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진화하게 만들고, 지능이라는 저주를 내린 건 바로 우리야.
젤라즈니의 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은 표제작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지만 맨 처음 실린 ≪12월의 열쇠≫는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딱 첫장을 펼치자마자 이 첫 작품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과연 작품은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읽을수록 점점 더 흥미로와진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잉태되었지만 GMI 계약 옵션에 의거 한랭 행성종(얄료날 거주를 위해 개조된) Y7 고양이 형태로 개조된 쟈리 다크는 그에게 거처를 보증해주었던 이 우주 어느곴에서도 살아가기에 적합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이것을 축복으로 볼지 저주로 볼지는 당신을 자유이다."
얼핏 봐서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하는 문장이다. 얄료냘 거주를 위한 한랭 행성종이니 고양이 형태니 하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들의 남발에 뭐야. 컬트적이고 어려운 SF 소재는 딱 질색이야 라는 마음 가짐으로 읽어내려가던 나는 몇쪽 더 읽기도 전에 이 재치있고 천재적인 작가의 소설에 푹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알쏭달쏭한 이 문장은 실제로 이 작품의 주요 내용의 프리퀄에 해당되고 마지막 문장은 쟈리 자크의 선택에 대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어느 미래의(다시 생각해보니 먼 과거의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사회 우주 곳곳에 문명이 침투한 어느날 아이를 낳기로 한 쟈리의 부모는 출산 관리국의 조언에 따라 얄료날이라는 몹시 춥고 기압이 높은 행성에 알맞는 조건을 가진 고양이 형태로 아이의 형태를 차세대 후계자 DNA의 조합으로 결정한다. 유전자 조작이니 그런 말운 일언 방구도 없다. 뱃속에 털복숭이 고양이를 잉태하고 분만하거나 하는 자세한 설정들은 처음부터 빠져있다. 행성의 환경을 자유자재로 바꿀 만큼, 은하계 사이를 마음대로 이동할만큼 과학 문명이 발달된 사회인데, 설마 뱃속으로 아이를 낳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람 모양의 아들을 낳지 않고 고양이 모양의 아들을 낳은 이유는 제너럴 광업 주식회사가 그 알료날 행성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행성에서 일할 사람들이 필요하자, 아예 행성에 적합한 모양으로 개조한 인간(DNA겠지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소설이 쓰여진 시기가 50~60년대 시기로 사기꾼 멜서스 인구론이 잡아먹을 듯 활개를 치던 시대니까, 인구 통제국이라는 기관이 자연스레 등장하고, 제너럴 광물 주식회사는 인구 통제국과 딜을 한 모양이어서, 그런 고양이 아기를 낳으면 교육과 의료 직업 연금 그 모든 걸 책임져주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모양이었다. 물론 이런 내용도 자세히는 안나온다. 영하 50도의 한냉 행성에서 거주할 고양이 인간들을 대대적으로 뽑아 세계를 만들어놨는데, 그 알료날이라는 행성이 '신성폭발'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졸지에 갈 데가 없어졌다. 직업과 교육 의료 등등 여러가지를 보증하는 계약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쟈크와 모든 고양이 형태들은 연금을 받으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행성을 개척했는데, 너무 척박해서 살 생물이 없어, 인간을 고양이로 개조시켜놨더니 행성이 폭발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고양이 형태들은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행성이 어느 곳에도 없음을 안다. 제너럴 광물 주식회사와의 계약 조건에 따라 쟈리를 비롯한 수만명의 고양이 형태들은 답답한 기온 기압 조절 장치속에서 약물에 의존해 삶을 유지시킨다. 영하 50도가 최적의 기온인 그들은 외부로 나오지 못하고 감옥 같은 제어 장치 속에서 수당을 받으며 생활하는데 돈버는 재주를 가진 덕에 큰 돈을 벌어 자신들과 같은 종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행성을 구입하여 환경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수만명의 고양이 형태들은 12월클럽이라는 공동체를 결성하고 이미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어떤 행성을 사들여 행성개조 유닛을 통해 사들린 행성을 제2의 얄뇨날처럼 추운 곳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행성 개조 유닛을 행성 곳곳에 세워두고 고양이 형태들은 동굴에 들어가 3천년동안 냉동 수면 침대에서 잠을 잔다. 250년마다 3개월씩 당직을 서기 때문에 각자가 천 년당 1년씩의 개인적 시간을 투자한다.
