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단 한번뿐인 운명적 사랑이야기라고 설명되어진 더글라스 캐네디의 책이지만, 사랑스러운 느낌과 상반된 어둡고 칙칙한 책 표지에 묘하게 끌렸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있는 사랑이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할테지만 이 책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서술방식만큼이나 복잡하고 소중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불친절한 작가는 도망을 일삼는 남자, 토마스 네스비트,의 이혼서류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의 아내는 어떻게 만났고, 어쩌다가 이혼을 하게된건지, 남자는 어떤 추억으로부터 도망을 가는건지, 왜 자꾸 도피를 일삼는지에 대한 설명은 흙탕물 속에 헝크러진 잔재가 가라앉든 아주 서서히 알려준다. 그리고 아래의 말을 마치 주문처럼 이야기의 서막을 알린다.
Wie bald 'nicht jetzt' 'nie' wird
'지금은 아니'가 '전혀'가 되기란 얼마나 순식간인가.
독립된 '순간'이란 뜻을 가진 제목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은 채 뒤죽박죽으로 현재의 조각들을 뿌려준다.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과거의 조각을 찾아내는 것은 온전히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수수께끼같은 도입부는 다소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놓지않고 마지막 장까지 읽고 덮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 집착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마치 내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후회할법한 실수가 있고 그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현재에 집중하기위해 발버둥치는 동시에 '과거에 이러지 않았으면-'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히기 마련이다. 이젠 형상도 사라져버린 깨진 유리병이지만 마치 유리 한 조각이 마음 깊숙이 박혀있는것처럼.
사랑을 처음 시작하는 관계는 얼마나 애뜻하며 조심스러운가. 다음 글귀는 여행작가인 토마스와 어떤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는 방송국 번역가 페트라 두스만 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아찔한 순간과 더불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까하는 조바심이 묻어나 있다.
"우리는 바라는 걸 얻으리라는 기대로 이튿날을 기다린다. 하지만 바라는 걸 얻게 되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우리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기다림이란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 기초할 뿐이다. 하지만 그 바람을 서둘러 드러내면 이루어 지지 않을 수도 있다. 관심을 보이되 속이 들여다보이면 안된다. 그것이 기다림이다" (p.165).
서독과 동독의 분단관계를 배경설정으로 한 점과 베를린 장벽의 상징성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점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마치 정말로 일어났을법한 치밀한 묘사에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절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까워지려는 욕심에 한걸음 다가가려 하다가도, 혹시 상대에게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몸을 사리는 두사람" (p.187) 이라고 표현된것처럼 서로를 조심히 염탐하고 수 많은 감시 속에서 불안감을 느끼며 굳건할 줄 알았던 믿음이 의심과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산산조각 나는 것 역시 작가가 만들어낸 배경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곳은 비밀경찰단들의 감시가 끊이질 않는 바로 분단시절이니까.
나라에 아이를 빼앗기고 서독으로 망명해온 동베를린 출신인 페트라는 말한다.
"동독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을 배신해야 해요. 그게 문제죠. 하지만 자기 혼자 생존하기 위해 남을 배신하는 행위는 곧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죠" (p.201).
<곡성>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끊임없이 속고 속인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할지 혼동하는 토마스처럼 독자들의 머리도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다 토마스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하고만다. 바로 지금까지 겪어온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힘으로 치유해주겠다고 말하던 여자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지않은채 비밀경찰단에게 넘겨준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수많은 방황과 도피를 마친 후 실마리를 풀게된 토마스는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을 미워한다. 한편으론 그런 짓을 저지른 자신을 미워할 페트라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할지 몰라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페트라의 오래된 편지와 일기속에서 페트라는 토마스가 아닌 자신에게 잘못을 돌린다.
