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배경, 발음이 쉽지 않은 지명과 이름, 밀림, 원시 부족 등 라틴 문학의 냄새가 물씬 난다. 20세기 초반, 장소는 아마도 아마존일 것이다. 서서히 개발이 시작되고 밀림 개간을 장려했던 에콰도르 정부의 이주민 정책에 따라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노인 이름1))는 아내와 함께 고향을 떠나 밀림 개간에 동참한다. 노인의 회상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밀림까지 왔고 밀림의 원시 부족 수아르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이주민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야기 구조와 등장인물은 단순하다. 자연이 허락하는 범위를 초과한 개간사업을 조롱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는 재앙을 가져온다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담겨있다. 뻔히 작가의 의도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여전히 의미 있고 많은 독자들이 손가락을 치켜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화자가 노인듯하지만 제3자의 눈으로 묘사되는 점, 이야기 전개가 복잡하지 않다는 점, 배경이 미지의 세계인 밀림이라는 점, 기승전결이 분명한 이야기 구성이라는 점, 그리고 인간과 짐승의 대결구도라는 독특한 대립이라는 점이 아닐까.
노인은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이 원칙은 밀림의 원시 부족인 수아르족과 함께 생활하며 터득했기 때문에 그는 밀림이 경고하는 메시지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노인의 즐거움이 자연 속에서 야생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복선이 깔려있다. 바로 그가 ‘읽을 줄 안다’는 것 즉 노인이 문맹이 아니라는 점인데 노인이 수아르족으로부터 떠나 이주민 마을에 정착했다는 설정 자체가 작가는 노인을 문명인으로 이미 분류해놓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개발과 보존 사이의 경계, 원시와 문명의 경계에서 노인이 중재자 역할을 하게 만들어 놓았다.
어느 날 노인은 자신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읽을 것이 없었다.”(72p)
읽을거리를 찾아 잠시 도시로 나가본다. 노인의 취향에 맞는 장르를 찾았다. 바로 ‘사랑이야기’였다. 이후 노인의 가장 큰 즐거움인 연애소설을 읽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애소설을 탐닉한다. 닥치는 대로 읽어 댄다 라기 보다 한 단어씩, 한 문장씩을 곱씹고, 상상하고, 읊으면서, 잘근잘근 해체했다 조립했다 한다. 사랑은 만국 공통어다. 사랑 이야기에는 남녀노소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랑의 달콤함에 눈을 감는다. 아마 밀림도 사랑의 원칙대로만 움직인다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이주민 마을의 읍장으로 등장하는 ‘뚱보’는 자신은 배울 만큼 배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밀림의 원시 부족인 수아르족 등을 미개인이라 치부하며 굉장히 멸시한다. 읍장 앞에서는 ‘읍장 각하’라고 부르지만 마을 사람들끼리는 ‘뚱보’라고 부르며 겉으로는 비위를 맞춰주는 척 하다가 돌아서서는 읍장이 누군가의 손에 죽길 바란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의지하는 사람은 노인이다. 노인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마을 사람들은 신뢰 한다. 그러다보니 읍장의 눈에는 노인이 가시 같은 존재다. 뚱보 읍장이 악랄하고 교활한 인물이긴 하나 읍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문제해결을 하려는 것도 분명 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읍장의 모습이 때론 연민이 일기도 했다.
양키(이 책에서 백인을 양키로 묘사)들과 노다지꾼들이 밀림을 함부로 들쑤시고 다니고 정부가 밀림 개발에 박차를 가하자 서서히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위기에 닥친 마을에 읍장은 할 수 없이 노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작가는 재앙의 메신저를 살쾡이로 설정해 두었다. 살쾡이는 ‘고양이과’답게 영악하고 머리가 좋은 동물이다. 살쾡이 새끼를 건드린 양키 사냥꾼 때문에 암살쾡이는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기 시작하고 이 복수를 잠재우기 위해 노인을 중심으로 수색대가 파견된 것이다. 결국 노인과 암살쾡이의 1:1 결전에 이른다.
