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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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리뷰 총점 8.8 (151건)
분야
인문 > 심리/정신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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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무기력과 자유,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풀어낸 에리히 프롬의 역저 평점10점 | m******1 | 2016.10.12 리뷰제목
다시 에리히 프롬에 빠진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계기로. 무기력의 반대는 자유. 프롬은 자유란 사실이기보다 가능성이라 말한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이라고 말한다.(60 페이지) 프로이트,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듯 인간은 타자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이를 프롬식으로는 인간은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는 말이 된다. 4년 전 ‘피로사
리뷰제목

 

다시 에리히 프롬에 빠진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계기로. 무기력의 반대는 자유. 프롬은 자유란 사실이기보다 가능성이라 말한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이라고 말한다.(60 페이지) 프로이트,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듯 인간은 타자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이를 프롬식으로는 인간은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는 말이 된다. 4년 전 ‘피로사회’란 책이 나왔었다. 이 책은 자기를 착취하는 피로사회에 대한 책이다.


프롬은 오늘날을 모두가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로 정의한다. 이는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하는 사회상을 지적한 말이다. 프롬은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프롬은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프롬은 오늘날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는 평등은 사실 칸트의 말대로 인간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평등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위인이며 결코 타인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 동등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평등은 우리 모두가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간적 존엄성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201 페이지)


프롬은 우리가 소속감, 팀워크 등으로 부르는 것은 실상 자신과 혼자 있을 수 없는 무능력이라 말한다. 프롬은 인간 본질이라는 말이 이용(착취 정당화, 침략 정당화 등)당한 과거를 언급하며 그럼에도 인간의 본질이란 말을 포기할 수는 없고 본질적 속성이라고 말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모든 속성과 그 이상을 포괄할 수 있으며 어쩌면 다양한 속성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보(進步)를 우리 의식의 꾸준한 성장으로 이해하는 프롬은 인간을 상수(常數)와 변수(變數)로 설명한다.


프롬은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과 달리 본능이 그의 행동을 주관할 정도는 아니고, 지능을 넘어 자신을 자각하지만 자연의 명령으로부터 달아나지는 못한다고 설명한다. 프롬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스토아학파, 스피노자 등을 결정론자라 볼 수 있지만 그들은 동시에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고 인간이 인간 현존의 지연적, 역사적 조건 안에서 최대의 자유에 도달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59 페이지)


종합하면 자유는 사실이기보다 가능성이며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이며 장애 및 조건과 투쟁하여 얻어내는 것이다. 프롬은 자유는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유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라 말한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하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프롬은 사회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자신만 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만든 거울에 빠져 죽는다는 말(65 페이지)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이다. 광기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의 상태라는 말(19 페이지)도 그렇다. 인간은 자각에 이르는 만큼만, 현실을 인식하는 만큼만 자유로워진다는 말(62 페이지)을 한 프롬은 같은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인간은 희망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을 더한다,(65 페이지) 정신적 인간이란 존재도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으면 비정신적 인간이라 말하는 프롬은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내적 조화의 체험이라 설명한다.


인간은 본질상 초월의 욕망을 품은 존재라는 말(70 페이지)도 그렇다. 프롬은 활동을 감정의 영역, 지적인 영역, 감각적 영역, 의지의 영역 모두와 관계된 것으로 풀이한다. 이런 다양한 영역들을 통합했을 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프롬의 진의이다. 프롬은 자발적 활동이 자유에 대한 질문에 해답이 된다고 말한다.(자발성 즉 자유는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인 소극적 자유와 다른 것이다. 이런 소극적 자유만 있으면 고립되고 만다.)


