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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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역사

인간이 묻고 신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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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세계의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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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구매 [세계 종교의 역사-리처드 할러웨이] 세계 종교사 최고의 입문서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s*******1 | 2018.10.05 리뷰제목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삼으면 절대 안 되는 주제가 있다면, ‘정치’와 ‘종교’를 택하겠다. 그 중에서도 하나를 택하라면 단연 ‘종교’다. 이 두 가지, 특히 종교의 경우에는 타협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는 신념이라는 개인적, 사회적 가치에 관한 것이기에 일말의 타협이 가능하다. (정치가 일종의 타협의 기술임에도 타협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만.) ‘종교
리뷰제목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삼으면 절대 안 되는 주제가 있다면, ‘정치종교를 택하겠다. 그 중에서도 하나를 택하라면 단연 종교. 이 두 가지, 특히 종교의 경우에는 타협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는 신념이라는 개인적, 사회적 가치에 관한 것이기에 일말의 타협이 가능하다. (정치가 일종의 타협의 기술임에도 타협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만.) ‘종교는 다르다. 종교는 믿음에 관한 일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고 성경에서 말한다. 의심 없이 따라야 할 이상향이다. 믿음은 변하거나 타협할 속성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세상의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지만, 신심이 깊은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다. 아니면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신심이 깊으신 분들에게 리처드 할러웨이의 세계 종교의 역사는 불편한 책일지 모르겠다. “확신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의 반대(p.496)”라고 말하며 과학은 종교가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또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바꾸도록 도와줌으로써 종교에 도움을 주었다.(p.497)”고 말한다. 신 자체보다는 인간의 마음, 그리고 상징을 통한 종교의 의미를 고민하다보면 믿음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한다. 인류 역사와 마찬가지로 종교 간 영향력을 조망하다보면 종교에 대한 믿음이 떨어질 만하다. 반대로 신심이 극단적이지 않은 분들이 읽는 다면 최고의 종교() 입문서다. ‘종교란 무엇인가.’ ‘신이란 존재하는가.’ ‘사회와 종교, 종교 간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질문에 가장 기초적인 지식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렵지 않고, 쉽게 하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종교 역사를 충실하게 읽을 수 있다. 더군다나 미래의 종교, 혹은 올바른 종교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데 단서를 준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종교 관련 장편의 글을 받았다. 요지는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취지의 유투브 강의 녹취록이었다.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의 주요 발언, 성경적 사실을 통해 동성애는 죄악이고, 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면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차분하게 읽어보면 반공(을 빙자한 현 정부 비난)과 동성애 혐오라는 일치하기 어려운 두 메시지의 결합이 핵심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동성애라는 종교적 명제와 이를 혐오하는 감정을 방아쇠로 반공이라는 트라우마를 건드려 현 정부를 비난(비판이 아닌)하고자 하는 것인지, 동성애가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메시지를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고민이 있어서다.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자 성전을 벌이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세속주의 만이 그들의 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된 세상에서 신을 전하고자 한다면, 신이 왜 죽었는지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신이 말하고자 했던 바 약자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신뢰와 같은 가치에 대한 고민 없는 선언은 신이 여기에 없음을 더 없이 증명하는 행동이 아닐까.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것이 기독교이건, 이슬람이건, 어느 종교건 그들의 신이 위대한, 위대했던 이유를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매 시대 종교는, 신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었다. 해방과 독립, 천국과 지옥, 고난과 희망을. 하지만지금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가고 있다. 이 시대의 종교는 우리에게 어떤 비전을 주는가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에 변화는 없다. 다만, 그의 말을 전하고 행하고 알리는 종교라는 인간의 일을, 말을 의심한다. 하지만 그들을 거치지 않고 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바른 통로가 있는가? 다이자 오사무의 직소가 떠오른다. 유다의 잘못된 신앙이 은자 서른 냥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면, 나의 믿음이 애초에 잘못되어 목메어 자살할 운명이라면 너무나도 슬프다. 그래서 내가 믿음을 잃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 운명이 싫어 애써 당신을 부인하는 것일까. 아니면 직소의 소설처럼 내 죄를 고백하는 중일까. 믿음이 부족한 자여! 신앙인으로의 삶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때는 항상 이르렀다.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확실히 불편해 할 것이다.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경계를 흐리는 말이니까. 신에 이르는 통로는 하나일까. 말과 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되새기는 일. 그리고 내가 올바르게,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 일이 전부일까. 신의 계시를 받았던 사람들은 항상 기존의 종교에 탄압을 받았다. <세계 종교의 역사는 말한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이러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종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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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항상 일어나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숨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첫걸음이다. p.10