"내 스스로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이 책은 지난날에 저지른 한 순간의 실수에 대한 후회가 깊게 스며든 책이다.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결말은 희망차다. 비록 사랑은 잃었지만 앞으로 살아가야할 희망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를 부정하기보다 과거를 끌어아는 법을 조심스레 알려준다. 결국 현재의 이 모든 순간은 과거로 수 많은 선택들로부터 이어져온 순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어쨋든 인생은 선택이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시나리오로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하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야한다. 아니,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길지 않은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뜻대로 완성해 가야 한다" (p.590).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더글라스 케네디의 <모멘토>를 읽고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중 국내에 처음 소개된 《빅 픽처》는 출판시장의 불황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더글라스 케네디의 뛰어난 작가적 역량을 감안하자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이미 프랑스, 영국,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로 각광받고 있으며, 세계 30여 개국에서 출간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정서와 연령,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폭넓게 읽힌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아직도 국내 주요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빅 픽처》를 볼 수 있으며, 두 번째로 출간된 《위험한 관계》역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모멘트》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열 번째 소설이자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작품이다. 최근 작가의 소설은 나날이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유럽에서는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두 편이나 개봉되었다. 《빅 픽처》와 《파리 5구의 여인》이 작가가 쓴 영화의 원작 소설들이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문체는 생생하고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넘친다. 그런 한편 섬뜩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한 번 집어 들면 책에서 줄곧 시선을 떼지 못한다.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의 생동감 넘치는 묘사와 사실적인 비유는 세계 각지를 다양하게 여행한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지만 다양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촘촘하고 생생한 묘사야말로 작품의 실감을 높인다.
《모멘트》는 ‘사랑하기’와 ‘살아가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베를린,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미국 출신 여행 작가 토마스는 동베를린 출신 여성 페트라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토마스는 페트라가 동독비밀경찰의 끄나풀이며 정보를 빼내기 위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한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십여 년이 흐른 후 페트라의 사망소식과 함께 그녀의 일기장이 메인 주에 사는 작가 토마스에게 배달된다. 일기장에는 동독비밀경찰이 아들 요한을 볼모로 잡고 협박을 가하는 바람에 어쩔 수 그들에게 협조해야만 했던 페트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통독 이전의 베를린이다. 토마스와 페트라의 사랑이야기와 분단과 냉전으로 상징되는 비극의 역사가 서로 얽히고설키는 구조를 이룬다. ‘사랑하기’와 ‘살아가기’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지만 대부분 그 행복을 스스로 망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청춘의 피는 뜨거운 반면 그리 이성적이지는 않은 탓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토마스는 페트라가 적은 일기장을 보고 나서야 그 당시 저지른 실수가 자신의 인생을 한없이 쓸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 토마스는 페트라가 동독비밀경찰의 끄나풀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뭔지 깊이 캐보려고 하지 않았다. 페트라가 자신을 배신했고,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에만 매달려 페트라의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다. 분단된 베를린처럼 그들의 사랑도 그렇게 갈라서고 만다.
다시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주인공 토마스는 심각한 인생의 위기를 맞는다. 아내 잔이 이혼을 요구하고 사랑하는 딸 캔디스는 당장 남자친구와 결혼하겠다며 아빠를 졸라댄다.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토마스에게 페트라의 일기장은 수많은 회한과 추억을 떠올린다.
‘그때 페트라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진정한 사랑이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 나도 운명적인 반쪽을 만나게 되진 않을까? 청춘의 시기에는 누구나 그런 사랑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로맨틱한 사랑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청춘은 저 멀리로 사라져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청춘을 한참 벗어난 나이가 되어서도 소설에서 그런 사랑이야기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가슴 떨리는 흥분과 함께 커다란 대리만족을 경험하게 된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그 상처는 그대로야. 토마스, 당신을 향한 내 사랑, 당신이 내게 준 사랑, 우리가 함께 하는 사랑, 그 사랑이 내 삶을 바꾼 건 사실이야. 나는 다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지. 하지만 자기를 만나기 전까지 내 삶에서 요한만이 유일한 행복이었어. 요한은 이제 포기해야 한다고, 다시 볼 수 없다고,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며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지. 나는 지금도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어디에나 요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던 거야.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나를 멀리하는 게 좋다고. 내 아들 요한이 저 장벽 너머에서 비밀경찰의 손에서 자라고 있는 한 나는 늘 상처를 입은 사람일 테니까. 늘 슬픈 사람일 테니까. 나 같은 사람과 산다는 건 불행일 테니까.
