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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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리뷰 총점 9.4 (11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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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세계의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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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다름과 틀림이 만들어 낸 믿음의 역사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k********2 | 2014.10.23 리뷰제목
다름과 틀림은 어떤 느낌일까. 삶에서 ‘다름’이라는 잣대로 정의되는 이분법적 분류가 삶의 수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차단하는 극단의 오류를 범하게 한다. 나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은 굳이 종교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다못해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시선에서도  이런 다름의 잣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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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 틀림은 어떤 느낌일까. 삶에서 다름이라는 잣대로 정의되는 이분법적 분류가 삶의 수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차단하는 극단의 오류를 범하게 한다. 나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은 굳이 종교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다못해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시선에서도  이런 다름의 잣대는 그대로 적용된다. '다름'의 잣대 , 다름이 틀림이 아님에도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점점 높은 벽을 쌓고 있는 것일까 

 

올 여름 내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파괴 되는 장면이 전세계인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이 지구촌화 되면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 듯 보이지만 세계사의 굵직한 획을 그었던 종교전쟁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뿌리 깊은 반목과 분쟁은 이미 이천년도 더 지난 이야기라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고서적을 뒤적여야 한다. 몇 년전 유대인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라는 유대인이 저술한 예루살렘 전기를 읽으며 예루살렘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접해 본 적이 있다. 저자는 예루살렘 역사책이 단 두 권만이 존재한다며 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통해 예루살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집필하였다고 하였다. 사이먼 시백은 예루살렘을 축복과 저주가 공존하는 땅이라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을 듯 하다. 매일 아침 펼쳐지는 진풍경, 세 종교가 예루살렘을 향해 축복의 예배를 드리지만, 서로를 향해서는 저주를 퍼붓는 광경을 매일 아침마다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세 종교 이야기를 보면서 당연히 외국인 저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식견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 홍익희는 KOTRA 에 입사한 후 무역장관을 거쳐 퇴임한 글로벌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숫자는 많지 않으면서도 전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으로 자리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우수성을 보면서 많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궤적을 경제사적 관점으로 조명한 '유대인 이야기' 시리즈를 완성하였고 유대인들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펴낸 저자이다. 이 책은 종교를 통해 보는 유대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며 세계 3대 종교안에 들어가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모태로서의 유대교를 재조명함으로 역사에서 다름의 시각이 가져온 작금의 반복과 분쟁의 원인을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종교의 뿌리는 의외로 아브라함으로 시작되고 있다. 수메르 최강의 도시국가 우르가 아브라함의 고향이다. 다신교를 숭배하고 성적행위가 종교의식의 하나였던 시대로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은 타락과 부패와 음란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해 순수의 땅 광야로 보내게 되는 것이 세 종교의 시발점이다. 아브라함이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무슬림의 시조가 되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은 유대인의 시조가 된다. (이슬람교의 주장에 의하면 알라와 여호와 하느님은 같은 신이라고 한다.) 이후 유대교의 역사인 구약성경은 세 종교 모두의 경전이 되고, 이슬람교는 구약성경 중에서 코란에서 상충되지 않는 모세오경과 다윗의 시편을 경전으로 믿는다. 세 종교 모두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며 공통점은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로 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내세라는 종교관 모두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는 세 종교는 원래 하나라는 것이 증명된다.

   

  