종교의 역사는 이들 예언자와 현자, 그리고 그들이 시작했던 운동, 그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논쟁과 불일치로 가득한 무거운 주제다. p.17

종교란 우리 무의식 안에 있는 두려움과 소망이 삶이라는 은막(p.26)위에 투사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은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다. p.27

과학이나 철학의 역사와 달리, 종교의 역사에 접근할 때 엄격한 연대기적(p.27) 접근법을 취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다른 사건들이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연속적인 발전 궤도를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p.29

붓다는 실제적이며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실제적인 사람들의 강한 특성은 목록 만들기를 대단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p.65

그들은, 인간은 그 누구든 결코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사물을 보는 다양한 방식과 실재를 경험하는 다양한 모습을 모두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교리를 그들은 아네칸타바다anekantavada 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코끼리 한 마리를 놓고 각기 다른 부분을 손으로 더듬어 묘사했던 여섯 맹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p.77

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종교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다신교에서 유일한 신을 믿는 일신교로서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전환은 종교란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교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화한다. 종교는 활동사진이다. p.94

종교적 이야기들은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하다. p.107

어떤 종교적 시스템도 신의 신비를 포착하거나 담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많은 종교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듯이 주장했다 p.113

예언자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앞서서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들은 것을 설명하거나 알리는 사람들이다. p.121

에스겔은 이스라엘인들이 유배를 당한 것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자신에게 어떤 나쁜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은 불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이 탄생한 것이다. p.125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의 이스라엘에는 왕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전의 최고 사제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지상에서의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 기나긴 이스라엘의 통합 과정에서 아브라함 이래 그들 역사의 일부였던 어떤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예언이 멈춘 것이다! 이제, 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p.127) 놀라운 새로운 말을 전달하는 예언자 대신, 신이 인도하는 역사 이야기 및 그들의 삶을 규율하는 율법을 모은 책이 편찬되었다. ... 목소리의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책의 민족이 되었다. p.128

유대의 사상가들은 시간이 하느님이 쏜 화살이며, 그것이 과녁에 도달하면 시간은 끝이 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p.140

다니엘이 개인이 죽었을 때 개별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민족 전체의 부활을 믿었던 것이다. ... 그는 또 다른 커다란 관념 하나를 제시했다. 끝이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기 위해 신은 메시아라고 불리는 대단히 특별한 비밀 요원을 보내 최후의 공격에 대비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다. p.142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이단으로 출발했다. 아브라함이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다른 사람들이 믿는 신들을 비웃었던 것처럼, 예언자들은 지배적인 의견에 도전하는 내부의 목소리에 반응한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대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단자)이 분리되어 나와서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거나, 낡은 그룹과 경쟁하는 분파를 세우는 것이다. 때로 이단자들이 싸움에서 이기고 그들의 생각이 새로운 정통이 되기도 한다. 닫힌 마음이 그대로 굳게 닫혀 있어서 새로운 생각은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통찰력을 흡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p.149

욥은 자기 민족이 수백 년 동안 물어왔던 그 질문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통적 견해, 즉 고통은 신이 그들의 죄에 대해 내린 벌이라는 견해를 파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거대한 순간이었다. 욥기는 잘못된 생각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단순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해준다. 그 시대의 정통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신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답은 옳다고 욥에게 말한다. 그래서 욥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신이 단지 그렇다고 맘하기만 하면 잘못된 것은 옳은 것이 되는가?' 아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이 뭐라고 말하든, 사제가 신이 말한 것이 무엇알고 말해주든, 나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설사 하늘이 내 앞에서 무너진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욥은 성경 바로 한가운데서 일어나서 그 자체의 가르침에 도전하는 이단자. p.152

고도로 발달된 종교적 정통 이론자들은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신이 그런 상황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p.157

종교는 이 세상을 초월한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원천으로 삼는다. 그 다른 세계의 비밀은 그 신비를 간파했다고 주장하는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 예언자들은 어떤 목소리가 자기들에게 들려준 것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려주면서 새로운 종교가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종교는 옛 종교에 대한 공격이라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옛 종교의 사제(p.163)들이 새로운 종교의 사제들을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은 항상 고통받을 수밖에 없고, 또한 자신들이 본 것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종교 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p.164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생생한 무서움을 안겨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 출현하는 종교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p.170) ... 이런 영향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들이 서로에게 배타적으로 봉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왕성한 융합을 이루면서 발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p.171