담담한 문체로 자연(살쾡이)과 인간(백인,개발자, 거대자본가 등)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뜬금없을 것 같은 연애소설 읽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을 데려다가 중재자 역할을 하게 한다. 지혜와 연륜의 상징인 노인과 인류의 모든 문제 해결의 답인 사랑(연애소설)을 통해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인간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나보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실제로도 행동하는 지성으로 불리며 환경운동 등에도 활약한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났지만 쉬우면서 잘 읽혔다.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고 감동을 선사한다. 매력적인 작품이다.
1) 노인의 아내 이름은 더 길었다.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
왜 이렇게 긴 이름을 쓸까? 그리고 작가가 이 긴 이름을 일부러라도 몇 번씩 쓴 이유는 무엇일까
여봉달, 혼자의 시간을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책 한 권 읽을 수 있었네요.
(1박2일로 아이 데리고 계곡 놀러 가준 남편에게)
살쾡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어른 살쾡이, 아기 살쾡이..
왕뱀이 등장하길래 찾아봤다.
오....王자를 그냥 붙인 게 아니었구나...ㅠㅠ
밀림은 무서워..
수 년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작가가 칠레 출신이지만, 피노체트 독재를 피해 도망하고,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결국엔 독일로 이주하며 살다가 발표한 첫소설인데,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다.
처음 읽을 때도 책을 놓지 못하고 한 번에 쭈욱 읽어냈던 기억이 있다. 어찌나 생생하고 정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던지...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동물들과, 그 동물들처럼 순응하고 사는 원주민들, 오로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개발의 대상으로만 아는 일명 문명인들의 부딪침 속에서 사건, 사고는 일어난다.
적도지방인 엘 이딜리오에 사는 노인 안토니오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젊어서 이 곳에 이주했지만, 말라리아로 부인을 잃고 혼자서 살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글의 원주민이라고 볼 수 있는 수아르족과 친구가 되고, 오랜 시간 그들과 함께 하며 정글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만, 또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그들과 헤어지게 된다. 두 달에 한 번쯤 마을에 들어오는 까칠한 치과의사 루비쿤도 로아차민은 노인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연애 소설을 원하는 노인에게 책을 구해다 주며 둘은 나름 친구가 된다. 엘 이딜리오에는 문명인의 대변인쯤 되는 거만하고 자존심 강한 뚱보 읍장이 있고,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고, 이곳에 사냥이나 개발을 위해 들락 거리는 백인들이 종종 있다.
사건은 수아르족이 동물에 찢겨서 죽은 백인의 시신을 정글에서 가져다 주면서 시작된다. 읍장은 수아르족의 행위라고 무조건 몰아붙이지만, 노인은 하나하나 시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근거있는 말로 설명하고, 시신의 짐까지 수색하여 암살쾡이의 짓임을 밝혀내고, 또한 암살쾡이가 왜 백인을 죽였는지도 알아내며, 암살쾡이가 인간 모두를 공격할 것임을 예견한다. 그리고... 수색대와 암살쾡이와의 싸움...
현기증을 느끼며 급히 몸을 일으킨 노인은 낫칼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었다. 언덕 위에는 암살쾡이가 꼬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마치 밀림의 미세한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작은 귀를 움직이는 짐승을 향해 소리쳤다.
"왜 주저하고 있지? 도대체 네놈이 바라는 게 뭐야?"
노인은 풀밭에 떨어진 엽총을 재빨리 집어 들며 손가락을 방아쇠를 갖다 댔다. 그 정도 거리면 실패할 확률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암살쾡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일순 그 짐승은 앞발을 들어 올리며 슬프고 지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또 다른 짐승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에는 수컷의 울음 소리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수컷은 암컷보다 몸집이 작았다. 그 짐승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통나무를 보호처로 삼아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뼈에 달라붙은 등가죽과 가죽 밖으로 드러난 살점을 보고 있는 사실 자체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네 놈이 원하는 게 이거였단 말이지? 나에게 끝장을 내달라고?"
