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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 쉬지 않고 일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기 힘든가
EBS 자본주의 제작팀 저/EBS MEDIA 기획
조선의 평화를 단박에 깨뜨린 '임진왜란'은 자칫 조선을 멸망시키고 일본의 지배를 받거나 엄청난 피해로 인해서 '망국의 지름길'을 열어버리는 일이 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승리'로 끝맺긴 했으나, 조선이 다시 부흥하지 못하고 300여 년간 골골 대다가 끝내 일제에게 '망국'을 당하고 말았다.
여말선초 시절, '왜구'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을 때는 최영, 이성계, 최무선 등의 걸출한 인물이 있어서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비록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긴 하였으나 '역성혁명'으로 인해 비교적 안정적인 '교체'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다 조선 개국초기에는 '사대교린 정책'을 내세워서 여진과 왜는 쳐부수기보다는 잘 타일러서 교화시키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었다. 그러다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본때를 보여주며 북쪽으로 '4군6진'을 개척했으며, 남쪽으로는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여 조선의 국력을 만방에 떨쳤었다. 이렇게 강력했던 조선이 200년 뒤에는 '국방력'이 약해져서 왜구의 침략(삼포왜란 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다 끝내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에 의해 대대적인 침공을 받게 된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그리고 이 책 <징비록>은 그 악몽같았던 7년간의 기록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다시는 '그날'의 비극을 다시 맞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의 시작에는 '신숙주의 당부'로 글이 쓰여 있다. 신숙주는 세종 시절에는 '집현전 학사'로 이름을 날렸고 '계유정난' 이후에는 세조로부터 훈구공신 대우를 받았고, 성종 때 죽은 인물이다. 신숙주는 '외교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신하였으며, 특히 조선의 태평성대를 위해서는 '일본'을 잘 감시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주변국의 정세를 잘 파악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런데도 조선은 일본에 대한 감시를 소홀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악수를 두고 만다.
왜 그랬을까? 조선초기에 조선을 둘러싼 주변국들이 약한 덕분이었다. 물론 세종 때까지는 '무력시위'를 벌이고 주변국을 상대로 승리할 정도로 국방력을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평화가 200년 간 이어지자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절의 '군역'은 있으나마나할 정도로 해이해졌으며, 그나마도 '군포 1필'을 내면 1년 간 군역을 면제해주는 일까지 횡행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변방의 군역을 빼낼 수 없어서 반드시 군역을 치루도록 했지만, 그나마도 '군포'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만 차출되어 차디찬 북방으로 군역을 보내니 '군의 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어졌을 뿐이다.
이처럼 '국방력 약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삼포왜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벌어진 왜구들의 대대적인 습격이었는데, 이때 왜구들이 내륙 깊숙한 충청도까지 쳐들어올 때까지 이를 막아낼 '조선군'이 없었으니 정말 형편 없는 국방력이었던 셈이다. 이 당시에 '군사체제'가 '진관체제'였는데, 이는 '지역방어'에는 유리했으나 소규모로 각기 따로 움직였기에 '대병력'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규모' 쳐들어오는 적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 '조선군'도 군대를 집결시켜 대규모로 막아내는 방어책을 쓰는데, 이것이 '제승방략제'다. 어찌어찌 이 군사제도로 '삼포왜란'을 막아내긴 했는데, 그 뒤에도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않아서 '제승방략제도'의 효과를 극대화시키지는 못했다. 왜냐면 '대규모 군사훈련'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비용절감'을 위해서 또다시 국방력을 약화시키고 만 것이다. 이즈음에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했으니, 시행이 되었으면 '임진왜란'의 초기에 그토록 쉽사리 밀리지는 않았겠지만,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조선의 행정시스템이 먼저 무너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암튼, 이처럼 해이해진 조선을 일본이 대대적으로 침공하게 된다. 명분은 '정명가도(명나라를 치러 가니 조선은 길을 열고 합세하여 같이 명을 치자)'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원인으로는 오랫동안 일본의 조공을 금지한 명나라 탓이 으뜸이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이 막혀버리자 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숨통을 틔운 나라가 '조선'이건만, 조선도 왜구들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며 일본과의 무역에 빗장을 걸기 일쑤였다. 그러다 '포르투갈 상인'이 찾아오자 새로운 바닷길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오랜 전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기'인 조총도 이때 들어오게 된다.