인간은 제한된 시야 때문에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종교적 주장들이 궁극적 실재를 보여줄 것이라는 오만함을 가져서는 안 된다. p.173

중국은 종교에 대한 그들만의 접근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실용주의적'이라는 개념이 그들의 방법을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일 것이다. ... 그것은 바른 믿음이라기보다는 바른 실행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중국의 종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강조했다는 의미에서, 그 말은 중국인의 종교에 대한 태도를 설명할 때 아주 유용하다. p.177

고대 중국에서 종교는 무엇인가를 믿는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는 것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것은, 공동체에 무엇인가 좋은 것을(p.178) 가져다주기 위해, 자연의 힘들을 관리하는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p.179

우리는 공자로부터 황금률에 대한 최초의 표현 중 하나를 배우게 된다. 하나는 긍정문, 다른 하나는 부정문의 형태로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 또는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p.183

인간의 불일치와 갈등을 처리하는 유교적 접근법은 측은지심만이 아니다. 유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인내도 가르친다. 실제로는, 이것이 거의 양식화된 예의와 연관되는 이유다. 예의와 인내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인식하는 마음의 표시이며, 그 실천에는 보살핌이 요구된다. 오늘날까지도 성급한 서양인의 마음 안에서보다는 인내심을 가진 동양인의 마음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관한(p.184) 예의를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p.185

유교는 인간 공동체의 선을 위해 이 세상에서의 인생을 관리하는 것에 그 에너지를 집중한다. 인생은 그 자체로 잘 살아내야 하는 것이지 죽음 후 우리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의 서곡이 아니다. p.185

흰두교의 현자들은 세계와 세계 안에서의 우리 삶은 환상이며, 구원을 얻으려면 그 환상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유대교의 예언자들은 언젠가는 신이 이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행한 것에 대해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과 세상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 그것은 그 두 종교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그 대답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도교는 달랐다. 도교의 현자들이 바라본 곳은 이 세상이었다. p.189

'순환의 도' ... 도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우주 전체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 안에서 그런 균형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p.191

도덕경> ... 핵심은 '균형''상보성'이라는 아이디어다. 노자는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에는 대립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대립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상보적 대립자'라고 부를 수 있다. p.192

노자는 인생사에 대한 자기만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무위'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기', 세상을 그냥 그대로 두기, 일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내버려두기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p.194

종교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박해하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망치 여러 개를 닳아 없어지게 만든 모루를 닮았다. p.203

과학은 사실facts과 사물things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예술은 우리 자신의 삶의 진실truth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야기는,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게 바로 내 이야기야!'라고 소리치며 깨달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 종교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많은 종교인들이 결코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과학과 종교의 차이이기 도(p.210) 하다. 종교인들 중 일부는 기독교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예술 작품이 아니라 과학 작품이라고 증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다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p.211

창조 이야기들은 머나먼 옛날부터 전해져온 기억의 조각들, 즉 모든 변화를 시작하게 만든 폭발과 모든 피조물을 탄생시킨 대양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p.212

종교는 세계가 '어떻게' (p.218) 창조되었는지를 기술하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세계는 왜 '그런 모양'으로 만들어졌는지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p.219

도덕률의 수호자로서 기능 .... 종교는 인간 공동체를 통제하는 방법, 즉 집단적 활동이 될 뿐만 아니라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p.220) ... 문제투성이 삶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p.221

로마 제국에서 이런 비밀 제의가 출현한 것은 종교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종교는 주로 공통의 정체성과 연결된 집단적 활동이었다. ...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위안을 제공하는 종교가 점차 성장하여 보편적인 종교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구원을 찾아 헤매는 개인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신비제의들은 이런 경향을 유효하게(p.229)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개인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제의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런 참여가 집단 정체성의 표현이었던 과거의 종교 개념을 변화시키기 시작했고, 이제 종교는 개인적인 개종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제의 참여자들에게 구원의 정서적 경험을 제공하는 데 이용되었던 의례적 방법들은 앞으로 탄생하게 될 미래의 종교들이 모방하게 되는 하나의 형식을 공급해 주었다. p.230

모든 종교는, 말로는 일치를 강조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때때로 대단히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신앙을 가진 다양한 그룹의 연합체다. p.235

마가복음에서, 안식일 이야기의 표적은 율법이었다.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의 표적은 권력정치였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는, 종교가 표적이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핵심은 이렇다. 신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제도는 너무나 쉽게 신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신의 사랑보다 더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p.257