다른 점은 예수를 보는 관점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지 않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기독교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 세 종교의 모태는 유대교로 아브라함이 직접 신과 계약을 맺은 것을 믿는 유대민족의 종교가 된다. 반면 기독교는 하느님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 기독교이다. 이보다 늦게 생긴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닌 예언자로 인정하고 무함마드를 최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보는 종교다. 뿌리가 같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 종교 모두 구약성경신약성경>, 이슬람교는 토라와 다윗의 시편, 예수 복음서 그리고 코란이 경전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을 제외한 세 개는 후대에 일부 내용이 변절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작은 차이에서 오는 역사의 광풍은 지나치게 배타적인 유대교를 향한 세계인들의 반감을 가져왔고 가장 오래된 종교 전쟁인 십자군 원정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잔인하였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초래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음은 삶에서 많은 다양성이나 가능성에 대한 시선을 차단시킨다. 다름은 결국 틀림으로 간주되어 극단으로 치닫게 되고 , 이러한 모습은 현실의 정치문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이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분쟁의 역사를 쓰고 있는 예루살렘을 볼 때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어리석음은 종교적 도그마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이다. 배타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파생된 이 글귀는 신앙 또는 신조에 입각한 도그마의 위험성을 잘 알려주고 있다. 대부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교조주의와 근본주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채 종교적 도그마에 취해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모두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짓곤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을 벗어나 예수님 그 자체의 모습을 바라볼 때 가치 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삶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중요하지 않듯, 천당과 지옥이라는 규정 역시도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그릇 된 가치이다. 이러한 종교적 도그마로 인해 더욱 배타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종교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바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서는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종교의 알파와 오메가인 예루살렘의 역사가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인하여 이천년의 세월을 반목과 분쟁으로 역사를 써왔다. 평화와 공존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틀림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비단 종교만이 아닌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한 한 번의 삶에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길이라는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는 어쩌면 평생 추구해야 한 번 닿을까말까한 유일한 진실이 아닐까.

 

"사물을 바라보는 데는 천 개의 눈이 있으며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길에는 천개의 길이 있다."

6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6 댓글 2
종이책 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과거와 현재 평점10점 | y******l | 2018.12.09 리뷰제목
유태인 가정 두어집을 알고 지낸 적이 있다. 돼지고기나 비늘 없는 물고기는 먹지 않고 크리스마스도 즐기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산타 선물도 주지 않는다기에 좀 재미 없고 까다로운 사람들(?)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람들 자체는 좋았기때문에 그들의 종교와 관계없이 편희 지내다가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비인도적 폭격 뉴스를 접할때는 그들이 좀 달리 보였었다. 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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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가정 두어집을 알고 지낸 적이 있다. 돼지고기나 비늘 없는 물고기는 먹지 않고 크리스마스도 즐기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산타 선물도 주지 않는다기에 좀 재미 없고 까다로운 사람들(?)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람들 자체는 좋았기때문에 그들의 종교와 관계없이 편희 지내다가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비인도적 폭격 뉴스를 접할때는 그들이 좀 달리 보였었다. 이 책을 마치면서 일반 유대인과 이스라엘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대다수 유대인이 믿는 종교와 관계없는 현재 집권중인 극우 정치인들의 폭력적 수구 정치 행위와 유대교 원리주의가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를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책은 수메르인이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유대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주변지역에서 발원한 세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4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유대교, 그로부터 2천년 후 예수로 재탄생된 기독교, 다시 그로부터 6백여년이 지난 후에 발생한 이슬람교까지. 4천여년의 역사를 아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작가가 친절하게 필요할때마다 반복 정리를 하고 넘어가서 이해가 아주 쉽다. 


작가는 유대교는 율법을 기독교는 믿음을, 이슬람은 행동을 중시한다고 하는데, 핵심을 잘 요약한 말같다.


유대인들은 인간과 신 사이에 성직자 없이 오로지 하나님과의 계약인 율법에 따라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본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며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으로 메시아가 오는 날 천국의 문이 열린다고 믿는다. 어느 종교 기간에는 불도 안켜고, 차도 안탄다고 하니 참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사람들인데 또 어찌보면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그러는데 뭐가 문제인가 라는 생각도 든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을 경멸, 탄압하고 오로지 예수를 통한 죄 사함을 받아야 천국에 간다는 종교이다. 인간의 원죄(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를 예수가 대신 갚았으니 천국의 문은 오로지 예수를 통한다. 그래서 예수의 대리자인 성직자가 권위를 가진다. 기독교는 유대교를 유대인만의 배타적 종교에서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는 보편적 종교로 바꿔놓는다. 물론 무분별한 전도의 폐해를 낳기도 하고 여전한 일신 사상의 배타적 교리때문에 보편적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원죄의식이 없다. 오로지 현재 모세의 규율에 따라 살지 않는 것만이 죄가 된다. 신과의 사이에 성직자도 없다. 신과 나 사이에는 율범과 경전 그리고 실천이 있을 뿐. 이슬람교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구약이 역사를 거쳐오면서 성직자들의 해석 과정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왜곡 변형 되었다 믿는다. 그들은 예수도 선지자로 존경하지만 오직 마흐메드가 최후의 완전한 선지자라 여겨 그의 말을 적은 꾸란만을 진정한 경전으로 인정한다. 한마디로 이전 종교보다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중에 기독교가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뉘고 이슬람교도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지만 내용은 같다. 일단 세 종교의 내용은 다 좋다. 유일신을 섬기고 불쌍한 이웃을 형제와 같이 도우라는 것. 근데 왜들 그리 수천년간 지겹게 싸우는 지... 종교만으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 책은 유대인의 수난사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뿌리인 유대인의 역사를 각 종교의 역사와 맞물려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 건진것이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