암튼, 일본은 전국을 통일하고 남아도는 '군사세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웃나라를 침공하는 일을 계획하기 된다. '토사구팽'으로도 유명한 이 전략은 통일을 이루기까지 '무장의 힘'을 빌리지만, 통일을 이루고 평화가 찾아오면 '무장의 힘'은 새로운 위협이 되기 때문에 '없애야 할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한신'이 그랬고, 송나라 조광윤을 도와 송을 건국한 개국공신들은 칼을 버리고 '사대부'가 되어야만 했다. 풍신수길도 마땅히 자신을 도와 전국통일을 이룬 '사무라이들의 힘'을 분산시켜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이웃나라를 침공할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이때 만약 신숙주의 유언대로 '일본'과 관계개선을 끊임없이 하며, 감시도 철저히 했었더라면, 일본의 이런 움직임을 진작에 간파하고 대비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테고,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허나 조선은 관계개선도 하지 못했고, 감시도 하지 않았고, 대비도 하지 못했으며, 전쟁도 막지 못했다. 마지막 기회였던 '통신사 파견'도 끝내 '동인과 서인의 갈등(당파)'으로 인해 아무런 소득도 없이 흐지부지 결론을 내지 못했던 셈이다. 그나마 서애 류성룡만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감지하고,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해 각각 바다와 육지를 맡게 되니 '조선'으로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결국 '임진년(1592년 4월)'에 전쟁은 발발했고,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 달 남짓한 시간만에 한양을 점령해버리는 기염을 토하고 만다. 도대체 조선군은 뭘하고 있었단 말인가? 류성룡의 지적을 보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일본군이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들고 와서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는 하지만, 조선에는 더 강력한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철저한 대비만 하고 있더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뚫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의 모습에서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전쟁의 승패는 '무기의 강력함'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수비하는 처지'에서는 성을 쌓고 버티거나 길목을 지키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그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많은 수의 공격을 받아도 결코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그랬고, 양만춘의 안시성전투가 그랬으며, 김시민의 진주성전투가 잘 보여준다. 그러니 조선이 국방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고 대비를 철저히 했다면 어떤 공격이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임진왜란'의 실체였던 셈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낱낱이 파헤친다. 그리고 '대비'를 못한 결과가 얼마나 치욕스럽고 잔인했으며 끔찍했는지 처절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병자호란'을 막아내는 결과를 낳지 못했다.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을 '교훈'과 함께 '경고'의 의미로 써내려갔는데도,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는 이들이 아무도 이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선조의 행적'과 함께 '지배층의 무능'을 낱낱이 보여주는 책이라며 감추기 급급했다. 훗날 조선이 아니라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징비록>을 더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금지 목록'에 올려 다른 나라에 빼돌리지 못하게 막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이 책을 '교과서' 삼지 않고 끝내 조선이 멸망하고, 대한민국이 들어선 지도 한참 지난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도 '이순신'이 새삼 주목받는 계기 덕분이었고, 얼토당토 않은 '원균'이 충신(?)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겨우 관심을 받게 된 셈이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201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징비록>의 가치를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제라도 느끼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다. 물론 이 책이 <징비록>의 전부는 아니다. <징비록>에 대한 연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지라도 우리 독자들이 즐겨보는 책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전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는 이때가 바로 <징비록>을 읽고 '디딤돌'로 삼아야 할 때다. 모처럼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저력은 바로 '실패'를 거울 삼아 '성공'을 다시 쓰는 역사를 통해서 발휘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 초반부를 읽는데 예전 코미디가 생각났다. 변방의 북소리라고. 심형래씨가 나오던 코너인데 작전도 어설프고 병사들도 어설프고, 작전 전달도 제대로 못해 웃음이 절로 나왔던 코미디가 자꾸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징비록> 속 상황도 그 코미디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군이 쳐들어 왔다. 왜군이 쳐들어 온 사실을 장수에게 고하니 분위기 흐트린다고 고한 이를 죽인다. 그러다 적이 눈앞에 오니 첩을 피신시키고 자기도 도망간다. 그래서 다른 이를 내보내니 손도 못쓰고 죽는다. 변방의 북소리는 코미디라 맘껏 웃기라도 하지, 이건 나라의 명운과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이야기에다, 실제 상황이니 웃지도 못하고 가슴 답답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선조가 피난을 요동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 패하기만 했으니 피난을 갈 수 밖에 없는 당연한 것일텐데. 이미 그런 결과를 아는데도 나도 모르게 여기서는 이겨야 되는 거 아니야?하는 답답한 마음이 마구 솟았다. 그 역사를 살아낸 이의 눈으로 그 사건과 시대를 서술했기에 더 실감나고 더 속상하게 여겨졌다. 역사를 정리한 책도 물론이거니와, 이런 책을 좀 더 찾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일단..마음은 먹음..)
왕의 무능함과 관료들의 탁상공론, 제 살길만 챙기기, 반대파 숙청하기, 귀닫고 눈감기, 상벌에만 관심 두기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전쟁이 없는 시기일지언정, 적어도 자력으로 자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어야 하는데, 아니면 적어도 충언들에 귀를 기울였다면, 조금이라도 피해가 적었을텐데 안타깝기만 했다. 그 원통함을 류성룡이 <징비록>으로 남겨 후손들에게 같은 실패를 겪지 말라고 당부한다.