프롬은 자발성의 두 요소로 사랑과 노동을 든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자아가 다른 사람 속으로 녹아 버리거나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다. 또한 노동은 인간이 창조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노동이다.(81, 82 페이지) 프롬은 자발성을 그 이전에 누구도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말한다,(87 페이지)


프롬은 점점 더 많은 사실들만 기억하면 결국 진리를 깨달을 것이라는 비장한 미신을 섬기는 사회를 비판한다.(95 페이지) 프롬은 현대인의 특징으로 냉소주의와 순진함의 결합이라고 말한다.(98 페이지) 프롬은 현대인들은 감정, 사고에서 뿐 아니라 소망에 대해서도 독창성이 결핍되었다고 말한다, 프롬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100 페이지)


프롬은 나라는 존재가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묻는다.(103 페이지) 프롬은 현대인의 행동 동기인 자아는 사회적 자아로서 타인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 연기를 하는, 그가 맡은 객관적 기능의 주관적 위장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자아라고 설명한다.(109 페이지) 어빙 고프먼의 '자아연출의 사회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 구절이다. 프롬은 최면술사에 의해 주입(암시)된 생각을 자신의 고유의 것이라 착각하는 피실험자의 실험을 소개하며 이는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 설명한다.


특정한 조건하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주입된 것이라는 의미이다.(120 페이지) 프롬은 미적 판단에서도 그런 점(비자발성)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김영민 교수의 ‘진리 일리 무리’에 수록된 제 6장 ‘가벼움에 대해서: 앎. 느낌. 기법. 해석‘을 참고하면 좋다. 상술할 수는 없고 내용 중에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는 말 정도를 하고 싶다. “나의 것 중의 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밀(私密)한 느낌마저 나를 벗어나 표준화된 길을 좇아 움직이는 것이 오늘의 감성 현실이다.”(229 페이지)


프롬은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지의 여부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127 페이지) 프롬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심을 했다고 믿지만 고립을 염려해 남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는 현대인들의 특징을 언급한다. 프롬은 인간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지 이해한다면 스스로 결심을 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관습을 지키거나 의무감이나 아주 단순히 압박감에서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깜짝 놀랄 것이라 말한다.(135 페이지)


프롬은 자아감은 스스로를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감정, 나의 결정, 나의 판단, 나의 행위의 주체로 느끼는 데에서 탄생한다고 말한다.(142 페이지) 현대인이 깊은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익명의 권위에 의지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자아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럴수록 더 무력감을 느끼고 순응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143 페이지) 프롬이 파악하는 현대인은 본질적으로 무력감을 인식하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프롬에 의하면 극단적 무력감은 대부분 신경증적 인성에서 발견된다. 물론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무력감은 발견된다. 무력감은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매우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인성 구조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에 매달린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자신은 그 결과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무력감을 의식하는 사람도 정신분석을 통해 그렇게 의식하는 부분이 전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무력감에 동반하는 깊은 두려움 탓에 아주 약화된 형태로만 무력감을 의식하는 것이다. 단순하지 않은 것은 과보상(過報償)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되는 무력감의 경우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은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이를 가짜 활력이라 하지만 진짜 활력과 가짜 활력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가짜 활력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비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것들에까지 확장된다. 무력감은 통제, 권력에 대한 소망 등으로 나타난다. 통제, 권력에 대한 소망이 무력감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프롬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약화된 형태로라도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신분석 의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70, 171 페이지) 이 경우 환자가 자신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없다고 믿듯 그런 의사 역시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런 의사의 직업적이며 의식적인 낙관 속에는 깊은 불신이 숨어 있다.


프롬은 정신분석 이론이 단순화된 탓에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정신분석이 세 살 때 엄마에게 맞았거나 다섯 살 때 오빠에게 놀림을 당했기 때문에 무력해졌다고 믿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158 페이지) 아이가 근본적으로 어른이 자신을 유념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느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성장(175 페이지)한다면 아이는 무력감에 빠져 상당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사례(세 살 때 엄마에게 맞았거나 다섯 살 때 오빠에게 놀림을 당한 것)가 일회성의 특별한 경우(물론 이런 사례도 몇 차례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인 데 비해 근본적으로 어른이 아이를 유념하지 않으며 아이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을 하는 상황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일 것이다. 정신분석(심리치유 포함)이 있기에 가능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정(양육)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은 이런 극단적인 사례들은 개인적인 상황이 원인일 수 있겠지만 그 뿌리는 사회 전체와 그 사회가 결정하는 정신적 상태라고 말한다.(176 페이지) 프롬(뿐만이 아니지만)은 현대 사회를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능력에 바탕을 두고 평가하는 사회로 파악한다. 사회적 위치상 무력한 사람은 무기력을 보상하는 심리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강하고 우월하다는 느낌을 가지려 한다.(178 페이지)


