 2017.06.28 리뷰제목
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이 책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시대의 왕의 능을 찾아보고 기록한 책이다. 왕릉이란 왕의 묘를 말한다. 임금의 자리에 있었지만 폐위된 임금의 경우는 능이라 부르지 않고 묘라 부른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가 그런 경우다.   조선 왕릉에는 단지 왕의 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비의 능도 같이 모셔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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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이 책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시대의 왕의 능을 찾아보고 기록한 책이다.

왕릉이란 왕의 묘를 말한다.

임금의 자리에 있었지만 폐위된 임금의 경우는 능이라 부르지 않고 묘라 부른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가 그런 경우다.

 

조선 왕릉에는 단지 왕의 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비의 능도 같이 모셔져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하니, 이는 국제적으로도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그런 조선 왕조의 왕릉을 답사하고, 그 기록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 중 35기를 답사하고 난 후 기록한 것이니, 그 두께도 상당하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는 그런 왕릉을 이 책에 모두 35기의 왕릉을 담아 놓았다. 이 중에는 광해군과 연산군의 묘가 있으니, 왕릉은 32기, 묘가 2기가 들어 있다.

 

각각 능의 답사기는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그 왕의 행적을 설명한 다음에, 죽은 후 능이 조성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 후 왕릉을 실제 답사하여 그 행적을 기록해 놓고 있다. 모두 저자가 발로 뛰어 능을 답사하고 가록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은 여러모로 친절하다,

우선 첫 페이지에는 능의 위치를 표기한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여 거의 모든 능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그 다음 쪽에는 왕릉의 공간구성 해설도가 보인다,

이 자료를 보면 왕릉의 공간이 한 눈에 이해가 된다.

 

진입공간, 제향공간과 그리고 능침공간으로 구분된다는 사실부터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그 공간마다 설치되어 있는 건물, 구조물, 석조물이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책이지만 숙연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금천교를 예로 들어보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돌다리라니, 그럼 그 돌다리 밑에는 적어도 개울이 흘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궁금증에 몇 개의 왕릉을 찾아보았다,

 

우선 서울 정릉, 금천교를 건너 얼마를 걸어가니 홍살문이 나타났다(41)는 기록은 있는데, 금천교 아래 개울이라도 흐르고 있는지 여부는 기록에 없다. 금천교가 없는 능도 있다. (55)

 

금천교는 거의 모든 능에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되는데,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는가 하는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직접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그래서 크다.

 

그래서 그런 기록을 통해 내린 결론은 금천교라는 것은 비단 시내를 건너는 다리가 아니라, 속세와 능역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다리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또한 능의 전경을 해설해 놓은 것을 통해서 왕릉의 공간과 거기에 설치되어 있는 석조물에 대한 이해를 잘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다시,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대 임금을 모셔놓은 능은 다른 곳에도 있다. 경주에는 신라시대의 왕릉들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그중 무덤의 주인이 알려진 곳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곳도 있는데, 주인이 알려지지 않은 무덤은 능이라 불리지 않고, ()이라 부른다.

 

()은 발굴된 무덤의 크기나 규모. 발굴 유적으로 볼 때는 왕이나 왕비의 능인 것 같은데 어떤 왕이나 왕비 무덤인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어 능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다. 경주의 천마총이 그 예이다.

 

그러니 능의 주인이 모두 알려진 조선왕릉의 경우는 신라왕릉과는 다르다. 보존도 잘 되어있거니와 그 기록이 잘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책의 가치도 더하다. 본격적으로 이 책을 들고 조선왕릉을 답사할 수 있으니, 이 책 제목 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가 실제 가능한 것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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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왕릉에서 발견하는 조선왕조의 또다른 이야기들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s****b | 2017.06.29 리뷰제목
서울에 살지 않아서 잘 모르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궁궐이다.남대문, 동대문 등 사대문을 비롯하여 종묘, 사직단 등의 제사장,그리고 다양한 궁궐을 도시 곳곳에 소유하고 있다.가끔 연예프로그램을 볼 때, 미션으로 궁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가면 저렇게 볼 수 있는 궁궐이 있구나.어릴땐 그게 뭐 대수롭지 않게 보였는데,
리뷰제목

서울에 살지 않아서 잘 모르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궁궐이다.
남대문, 동대문 등 사대문을 비롯하여 종묘, 사직단 등의 제사장,
그리고 다양한 궁궐을 도시 곳곳에 소유하고 있다.
가끔 연예프로그램을 볼 때, 미션으로 궁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가면 저렇게 볼 수 있는 궁궐이 있구나.
어릴땐 그게 뭐 대수롭지 않게 보였는데, 이상하게 나이가 드니 그런게 그렇게 부럽다.