꿈도 없는 잠을 자고 깨어나면 3천년간의 시간의 변화는 3년으로로 압축된다. 하지만 자는 동안 행성은 행성 개조 유닛의 작동으로 끊임없이 변해간다. 쟈리는 약혼녀와 함께 2세기 반마다 깨어나 우주의 변화를 실감한다. 점점 추워지고 생명들은 멸종되거나 적응하기 위해 두터운 껍질을 두른다. 그러다가 직립 보행하는 짐승들 중 하나가 자신들이 대들랜드라고 부르는 그 춥고 황량한 곳에까지 죽은 짐승을 가지고 오는 걸 목격하고 그것들의 존재를 그리고 수세기마다 한번씩 깨어날 때마다 그것들이 점점 추위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몸집이 커져 털을 진화시켰는 줄 알았는데 짐승의 털을 두르고 다닌 거였고 이마가 생기더니 손바닥을 마주보는 엄지가 생긴다. 그리고 알게되는 사실 하나 이 고양이 형태들을 신으로 알고 제물을 바치고 숭배하가 시작하는 것이다.
어차피 3천년이라는 시간동안 인위적으로 환경을 그토록 바꾼다면 그곳에 서식하던 대다수의 생명체들은 예고된 멸종에 작면할 것아고 적응에 성공한 소수의 돌연변이의 조합이 탄생시킨 새로운 종류의 소수의 생명만이 남겨 될 터였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적응하는 생명체만이 살아남게 되고 고양이형태들의 관심은 그들 스스로가 윤기나는 털을 다듬으며, 그르렁거리던 답답한 공간 속에서 나와 마음껏 뛰어오를 제 2의 얄료날 행성을 가질 수만 있다면 다른 생명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제 말이다. 하지만 지적 종족이라면 무엇이 다를까. 그와 약혼녀는 한갓 짐승에 불과했던 두발 다리의 그것들이 빠른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지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목격하고는 혼란을 겪는다. 자신들의 행성 개조로 인해 이 지적 종족은 결국 멸종할 것이다.
종의 멸종을 막으려면? 방법은 있다. 변화의 속도를 늦추어 종이 적응할 시간을 주는 거다. 하지만 그러려면 7천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 긴 시간을 냉동인간처럼 쭉 내리 자는 게 아나라 1천년당 1년씩의 개인 시간을 당직에 써야 하기 때문에 7년을 더 소비해야 한다.그것을 위해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 투표도 해야 한다. 그 적색형태라 아름붙인 지적 종족을 보호하고 싶은 사람은 쟈리 밖에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는 확고하다. 그는 그들에게 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이 분의 최고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 아니라는 게 더 놀랍다. 작품집의 모든 소설이 가장 창작의욕이 왕성했던 초기작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도 아껴 아껴 읽어야겠다. 테드 창의 소설들이 생각났는데 테드창 읽을 때는 먼가 유식하고 철학적인 소리들을 해대서 못알아먹는 게 많았는데(못알아먹어도 재밌게 못알아먹게 만드는 이상한 테드창) 이 책은 보다 유머러스하고 훨씬 쉽게 접근한다. 너무 감동스럽게 재밌어서 뒤에 가서 작품설명 읽었는데 더 모르겠더라는 뭐 신화적 원형에 뿌리를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은 소설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데 엄청 어렵게 설명되어 있다. 암튼 과학 소설이란게 장르적 구분 같은 걸로 쓸모없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듯한 느낌. 그냥 읽으면 인간과 신의 그 태초의 관계적 탄생을 우화적으로 재탄생시키는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고양이 토템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나무니 곰이니 하는 토템의 뿌리를 이런 식으로 상상할수 있는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 새로운 소재 정말 좋다.
