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해풍이의 모험 ‘나는 바람이다 1 빨간 수염 사나이 하멜’ 해풍이의 모험 ‘나는 바람이다 2 나가사키에 부는 바람’)
그러다 만난 서해문집의 하멜표류기. 제목만 봐서는 무슨 아동용 모험기 같은데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간 다음에 쓴 기록이며 보고서였고 이 보고서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한 거였고, 원래 제목은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왕국(조선)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제주도)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네덜란드령 인도총독, 요한 마짜이케르 각하 및 형의원 제위 귀하’로 무척 길다.
하멜표류기는 여러 판본들이 있는데, 불어본에 입각한 한글판은 1930년대에 출판되었고 1954년에 이병도의 ‘하멜표류기’가 재판되었는데 한국과 일본의 자료를 보충한 것이라고 한다. 141페이지로 얇지만 내용이 꽤 알차다. ('나는 바람이다'에 무척 자세한 내용이 나와있어서 17세기 조선의 모습을 다시 보는 시간이었다)
왼쪽 그림은 스페르베르 호 항로, 오른쪽 그림은 1596년의 일본 지도로 한국의 모습이 보인다.
하멜일지와 조선국에 관한 기술로 나뉘어 있고, 하멜일지는 제주도로 오게 된 경위와 조난당해서부터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쓴 기록이고,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는 조선 백성의 관습과 생활상 그리고, 조선 왕조에 관해서 쓴 기록으로 지리적 위치부터 군사 경제 교육 등 하멜이 본 조선의 모습이 자세히 담겨져있다.
바타비아 (인도네시아)를 떠나 타이완을 거쳐 일본을 가능 항해 도중 날씨가 나빠져 표류하던 중 육지에 도착하지만 거친 파도와 심한 바람 때문에 배가 부서지고 부상자들도 생긴다. 아름다운 배는 산산조각 나고 64명의 선원 중 36명만이 살아남았다. 100명 정도의 무장한 사람들이 그들의 인원수를 조사하고 감시했고 다음 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사람들을 나누어 데려가 조사를 시작했다. 일등항해사는 관측을 하고 이곳이 ‘켈파트르 (제주도)’섬이라는 걸 알아냈고, 사람들은 하루 두 차례 음식을 갖다 주고 조사를 하고 감시를 했다. 그곳으로 네덜란드 사람이지만 거의 한국인이 된 얀 얀스 벨테브레가 찾아왔고 왕은 (효종)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당신을 보호해 주겠으며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제공해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치라’라고 그의 귀환을 거절했으며 하멜 일행 또한 여기에서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제주에서 서울로 와 왕과 대면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역시 거절당하고 친위병으로 지낸다.
청나라 칙사에게 그들의 일을 알리고 도망치려 하는 일이 발각되어 그들은 전라도에 유배되어 목숨은 구하지만 절도사에 따라 쌀은 지급하지만 땔나무를 직접 구하고 군청의 잡초도 뽑고 청소도 한다. 기근이 심해지자 22명은 여수, 순천, 남원으로 분산되어 힘들게 지내고 그러다 힘들게 배를 구하여 탈출한다.
나가사키로 가던 중 고토섬에 도착하여 엄중한 감시를 받았지만 무사히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고 바로 네덜란드로 갈 줄 알았으나 나가사키 총독은 그들을 데지마 섬에 데리고 가 일년 더 있도록 한다.
'나가사키 총독이 한 질문과 이름을 밝힌 우리들이 대답한 답변' 내용은 하멜 일행이 조선에 가게 된 경위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 궁금한 총독의 질문이 많이 들어있다. 하멜 일행은 데지마에서 1년 이상 지내며 음식과 옷 대접을 잘 받았지만 답답해한다. 드디어 1667년 10월 25일 그들은 스프리우프 호에 승선하여 바타비아에 도착했다가 하멜은 남고 나머지 7명은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탈출하지 못한 7명은 동래에 있는 일본의 무역기지를 거쳐 조선을 출발하여 악천후로 1년만에 나가사키에 도착하고 (아마도 바타비아에서 만난) 하멜과 함께 네덜란드로 가고 계산 된 밀린 급여를 받는다. 하멜의 귀환 후 조선과 통상을 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 정부가 반대했을 거라는 추측만 남는다.