1. 류성룡과 징비록
[유성룡과 징비록] 中
1574년, 중종 37년에 경상도 의성 지방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늘 그렇듯이 유성룡 또한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6세 때 향시에 급제한 그는 21살 되던 해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생략)
임진왜란 발발시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던 그는 다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선조가 난을 피해 길을 떠나자 호종하였으며,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다시 의주에 이르러서는 평안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파견되어 오자 그와 함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생략)
이후 류성룡은 영의정에 다시 복직하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군비강황와 인재 배양에 힘썼으나 정유재란 이듬해에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한다. 고향으로 가 저술에 몰두하고, 복관되어 조정에서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글 중 <징비록>은 역사적,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문장으로 꼽히고 있으며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징비록의 징비는 시경 소비편에 나오는 문장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에서 나왔다고 한다. 즉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쓴 글임을 알 수 있다.
리뷰에서 이를 언급한 이유는, 그의 일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의 분위기가 읽혔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고,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기 급급하여 벼슬을 줬다 뺐었다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지금이라고 딱히 다른 것 같지 않아 더 답답한 것도 있고 말이다.
선조가 만약, 임진왜란 후에 제대로 나라를 재건하려고만 했더라도, 후대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류성룡이 크게 깨닫고 군을 정비하고 인재를 키우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라를 이끌어감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하고 뜻을 모았다면 어땠을까 답답하기 그지없다.
2. 이순신
임진왜란은 이순신이 다했구나 싶을 정도의 뛰어난 인물을 못잡아 먹어 안달인 말만 하는 이들은 분노를 일으킨다.
p. 187
이순신이 원균을 구원해 준 후로 둘 사이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얼마 후 공을 따지게 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성품이 음흉하고 간사한 원균은 여러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이순신을 모함했다.
(생략)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공격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요시라는 몰래 김응서를 찾아왔다. (생략)
김응서는 이 내용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도 이 내용을 믿었는데, 특히 해평군 윤근수는 기회가 왔다며 계속 임금께 보고드리고 이순신에게도 빨리 전진할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계략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주저하고 있었다.
주저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잡아들이고 원균을 통제사에 임명하기에 이른다. 임금이 그래도 의문이 있어 남이신을 파견하니 병사와 백성들이 모두 나와 이순신을 옹호한다. 하지만 이를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다. 이순신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고 하여 결국 이순신은 옥에 갇힌다. 판중추부사 정탁의 충언 덕에 그나마 사형은 면하는 이순신. 그리고 이순신의 흔적을 지워가는 원균. 왜적의 기습에 대패한다. 심지어 자기 수하들만 챙겨 도망간다. 결국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순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싸우라 하지만, 배도 10여척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았기에 군을 정비하고 적의 구원병을 크게 물리쳤으나 총이 가슴을 관통하여 숨을 거둔다. "지금 싸움이 급한 상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류승룡이 본 이순신은 이러했다.
p.215
그는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
후대의 평가가 아닌 역사 속 인물이 다른 역사 속 인물을 평하는 것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흔히 말하는 역사 속 인물이 살아 숨쉬는 것 같다라는 표현. 그게 딱 맞는 것 같다. 그들도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갈등하고 잘못된 선택도 할 수 있지만, 그 잘못을 바로 잡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일을 위해 나아간 이는 후대에 존경받지만, 아닌 이들은 지탄받는다. 눈 앞의 이익보다 멀리보는 눈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3. 우리의 지금은?
그 험한 시기를 이겨내고 앞일과 나라를 생각하던 장수가 또 하루아침에 파직된다. 듣기만 해도 화가 나는 일인데 본인은 오죽했을까. 분노에 차서 자신의 후일을 도모하기 보다, 왜 그렇게 잘못된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다시 살펴보고, 후손들은 그러지말라고 교훈을 남겨야겠다고 글을 써 내려간 류성룡의 의지.
그 의지를 후손인 우리는 얼마나 알고, 교훈 삼아 행하고 있는 것일까? 징비록을 읽으면 현재의 상황과 겹쳐진다는 일.고.십. 멤버들의 한숨이 그 답이 될 것 같다. 빠른 성장으로 IT강국이라는 이야기도 듣고, 식민지였던 나라가 이제 어려운 나라들을 도울만큼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징비록에서 전하고 있듯이 그렇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삶이나 세계 정세도 여유로운지 살필 때라 여겨진다.
p.35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했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나와 동년배인 전 전적 이로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p.43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디까?"
그렇지만 걱정이 된 나는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라에 태평한 세월이 계속되면 병사들은 모두 나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때에 변란이라도 일어나면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몇 해가 지나면 우리 병사들도 강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러나 신립은 내말은 무시한 채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p.232
무릇 나라에서는 평소에 훌륭한 장수를 선발해 두었다가 유사시에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을 선발할 때에도 정확해야 하고 그들을 활용할 때에도 빈틈이 없어야 한다.