그러나 암컷은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170p.~171p.
소설은 도저히 책을 손에서 놓게 만들지 않는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상상의 그림을 그리게 만들고, 숨막히는 노인과 암살쾡이의 대치는 생생하게 실감이 나도록 그려지고 있다. 노인은 인간이면서 자연이고, 글을 읽는 문명인이면서 수아르족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운 야만인이기도 하다. 그 어느편도 아닌, 중도에 서 있다. 예전에도 재밌게 읽었는데, 다시 읽는 맛도 어쩜 이렇게 재미있는지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명작은 끝까지 명작인가...
노인의 책을 읽는 자세, 책을 바라는 자세 또한 우리에게 독서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적자생존만이 있는 정글과 책이 전혀 안어울려 보이지만, 자연에 느리게 순응하며 사는 삶에 책이란 노인의 무료한 삶에 한 줄기 단비처럼 기쁨이 되고, 위안이 되어 준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45-46p
나는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지 돌아보았지만, 솔직히 일정치가 않다. 한 번에 밤을 새워서 스트레이트로 쭈욱 읽기도 하고, 부분부분 읽기도 하고, 떄로는 이 책, 저 책 궁금할 때마다 기웃거리기도 하고... 도대체가 일관성이 없는 나의 독서방법이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부분이다.
책이 귀하기에 노인은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며 음절음절을,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깨달을 때까지 읽는데... 나에겐 책이 너무 흔해서 일까, 도저히 노인의 방법을 따라갈 자신은 없다. 정글에서 노인처럼 느리게 읽는 방식,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체화하는 방식... 가끔은 따라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역시 그럴 자신은 없다. 아마 시험이나 과제작성 때문에 공부할 때 그렇게 해본듯... 노인의 책읽기 방식... 한 번쯤 돌아보고 따라해 보고 싶은 방식이다. 하지만 나의 책읽기 방식이 노인과 다르다고 해서 내가 책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책을 무지무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나인데... 음...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라고 나는 주장한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180p.
아마존의 정글과 연애 소설 읽기... 어쩌면 자연의 삶과 사랑하는 이야기... 바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얘기기에 전혀 안어울리는 게 아니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하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다 사람의 일이며 자연의 일이며 순리가 아닌가.
책의 전반에 걸친 노인과 암살쾡이의 대결 구도도 결국 자연의 일이다. 자연의 일에 방해를 하면 안된다. 자연의 일은 지구의 일이고, 지구의 일은 곧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지구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던 동시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고, 피비린내가 나지만 평화를 지향하는 소설... 몇 번을 읽어도 절대 손을 놓을 수 없는, 결과를 아는데도 중도에 접을 수 없는 마력과 매력을 지닌 정말 멋진 소설이다.
피노체트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가 망명하여,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떠돌면서 겪은 일들을 담은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http://blog.yes24.com/document/7948927>의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를 주목받게 만든 첫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었습니다. 무대는 페루에 인접한 아마존 유역에 있는 칠레의 엘 이딜리오이고, 주인공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노인입니다. 노인이 젊었을 적에 아내와 함께 엘 이딜리오에 도착하였을 때는 마을이랄 것도 없는 미개척지로 살아남기 위하여 홍수와 아마존 밀림의 엄청난 생명의 힘과 겨루어야만 했습니다.