까치발로 살금살금 이루어진 사건들이 종종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p.270

무함마드는 특별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 안에서 혹은 세상 너머에서 끊임없이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 사회의 특징인 추악함과 불공정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그들은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실 너머의 정신적 실재와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종교적은 방식을 존중한다. 그러(p.291)나 동시에 그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교묘하게 종교를 이용하는지, 나아가 그것이 종교의 본래 목표인 인간의 행복과 얼마나 대립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p.292

인간의 마음, 바로 그것이 종교의 다양한 세계를 창조한다. 그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상상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은 두 가지 수준에서 작동한다. 하나는 사고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궁금증의 영역이다. 인간은 언제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또 그것의 의미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왔다. p.325

루터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것은 역사를 영원히 바꾸게 될 두개의 힘을 속박에서 풀어주었다.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신 앞에 얼굴을 맞대고 서는 자유로운 개인(p.360)이다. 종교개혁의 즉각적인 효과는 난공불락이었던 교회라는 단일체를 해체시켰다는 것이다. p.361

종교란, 로마인들이 말했던(p.364) 것처럼, 'a quid pro quo'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내놓는 것'이었다. 이것을 믿고 저것을 행하라, 그러면 그 결과는 이렇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 의무는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을 믿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종교가 근거를 두고 있고, 또 종교가 요구하는 신에 대한 관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분명 일리가 있는 요구일 수도 있다. 종교는 일종의 교환, 거래, 보험 정책이었다. 면죄부는 분명히 그런 것이었다. 그것을 사라,

그러면 너의 미래는 보호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종교만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방식이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 그것은 비즈니스였다. p.365

종교는 필연적으로 인간 세계의 정치와 얽혀 있다는 사실이다. 도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정치'라는 말은 인간이 그들의 공적인 삶을 조직화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아주 편리한 단어다. 그리고 그 공적인 삶은 필연적으로 모든 긴장과 불일치를 본질로서 가지고 있다. 정치는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말다툼에서부터 국제연합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논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 속에(p.396)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애초부터 종교는 정치적 혼합물의 일부였다. 어쩌면 신과 인간의 관계, 그 자체가 일종의 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세속적인 정치의 일부였다. 종교 안에는 분명하게 정치가 존재한다. 누가 종교를 운영하고 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일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한 일은, 내용과 상관없이, 신이 자기편이라고 주장하는 경쟁적인 정치권력 사이의 논쟁에서 종교가 무기로 사용될 때 발생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더욱 그렇다. p.397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보(p.415)이는 이런 태도는 놀라빅도 하고 놀랍지 않기도 했다. 일단 그런 태도는 놀랍다. 왜냐하면, 거만함은 자기 제자들 사이에서 들어설 곳이 없다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분명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놀랍지 않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방식이고, 성스러운 옷을 아무리 여러 겹 걸쳐서 숨긴다해도, 종교는 결국 세상의 방식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p.416

퀘이커교도들은 오늘날 역사적, 비판적 성서연구라고 알려진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그것은 성서에 끼친 신의 영향력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적인 요소들을 분리시키려고 노력한다. (p.425)예제도는 인간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너의 이웃을 너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는 것은 신의 명령이었다. p.426

종교는 많은 목적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때로는 선한 목적을 위해, 또 때로는 잔인한 목적을 위해. p.428

그들이 가져갔던 프(p.428)로테스탄티즘은 불안정한 종교였으며, 그런 성격이 미국 그 자체의 특성으로 각인되었다. 그것은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고, 또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정복해야 할 새로운 프런티어는 언제나 존재했다. p.429

종말론 운동은 항상 억압받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신이 더 이상 자기들이 겪는 고통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회복이 이제 진행되고 있다는 꿈을 꾼다. p.431

종말론적 소망을 십자가에서 희생된 또 다른 미국의 거주자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종교에서 발견한다. 그들은 족쇄가 채워진 채 억지로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는 수천 마일의 항해 끝에 기독교 신자인 노예 주인들의 착취 아래 들어왔다. 그들 노예는 자기의 주인에게서 기독교를 배웠다. 하지만 노예들의 신앙은 기독교를 가르쳐준 주인들의 신앙보다 훨씬 더 원본에 충실하다. 그것은 종교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유대교는 노예들의 종교로 시작했다. (p.433) ... 기독교 역시 해방운동으로 시작되었다. (p.434) ... 기독교는 노예를 위한 종교였다! ... 그들은 성서가 가르쳐주는 그대로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성서가 말하는 해방의 소망은 노예들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p.435) ... 그들은 종교가 가진 여러 목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견디기 힘든 슬픔을 위로하고 완화시키는 기능을 실행하고 있었다. p.436