(생략)
자기가 기른 군사는 쓰지 못하고, 써여 할 군사는 기르지도 않았으니 병사들끼리도 몰라볼 정도였다. 이야말로 병법에서 절대 금하는 것이니, 어찌 앞사람의 잘못을 뒷사람이 고칠 줄 모르고 그대로 답습하여 일을 망친단 말인가!
이러고서도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요행에 기대는 것 뿐이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참으로 위험하구나!
마지막 글이 무섭게 다가온다. 앞사람의 잘못을 그대로 행하면서 무사하기를 바라는 요행은 안 될 일이다. 세계 정세도 지금 만만치 않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똑똑히 기억하라고 류성룡은 <징비록>을 남겼다.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해야할 시기이다. 일.고.십 질문에 대한 답에도 썼지만, 우리만의 것을 제대로 갖춰서 또다시 다른 나라에 휘둘리는 일이 없도록 힘을 길러야할 것이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다. 우선 정사라 할 수 있는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에도 실려있고,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그 밖에도 여러 의병장들이 기술한 문집들이 있다. 그러나 왕조실록에 실려있는 부분은 주로 당파적 입장에서 쓰여져 있다고 볼수 있으며, 이순신이나 여러 의병장들이 쓴 것은 자신의 치른 전투중심으로 쓰여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비록 개인의 문집으로 사후에 출간되었다고는 하나,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은 왕의 지근에서 바라본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과정에서 경쟁했던 수많은 제후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력과 욕망을 대외적으로 분출시키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7년간의 전쟁이 남긴 영향을 보면, 일본과 중국은 왕조가 바뀌었지만, 당시 전쟁의 주무대이었던 한국만은 요지부동 이었다.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중 사망함에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했고, 명나라는 전쟁에 따른 국력소모로 결국 청나라에 중국을 넘겨 주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권은 붕괴되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의 피해가 온전히 피지배층에 돌아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전쟁이 끝나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서애 유성룡은 자신이 몸담았던 조정과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반성하며, 임진왜란 전후의 현실인식을 통해 후손에게 값진 경험을 남겨주기 위해 이 책을 지었다. 징비록의 징비란 시경 소비(小毖)편에 나오는 문장 子其懲而毖後患(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즉,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쓴 글이라는 뜻이다. 이런 징비록의 구성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정황이 담긴 징비록 상하 2권, 7년전쟁 동안 보고 들은 내용이 담긴 녹후잡기, 서애가 올린 차 및 계사를 모은 근포집, 1592년부터 이듬해까지의 장계를 수록한 진사록, 그리고 서애가 도체찰사로 재임하던 때의 문이류를 모아 놓은 군문등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이중에서 징비록 상하 2권과 녹후잡기를 번역한 것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서애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전인 1586년부터 왜국이 사신을 보내 조선에 요구하는 내용과 조선의 대응에 대하여 적고 있다. 당파적인 관점을 떠나 일어난 일 그대로를 적은 내용을 보면 조선은 그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 무지했음을 느낀다. 하긴 중국 명나라에 대한 사대만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조선 건국후 200여년 동안 전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1592년 왜군의 침략이 시작된 이래 삽시간 만에 부산이 함락되고, 한양까지 물밀듯이 밀려오는 그들을 막기는커녕 도망치기에 급급한 조선의 관리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책을 읽는 내내 할말을 잊게 만든다. 서애는 선조가 한양을 빠져나가는 모습과,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그들이 왜국과 강화조약을 맺을 때까지, 또 조선의 의병과 군졸들이 싸우는 모습에 대하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모두 조선땅에서 일어난 만큼, 조선 백성들의 고난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대부들의 시각으로 본 단편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빠져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 확보에 대해서는 자세히 써있는 것을 볼 때, 의도적이었던, 그러지 아니했던 간에 당시 사대부들의 사고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전쟁의 실상이 승패 위주로 기록되어 있고, 백성들의 고초에 대해서는 스쳐 지나가듯이 들은 것 이외에는 기록이 되어있지 않지만, 당시 조정에 몸담고, 전쟁을 자초한 사람의 하나로써 스스로를 반성했다는 점에서 볼 때, 현대에 사는 우리가 징비록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회 또한 새로울 수 밖에 없다. 이 땅에는 징비(懲毖, 子其懲而毖後患) 하여야 할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애는 징비록에서 스스로를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였지만, 조선은 그러하지를 못했다. 그러기에 몇십년 후, 바로 병자호란을 당하여 또 다른 치욕을 맛보게 되며, 백몇십년 후 끝내는 왕조의 멸망을 맞이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우리는 많은 가시밭길을 헤쳐왔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어처구니 없고, 말 도안되는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것에 대해 스스로를 징계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경계로 삼는 사람조차 없다. 임진왜란 당시의 왕과 조정대신이나, 지금의 그들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음을 느끼게 만든다. 