이런 사회에서 어른은 진정으로 바라고 노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며 성공도 실패도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는 말을 듣는다.(178 페이지) 맥락이 다르지만 이런 상황을 두고 이해인 시인의 ’사랑‘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문 닫아도 소용 없네/ 그의 포로 된 후/ 편히 쉴 날 하루도 없네..” 아마도 수녀(修女) 시인인 이해인 님은 신(神)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를 삶이라 바꾸어보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편히 쉴 날(문제 없는 시기)이 하루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유용하지만 슬픈 현실을 드러내는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프롬의 다른 책들(‘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이 그렇듯 정신분석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 책이다. 프롬이 무기력을 길게(짧은 200여 페이지의 책이지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정신분석이란 이론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프롬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마르크스, 스피노자, 베르그손, 칸트, 밀 등과 함께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라(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라) 본 사람이다.(60 페이지)


하지만 프로이트는 오랜 동반에도 불구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다. 프롬 역시 정신분석 전문가이지만 그는 정신분석의도 무기력하고, 직업적이며 (환자를 고칠 수 있다는) 의식적인 낙관 속에 깊은 불신을 숨길 수 있다는 점 등을 폭로(?)했고, 정신분석이란 것이 유치한 외상적 기억이나 어떤 다른 원시적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여는 것이고, 내 안의 온갖 비이성적인 면을 향해 끊임없이 나를 열어 마침내 나의 환자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33 페이지)을 했다.


참 따뜻하고 호감이 가는 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바슐라르나 세 명의 기쁨의 철학자들 중 니체를 제외한 베르그손이나 스피노자에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물론 나는 그의 주옥 같은 책들을 많이 읽지 못했다. 그렇기에 천착(穿鑿)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분야가 다르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약한 것은 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믿게 될수록 무기력은 더욱 심한 압박감으로 다가온다.(179 페이지) 프롬은 선(禪)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사실 내가 읽은 그의 첫 책이 ‘선(禪)과 정신분석’이다. 지금은 대의(大義)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당시는 내가 그가 윤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관심을 둘 만한 문제의식이 없었다. 프롬은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면 특수한 정치경제학이 필요하고, 개인의 인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면 정신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79, 180 페이지)


카렌 호나이의 ‘내가 나를 치유한다’, ‘자기분석’, ‘우리 시대는 신경증일까?’ 등을 읽을 필요가 있겠다. 프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을 믿지만 그것은 이미 미친 사람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혼동이라 말한다.(185 페이지) 프롬은 약간 어려울 수도 있는 이런 말을 한다. 누군가 장미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 장미를 본 것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대상을 보면서 자신들이 본 것이 장미라는 개념에 해당하며 그런 이유에서 장미를 본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프롬은 순수한 개념적 인식으로서의 나무는 개성을 갖지 않으며 그저 나무 종(種)의 한 가지 사례, 추상(抽象)의 대변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반대로 완벽한 인식의 경우에는 추상이 없다. 이 경우 나무는 완벽한 구체성과 더불어 유일성을 간직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프롬에 의하면 그런데 우리는 구체적 사람에게서 추상을 본다. 그 이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189 페이지)


프롬에 의하면 우리는 투영(投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미지를 왜곡한다. 이는 프롬의 말대로 불교에서 말하는 3독(탐진치)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탐욕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분노가 강요하는 대로, 우리의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한다.(190 페이지)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보는 것은 그를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의미이며 이는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프롬은 감탄의 능력을 강조한다.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또한 집중력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아경험의 능력을 강조한다. 프롬은 갈등을 감탄의 원천으로 본다.(199 페이지) 개인적이고 우연한 갈등도 있지만 인간 실존에 깊이 뿌리내린 갈등도 존재한다. 이는 동물적 왕국에 속해 있으면서 우리의 의식과 상상력과 창의력을 통해 이 왕국과 본성을 초월하는 사실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다. 프롬은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201 페이지)