유대인이 고리대금 업자라고 불릴 정도로 금융과 상업에 능했는데 역사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끈질긴 저항끝에 본거지에서 쫓겨나 지중해 연안이나 유럽 각지를 떠돌았는데 기독교와 이슬람 국가들에 번갈아가며 지배를 받으며 그들에게 가장 천한 일인 상업과 금융업만이 허락됐기 때문이다. 당시 카톨릭 국가나 이슬람 국가들은 재정이 어려워지면 유대인의 재물을 빼앗고 내쫒아버렸다. 그러다가 돈이 궁해지면 다시 불러들이고. 이런 일이 수천년 동안 계속 되는 동안 반유대주의가 깊숙히 자리 잡아 결국에는 히틀러에 의해 전세계 유대인의 절반이 학살되는 인종청소가 주변국들의 암묵적 동의로 자행된 것이다.


돈 많고 똑똑한 유대인들은 항상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었으므로 나라에 역병이나 우환이 있을때마다 기독교 왕정은 민심의 분노를  유대인들에게 돌려서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예수를 죽인 민족이니까 너희들은 당해도 싸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었다고 하는데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가르치는 '사랑의 종교'의 이름으로 수백만의 인간을 도륙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었을까. 얼마전에도 미국에서 유대교 회당에 대한 총기 난사로 수십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스라엘보다 유대인이 많다는 미국에서 말이다. 이걸 보면 서방사회에 뿌리 박혀있는 반유대주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사실 왕이 신과 같은 존재였으므로 신이 왕위에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종교 전쟁이 있을 수 없었고 그저 땅 따먹기 전쟁만 있었을 뿐인데, 서양에서는 왜 그렇게 신의 존재가 중요했을까. 신에 의해 위임받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 천국에 그렇게 다들 가고 싶었나? 현세가 얼마나 힘들면... 하긴 500년전까지만해도 중국을 위시한 동양이 유럽보다 부강했으니 그 이유를 알것도 같다. 


지난 여름 프라하에서 유대인 공동묘지에 들른 적이 있다. 카프카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그 큰 묘지에 많은 부분이 가족묘였다. 비석에는 홀로코스트로 한날 한시에 사망한 온 가족의 이름이 하나 하나 새겨져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열살 아들, 일곱살 딸, 두살 아기까지... 현재도 지구상에서 종교나 인종,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살인, 테러나 분쟁을 보면 다시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아무도 장담 못할 것이다. 영어 수학이 먼저가 아니라 이런 인류 역사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저자는 코트라에서 정년퇴직한 무역맨으로 세계 여러나라에서 근무하면서 쌓은 경험과 관심을 글로 쓰고 있고 지금은 학생들도 가르친다고 한다. 전공이나 학위 없이 이토록 세 종교의 역사와 문화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쉽게 설명하다니 놀라웠다. 그는 50대 중반에 은퇴하고 사업 실패후 글쓰기를 했다는데 절박함이 있어서 그랬는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것으로 교수도 됐다고 한다. 인생2모작의 모범적 성공사례가 아닐까. 이 책은 중동 분쟁사와 유럽 종교전쟁에 무지한 내게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관련 입문서로 아주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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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한 부모를 둔 형제 종교 평점10점 | a******k | 2020.05.06 리뷰제목
아브라함이라는 공통된 믿음의 조상을 가졌고 '구약성경', '예루살렘'도 공유하지만 오늘날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세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관한 고찰이다.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기원전 2천년에 고대 수메르의 도시 '우르'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아브람인데 인류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아브라함이라 신이 이름을 내렸다.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유대교에서 비롯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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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라는 공통된 믿음의 조상을 가졌고 '구약성경', '예루살렘'도 공유하지만 오늘날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세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관한 고찰이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기원전 2천년에 고대 수메르의 도시 '우르'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아브람인데 인류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아브라함이라 신이 이름을 내렸다.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유대교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은 이들 모두의 조상이다.