그들에게 징비록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아마 그들은 읽고도 그 뜻을 알지 못하리란 생각에, 아니 설사 안다 할지라도 외면하리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그 유명한 류성룡의 「징비록」. 이렇게 얇은 책인데, 이 책을 읽기까지 참으로 오래도 걸렸다. 누가 썼는지도 알고 그 내용도 잘 알고, 동명의 드라마도 본방사수 할 정도로 봤던 나였다. 하지만 책 만큼은 못읽겠다 싶었다. 아니, 동명의 드라마를 보기 전 까지는 읽어볼까 싶기도 했는데, 동명의 드라마를 보고 나서 더욱 읽을 자신이 없었다. 화면으로 봐도 그렇게 답답하고 울분이 터지는데, 문자로, 책으로 읽으면 정말 더욱 답답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는 내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고, 왜 이럴 수 밖에 없었는지 참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읽는 내내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저 밑 말단 병사부터 시작해서 중간 장수들, 하다 못해 왕까지 도망간다. 전쟁 시작 전부터 정세파악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전쟁 시작 후에도 그랬고, 끝날 때 까지도 그랬다. 정말 진짜로... 이순신 장군님 아니었으면 분노해서 책을 집어던질 뻔. 오죽하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참고 넘어 가다가 도저히 이런 이런건 안되겠다 싶어서 포스트잇을 붙인게 저 정도.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자기 나라 임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일설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본래 중국인이라고 한다. 일본까지 흘러 들어간 그는 나무장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중략) 큰 공을 세워 대관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권력을 잡은 그가 결국 겐지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중략) 겐지 왕국이 망한 지 10년, 그동안 여러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드나들었지만 통제를 워낙 엄격히 한 까닭에 그들 사정은 전해지지 않았고, 당연히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야스히로를 죽인 히데요시는 다시 소 요시토시를 사신으로 보내고 우리에게도 사신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1590년 3월, 드디어 우리 사신 일행이 요시토시와 함께 일본을 향해 떠났다. 요시토시는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임금께 바쳤다. 임금께서는 공작새는 날려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에 보관토록 하셨다. 우리나라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임진왜란을 이야기 하면 보통 사람들은 당시 일본의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김성일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허위보고 한게 문제다”라고. 조금 공부를 한 사람들이라면 김성일이 아닌 선조를 탓한다. “김성일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황윤길은 ‘전쟁은 일어날거다’라고 대답하지 않았냐고. 선택은 선조가 한것이 아니냐고.” 솔직히 말하면 난 후자다. 다만 그 이유는 조금 더 있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부터, 이미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다는 이야기가 조선의 조정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꼈던 율곡 이이는 1583년에 대량의 군사를 키워야 한다(십만양병설)고 했고, 이 책의 저자 서애 류성룡은 환란을 대비해 능력있는 장수를 선발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대마도 조차도, 전쟁이 일어거라며 미리 알려주었으며,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류큐에서도 1591년에 사신을 보내서 일본이 침략할 것 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선택을 한 것이다.
자, 그리고 1590년, 징비록에서 언급한 대로 대마도에서 온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조총 두 자루를 건네주고 간다.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무기고에 처박고 끝냈다. 서애가 말하기로는 조총이 들어온게 이 때가 처음이라고 하지만 그건 틀렸다. 징비록을 덮고, 잠시 조선왕조실록을 들쳐보자.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1일 갑인 1번째기사 / 왜인 평장친이 가지고 온 총통 화약이 뛰어나니 관직 제수를 비변사가 아뢰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2일 을묘 3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버려진 종을 사용할 것을 간원이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3일 병진 2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큰 종을 사용할 것을 비변사가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5일 무오 1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큰 종을 사용할 것을 상차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2일 을축 1번째기사 / 총통을 주조하기 위해 큰 종을 사용할 것을 정원이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14일 정축 1번째기사 / 선전관 박세현이 전라도에서의 왜변의 상황을 아뢰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17일 경진 1번째기사 / 전라좌도 방어사 남치근이 본도 사찰의 종으로 총통을 만들자고 청하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17일 경진 2번째기사 / 오래 된 종은 신령스러우므로 총통 주조에 사용할 수 없다고 정원에 전교하다
선조 바로 위의 왕이 바로 명종이다. 명종은 후사가 없었기에 왕실의 왕자군들을 불러 모았고 그 유명한 ‘익선관’ 스토리의 주인공인 하성군이 왕이되니 그게 바로 선조다. 명종 10년 즉 1555년에 왜인 평창진이 총통을 들고왔다.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40년 전에 왜인 평창진이 매우 뛰어난 총통을 들고 조선에 온 것이다. 그가 들어곤 총통이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조총’이었다. 서애는 1590년에 소 요시토시가 들고온 조총이 조선에 들어온 처음이라고 하였지만, 이미 임진왜란 발발 약 40년 전에 조총은 조선에 있었다.