지적 생명으로 나가는 진화의 시작점에 빙하기라는 극단의 추위가 압력으로 작용하고, 생물(유전)학적 메카니즘을 통해 그 극단적 추위에 적응하는 동안 , 진화된 인간의 정신은 신을 창조하고 숭배함으로써 결국 그 환경의 극적 변화에 제동을 거는 제법 개연성이 있는 상상을 신화의 탄생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강추강추
동거인이 강추하는 로저 젤라즈니. 그 중에서도 수작들을 모아 놓았다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동거인(남)이 신경숙에게 느끼는 그 답답함과 핀트가 맞지 않는 느낌을 나는 로저 젤라즈니에게 느끼는 듯 하다.
글은 잘 쓰고 웅장한 신화와 상징을 잘 배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허세 가득한 마초의 느낌이 계속 거슬린달까? 감성이 맞지 않는달까?
뭐야, 왜 엄청난 목표물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거지? 그게 뭐 대수라고, 흥. 이런 기분이다.
그래서 표제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의 평도 간단하게 쓰자면 이렇다.
내가 씨내리라니~! 씨내리라니! 내가 씨내리라니~! 이보시오, 추장 양반, 씨내리라니, 이럴 순 없어!! (야인시대의 심영 버전)
그레이 레이디라는 엄청 높은 산을 등반하는 내용의 단편의 간단평.
낚였다니~! 낚였다니~! 산 사나이인 나의 후까시는 어쩌라고, 내가 낚였다니~!
무더웠던 여름이 언제 가나 했는데 벌써 가을의 기운이 느껴진다. 세월 흐르는 게 참으로 빠르다. 이러다 얼마 안 있어 또 한 살을 먹겠거니 생각한다. 어느덧 한 살 더 먹는 게 무겁게 다가오는 시기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노쇠에 대해 말했던 작가는 많다. 철학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도 말년에 대해 글을 썼고 필립 로스도 늙는 것에 대한 무력과 슬픔이 배인 '에브리맨'이란 소설을 썼다. 철학과 순수 문학에선 어렵지 않게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글을 찾을 수 있는데, 장르 소설은 어떨까? 과연 거기에도 그런 것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 있을까?
이런 의문에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로저 젤라즈니였다.
우리에게는 뉴웨이브 SF 작가로 많이 알려진 사람. 하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로저 젤라즈니란, 나이먹음에 대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작가다.
아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이들어 내어놓은 후반기의 작품들이 젊은 시절 내어놓은 초창기 작품들 보다 작품성이 많이 떨어져 있기에 가지게 된 느낌인지도 모른다. 그의 데뷔작 '내 이름은 콘라드'로 부터 지금 말하려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까지 초창기의 작품들은 그의 비브리오그래피에 있어서 가히 올림푸스 신전과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첫 시작 부터 모든 것을 다 이루어버린 작가였던 셈이다. 이런 작가는 사실 불행하다. 궁극을 다시 한 번 넘어서도록 해 주는 행운은 누구에게나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내리막길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평가라는 것을 알아두시길... )
추락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런 경험이다.
그것도 특히 정상에 한 번 올라 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면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느낌에 더하여 한 번 올라섰던 그 자리에 대한 미련과 다시는 거기로 가지 못함에 대한 절망이 가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나 전보다 떨어져만 보이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더욱 비관하게 된다. 천재였다가 둔재가 되어버린 아이가 예전엔 쉽게 풀었으나 이제는 더이상 풀리지 않는 문제로 끙끙거리듯이 턱없이 낮아져버린 자신의 능력치에 대해서 한탄하고 스스로를 구박해댄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다. 예전의 그와 별다르게 달라진 것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아는 것도 경험도 더 많아졌는데 어쩌자고 그 때의 영감과 기지가 더이상 자신에게 샘솟지 않는 것일까 하고. 그래서 그가 찾아낸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셈이 된다. 바로 나이가 들어서 그런거라고.