처음에 종교는 불가사의한 경험에서 시작되지만 항상 정치로 나아간다. 종교는 선택된 도구인 예언자들에게서 들리는 목소리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이 들은 것은 언제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정치에 영향을 주는 행동들로 이어진다. 때로는 나쁜 정치가 있다. 나쁜 정치는 그릇된 믿음을 따른다는 이유로, 또는 그릇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박해한다. 또는 최후의 열정적인 예언자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래서 종교사는 다양한 형태의 탄압에 대한 연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좋은 정치가 있다. 좋은 정치는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주는 것이다. (p.439) ... 여기서 종교는 부정의와 불평등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아편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종교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자극제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라는 경기에 계속해서 참여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p.440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들이 모두 동일한 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하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며, 또 그것이 그들을 통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각도가 아니라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종교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보이는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를 혼동한다. 이 모든 것은 다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생각했던, 앞을 못 보는 사람들과 코끼리의 비유로 돌아간다. 코끼리는 아마도 하나겠지(p.490), 보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 자신들의 말이 최후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의 비극은, 그것이 인간을 서로 싸우는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불할시킨다는 것이다. 현대 와서 종교는 인간의 최대 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신을 다른 시각에서 보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동일한 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종교는 분열보다는 통합을 위한 힘이 될 수 있다. p.491

근대 과학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의 삶을(p.494)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p.495

확신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의 반대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확신한다면, 그것을 믿(p.496)을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다. 나는 '2+2=4'를 믿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셈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인생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세계를 창조하고 또 세상을 사랑하는 창조자가 있다는 것은 확신하지 못한다. 또는 죽은 후에 또 다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 중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믿거나 또는 믿지 않는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거나,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과학은 종교가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또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바꾸도록 도와줌으로써 종교에 도움을 주었다. p.497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자는 역사와 역사가 불러오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로부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에 대응하기보다는 차라리 테니스 코트 위에서 라켓을 내동댕이치는 쪽을 선택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과거다. '왜 당신들은 자꾸만 미래를 끌어오는가?' 그들은 이렇게 소리친다. 근본주의는 떼쟁이에 가깝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을 거부하며 날카롭게 외치는 발작이다. p.501

우리 시대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뒤흔들리는 이유는 과학의 압력보다는 사회의 변화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형태의 근본주의는 단지 화가 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폭력으로 변했다. p.502

진보적인 종교들이 다윈에 적응해가는 것을 배웠나갔던 것처럼, 그들은 여성해방에, 대단히 고통스럽게, 적응하려고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시대는 정지해 있지 않으며, 이제는 동성애자들의 해방 문제를, 훨씬 더 고통스럽게, 해결해내야 한다. p.504

우리는 같은 의견을 가질 수도 있고,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만약 이 주제들에 대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입장이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장이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해진다. p.506

근본주의자들은 논쟁하지 않는다. 그들은 증거를 심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판결문을 전달할 뿐이다. 그리고 그 판결은 언제나 '유죄'이며, 그들의 성스러운 책이 이미 그런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p.506

우리가 종교적 폭력을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갈등에 대해 불합리한 격렬함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의 심장부에 엄청난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종종 신자들에게보다 비 신자들에게 더 명확하게 보인다. 그 모순의 이름은 신이다. p.515

그렇다. 이처럼 종교는 역사 속에서 최악의 폭력을 야기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을 이용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신이라는 단어로 자비로운 우주 창조자를 의미한다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종교가 신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건, 종교는 우리를 조심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우리가 꼭 종교를 통째로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종교를 고수하기로 결정한다면, 지금까지 종교는 선행뿐만 아니라 악행도 저질렀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우리가 내리는 것이다. p.518

그들은(세속적 인본주의자들) 종교가 새로운 지식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인간 행동에 있어서 좋은 변화들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 얼마나 느린지 알고 있다. 종교는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도전하기는 커녕 대개 옛것에 매달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p.532

이 책은 세계 종교의 긴 역사 안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간결하지만 세련된 입문서다. p.533