토마스 지금이라도 나를 멀리 떠나. 당신은 이 일에 휘말리지 마. 복잡하고 슬픈 내 인생에 휘말리지 마.”
『모멘트』는 『빅 픽처』의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의 열 번째 소설로 '사랑하기’와 ‘살아가기’에 대한 이야기다. 베를린,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미국 출신 여행 작가 토마스는 동베를린 출신 여성 페트라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진다. 책은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페트라는 토마스에게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게 생각될 만큼 두 사람은 잠시도 떨어질 줄 모른다. 둘이 함께 있으면 무엇을 하든 즐겁다. 이제 중년에 접어든 토마스는 삶을 통해 만난 여인들을 추억한다.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지만 20여 년이나 함께 살아온 아내 잔, 대학시절 만난 앤, 섹스파트너로만 만난 출판사 편집자 등.
긴박한 냉전구도 아래 있던 베를린에서 토마스는 페트라를 만나 사랑의 기쁨이 무엇인지 맛보고 행복이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평생 한 번 만나기 힘든 사랑을 만나 행복한 미래를 눈앞에 두었던 토마스는 자존심에 눈이 멀어 페트라를 떠나보낸다. 인생에서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 페트라가 동독비밀경찰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끄나풀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토마스에 대한 사랑만큼은 분명한 진실이었기에……. 토마스는 놓쳐버린 기회, 사라져 버린 행복에 가슴 아파 하며 또 다른 길을 모색하지만 한 번 어긋난 행복은 좀처럼 다시 찾아와주지 않는다.
책은 당시 베를린의 긴장된 상황 속에서 매우 드라마틱한 상황을 그려낸다. 이념의 첨예한 대립구도에 놓인 베를린에서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복잡하게 뒤엉켜가던 이야기는 마지막 결말에 이르러 뜨거운 감동과 함께 진실을 향해 치닫는다.
수십 년을 오가는 시간적 배경, 극적인 반전, 복잡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삶의 놀라운 비밀과 한 여자의 아픈 진실이 드러난다. 작가는 분단된 베를린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배경과 인물 모두를 잘 살리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결과이다
《모멘트》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페트라는 토마스에게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게 생각될 만큼 두 사람은 잠시도 떨어질 줄 모른다. 둘이 함께 있으면 무엇을 하든 즐겁다. 이제 중년에 접어든 토마스는 삶을 통해 만난 여인들을 추억한다.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지만 20여 년이나 함께 살아온 아내 잔, 대학시절 만난 앤, 섹스파트너로만 만난 출판사 편집자 등.
긴박한 냉전구도 아래 있던 베를린에서 토마스는 페트라를 만나 사랑의 기쁨이 무엇인지 맛보고 행복이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평생 한 번 만나기 힘든 사랑을 만나 행복한 미래를 눈앞에 두었던 토마스는 자존심에 눈이 멀어 페트라를 떠나보낸다. 인생에서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 페트라가 동독비밀경찰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끄나풀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토마스에 대한 사랑만큼은 분명한 진실이었기에……. 토마스는 놓쳐버린 기회, 사라져 버린 행복에 가슴 아파 하며 또 다른 길을 모색하지만 한 번 어긋난 행복은 좀처럼 다시 찾아와주지 않는다.
청춘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반세기의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토마스는 비로소 그 모든 순간순간이 모여 지금의 삶을 만들었음을 깨닫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스무 해가 넘은 지금 젊은 독자들에게는 당시의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매우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다만 아직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바라보자면 이 소설의 내용이 쉽게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작가이거나 문화예술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의 시각으로 표현되는 상황에 대한 묘사와 감정의 표현이 매우 감성적이고 섬세하다. 음악에 대한 해박한 이해, 그림에 대한 심미안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에서 흔히 다뤄지는 이야기들이며 작가의 소설이 특정 장르에 관계없이 사랑받는 이유라 할 수 있다.