아이들 핑계를 대고 찾아간 궁궐들.
아이들은 별 감흥이 없는데 나만 그 자태에 매력을 느끼고 말았다.
한 나라의 흥망성쇄가 들어 있는 역사적 사실 말고도
그냥 거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왕릉이다.
부산사람에게 왕릉 하면, 아무래도 가까운 경주에 있는 신라의 거대 무덤들을 떠올리기가 쉽다.
다시 지역적 거리감을 느낀다. 이 책에 나오는 조선시대의 왕릉들은
아무래도 서울과 경기에 집중되어 있다.
심지어 아직도 도심 한가운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왕릉들도 있다.
우리에겐 조선의 왕릉이란 관심을 갖고 일부러 찾아가보지 않으면 만나기 힘든 곳이다.
그래서 이런 책이 더욱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왕릉에 대한 책이 몇 권 출판되어 있었다.
교육의 목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기 위한 책도 있었고,
역사적인 의미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적이기에 의무감에 집필된 책도 있으리라.

조선 왕조의 무덤은 모두 119기.
능이 42기, 원이 13기, 묘가 64기라고 한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왕의 사친, 왕세자와 그의 비의 무덤,
묘는 대군, 옹주, 후궁 등의 무덤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 500년의 역사에 비춰볼 때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닌 듯 하다.
북한에 있는 것, 공개가 되지 않은 것을 빼고, 
직접 방문했던 능, 원, 묘를 시대순으로 정리해 적은 것이 바로 이 책.
당연히 방문에만 몇 년의 세월을 보냈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부분이 아니니 책을 써내면서도 외로운 작업이었을 것 같다.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이 책을 쓰는 것 역시 쉽지 않았을테지만
한 출판사의 대표로 어떤 의무감에서 집필된 책이 아닐까, 나름 짐작해보았다.

시대순으로 나열된 책은 그 시대의 역사적 분위기를 살펴보고,
실제로 방문한 능의 분위기, 상태 등을 서술하고 있어 그리 지루하지 않다.
책의 서두에 묘와 관련한 용어가 정리되어 있으니 한번 읽어보고 지나가면
우리가 그냥 보는 표지석 하나, 전각 하나도 다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시작, 태조에서부터 왕릉은 왕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능은 후대에 만들어지는 것이다보니 계비인 신덕왕후와 힘겨루기를 하던 태종이
태조와 신덕왕후를 함께 모셨을 리 없다.
결국 태조는 외롭게 혼자 모시게 되었고, 이후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된다.

태종의 능에는 후대에 "태종우"라고 불리게 되는 유적도 함께 남아 있다.

헌릉 혼유석 밑에 네모난 홈이 있는 하전석에는 해마다 태종의
기일(음력 5월 10일)만 되면 비가 와 물이 고인다고 한다.
태종이 임종을 맞이할 때 세종에게 "현재 가뭄이 심하니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이날 비가 오게 하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동국세시기>에는 이 비를 태종우라고 했다.

정말 어이없게도 "광릉 수목원"은 알면서, 광릉이 세조의 능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뒤에 릉이 붙어 있는데도 무덤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고,
수목원에 집중해서 기억하고 있던 것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왕릉은 멀고 나와는 관계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땅값 비싸기로 소무난 서울 강남구 한복판에 선릉과 정릉이 존재한다.
다행히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받고 있는 이 곳.
능의 또 다른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화유산을 금액으로 산정할 수는 없다.
도심의 금싸라기땅이 역사, 휴식, 산책 공간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문화재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잘 활용해야 될 것 같다.

후대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는 왕 광해.
어머니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광해군의 일생을 보면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 그래서 광해군은 어머니 곁에 묻히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광해군은 세상을 떠나면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래서 광해군묘와 성묘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지역은
특히 소나무가 많은데 '송능리'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인 송릉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모자가 모두 비운의
삶을 살고 간 역사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묘를 떠났다.

조선의 왕릉에서 발견한 다양한 역사적 이야기들,
<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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