결국은 지쳐 쓰러진 두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이 지역 원주민 수아르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그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로레스 엔타르나시온 델 산타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라는 긴 이름의 아내가 말라리아로 먼저 죽게 되자, 안토니오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고, 그곳에 남아 사라진 기억을 보듬고 살기로 합니다. 수아르족 틈에서 밀림생활을 하게 된 그는 수아르족이 아닌 수아르족처럼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밀림을 떠나 엘 이딜리오에 정착하게 됩니다. 어느 날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는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면서 연애소설을 탐독하면서 일상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노인의 독서방식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45-46쪽)”
밀림의 법칙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탐욕은 화를 부르고 말았습니다. 어린 살쾡이들을 몰살시킨 것입니다. 분노한 암살쾡이는 복수에 나서 새끼를 몰살시킨 양키를 죽였고, 나아가 밀림으로 몰려드는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엘 이딜리오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탈에만 급급하던 뚱보읍장은 날뛰는 짐승을 잡아야만 했습니다. 안토니오를 포함한 수색대가 짐승을 찾아 떠나고 결국에는 안토니오와 암살쾡이의 1대1 대결이 시작됩니다. 살쾡이의 살인행각을 살피던 노인은 짐승이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과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로 자신이 선택된 것입니다.
암살쾡이를 뒤쫓다보니 상처 입은 수컷에 이르게 되는데, 암살쾡이는 수컷의 목숨을 끊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수컷의 죽음을 애도한 암살쾡이는 다시 안토니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데, 안토니오는 수컷을 따라 가겠다는 의도로 읽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맹수와의 대결에서 한치라도 허점을 보인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정면으로 맞선 상황에서 노인은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습니다. 노인은 앞으로 나아갔고, 부상당한 짐승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노인은 한쪽 무릎을 꿇었고, ‘마치 거대한 화살처럼 강변을 달려오던 암살쾡이는 불과 네댓 걸음을 남긴 지점에서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차분하게 그 순간을 기다리던 노인은 짐승의 도약이 정점에 이르자 방아쇠를 당겼다. 일순 허공에서 도약을 정지한 듯한 짐승은 이내 몸을 비틀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178-179쪽)’ 저자는 두 생명 사이의 싸움이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극적인 순간을 세밀화처럼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는 노인이 책읽는 방식으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루이스 세풀베다작가의 코로나19 감염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놀라고는 있지만,정말 대단한 바이러스구나 싶다.그런데,며칠 후 책장을 정리하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 관한 스크랩글을 발견했다.<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다시 읽은 라는 계시(?)인가 싶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서 놀라게 된 건,당연히 이북으로 다운 받아 놓았다고 생각했었는데..이벤트로 다운 받은 거라 유효기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거다.그러니까 이 책을 전자책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은 4월까지였다.절묘한 타이밍이다.^^
다시 읽는 소설은 처음 읽을때 기록한 리뷰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그런데,<연애소설 읽는 노인>에 관한 기록이 없다.환경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다시 읽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나를 가장 화나게 한 건 환경을 인간 욕심대로 하는 것도 이유였지만,'뚱보'로 불리는 독재자 같은 읍장이 아니었나 싶다. 전형적인 권력형 정치인의 모습...인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인 듯 하다. 나라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정치놀음만 하고 있는..짓들을 보고 있쟎니..뚱보가 하는 행동과 말들 하나하나가 오르는 화를 참아야 했다. 엘 이딜리오 아마존 밀림의 작은 마을이다.수아르족이 있고,수아르족에게서 밀림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 노인,안토니오(이름이 너무 길다)노인이 살고 있다.그리고 예상할 수 있듯,이 밀림으로 노다지 꾼들과 밀렵꾼,백인들이 호시탐탐 군침을 흘리게 되는 곳...어느 날 백인이 시체로 떠오르게 되고,그것이 실은 동물이 인간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인간이 먼저 동물을 공격한 것에 대한 댓가였음을..그러나 마을엔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사람에 적개를 품은 살쾡이를 죽여야하고,,여기에 뚱보와 노인 그리고 나머지 일행이 찾아 나서게 되는데..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아는척 하는 뚱보 때문에 계획대로 되지 않고..뚱보 역시 몸과 마음이 지치다 보니,자기의 마음이 노인의 마음과 같은 줄 착각하며 현상금을 조건으로..내건다.그러나 노인은 저들과는 다른 마음으로 살쾡이와 마주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현상금 제안에 노인의 속마음은...희생자로 보이는 이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는 다는 고백을 하기 때문이다.결국 암살쾡이는 노인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지만..그럴수 밖에 없었던 노인은 살쾡이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보내준다. 소설 중에서도 '사랑'을 주제로 한 '연애소설'을 애정하는 감정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자연을 어떤 대상으로 노인이 바라보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밀림은 정복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함께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면 좋을텐데 말이다.