이 말은 참된 인식은 자기 부정의 연속이라는 말(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09 페이지)을 연상하게 한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202 페이지)... 이렇듯 감동적인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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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현대인에게 너무 좋은 말들 그리고 끼워팔기 평점6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4****6 | 2016.09.07 리뷰제목
에리히 프롬의 글을 사랑의 기술 밖에 읽어보지 못한 독자이고 그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한적은 없었다현대인에 무기력에 대한 제목에 끌려서 읽었다표지엔 에리히 프롬이 지었다고 적려있고 국내엔 미발표작이라고 적혀 있는데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에리히 프롬이 해외에서 발표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라는 책을 국내에서 번역한거라 생각했는데다 읽어보니 그것은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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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글을 사랑의 기술 밖에 읽어보지 못한 독자이고 그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한적은 없었다

현대인에 무기력에 대한 제목에 끌려서 읽었다
표지엔 에리히 프롬이 지었다고 적려있고 국내엔 미발표작이라고 적혀 있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에리히 프롬이 해외에서 발표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라는 책을 국내에서 번역한거라 생각했는데

다 읽어보니 그것은 아니었고 라이너 풍크가 엮은것을 번역한 것이고 에리히 프롬은 이런 착을 발간한적이 없다 그런제 그걸 발간한척 속이고 겉에는 엮은 이도 적지 않은 사기다

책안에 설명되어있듯이 일곱가지를 엮었고 그중에 두가진 국내 발간된 책에 소개된내용이다

제발 출판사는 잘 명시하고 정직하게 책팔자 화가 나서 환불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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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서평]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평점10점 | c******d | 2016.08.23 리뷰제목
무기력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 너무 많은 일들을 해야 했었고 바쁘게 지내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과 마음 여기저기 들끊는 짜증에 서서히 지쳐만 갔다. 문득 이런 생활은 다신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것은 곧 잘 지내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언제 지쳐 쓰러질 지 모르는 상태임을 모르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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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 너무 많은 일들을 해야 했었고 바쁘게 지내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과 마음 여기저기 들끊는 짜증에 서서히 지쳐만 갔다. 문득 이런 생활은 다신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것은 곧 잘 지내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언제 지쳐 쓰러질 지 모르는 상태임을 모르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이름만으로도 정신이 번쩍드는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진짜 삶이 무엇인지 철학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작지만 묵직한 책으로 국내 미발표작이다. 누구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잘 살고 있는 것은 맞는지. 그 물음의 끝엔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좋아하는 것을 쫓아 살라고. 그리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삶의 여유를 찾으라는 말이다. 


이 책을 읽어면서 놀라웠던 것은 이 책을 발표한 시점이 1930년대인데 현재 우리들의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특유의 예리한 통찰력과 현대인에 대한 이해력이 밑받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로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반대로 현대인들은 소모적인 삶과 깊은 무력감에 빠져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왜 삶은 더 나아지고 높은 성취를 이뤘지만 무기력해지는 걸까? 스스로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내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몇 일전 다큐에서 본 여자분은 대기업에 다니면서 복싱을 배우게 됐는데 복싱을 하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복싱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원한 삶을 택해 도전하는 것이야 말고 진짜 삶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정해준 삶의 패턴은 쉽사리 무기력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건 어른이나 아이도 마찬가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살사 댄스를 잠시 배우기도 했고, 매년 걷기 대회에 참여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았을 때는 그 과정이 힘들어도 무료한 삶을 견디는 힘을 준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필연적으로 안고 가야 할 고독과 자유에 대해서 얘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린 자신만의 진짜 삶을 살기 위해 가슴 뛰는 일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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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평점8점 | b******o | 2020.09.01 리뷰제목
-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생명체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다. 전형적인 형태가 복종이나 권력 행사 혹은 마케팅 지향일 것이다. 마케팅 지향 관계는 시장에서 소비재를 교환하듯 지속적인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모든 문화는 질병에 대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갖는다. 새뮤얼 버틀러는 풍자 미래 소설 <에레혼Ereh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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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생명체이다.