육체도 정신도 예전 같지 않음은 일상에서 늘 느끼기 마련인 감각이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그것도 이미 전성기를 맛보아버린 작가에게 그것은 더 예민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처럼 자신도 모르게 작품에 지금 느끼고 있는 지난 세월에 대한 상실감이 투영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번째의 작품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이 하필이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차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그가 데뷔작 '내 이름은 콘라드' 이후로 내내 '불멸'의 존재를 그리고 있음으로도 증명된다. 그는 다른 SF작가들과 달리 유독 그리스 신이나 인도 힌두교 신 같은 존재를 자주 형상화하는데 그럴 때 그가 주요 부여하는 특성이 바로 '불멸'이다. 그가 이토록 '불멸'에 유난히 집착하는 까닭이 어쩌면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시간의 흐름에 대해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간접 증거는 아닐까?
따라서, 이토록 예민한 시간에 대한 감각을 가진 소유자라면 어쩌면 현재 정상과 점점 멀어지는 자신에게 있어 (오직 그것만이 이유라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노화'에 대한 강박은 당연히 자리잡게 될 것도 같다. 한 번 정상에 있어 본 사람은 늘 그 정상에 있기를 소망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확장되어 그렇게 시간이 결빙된 듯 모든 것이 늘 변하지 않게 되기를 꿈꾸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그는 작품으로 '불멸'을 추구한다. 그렇게 늘 자신을 변함없이 유지시켜 줄 영원한 젊음을 꿈꾸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신이 되려는 것이다. 그렇게 '내 이름은 콘라드'에서 그는 아예 신성(神性)을 뒤집어 쓰고 신이 된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허구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법. 현실 속에선 그 누구든 시간에서 비켜 서 있을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그가 아무리 상상력을 빌어 의욕적으로 신이라는 허구의 가면을 쓰고자 해도 결국은 벗겨지게 마련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꿈도 결국은 깨기 마련이고 남는 것은 미련으로 입맛을 다시는 씁쓸함 뿐인 것을. (그는 2010년, 58세의 나이로 그 자신이 원했던 영원한 불멸의 몸이 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는 느꼈을 것이다. 현실에서 느껴지는 머리와 몸 곳곳에서 호소하는 능력 부족의 아우성을. 그리고 그 아우성이 무수한 파동으로 다가와 점점 자신이 쓰고 있는 허구의 가면을 조금씩 허물어 뜨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 가면의 떨어져나간 부분 안으로 자신의 주름살이라든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드러나고 있음을...
그렇게 젤라즈니에게 있어 자신의 소망과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 하루 점차 사멸해 가는 스스로를, 작품으로 추구했던 '불멸'처럼 그렇게 늘 변하지 않는 스스로를 꿈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꿈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진정 고통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가 바로 그러한 내면의 고통 가운데 나온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국 양장본 초판(1969)의 커버(꽤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그렇게 내가 이 작품집에서 보게 되는 것은 나이들어가는 가운데 느끼는 무력감에 대한 씁쓸함과 씁쓸하지만 그대로 내치지 아니하고 자신의 본래적 모습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젤라즈니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내게 다가온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라는 작품집은 젤라즈니 자신의 이제 자신은 더이상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고백이다.