당시 비변사에서는 왜인 평창진이 들고 온 총통, 즉 조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려진 큰 종이 있으니 그것을 녹여 총으로 만들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왕 명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남도지방은 잦은 왜변, 왜인들의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조총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지만,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해 있었기에, 절에 있었던 큰 종을 녹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나라였다. 조선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이런 함몰된 조선에서, 딱 이 시기에 정세파악에 뛰어난 인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인재들이 이 책의 저자 서애 류성룡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인거다.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서애를 비롯한 사람들은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 여기저기 방비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1591년 봄,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 일행이 야나가와 시게노부, 겐소 등과 함께 돌아왔다.
그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남부 지방 삼도와 방어를 맡도록 했는데 (중략)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했다. 그 가운데서도 경상도에는 특히 많은 성을 쌓고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 등지에는 병영까지 신축하거나 고치도록 했다.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하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전 전적 이로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삼가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이소.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뛰어넘는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괴롭히니 참으로 답답하오’
유래없는 200년 평화는 조선의 윗대가리만 좀먹은게 아니라 저 밑바닥까지 좀 먹고 있었던거다. 그래도 생각있는 관리들이 만약을 대비해 성도 쌓고, 해자도 만드려고 했더니, 전부 보이콧이었다.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한 거라고는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발탁한 정도였다.
1592년 4월 13일, 왜놈들이 부산으로 처들어왔다. 적에 대한 방비도 안되어 있었던,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은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여기까지다. 그 뒤는 이렇다. 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좌병사 이각은 자기 첩과 함께 도망갔다. 밀양부사 박진도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김해부사 서예원도 도망갔고 초계군수도 도망갔다. 순찰사 김수도 도망갔다. 용궁현감 우복룡이라는 사람은 방어사에 귀속되어 북쪽으로 올라가던 군사들을 붙잡고, 반란군이라고 칭하며 몰살시켰다. 도망간 순찰사 김수는 이 우복룡이야 말로 공을 세웠다며 조정에 보고하여, 우복룡은 정3품 자리에 올랐다. 왜놈들이 처들어왔는데 나라꼴이 이랬다. 도망가거나, 팀킬하거나.
-상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순변사 이일은 충주로 도망갔다.
이일은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의 곡식을 꺼내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백 명으로 불어났따. 순식간에 대오를 갖춘 군대가 조직되었다. 그렇지만 모두 전투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 불과했다. 그때 적군은 이미 선산에 이르렀다. 저녁 무렵 개령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코 앞에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못한 이일이 그를 목 베려 했다.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잠시 동안만 나를 가둬 두고 기다려 보십시오. 내일 아침에도 적이 이곳에 오지 않으면 그때 죽이십시오.”
당시 적들은 장천에 머무르고 있엇는데, 그곳은 상주에서 겨우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이일이 개령 사람을 옥에서 끌어내 목을 베고 말았다.
(중략) 잠시 후 몇 사람이 숲속에서 나와 서성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은 적이 엿보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으나 아침 일이 머리에 떠올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중략) 곧이어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따. 10여자루 조총에서 탄환이 불을 뿜는데 맞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미 늦었다고 깨달은 이일은 말머리를 급히 돌려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곧 적이 온다고 보고 한 백성을 민심을 동요 시킨다고 공개처형했다. 같은 날 오후에 왜놈이 엿보는 것을 본 병사들이 있었지만, 본인들도 처형당할까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안되어 왜놈들이 처들어왔다. 적이 온다고 보고한 백성을 처형한 순변사 이일, 그는 꽁지를 내빼고 도망갔다. 심지어는 말도 버리고 의복도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진심으로.. 징비록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계속 이런 이야기의 향연이었다. 계속 읽다가는 속병나서 미칠 것 같았다.
왜놈이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길목에는 산새가 험한 조령(문경새재)이 있다. 이 곳에서 진을 쳤더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의 명장 신립 장군은 조령을 포기하고 너른 벌판인 탄금대에서 진을 쳤다. 그리고 앞서 도망간 순변사 이일 처럼 적의 동태를 보고한 병사를 공개처형 시킨다. 그리고 탄금대 전투에서 전멸. 징비록에 따르면 신립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다.
신립장군에 대해서 내 마음속 평가는 아직도 갈팡질팡이다. 몇 달 전 신립장군에 묘소도 갔다왔고, 몇 년 전에는 탄금대도 둘러보고 왔다. 근데 매번 마음이 변한다. 징비록을 읽은 현재는 이런 마음이다. 신립은 본인의 능력에 자만하다가 괴멸했다는 것.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신립이 매복을 포기한 문경새재를 왜놈들은 걱정하며 들어왔다는 점이다. 혹시나 매복이 있을까 정찰병도 보내고 여러번 확인 했는데, 매복한 조선군이 1도 없으니 왜놈들 입장에선 개꿀. 그 덕에 왜놈들은 춤을 추며 문경새재를 통과하고, 충추까지 와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 부대를 몰살시킨 것이다.
후후...여기까지 읽어도 답답히 미칠지경인데 다음 이야기는 더 답답하다.
4월 30일 새벽,
임금께서 서쪽을 향해 출발하셨다.