입문서는 방대한 정보를 단순히 요약하는 책이 아니다. 그 분야의 학문적 전망을 제시하는 동시에(p.536)깊이와 재미를 전달해야 하는 과제를 완수해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서 입문서는 그 분야 최고의 대가들의 학문 생애 최후의 저술이 되는 경우가 많다. ... 특히 세계종교사를 저술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인간과 문명에 대해 깊은 공감 능력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 나아가 세계 종교사를 쓰기 위해서는 하나의 종교에 정통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 거기에 덧붙여 종교사 저자는 비교문화적 시각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풍부한 지식은 기본이고 안목의 객관성과 공정함, 나아가 포용성까지 요구된다. 게다가 종교사 저자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p.537

저자는 여러 종교의 다름을 승인하면서도, 다름을 관통하는 핵심을 파악하고 있다. 그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개념은 다름 아닌 상징이다. 종교의 언어를 '상징'으로서 이해하는 안목을 가질 때, 우리는 다양성에 의해 지리멸렬해지지 않을 수 있다. 상징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다양성을 꿰뚫는 하나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종교가 '결국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복잡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편협한 마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렇다고 다름만을 보게 되면 방향을 잃고 산만해진다. p.539

인간의 인식은 자기가 아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이자 숙명이다. 숙명의 노예가 되는 것에 그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탁월함을 발견할 수 없다. 탁월함이란 숙명을 넘어서는 데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540

자기에게서 시작할 수밖에 없지만, 그 한계를 넘어 더 멀리 더 깊이 나아가는 것이 학문의 궁극적 목표이고, 나아가 삶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그것이 소위 말하는 깨달음이고 구원이 아닐까? 깨달음은 나의 한계를 깨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자신의 낡고 익숙한 껍질을 벗어던지는 것이 구원이다. 그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에게서 우리는 건강한 인격의 모델을 볼 수 있다. 자기에게서 출발하되 자기를 넘어서는 초월과 초탈이 인격적 건강함이다. 여러 언어에서, 건강은 성스러움과 통하(p.540)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p.541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교리나 제도 등, 단순히 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종교는 단순한 믿음이나 복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과 복종이라는 단어를 역시 '상징'으로서 읽을 수 있다. 그때 그 말은 종교의 핵심이자,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지혜를 담는 말이 될 수 있다. 그 말은 결국 자기의 편견이나 아집을 버린다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났다는 고집과 편견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다. 나보다 더 위대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승인하(p.544),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복하고, 나의 편협함을 내려놓고 겸허하게 물러나는 존재 그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복종이다. p.545

종교는 깊이와 관련된 영역에서 솟아나오는 삶의 태도와 성찰의 노력이다. 이류 종교사는 종교의 교리나 종교와 관련된 정보를 전달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다. 하지만, 일류 종교사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했는가, 더 나은 더 살만한 인간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상상력을 발휘했는가, 그런 상상과 비전과 분투의 역사를 서술하려고 한다. 따라서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보적 지식에 그치지 않고, 다양성을 단순화시키지 않으면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인간적 '분투'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역사 쓰기에서는 정보 그 자체의 수집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꿰는 능력이다. p.545

왜 선교를 해야 하는가? 그 사실을 근본적으로 물어보지 않는다면, 선교는 결국 나르시시즘의 폭력을 확산하는 일에 그칠 수 있다. p.546

21세기 지구적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형태의 근본주의는 공감적 이해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을 상실한 문화적 자폐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p.547

정치는 사회와 사회에서의 개인의 삶을 바르게 만드는 것이다. 바르게 사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지 않는 정치가 얼마나 공허한가? 바르게 사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하지 않는 정치는 결국 진흙탕 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p.548

바르게 사는 삶을 탐색하는 것이 정치다. 그렇다면 정치와 종교가 다르지 않은 것 아닌가? ... 바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대마다 상황마다 변화한다. 그 변화 속에서 유연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조화로운 바름을 탐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p.549

동양의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실천과 실행을 중시했다. 영어로 신앙, 즉 크레도credo라는 말 역시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p.549) 실천을 함축하는 말이었다. 믿음이란 바른 삶의 탐색이고 실천이었던 것이다. p.550

종교란 맹목적 믿음으로서의 신앙에 관한 일이 아니다. 신앙은 바른 삶을 탐색하는 인간적 분투의 한 국면이며, 바르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념이며, 비전에 대한 신뢰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신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우리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노력과 분투에 착수할 수 있다. 우리만 옳고 너희는 틀렸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절대화되는 방식으로 방향을 잘못 잡으면 비극이 초래된다. 그것이 타자의 전면 부정으로(p.550) 이어지면 독단이 된다. p.551