조선국에 관한 기술 중 '문자와 인쇄'가 눈에 띄는데 문자를 쓰는 데 세 가지 다른 방식이 있고, 첫 번째 것은 주로 쓰는 방식인데 중국와 일본의 글자와 같고 공식문서와 모든 책들이 이렇게 인쇄되었고, 두 번재 것은 네덜란드 필기체처럼 매우 빨리 쓰는 문자인데 포고령이나 청원서, 편지를 쓸 때 사용하고, 세 번째 것은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문자로 배우기 쉽고 어떤 사물이든지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역시 한글의 힘은 위대하다.
만약 17세기 조선의 선조들이 낯선 네덜란드인들 36명이라는 집단을 적절하게 응대하고 잘 활용했더라면 서양 문명의 발달을 일찍 수용할 수 있을 것이요, 조선의 개화도 더 빨리 이뤄졌을 것이 아닌가! 그랬더라면 일제 침략도 지배도, 그리고 남북분단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역자의 말에 나 또한 그 당시의 관습과 대응에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하멜 표류기의 원제는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이다 제목 그대로 [하멜 표류기]는 헨드릭 하멜이라는 선원이 제주도에 표류해 그때부터 약 13년간 조선에서 겪은 경험담을 쓴 기록문이며 보고서이다 이것을 보고서로 쓴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
[하멜 표류기]는 지금까지 여러 권 출간되었으나 이 책들은 모두 하멜이 쓴 원본이 아니라 하멜의 글을 흥미 위주로 각색한 이본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반면 이번에 펴내는 하멜 표류기는 하멜이 쓴 네덜란드어 정본을 고증해 펴낸 후틴크의 1920년 판을 텍스트로 하였다 표류기의 구성을 보면 하멜의 경험담을 쓴 [하멜일지]와 조선에 대한 보고를 담은 [조선국에 관한 기술]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원다운 소박하고 솔직한 문체로 기록된 하멜 표류기에는 우리도 몰랐던 우리 조상들의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상과 함께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이 담겨 있다
신문 광고인가, 어디서 서해문집 출판사의 '오래된 책방' 시리즈의 책들을 알게 되었다. 정확한 번역과 풍부한 주석, 사진 자료 등으로 고증으로서의 역사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줄 것이라는 생각에 오래된 책방 시리즈의 '하멜 표류기'를 처음으로 읽어보았다.
이 책은 17세기 동인도회사 소속의 네덜란드 출신의 선박 포수였던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지금의 제주에 불시착(?) 하게 되면서 조선에 포로로 잡혀있던 13년 동안의 기록이다.
외국인의 시각에서 본 조선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느꼈을 두려움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교적 상세하게 조선에 대한 풍습과 생활상들이 기술되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큰 책이라 여겨진다.
다소 놀라웠던 점은 하멜이 극적으로 조선을 탈출하고 일본에 드디어 도착하게 되었을때 나가사키 국왕과 인터뷰를 했던 내용인데, 지금으로치면 국가기밀에 해당될 수도 있을법한 내용들까지도 일본은 아주 상세하게 질문했다는 점이다(하멜은 자기가 아는한 다 대답한 것 같다). 조선이 좀 더 깨어있고 평화를 지키기위해 대외적으로도 방비를 했다면 훗날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국가차원의 무지란 한 나라와 백성을 파탄으로 몰고갈 수도 있다는것.
아무튼 하멜 표류기, 흥미로운 책이었다.
KBS의 역사 저널 그날을 통해 하멜 표류기에 대해 접하고 실제 내가 그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보기 시작했다.
책의 저술이 동인도 회사에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한 동기로 저술된 것도이 우습기도 하지만 외부인의 눈에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모습에 대해 알게 되어 다소 충격이었고 지금이나 예전이나 관료들의 생각은 별로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런데 더 무서웠던 것은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하고 일본에 가서 데지마라는 인공섬에서 그 일행이 머물면서 조선에 대해 상세하게 물은 일본의 행동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70여년이 지난 후 일본은 여전히 조선에 대해 아주 상세히 파악을 하고 있었고 그 정보는 외국인에 의해서 일본에 전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군사훈련과 지리적 거리 등등 너무나 상세한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하멜 일행이 표류했을때 조선정부는 형식적인 질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그들을 그저 그런 포로로 여기었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더 깨어있는 군주였더라면...조금만 더 깨어있었던 관료들이 있었더라면 가정을 해보는 것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