- 타인과의 관계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다. 전형적인 형태가 복종이나 권력 행사 혹은 마케팅 지향일 것이다. 마케팅 지향 관계는 시장에서 소비재를 교환하듯 지속적인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 사실 모든 문화는 질병에 대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갖는다. 새뮤얼 버틀러는 풍자 미래 소설 <에레혼Erehwon>에서 그것을 멋지게 표현하였다. 그곳에서는 감기가 걸리면 우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우울하면 감기에 걸렸다고 말해야 한다.


- 우리는 영원한 소비자이다. 우리는 담배, 술, 강연, 책, 영화, 인간을 소비한다. 우리는 아이가 부모에게서 필요로 하는 사랑도 아이에게 필요한 신제품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는 엄청난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수동적 소비자이며, 젖병과 사과를 기다리는 영원한 신생아이다.


-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 데카르트는 자유의지를 더 나은 길을 알면서도 최악의 길을 가도록 우리는 유혹하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 우리는 존재를 추구하지 않고 소유를 추구한다. 많은 경우에서 소유가 존재보다 더 강한 현실성을 갖는다. 자신을 소유자로 소외시키는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일 뿐 인간 인격으로서의 자신이 되기를 중단하였다.


-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온전하게 완성할수록, 다시 말해 '자신을 더 잘 꿰뚫어볼 수록' 더 강해진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기본 계명이다.


- 사람들이 명소를 찾을 때도 실제로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사진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풍경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그 명소를 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 명소의 모사품이다. 어떤 사고의 목격자가 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신문이 보도를 하게 될 방식대로 그 상황을 보고 듣는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 직접 본 예술 경험, 직접 참석한 정치집회를 신문 기사로 접한 후에에 비로소 '실제'로 느낀다.


따로 감상을 남길 요량이 없어 읽으면서 표시해둔 부분을 옮겨적는 것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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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고 우울함에 빨려들어갈까 평점8점 | n********9 | 2016.08.23 리뷰제목
우울증과 무기력함혹은 과도하게 포장된 행동들.나를 포함한 많은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회사를 다닌 지 이제 갓 2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나는 스스로를 마주할 시간을 조금씩이나마 늘려가고 있다. 사실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곰곰이 살펴보니 나라는 존재는 내가 그러리라고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가치가 적은 것으로 들통났다. 단체의 일원
리뷰제목
우울증과 무기력함
혹은 과도하게 포장된 행동들.