노아에 이르러 대홍수를 겪은 후 그의 세 아들들 중 큰아들 셈은 아시아로, 둘째 함은 아프리카로, 막내 야벳은 유럽으로 가서 터를 잡았다. 각각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의 조상이라고 한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곱에 이르러 그의 11번째 아들 요셉에 의해 이집트로 이주한다. 야곱의 아들 10명, 요셉의 아들 2명이 합해 유대12지파가 된다. 

이집트의 람세스2세 때, 모세는 노예로 전락한 동포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다(출애굽). 당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피라미드와 같은 수많은 건축물이 지어졌다. 피라미드 건축은 첨단 기술이 필요한 전문가의 영역이었고 이에 종사하는 건축가들은 최고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중 일부는 자유를 허락받았다. 자유(free) 석공(mason), 유대인 비밀결사조직 프리매이슨의 시조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에 터를 잡은 유대족은 다윗에 이르러 유대왕국을 세우고 솔로몬 때에 전성기를 구가한다.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끄는 남쪽의 유대왕국과 여로보암이 이끄는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단된다.

북쪽의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패망한다. 앗시리아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사람과 앗시리아 천민의 혼혈을 조장한다. 이들이 사마리아인이다.

남쪽의 유대왕국은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느브갓네살)에게 패망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된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기까지 2,500여 년의 이산 시대가 시작된다(1차 이산). 유대 12지파가 절멸하여 사제가 없어졌으므로 유대교는 율법중심 종교로 편향된다.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는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가한다. 유대인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을 메시아로 간주한다. 그런데 고레스가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를 신봉하고 있었으므로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조로아스터교는 유일신 신앙을, 유대교는 선악의 이분법과 메시아 사상을.  바리새파란 친페르시아파란 뜻이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모세5경을 정비하여 '토라'를 완성한다. 느헤미야는 또한 동족들로부터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는데 단서 규정을 두어 이방인에게서는 받아도 된다고 한다. 이리하여 유대인은 이방인을 상대로 고혈을 짜내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로서 떳떳한 삶을 살게 해준다. 유대인은 바빌론과 예루살렘에 나누어 거주하는데, 워낙 외침을 많이 겪다보니 계란을 한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는 이치를 터득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대인은 미국 뉴욕과 이스라엘에 나누어 살며 세계를 주무른다. 

페르시아는 다시 알렉산더에게 패망하고 유대인은 자연스럽게 헬레니즘 문화에 경도된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로 분열되는데 유대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친유대 정책 아래 알렉산드리아에서 해상무역을 주름잡으며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40%에까지 육박하게 이른다. 유대인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느라 히브리어를 다 까먹기에 이르자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거쳐 이른바 '70인역' 성경을 탄생시키니 오늘날의 성경은 이렇게 탄생했다. 70인역 성경 덕분에 엄청난 인구가 유대교로 개종 내지 호감을 갖게 되어 지중해 세계에 폭넓게 전파된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전복시키고 반유대 정책을 펼치자 유대인은 최초의 종교전쟁인 마카비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성공하여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를 연다. 하스모니안 가문이 정권과 함께 사두개파가 담당하던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려 하자 바리새파와 에세네파로 분열된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신흥 강자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유다이아 주가 된다. 유대족은 친로마파인 헤롯파(또는 사두개파,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받듦), 친서민적인 바리새파(구전율법과 모세오경을 다 받든 율법학자), 쿰란에서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는 에세네파로 분열된다.