그렇다면 바른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하게 답을 내리기 어렵다. 과학만으로도 안 되고 철학만으로도 안 된다. 그 시대의 지혜를 총체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회택백가(모든 사람의 지혜를 이용하다). 과학도 필요하고 철학도 필요하다. 어느 한 시점의 진리가 다음 시대의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겸허함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p.551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근대적 정교분리 이념은 작은 종교 집단이 자기들의 이익과 국가 전체의 이익을 혼동하는데서 발생하는 갈들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 그러나 종교를 사적 영역으로 몰아낸 정치는 바른 삶의(p.552) 모색이라는 이상도 함께 제거해 버렸다. p.553

우리는 종교의 의미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정치의 근본 의미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종교와 정치가 바른 삶의 탐색이라는 근본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마주하는 문제는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진다. 나 자신, 나와 타자, 나와 자연(세계)의 관계다. 그러나 그 모든 차원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들은 이론적 인식만으로는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p.553

사실 신을 실체화하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은 우상숭배라고 말할 수 있다. p.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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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6026] 세계종교의 역사 평점8점 | YES마니아 : 골드 h*****p | 2020.04.27 리뷰제목
불교는 행동이지 신조가 아니다. 믿어야 할 어떤 것이라기보다 행해야 할 어떤 것이다. 그 효율성의 관건은 명상을 통해 끊임없이 솟는 갈망을 통제하는 것이다. 재미있고 깔끔하게 써진 완벽에 가까운 대중입문서이다.각 종교의 중요 교리가 왜 그런 발상을 하게 된 것인지 또는 그런 발상이 사람들 그리고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기독교계열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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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행동이지 신조가 아니다. 믿어야 할 어떤 것이라기보다 행해야 할 어떤 것이다. 그 효율성의 관건은 명상을 통해 끊임없이 솟는 갈망을 통제하는 것이다. 


재미있고 깔끔하게 써진 완벽에 가까운 대중입문서이다.

각 종교의 중요 교리가 왜 그런 발상을 하게 된 것인지 또는 그런 발상이 사람들 그리고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기독교계열은 시간은 화살(일방향, 단선적)로, 힌두교 계열은 시간은 원(순환)으로 인식하고 있고, 유교와 도교는 내세 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양자역학 때문에 시간이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되어 순환론적인 세계관이 각광을 받고 있는거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에 견고하면서 아름다운 유태교의 성전 가장 깊숙한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도 의미심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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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세계 종교의 역사 평점8점 | r***2 | 2018.05.08 리뷰제목
"종교적 이야기들은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하다"(81)이 이야기는 어쩌면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종교의 역사'라는 것을 객관화시켜서 본다면 - 엄밀히 객관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역사적 사실과는 또 다른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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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이야기들은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하다"(81)

이 이야기는 어쩌면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종교의 역사'라는 것을 객관화시켜서 본다면 - 엄밀히 객관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역사적 사실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가끔은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설화처럼 읽어버리기도 하고 또 가끔은 유신론자인 신앙인의 관점에서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그냥 하나의 흐름처럼 '역사' 속에서의 종교의 변화와 흐름으로만 읽은 시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약간 불편했던 것은- 간혹 번역문에서 개신교 특유의 단어표현이 나오는데 성경인물의 이름조차 오래된 한국어식 표현을 하고 있어서 글이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았다. 물론 보편적으로 종교가 없더라도 익숙한 이름인 베드로나 바오로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왠지 오래된 번역서를 읽는 느낌이어서 약간 어색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 책은 세계 종교에 대한 입문서 같은 느낌으로 그리 어렵게 읽히지는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는 각각의 종교에 대한 책을 읽어본 내게는 조금 더 가벼운 책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역자처럼 이 책을 깊이있게 받아들이기에는 내 역량이 부족해서 그런지 읽으면 읽을수록 이도저도 아닌 느낌으로 역사 입문서를 읽는 느낌이 들어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자가 성공회 신부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지 세계 종교의 역사적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 속에서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은 많이 받았다. 사실 무신론자가 쓴 세계 종교의 역사라고 했다면 좀 더 가벼운 이야기가 되었을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 물론 전체적인 글을 다 읽은 후에 되새겨보면 몇몇의 이야기는 스윽 스쳐가듯 지나가버리기도 해서 그냥 그 종교의 발생과정을 설명하고 있을뿐이라는 느낌도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기고 하나의 종교로 생성되었는지를 살펴보기에는 좋다. 근현대로 넘어와 대부분의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이단이라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발생한 말일성도나 여호와의 증인, 심지어 문선명의 통일교도 언급이 되고 있어서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조금 더 깊이 읽어본다면 종교의 역사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인간의 역사속 시대의 현실과 문화안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종교와 신앙 그리고 신神의 존재와는 별개로 그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상징도, 신이라는 실재에 다가가지 못한다.  ... 벽에 그린 그림이든 책에 쓴 단어든, 어떤 종류의 인간 예술로도 결코 신의 신비를 전달할 수 없다"(85)는 말 역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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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여러 종교를 통한 인간 존재 의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 평점7점 | s******0 | 2018.05.10 리뷰제목
인간에게 종교란것은 필수적인면이 있는거 같다. 종교란것이 무엇인가 단순히 말한다면 어떤 전지적인 절대자를 믿는것이다. 그런데 왜 믿는가. 그것은 인간은 스스로가 나약하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자애로울것만 같은 자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그 대자연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될수 있는지 인간이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자연에서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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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종교란것은 필수적인면이 있는거 같다. 종교란것이 무엇인가 단순히 말한다면 어떤 전지적인 절대자를 믿는것이다. 그런데 왜 믿는가. 그것은 인간은 스스로가 나약하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자애로울것만 같은 자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그 대자연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될수 있는지 인간이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자연에서 조금이라도 안전해지고자 절대자를 찾게 되고 그것이 종교로 발전하게 된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각 종교에서 주장하는것은 그것이 아닐테지만.