나를 포함한 많은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회사를 다닌 지 이제 갓 2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나는 스스로를 마주할 시간을 조금씩이나마 늘려가고 있다. 사실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곰곰이 살펴보니 나라는 존재는 내가 그러리라고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가치가 적은 것으로 들통났다. 단체의 일원으로서든 오롯한 개인으로서든,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지나, 실제로 그 속에 속해있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는 인생의 목표와도 같은 입사의 관문까지 지나오고 나니 허무감은 당연히 느껴진다. 그렇게 많은 길을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데, 결국 달려오고 나니 남는 것은 지친 영혼과 그걸 달랠 강인한 자아조차도 부재한 '나'였다. 꼬박꼬박 들어와 감사했던 월급조차 익숙해지고 나니, 이 월급이 나의 '과거에 대한 친절한 보상'이 아니라 충실히 회사의 한 일원으로서 기능을 다하라는 '미래에 대한 압박'과 같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함께한다, 라는 말도 참 좋으면서도 위험한 말이다.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항상 누군가들과 함께였기에 즐거운 추억들은 많이 남기는 했는데.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쓸모 있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하는 말들과 생각들을 들여다보니, 진짜 나의 뇌가 만들어낸 창의적인 의견이 아니라, 어디선가 들었던 말들을 그냥 되풀이할 뿐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함께라는 것이, 온전한 나로서 다른 이들과 한 공간에서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함께'라는 것에 녹이고 그 함께를 나처럼 투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적으로는 무기력해지고 움직임은 과해졌다.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스스로를 바쁜 스케줄로 괴롭혔다. 그럼으로써 나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만은 않았던 듯싶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그렇게 외적인 압박으로 무언가를 이루지 않고서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무기력해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만나게 됐다. 사실, 아무래도 철학적인 이야기가 가득해서 그다지 읽기 쉽다고는 말 못 하겠다. 절대로 독자에게 친절한 투는 아니다. 같은 장을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얇고, 마치 타로점을 보는 것 마냥 하나하나 내 얘기인 것만 같아 힘겹게나마 다음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신이 무기력한 이유는 '남이 바라는 나'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용감하게도 나의, 우리의 치부를 드러낸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나도, 즐겁게 여행을 다니는 나도, 사교 활동을 좋아하는 나도 사실 진짜 나가 아님을 말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우리는 평등의 개념을 사회에 잘못 적용했다. 차별받지 않고 개인의 자유 의지를 표현하는 평등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아지는' 평등을 우리도 모르게 추구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할 것 같은 모습 그대로를 나에게 투영하고, 그게 진짜 나라고 생각하며, 정말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를 서로에게 투영하면서 '잘못된 평등'을 계속해서 되풀이해간다.


요즘 돌아보면, 사람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감정'이라는 것에 기반한다고 느껴진다. 동물들은 강한 자에게 당연히 고개를 숙이며, 먹을 수 있는 것이 눈 앞에 등장하면 망설임 없이 입을 댄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강한 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약한 자를 보며 강한 자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으며, 아무리 눈 앞에 먹을 것이 있다고 해도 먹기에 부적절한 상황이라면 먹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느낄 때' 비로소 진짜 '나'가 된다.


에리히 프롬도 같은 이야기를 주장한다. 우리는 감탄하는 법을 잊었다. 그저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세상을 판단하려고만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 기계와도 같은 존재가 된다. 나무를 보면 그저 '이것은 나무다'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으며, 완두콩이 굴러가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고 생각하며 굴러가는 완두콩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단지 아이들의 행동 양식만이, 진짜 인간으로서, 무기력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처럼 세상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놀라워하고, 눈길을 주는 것이야말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판단하기 이전에 경험하고, 분류하기 이전에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나다. 


그리고 진짜 나를 되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기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역동적인 삶의 물결 위에서 그 울렁임을 느끼고 맛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등한 것처럼 보이고 똑똑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넓어지고 연결 고리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개성을 잃어가고 암묵적인 '동일화의 압박'에 짓눌린다. 평등이라는 사상은 점차 균일화라는 무기로 뒤바뀌어 개인들의 외양은 물론이고 생각과 사상, 스스로에 대한 인식조차도 바꾸어 놓는다. 


개인들은 이러한 균일화된 단체 속에서, 자신의 의미와 경제적 가치, 기능적 가치를 찾으려 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찾은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역시 우리들의 고질적인 무기력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반응하는 나 자신을 빼고는, 사실상 우리의 모든 생각은 이미 누군가로 인해 심어진 생각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과 접점을 찾아서 정리한 내용들이지만, 아마도 모든 독자들에게 와 닿는 문장들이 서로 다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로서는 나의 얕은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나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기 위한 시도를 해볼 용기를 찾는데도 도움을 얻었다. 철학이나 심리학은 원래 정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던져주고 스스로를 깊이 살펴볼 기회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의미 있는 학문이니 말이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가지고 싶은 것을 갖는 데 쏟는다. 그런 행동의 전제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전제 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싶고, 어른이 되어서는 성공의 사다리에 더 높이 오르고 싶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싶고, 더 좋은 차를 사고 여행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 번씩 이런 악착핱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은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그런 의문으로 괴로운 것은 그저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원래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목표를 계속해서 좇아간다. 

- 100쪽,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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