에세네파에서 예수가 등장한다. 히브리어 여호수아가 그리스어로 예수고, 히브리어 메시아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다. 즉 메시아 여호수아가 예수 크리스토다. 예수는 유대인의 유일신을 인류(이방인)의 유일신으로 만든다.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고, 신과 유대인(신이 선택한 민족)과의 계약은 신과 인류(이방인)와의 계약으로 갱신된다. 당연히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파의 유대인들이 이에 반발한다. 그러나 로마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것은 그가 민중선동가적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라는게 합리적이다.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편향적 주장으로 유대인은 2천년 동안 기독교인의 미움을 받게된다. 자연법칙을 무시한 예수는 3일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여주고 40일을 지상에 더 머물다 승천한다. 예수의 12 제자들(가롯 유다는 자살하고 마티아가 제비뽑기로 뽑힌다)은 성령을 체험하고 예수의 말씀을 만방에 전파하니 그리스도교의 탄생이다. 베드로는 초대 교황이 되고 오늘날 카톨릭 교황은 모두 베드로의 후임이다.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을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했다. 유대교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지만 이슬람교는 예수를 '이샤'라 부르며, 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중요한 예언자로는 인정한다.

처음에 사울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는 유대인을 핍박했다. 그런데 예수가 직접 그에게 나타나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현시하자 이름까지 바울로 바꾸고 그리스도교가 세계인의 종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의 한 지파인 나사렛파로 불렸고 서로 사이좋게 예배를 보았다. 예수의 열두제자들 모두 나사렛파 유대인들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방인은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먼저 유대인의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이것을 전면 부인한다. 율법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한 의미와 맞지 않는다고 설교했다. 최초로 열린 종교회의에서는 바울의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이리하여 유대교는 유대인만의, 기독교는 전인류의 종교가 된다.  

로마 치하에서 유대인은 그리스인과 반목이 심화되더니 결국 반란을 일으켜 로마와 전쟁을 치른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그의 아들 티투스는 유대를 철저히 파괴하고, 예루살렘 성전도 부서진다. 바리새파를 제외한 모든 부족이 절멸하고, 인구의 절반이 살육당한다. 티투스가 세운 '서쪽벽'은 통곡의 벽(황제는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1년에 딱 하루만 출입을 허가했다. 유대인은 그 날 서쪽벽에 머리를 찧으며 슬피 울었다)으로 남아 오늘날 유대인의 성지가 됐으며, 로마로 끌려간 유대인은 노예로 전락하여 콜로세움을 건설한다. 당시 바리새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유대가 함락되기 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은밀히 찾아가 그가 곧 황제로 추대될 것이며 유대인이 절멸되더라도 작은 학교 하나만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랍비의 예언은 적중했으며 황제는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랍비는 학교에서 동족들에게 토라를 공부시킨다. 이것이 유대인의 저력이다.  

유대 일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내세우며 다시 봉기한다. 이 때 유대인은 완전히 절멸되어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고 유대인의 땅은 팔레스타인으로 이름까지 바뀐다(2차 이산).

로마와 벌이는 투쟁의 와중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영원히 결별한다. 예루살렘 최후의 일전이 벌어질 당시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인을 보고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누가복음 21:20 ~ 21)"라는 예수의 말을 기억하고는 집단 탈출을 감행한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들은 비겁한 배신자들이었다. 전쟁 후 바리새파 랍비들은 유대 기독교인을 이단자로 단정하고 저주하며 더이상 유대교 회당에서 예배를 함께 보지 않았다. 이리하여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된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다. 기독교도는 예수를 십자가로 몰아넣은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초기 기독교는 사제에게만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한을 주었다. 일반인은 무지하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을 내릴 우려가 있다는 우려였다. 이리하여 유럽은 5백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문맹의 무지 속에서 살며 암흑기를 연출한다. 무식한 절대다수로부터 이익을 본 두 개의 집단이 있었으니 하나는 성직자요,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다. 성직자는 당시의 지배논리인 종교에 대한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13세부터 토라 공부를 의무화한 유대인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능력이 발달하여 상업에 있어서의 정보를 독점하고 지식을 대대로 전파함으로써 근현대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위인들이 대부분 유대인이 되게 만들었다.

유대인이 인류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은 '안식일'이 아닐까? 이들 덕분에 인류는 6일을 일하고 하루는 쉴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노예가 7년을 일하면 해방시켜주는 '안식년', 50년마다 모든 부채와 죄를 면제해주는 '희년'이 있다.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적 불평등을 정기적으로 해소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가 아닐까 싶다. 