그건 처음에 나오는 작품 '12월의 열쇠'에서 바로 느껴진다. 그 작품은 수세기를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을 연상시키는 유한한 존재에 대해 가지게 된 연민을 이야기 하고 있다. 아마도 내 생각이지만 거기 신과도 같은 존재인 주인공 '쟈리 다크'는 분명 젤라즈니의 분신일 것이다. 그런 '쟈리 다크'가 인간에 대해 연민을 가진다는 것은 그래서 젤라즈니 자신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12월의 열쇠'는 젤라즈니가 이제 '인간'이라는 존재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 받아들임을 작품집 처음에 내세움으로써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유한성을 받아들인 가운데(이 말은 추락과 사멸을 자신의 본래적 부분의 하나로 인정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더 이상 신이라는 완전성으로 부터 뒷받침되지 않은, 그렇게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고유의 의미와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종의 신과 인간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앞서도 말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두번째의 작품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이 대표적인데 그 작품은 무엇보다 인간에게 남겨진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뒤에 나오는 '이 죽음의 산에서'와 비슷한 이야기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두 작품 모두 인간에게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존재('그 얼굴의 문...'에서는 잡을 수 없는 레비안투스 물고기나 '이 죽음의 산..'에서의 '그레이 시스터'라는 산이)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을 압도하는 그 거대한 존재를 정복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로 만드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 젤라즈니 자신이 그 전까지 작품에서 추구했던 '신성'을 획득함으로써 스스로 '신격화'되는 것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가운데 젤라즈니는 그것을 살짝 비튼다. 주인공들의 그 거대한 존재로의 추구는 그대로 스스로에 대한 구원의 행위인데 젤라즈니의 결말에 가서 그 방향을 살짝 바꾸어 그 모든 행위들인 거대한 존재를 획득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존재를 추구하기 전의 본래적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이었음을 은밀히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전작에서 스스로 해왔던 모든 작업들을 그 자신 부정하는 것인데 거기엔 아마도 그 '노화에 대한 강박'을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 끝에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신'이라는 너무 외부의 것을 잡으려 애쓰다 보니 정말 신경써야 했던 자신의 내부와 그 내부와 연결된 소중한 타인들의 삶에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이다. 그 때문에 두 단편 모두에서 젤라즈니는 헤어져버린 옛 연인을 등장시키고 그 거대한 산에 잠자고 있는 것이 한 여자에 대한 애잔한 사랑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젤라즈니는 그 고통의 여정 가운데 스스로 찾은 해답을 슬며시 제시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네 내부와 네 곁의 사람들에게 있으니 이제 헛되이 신을 찾아 그것이 되려 애쓰지 말라고... 그렇게 지금 너에게 주어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시간속에 사멸해 감을 당당히 받아들이라고...
그래서 '그 얼굴의 문...'에서 그동안 신을 꿈꾸다 놓쳐버렸던 예전의 연인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표제작 '전도서에 바쳐진 장미'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 역시 신과 인간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인간이 가진 한계를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거기에 비추어보면 제목이 아주 의미심장하다. 솔로몬이 적었다고 전해지는 '전도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모든 행위들이 헛되다고 말하는 책이다. 그 책에 가장 처음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전도서 전체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그렇게 솔로몬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그 산물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신만이 오로지 유일한 의미이자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전도서'란 한마디로 이제는 젤라즈니가 포기한 '신성'으로 인도하는 손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 '장미'를 바친다. 이건 경배의 행위일까?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장미란 무엇보다 사랑의 상징이고 그렇게 가장 인간적인 것을 의미하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미란 전도서와 완전히 상극의 존재이므로 '신'으로 인도하는 손길 위에 장미를 바친다는 것은 당신의 인도를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제목 그대로 여기에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신과 인간이 담겨져 있다. 그렇게 신의 의지와 인간의 행위가 맞부딪히는 작품인 것이다. 사랑이 인간이 내세우는 무기라면 춤은 신의 언어가 드러나는 몸짓이다. 시인은 언어로서 신을 헤아리려 하고 신은 그 언어로 도리어 시인을 신성으로 이끌려 한다. 그렇게 지구와 화성, 인간과 신, 사랑과 경건이 서로 가면을 달리 쓰면서 신과 인간 사이의 용호상박의 난투를 그리고 있다. 젤라즈니는 물론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 모든 대립 과정을 밝히는 이유가 인간의 삶이란 게 바로 그와 같은 전장 한 가운데 놓여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갈등하고 번민하고 추락의 예감과 실감에 시달리고 한 번 쥐었어도 놓칠 수 밖에 없고 또한 그 놓쳤던 것에 아쉬워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가진 실존에 대한 잠언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젤라즈니 자신의 깨달음이며 또한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안이기도 하다. 그렇게 더이상 노화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는 더이상 더 감퇴되는 기억력, 샘솟지 않는 영감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스스로를 구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는 대로, 부족함을 느끼면 느끼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과거는 지나간 것,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겠는가! 현재의 나,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을 함께 있는 내 곁의 타인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깥의 '신'으로서 날 충만시킬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충만하면 그것이 곧 신이 되는 길이 아니겠는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그러한 더 많은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그가 받아들인 것들이 곳곳마다 잠언처럼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다 읽고나면 어쩐지
가면을 완전히 벗어버린 맨 얼굴로 소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젤라즈니가 보이는 듯도 하다. '현재의 삶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말이 어떠한 선언이나 우격다짐 없이 마냥 잔잔한 가운데 몰래 맞는 가랑비 처럼 흠뻑 젖도록 만든다.