그 유명한 선조의 ‘몽진’이다. 그렇게 한양을 지킨다고 뻥카를 날리고서는 짐싸고, 종묘에 있는 지네 선조들 위패 모시고 위로 떠났다. 선조 떠나는 길에 백성들이 나와서 울며 간청했지만, 조선의 왕이라는 자는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왜놈들 입장에서 선조의 도망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을 거다. 당시 왜놈들의 전투 방법은 대빵을 사로잡으면 끝이었다. 근데 왠걸? 자기들 딴에는 쉬지도 않고 미친듯이 올라왔는데 조선의 대빵이 없다. 도망갔댄다. 얼마나 황당할지. 물론 도망간 왕을 지켜본 조선의 백성들만큼이었겠냐마는.
선조는 한양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개성에서 위로 쭉쭉 평양까지 당도했다. 이 즈음에 임진왜란 전투 사상 첫 조선의 승리가 있었으니, 부원수 신각이 양주에서 왜놈들을 물리친 것이다. 하지만 신각의 상사 김명원이, 신각이 명령에 불복종한다고 보고하였고, 선조는 신각을 죽이라 했다. 그렇게 첫 승리를 따낸 장수를 죽였다. 자신보다 유능한 부하장수를 시기한 김명원이나,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유능한 장수를 죽인 선조나 휴. 아오 빡이친다.
진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터질 때 쯤, 그 분노를 가라 앚혀줄 무언가 하나씩 나온다. 이순신과 의병이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끌고 견내량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 의병들은 나라를 지키기 전쟁터로 나섰다. 천한 취급을 받던 일개 천민부터 시작하서 글만 읽던 선비, 부처님을 모시던 승려들까지 의병의 계층도 다양했다.
전라도에서는 전 판결사 김천일, 첨지 고경명, 영해부사 최경회, 김덕령 등이 나섰다.
경상도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 전 좌랑 김면, 전 장령 정인홍, 전 한림 김해, 교서정자 유종개, 이대조, 장사진 등이 있다.
충청도에서는 승려 영규, 전 도독관 조헌, 전 청주 목사 김홍민, 이산겸, 박춘무, 조덕공, 조웅, 이봉 등이 있다.
경기도에서는 전 사간 우성전, 전정 정숙하, 최흘, 이노, 이산휘, 남언경, 김탁, 유대진, 이질, 홍계남, 왕옥 등이 있다.
북쪽에서는 금강산의 유정 대사, 묘향산의 서산대사, 평양의 임중량, 길주에 정문부 등이 있다.
여기서 함정이 있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났던 의병들은 자기들이 지키려 했던 나라의 왕, 선조의 손에 모함받아 대체로 이괄의 난 때 일파로 몰려 사형당하거나 숨어 살았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시기질투와 원균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해야했다. 미친듯이 고구마만 먹다가 겨우 사이다 한잔 삼켰는데, 다시 고구마다.
하 ㅋㅋㅋㅋㅋㅋ 진짜 ㅠㅠㅠㅠㅠㅠ 분노가 가라앉다가도 다시 차오른다. 아.. 어떡해야하지? 이 책을 정말 덮어야 할까? 굳이 읽으며 계속 분노해야할까? 읽으면서도 고민했다. 분명히 이 뒤에 이어질 내용도 다 알고,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 지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는게 망설여졌다. 정말 당대의 살아있는 기록을 읽는 건 너무나 생생해서, 그동안 공부하기 위해 읽은 역사서나 드라마로 접한 그 어떤 것도 「징비록」 만큼 생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목사 김시민에게 대패했던 왜놈들은 정유재란 때 칼을 갈고 왔다. 왜놈들은 애초에 전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해, 진주성을 학살하기 쳐들어왔다. 진주성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다 죽이기 위해 왔고, 실제로 다 죽여버렸다. 그들은 남원성에서도 학살을 이어갔다. 이순신을 모함하고 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죽었다. 남도 땅도 왜군에 먹혔는데, 이순신 장군이 목숨걸고 지켰던 남도 앞 바다까지 왜군에 손에 뺏긴 것이다. 조선은 리더들을 잘 못만나 육군, 해군을 그냥 말아 먹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조선은 그때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이순신 장군이 진도에 돌아왔을 때, 남아있는 배는 10여척이었다. 앞서 말했듯 원균이 미친듯이 말아먹었기 때문에, 여기서 조선의 해군을 부활시킨 다는 건 거의 기적과 다름 없었다. 근데 그 기적을 행했으니 확실히 이순신 장군은 큽... 아 징비록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조선은 정말 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노량에서 대파했다. 그리고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으며 임진/정유년 7년 전쟁이 끝난 것이다.
조선의 백성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장수 진린, 명나라 병사들까지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통곡했다. 해서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해달라 하였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시기질투했던 조선의 왕은 나라를 지키다 죽은 충신의 사당 건립을 거부했다. 그리고 약 1백년이 되어서야 숙종의 명으로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가 건립된다.