메카의 무함마드가 신의 뜻을 받들어 탄생시킨 이슬람교는 유대교, 기독교와 그 뿌리를 같이 한다. 유대의 유일신(아도나이-나의 주인님), 기독교의 유일신(YHWH-야훼 또는 여호아), 이슬람의 유일신(알라)은 그 이름만 다를뿐 본질이 같다. 다만 그 유일신의 말씀과 뜻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 자리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이슬람에서는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희생시키려 했던 곳이자, 예수가 활동하다가 부활하여 승천한 곳이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다. 한 장소에 대하여 세 종교가 각기 다른 이유로 성지로 삼고 있다. 638년 이슬람 세력이 이 곳을 점령하고 칼리프 우마르가 황금 돔 사원을 건설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영토의 소유권은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갖고 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야 이교도의 성지를 당장 파괴하고 제3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싶겠지만, 만약 이 곳을 더럽힌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라고 한다. 

무함마드가 포교할 당시의 아랍세계는 먹고살기가 각박한 까닭에 폭력이 난무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었다. 무함마드는 동족에게 유일신 개념을 역설하고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퍼뜨린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듯이 기본 바탕은 신에 대한 헌신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신에 대한 헌신에만 눈이 멀어 인류에 대한 사랑 대신 증오와 반목의 싸움을 멈추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무슬림의 사라센제국이 정복한 이베리아 반도(오늘날의 스페인 지역)는 유대인에 대한 관용책과 함께 중세문명을 화려하게 꽃피웠다. 유럽의 기준에서 보자면 중세가 암흑시대이지만 이슬람의 기준으로는 벨 에포크(황금시대)다.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왕국에서 꽃피운 인문학을 보고 배운 것이 이른바 유럽의 르네상스다.

 

유대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인지를 불문하고, 누구든 이 책을 읽는다면 종교적 아집(교조주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무신론자가 읽는다면 세계사와 함께 한 세 종교사를 통찰함으로써 사고의 폭과 깊이가 엄청나게 넓고 깊어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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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대조, 비교 평점9점 | e***7 | 2015.04.09 리뷰제목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무종교. 단일 민족 국가인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종교적 스팩트럼이 넓지 않은 편이다. 유럽이나 미국, 이곳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세계 각국의 이민자로 이루어진 나라에는 출신국의 수 만큼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한다. '다름'의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곳도 없겠지만, '틀림'으로 인해 마음을 쓰는 사람에게는 지옥이 아닐 수 없겠
리뷰제목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무종교. 단일 민족 국가인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종교적 스팩트럼이 넓지 않은 편이다. 유럽이나 미국, 이곳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세계 각국의 이민자로 이루어진 나라에는 출신국의 수 만큼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한다. '다름'의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곳도 없겠지만, '틀림'으로 인해 마음을 쓰는 사람에게는 지옥이 아닐 수 없겠다.


이곳에서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게 자연스럽다. 직장동료에서 학생들까지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신자들 인데, 그들과 일상을 같이 하고 간혹 대문을 두드리는 여호와의 증인과 모르몬교 신도까지 만나게 되니까. 한국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 했던 다양한 종교와 종파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종교적 환경 덕분에 몇 년 전 읽었던 책이 오강남 교수의 '세계종교 둘러보기'인데, 그 책을 종교에 관한 교양서라고 한다면, 이 책 '세 종교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에 뿌리를 둔 세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비교, 대조한 좀 더 전문적인 종교개론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으로부터 이슬람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될 때 마다 신선함이랄까, 지적 쾌감이랄까 그런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알라'는 무슬림들이 믿는 별개의 신이 아니라, 다른 두 종교가 부르는 '하나님'과 똑같은 신이라는 사실. 단지 하나님(여호와)을 직접 호명하기를(?) 꺼려 'The God' 이라는 뜻의 호칭으로 대체한 것 뿐. 또, 수니파가 세계 무슬림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시아파가 그 나머지를 이루고 있다는 것, 두 개의 종파로 분리된 이유, 가자지구의 역사, 최근 IS가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이라는 것 등 이슬람에 관한 부분이 특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다. 