 

오늘날 종교는 그 종류가 수만가지에 이르고 무신론자라고 해도 어떤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을때 자신도 모르게 아무런 절대자에게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하기도 한다. 신을 믿던 안 믿던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미약함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에 그런 마음이 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진 대표적인 종교가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 힌두교 정도 인데 그것은 단순하게 나눈것이고 단일 신앙을 가진 종교중에서도 분파가 수도 없이 많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데 해석상 자신의 주장이 맞다면서 서로 다른 종교처럼 적대하기도 한다. 서로 사이비라면서 공격하는 경우도 많고.

사실 보통 종교의 교리중에서 두드러지게 이상한건 없다. 다 좋은말만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착한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그래야 천국에 가고 등등. 그러나 그 실천방안에 대해서는 제각각 다른것이고 그것이 자기들 방식이 아닌것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하고 비난을 가하는 것이다.

 

그럼 이 종교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에 대한 의문점이 남는데 이 책이 그것에 대한 좋은 답안이 될듯하다. 세계의 종교의 역사를 각 종교별로 세세하게 설명하는 종교역사책은 그전에도 있어왔지만 이 책은 그런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종교 그 자체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각 종교를 통해서 인간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 종교이야기가 아니라 종교를 통해 인간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종교를 통한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책은 각 종교를 통해서 각각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종교란 것이 인간의 유한한 한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왔다면 그것을 대하는 인간은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믿는 종교만이 최고의 선이 아닌 공통의 선을 존중하고 인정할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최대종교라고 할 크리스트교나 이슬람교에서 최고의 신은 같다. 각기 부르는 이름이 다를뿐이다. 그럼에도 믿는 형식이 다르다고 서로 배척하고 있는 이 현실은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부를수 없을 것이다.

 

지은이는 신학교를 나온 목사이자 성공회 성직자인데 그래서 크리스트교나 이슬람교 유대교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종교의 시작과 과정이라는 정보도 제공하면서 그 종교를 우리 인간이 어떻게 대하고 생각해야하는가에 대해서 성찰하게 한다. 종교라는 것에 대해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과 종교 자체에 대한 실체적인 생각을 하게 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좀더 넓게 하는거 같아서 좋다. 조금 철학적인 면이 있어서 중간에 지루한면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종교를 통해서 인간을 더 이해할수도 있는 책이라서 종교의 유무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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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세계 종교의 역사 평점10점 | w******9 | 2021.03.28 리뷰제목
우리가 세계 종교의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에 써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본인이 세계 종교의 역사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이 책이나 다른 종교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을 선택하면 될 것이고 관심 없다면 당연히 그냥 넘어가면 된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역사에는 종교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종교의 역사를 알기 위해 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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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 종교의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에 써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본인이 세계 종교의 역사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이 책이나 다른 종교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을 선택하면 될 것이고 관심 없다면 당연히 그냥 넘어가면 된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역사에는 종교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종교의 역사를 알기 위해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세계 종교의 역사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작성된 책이다. 

리처드 홀러웨이는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주교이다. 켈함 신학교, 에든버러 신학교,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더 타임즈, 가디언, 인디펜던트 등의 저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진과 1남 2녀의 자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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