그러니 문득 속절없이 나이먹음에 대해 어딘가 아련하고 애잔한 파문이 살며시 일어난다면, 그래서 문득 영화에서 처럼 천막 안에서 모닥불을 마주하며 인디언 예언자의 선문답 같은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이 책을 벗하면 정말 좋을 것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법은 의외로 가까이 있다는 법 하나만은 분명 느낄 수 있으므로...
대가라 불리운 사람들
흔히 장르 문학의 대가라 불리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해당 장르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된 세계관, 혹은 테마의 원형을 창조했다.
둘째, 바깥의 의견은 관심 밖. 오로지 자체의 형식과 체계를 단단히 해 범접할 수 없는 장르의 성벽을 쌓아올렸다.
셋째, 심오한 주제 혹은 독특한 문체를 더해 장르 문학을 순수 문학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첫 번째에 속한 작품을 현대에 와서 읽는 건 상당한 실망을 유발할 수 있다. 당신은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라는 의문을 수 없이 되뇌이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을 만든 사람입니다'라는 틀에 박힌 평가를 내놓을 뿐이다.
두 번째에 속한 작품은 읽는 건 상당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성벽은 까마득히 높고 또 낯설어 감히 올라갈 엄두 조차 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올라가 성 안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곳이 긱과 괴짜들의 소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게 세 번째에 속한 작품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바로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소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한 마디로 말하면 -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지만 - 로저 젤라즈니는 심오한 베르베르 이자 문학을 전공한 테드 창(<내 인생의 이야기>의 저자, 공학을 전공함)이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SF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가 방점을 찍는 곳은 과학 기술이 아니다. 그는 종교와 신성, 인간의 정복욕과 자기 파괴욕, 불사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이중성, 판타지와 신비주의 등 철학적, 신화적 관념을 적극 흡수함으로써 쇠 맛이 전혀 나지 않는 SF를 만들어낸다. 이는 'S'에 천착하려는 골수 팬들에겐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풍부한 상징과 상상력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선 가히 장르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특히 소설이 드러내는 강한 판타지적 요소에서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술했듯 젤라즈니가 관심을 갖는 영역은 종교와 신화, 신비주의 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러한 소재를 다루기엔 아무래도 전통적 'S'F 보단 판타지가 결합된 새로운 서사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이유야 어떻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젤라즈니의 작품이 단순한 장르 문학에 그치지 않고 위대한 신문학에 이를 수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SF에 바치는 장미
흔히 오타쿠들의 소설, 머저리 괴짜들의 이야기로 알려진 SF는 많은 사람들의 경멸을 받아온 장르였다. 과연 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SF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독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할 지식인 박경철은 자기 인생을 통털어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 중 하나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꼽은 적이 있다. 특정인의 권위에 힘 입어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니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유명인이 있다는 게 일말의 안도감을 주는 건 사실이니 거기에 힘 얻어 한 마디 하겠다. 로저 젤라즈니의 SF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장르다.