9/11 이래로 끊임없이 보도되는 중동에서의 전쟁과 자살테러 등에 대해서 익숙한 나에게 이슬람은 '지하드'라는 과격한 핏빛 독선자를 양산하는 종교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이 책은 그 편견을 깨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기독교에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이 있듯, 이슬람에도 경전을 오독하고 곡해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신에 관해서는 리처드 도킨스에 동감하는 무신론자 내지는 불가지론자다. 종교의 시작은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태생적 추구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위해 인간이 만든 철학이라고 믿는다. 또한 마르크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설 에도 동감한다. 역사를 통해 보면 종교는 기득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조용하지만 강력하고 유용한 도구였다. '신의 뜻'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져 있으니 너희들의 현생이 처참하더라도 받아들이라, 선민사상, 카스트제도의 유지의 밑바탕 등.


종교가 개인의 영역을 넘어 조직화 되면 종교성은 약해지고 조직의 권력성이 강해지게 되는데 이것이 현대사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대형화, 기업화하는 교회의 권력에서 종교성은 찾아볼 수 없다. 정치와 결합해 권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것 같다. '신의 뜻', '신의 부르심'이란 명분으로...장로 대통령이 탄생한 것을 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인 기독교인도 제법 많았을 것이고, 그가 밀어붙인 4대강 공사는 신의 뜻으로 해석됐을지도 모르겠다.

(현대 사회와 세속국가에서 모든 정치인은 특정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적어도 신상명세에서 종교란은 빼야한다.)  


사실, 있는 그대로의 현생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종교는 개인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도가 높다고 한다. 동의한다. '다른 신(신념)'에 배타적이지 않는다면 어떤 종교든 우리의 오늘과 영혼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고, 현생의 일희일비에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한다.
사실 7년 여 전 나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1년 이상 적극적으로 교회에 갔던 적이 있다. 아침 8시 30분 부터 오후 2시까지 교회에서 보냈다. 마침내 청년회장을 맡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 신에게 이르기에는 너무 '합리적이고 이성적임(?)'을 깨닫고는 그만 두었다. 솔직히 말해, 일요일 마다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것도 참 어리석고 위선적으로 보였고, 주일 하루 교회에서는 그토록 교양있고 신실한 장로와 집사가 교회를 벗어난 곳에서는 어긋난 인격과 사생활을 보이는 것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이런 경험때문일까? 나름의 이성과 합리성이 생긴 20대 이후에 교회에 가기 시작했는데, 말끝마다 '하나님, 하나님'하는 사람들이 참 신기하기만 하다. 때로는 위선자로 보이기도 함을 인정해야겠다.


어느 분야든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소수 유대인의 비율이 많고, 최강국가 미국을 좌지우지 하는 유대인에 대해 친미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탈무드'에 관한 책이 인기를 끄는 등 친유대감정이 퍼져있는 편이다. 세계에서 제일 똑똑한 민족이 한민족이랑 유대인이라는 얘기도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말을 누가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스라엘인의 유대교, 그 선민사상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저자도 언급하지만 그들의 배타적 종교, 유대교가 다른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을 배척하게 했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 천년에 걸친 박해와 디아스포라는 그들의 확고한 종교적 신념으로 볼 수 있겠지만 동시에 그들의 독단과 독선, 배타성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 학급 학생으로 치면,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지만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 하는 학생이다. 걔는 다른 반 반장이랑만 어울린다. 반장끼리 어울리니까 다른 애들이 걔들을 싫어한다. 질투 때문이 아니라 걔들이 우리를 깔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사람은 어느 조직에나 있다. 현재 몸 담고 있는 직장에도 필리핀계(카톨릭) 여직원이 있는데, 다른 여직원들로부터 암암리에 뒷담화를 참 많이 듣는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뒷담화하는 직원들보다 그 직원은 자기일을 철저하게 끝까지 처리한다. 단 하나. 다른 사람 말을 들어먹질 않는다. 그게 타겟이 된 주요 요인이다. 유대인의 단면이랄까?