징비록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끝으로 그 내용이 끝난다. 그리고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일본이나 청나라와는 달리, 조선에서 책이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징비를 하기 위해 집필한 책이었으나, 징비를 해야할 사람들은 이 책을 서가에 꽁꽁 숨겨두었던 거다.
개인적으로 임진왜란에 관련된 장소를 많이 찾아다녔다. 이순신 장군의 묘소나 사당, 원균의 묘, 신립장군의 묘, 탄금대, 문경새재, 진주성, 행주산성, 남원성, 의병장 김덕령 장군 묘소 등등 정말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도 찾아다녔다. 그 때마다 느낀거라곤 이 두 가지다. 못난 리더 한 명이 나라를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그리고 반복되는 아픈 역 사속에서 우리는 징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는지.
우리는 정말 징비를 하고 있는걸까
징 비 록
징비록은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느꼈던 일들을 기록한 일종의 야사로 분류할 수 있는 개인적인 기록이다. 제목이 그럴듯이 후세에 경계함을 남기기 위해서 본인이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은 과감없이 기록한 글이다. 특히 당파의 이익을 논외로 하고 7년전쟁의 실상을 후대에 전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글이다. 7년전쟁과 관련된 기록들은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등이 가장 상세한 내용이지만 여긴 당쟁의 여파로 인한 자기당의 유리한 점만 기록하고 있다는점과 실상 백성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극히 정치적인 사료들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난중일기의 경우 전쟁 전반적인 내용보다는 해전을 중심으로한 기록들이 많으편이라서 7년전쟁을 전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기록은 아마도 징비록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조선개국이후 100년동안 조선은 거의 명나라의 뒤를 이어 소중화라는 문화적 자부심과 동시에 속칭 오랑캐라 칭하는 북방의 민족이나 왜국에 비해 상당한 발전을 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세종조와 성종조는 조선의 문화, 국방, 경제부문에서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하지만 중종반정으로 이어지는 동안 각종 사화로 인한 사대부들의 틈이 발생하게 되고 결국 조선최초로의 정실의 소생이 아닌 후궁의 소생으로 군주(선조)가 등극하게 되므로써 당쟁의 불씨를 남기되 된다. 사실 7년전쟁발발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은 왜국의 상국인 입장에서 왜국과의 조공관계의 의한 외교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조선은 내부적으로 정권창출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안고 동서분당으로 인한 치열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왜국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으로 일본은 잠시 평화의 시절이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결국 전국시대의 일시적인 통일은 그 잠재적인 힘을 필연적으로 외부로 분출할 수 밖에 없는 구조임이 드러나게 되고 가도입명이라는 미명하게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물론 조선조정도 7년전쟁발발전 전쟁의 기운을 인지하고 통신사를 급파하지만 결국 권력쟁취라는 소의에 묻혀버리게 된다. 그 후의 역사적 진행은 정말 가혹하리만큼 처절했다. 파죽지세라고 할 정도로 수도 한양을 접수하고 선조는 마침내 평양을 통해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고 급기야 명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처지에 까지 내몰리게 된다. 그리고 유성룡은 영의정에 제수되어 전쟁의 최고사령관역활을 부여받았지만 이 역시 당쟁의 희생으로 사직하게 되고 무관의 처지로 선조를 호위하게 된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발발에서 휴전 그리고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7년전쟁기간동안의 조정의 각종조치와 전쟁상황 그리고 백성들의 고달픔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대부의 눈에 비친 백성들의 고달픔이 이정도였다면 실상은 어마어마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식량난을 겪어면서 벌어지는 각종 행태들이 눈을 뜨고 볼수없는 지경에 이른것을 유성용은 자신을 비롯한 관직에 몸담았던 신하들의 잘못으로 인식하면서 그 폐단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접급하고 있다. 무관경시 현상으로 군사력의 열세에서 부터 군주를 포함한 신하들의 정신적인 자세에 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것이 전쟁을 자초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각종전투상황에서 자신의 병법으로 대처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배여있는 후기까지 기록하여 향후 전투사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시 총사령관이라는 지위를 통해 직접 전투를 통솔했던 서애는 무엇보다도 이순신같은 명장의 부재를 가장 아쉬워했다. 그리고 무장의 역량이나 군사력 증강을 위한 대처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징비록이 후대에 전하는 것은 이러한 각종 정책, 대처방안등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서애는 왜 전쟁이 발생했으며 어떻게 전쟁을 겪었으며 그 전쟁의 끝은 어디였는가에 대해 당시 전쟁을 겪었던 인물로서 후대에 거짓없이 전달하는 역활을 강조했다. 이는 역사적 거울을 본보기로 후대에는 다시는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열망이었다. 결국 조선은 전쟁의 댓가를 치루고도 금방 잊어버렸다. 불과 60년 지나서 호란이라는 전쟁이 재현되면서 징비록을 다시금 머리속에 떨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