혹자는 신에 대한 고찰은 니체로 충분하고 신화의 세계는 이미 조 프레이저가(<황금가지>의 저자) 끝낸 바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며 SF 무용론을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이야기의 전달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컨대 신성이란 '신성'이라는 단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지닌 캐릭터가 특정한 세계 속을 헤집고 다닐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난 실체는 온갖 학문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표현한 개념을 초월한다. 개념을 초월해 실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집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라 이름붙였지만 그 아래 영어로는 다른 제목이 붙어 있다. 함께 실린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The Doors of his Face, the Lamps of His Mouth>이다. 이 제목은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 작품은 금성이 배경이다. 어찌 하여 원제와 다른 소설 제목을 따왔을까? 장미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기독교 문화에선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이 더 익숙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어로 옮기면 좀 낯설지 않은가. 함께 실린 소설 제목들도 살펴 본다. <12월의 열쇠>, <이 죽음이 산에서>, <폭풍의 이 순간>,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역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가 제일 낫다. 로저 젤라즈니를 모른다 해도 조금 더 호감을 살 만하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얼마 전 리뷰한 <SF 명예의 전당>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 SF 협회 회원들이 뽑은 인기투표에서 6위를 차지했다. 1964년 12월 31일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이 후보였다. 1위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나이트폴>, 3위가 대니얼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다발을> 그리고 6위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다. 나도 한때 구약성서 매니아였는데... 시골에서 컸기 때문에 주변에 도서관도 없고 읽을 만한 책들은 죄다 읽은지라 성서도 열심히 봤다. 구약성서는 옛날 이야기같지 않은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의 주인공 갤린저도 구약성서를 시로서 감상했다고 한다. 나야 평범하디 평범한 일개 시민이고 갤린저는 천재 중에 천재라서 좀 다르긴 하지만. 갤린저가 얼마나 천재냐면, 여섯 살에 이미 5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아직 한창 나인데 벌써 대학에서 위대한 시인들과 함께 다뤄지고 있다.
「대학 다닐 때 현대시 강의를 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운을 뗐다. 「여섯 명의 시인이 그 대상이었죠 ― 예이츠, 파운드, 엘리엇, 크레인, 스티븐스, 그리고 갤린저였습니다. 그러던 학기 마지막날, 우리 교수가 약간 연극적인 말투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여섯 명의 이름은 금세기에 기록되고, 어떠한 지옥 같은 비평의 관문도 이들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갤린저의 천재성을 인정하지만 인성은 인정하지 못하는 모튼의 말이다. 어쨌거나 이 자신만만한 시인 갤린저는 화성 탐험대에 뽑혀 화성인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화성 세계. 이제 그는 화성의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얻는데 그곳에서 신에게 바치는 춤을 보게 되고 브락사라는 무희와 사랑에 빠진다. 250살은 족히 먹었을 이 어린 누나(?)와 행복하던 것도 잠시, 지구로 귀환해야하는 날이 돌아오고 브락사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미친듯이 화성 사막을 헤매던 갤린저가 이대로 죽나싶을 때 브락사가 나타나고... 갤린저는 그들의 신전으로 찾아가 담판을 지으려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실은 화성인들의 빅 픽처였다는 사실! 망연자실한 갤린저는 자살기도를 하게 된다. 1963년에 씌인 소설이라는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현대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이다.
갤린저가 불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후련한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잘나고 자신만만한 남성이 화성 여인들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다는 설정이 독특했다. 독실한 아버지 아래 나고자란 갤린저가 늘 종교를 피했지만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종교의 그늘로 들어오고... 청개구리 삶 그 자체다. 전도서를 떠올린 것도 화성의 경전과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도서를 티끌만큼도 믿지 않으면서 전도서를 가지고 화성인들을 꾸짖는데 사용하다니. 이런 역설이 또 어디있단 말인가? 릴케에 빙의해서 사랑을 속삭이던 모습들에서 이미 연애 짬바가 나오고... 한순간에 미래의 가정을 잃어버린 갤린저가 눈물짓는 장면은 애잔하다. 그는 앞으로 화성의 역사와 새로운 경전에서 어떤 식으로 등장할까? 지구와 화성의 교류는 계속 이어질텐데, 그 후의 삶이 궁금해진다. 좋은 작품이다. 나머지 단편들도 천천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