종교적 신념은 일반적인 신념 너머의 것이라 협상을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다른 이에게 선교라는 이름으로 강요하지 않는다면, '신의 이름으로, 신의 뜻으로, 종교인=선한 사람'이란 눈으로 비종교인을 대하지만 않는다면 역으로 그들은 더 좋은 마케팅을 할 수 있을 듯하다. 가장 강력한 구전마케팅 Word of mouth이 먹힐 테니까.

어쩌면 선교하는 행위가, '신을 섬기지 않는 당신 보다 나는 더 낳은 존재' 라는 믿음 혹은 '내세에서 당신보다 잘 살 것'이라는 달콤한 만족을 주기 때문에 그토록 선교에 열을 올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내 앞의 그 사람이 어떤 신을 믿든 상관없이 같이 먹고 생활하고 일하는 데 어떤 불편함도 없다. 단 나에게 그들의 신념을 푸쉬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존중하며 지낼 수 있다. 무신론자(불가지론자)의 가장 큰 장점인 열린마음(?). 가끔 자신의 신을 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종교가 자아분열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교적인 나와 실재하는 나 사이에서의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한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배다른 삼형제다.

지극히도 효자인 그 셋은 아버지를 닮기 위해, 아버지의 기록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 나름 고민했다. 그러다보니 각자 다른 해석, 다른 적용 방법이 생긴 것이고, 그것이 당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지역 문화가 결합하게 되고 추종자가 생기면서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 자식이 또 다른 자식들을 낳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마치 족보처럼 신을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수 많은 종파가 생겨났고 또 생겨날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다만 그들 배다른 세 형제와 자손들은 형제, 자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최고의 효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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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들의 역사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n*****m | 2017.08.27 리뷰제목
종교를 갖고 있지 않거나(내가 그렇다),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종교의 뿌리와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 생활 자체가 종교적 관습과 연관된 게 정말 많다고 느낄 때가 있고, 세계 정세까지도 심각하게 영향받는다는 걸 알게 된다.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세 종교의 뿌리는 같다.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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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갖고 있지 않거나(내가 그렇다),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종교의 뿌리와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 생활 자체가 종교적 관습과 연관된 게 정말 많다고 느낄 때가 있고, 세계 정세까지도 심각하게 영향받는다는 걸 알게 된다.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세 종교의 뿌리는 같다. 공유하는 것도 많다. 그럼에도 이 세 종교는 과거에도, 20세기, 21세기에도 가장 심각한 국제 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꼭 종교적 원인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도 종교를 그 원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더더욱 없다. 도대체 왜 그랬고, 지금도 그럴까? 그걸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세 종교의 뿌리와 역사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홍익희의 『세 종교 이야기』는 바로 그 세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떤 역사적 변천을 겪었는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그래서 왜 이렇게 반목하는지에 대해 잘 보여준다. 이 세 종교가 하나의 뿌리(바로 아브라함)에서 나왔지만, 그래서 교리 상으로도 상당히 닮은 면도 많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더욱 경계하고, 더욱 박멸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런 대립 자체가 세 종교의 본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두 사랑을 이야기하고, 관용을 앞세우는 종교들이다. 그런 종교의 이름으로 배척과 학살이 자행되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은 오히려 종교가 핑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현실 세계에서의 욕망을 지켜내고 확장하기 위해 고상하고 심오한 논리를 지닌, 그러나 일반 대중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게 하여 그저 따라야만 하는 종교의 가르침을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나의 합리적 의심에 근거를 얹어주고 있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쳐두고 수메르인에서 비롯된 히브리인의 역사를 줄기차게 외워야 하는(『성경』이 바로 그거다) 이유는 아직 정확히 납득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와 같이 무작정 믿지 않고, 그들의 역사가 마치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면 이 세계에 가장 많은 인구가 믿고 있고, 영향력이 있는 세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있다.

 

아쉬운 점은, ‘세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비중이 현격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세 종교가 공통으로 하고 있는 역사와 배경 때문에 앞 부분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반목과 갈등의 역사’의 대부분은 유대’인’ 탄압의 역사다. 그게 역사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일 터이지만, 그건 그 역사를 기록한 이들의 수적 편향을 반영하고 있을 뿐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 책도 그 편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가 『유대인 이야기』의 저자라는 사실도 당연히 반영되고 있다. (물론 이슬람교에 대해 여기서 비로소 좀더 역사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에 대해 부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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