《모멘트》는 당시 베를린의 긴장된 상황 속에서 매우 드라마틱한 상황을 그려낸다. 이념의 첨예한 대립구도에 놓인 베를린에서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복잡하게 뒤엉켜가던 이야기는 마지막 결말에 이르러 뜨거운 감동과 함께 진실을 향해 치닫는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깜짝 놀랄 반전을 갖춘 사랑 이야기에 확실히 뛰어난 작가이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이미 읽은 독자라면 그의 작품이 반전에 강하다는 사실을 이미 예상할 것이다. 그런 독자라도 이 소설의 절묘한 반전에는 또 다시 감탄하게 되겠지만…….
수십 년을 오가는 시간적 배경, 극적인 반전, 복잡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삶의 놀라운 비밀과 한 여자의 아픈 진실이 드러난다. 《모멘트》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중에서 가장 야심차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작가들은 이야기를 사실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애쓰기 마련인데, 《모멘트》는 정말이지 사실 같은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무엇보다 배경이 중요하지만 인물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모멘트》에서 더글라스 케네디는 사랑 이야기를, 그것도 분단된 베를린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배경과 인물 모두를 잘 살리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결과이다.
충격적인 결말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장벽을 무너뜨린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이 반전 드라마를 통해 인간의 운명, 한 사람의 역사가 ‘한 순간’에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 소설은 각기 다른 시간적 지리적 배경을 빈번하게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통독 이전의 베를린이라는 도시, 흥미로운 시간과 장소가 이 소설의 중심 무대이며 이야기의 사실성을 부여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틱하고 매우 슬픈 소설을 통해 더글라스 케네디는 우리 모두가 역사의 굴레에서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순간과 순간이 모여 삶을 이룬다.
지금 이 순간은, 내 삶 전체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모멘트.
순간에 빠지는 사랑이라는 거..
끝내주게 드문 사랑이라는 거..
내게도 와줄까?
소설이지만, 아리고 샘이 난다.
4반세기 동안이나 가슴에 품는다라..
나는 그 텅비고 허한 마음을 그리 긴 시간 내내 견뎌내고 버텨낼 자신이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마나 서로가 서로의 전부라 느끼며 행복해하던 페트라와 토마스의 모습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런 사랑이 내게도 꼭~ 와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건..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p.12
'지금은 아니'가 '전혀'가 되기란 얼마나 순식간인가.
p.62
어쨌든 외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깊은 바다처럼 푸른 눈이었다. 세상에 반항적이면서도 쉬 상처를 받는 성격이 눈에 그대로 드러났다. 말을 험하게 하는 건 자신을 보호하려는 보호막에 지나지 않아보였다. 먼저 거친 태도를 취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쉽게 공격을 받지 않을 테니까.
p.231
"하지만 여행은 당신 일이기도 하잖아. 그걸 바꾸게 하고 싶지는 않아. 나는 그저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되고 싶어."
p.165
우리는 바라는 걸 얻으리라는 기대로 이튿날을 기다린다. 하지만 바라는 걸 얻게 되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우리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기다림이란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 기초할 뿐이다. 하지만 그 바람을 서둘러 드러내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관심을 보이되 속이 들여다보이면 안 된다. 그것이 기다림이다.
p.117
'이 여자는 아픔을 안다. 하지만 겉으로는 기죽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 한다.'
구멍 난 스타킹 같은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 것, 손톱을 깨물고도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은 것을 보며 나는 여자에게 끌렸다. 여자는 아름다웠다. 모델이나 여배우에게서 볼 수 있는 매력이 아니었다. 지성, 자유, 자신감, 외로움 등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이었다.
p.239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사랑도 어쩔 수 없이 변한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애틋한 마음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고.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잦아들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는 오직 그 순간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p.247
"사랑은 감정이지. 감정을 두고 '사실이다, 아니다' 말할 수는 없는 거요. 감정에는 순간의 현실만이 있을 뿐이지. 내일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고. 게다가 메메트처럼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을 경우에는 더하지."
p.480
가장 나쁜 거짓말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끔찍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