ps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읽게 되었던 <연애소설 읽는 노인> ..오늘(4/17) 사망 소식을 듣게되었다.
2013년 들어 처음 읽었던 책이다. 왜 이 책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다. 당장 읽지도 못하면서 책의 유혹에 넘어가 일단 무참히 지르고 마는, 아주 몹쓸 버릇을 가지고 있으니, 이 책 역시 언젠가 강렬한 유혹에 넘어가 구입한 후 고이 모셔두고 있었으리라.
지금 돌이켜보면 2013년 1월은 절망과 한숨으로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절망한 많은 이들이 스스로 생을 접는 기가 막힌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지 않았나. 그럼에도 이른 바 주류 언론을 비롯한 권력에 눈이 먼 모리배들은 그 누군가를 찬양하기에만 급급했다. 구역질이 나 티브이나 신문을 거의 보지도 읽지도 않았다.
그런 암담한 순간에 왜 이 책을 집었을까. 이 책에서 과연 어떤 희망을 찾고자 했을까.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재앙으로 자연이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으로 나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작품은 간결하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이 전해주는 울림은 그 어떤 두꺼운 책들보다 강렬하다. 인간이 자연을 외면하고 착취하기만 한다면 결국 공멸을 면치 못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이 책은 때문에 두고두고 고전의 대열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저자의 언어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혹자는 그의 언어를 “예술적으로 정직한 언어”라 표현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묘사하는 능력과 여기에 뛰어난 감수성까지 더해져 소설을 읽는 진정한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아마존 밀림의 어느 마을 엘 이딜리오. 이곳은 개발의 붐이 밀고 들어와 원주민과 동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만든 정착촌이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들어온 노다지꾼들과 중무장을 하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냥을 일삼는 밀렵꾼들이 설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살고 있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그 역시 젊은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아내와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선전과 다르게 마을은 척박한 황무지와 밀림뿐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결국 병으로 아내를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게 된다. 그러던 중 아마존의 원주민인 수아르족과 함께 생활하며 차츰 그들의 삶과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했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은 때론 무자비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보듬어주곤 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고, 호세 역시 이를 따르게 된다.
어느 덧 나이가 들어 삶의 마지막 여정을 밟고 있던 그는 나날이 파괴되어 가는 마을을 안타까워하며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1년에 두 번 찾아오는 치과의사가 전해주는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며 말이다.
하지만 어리석고 잔인한 인간은 자연을 더욱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 비극을 부르고 만다. 밀렵꾼인 양키에게 새끼와 수놈을 잃은 암살쾡이가 인간 사냥에 나선 것이다. 시체는 점점 늘어만 가고, 결국 호세 노인은 그 슬픈 복수를 막기 위해 밀림으로 향한다.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싸움을 위해서.
최근 어느 방송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아나콘다, 식인 물고기, 백상아리 등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지만 정작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잔인한 동물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바로 우리들이다.
개발은 언제나 아름다운 수식어로 포장된다. 그리고 그 개발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될 찬란한 보상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로 인해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는 자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지난 MB정권은 국민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분명히 느끼지 못하는 와중에 온 나라의 강들을 파괴해버렸다. 대운하에서 4대강 정비로 이름만 바꾼 채 말이다. 그 후과가 어떻게 이어질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니,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재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작품은 선악의 구분이 명확하다. 자칫 현학적인 언어로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악에 대해 강렬한 분노를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악은 당연히 ‘양키’이다. 암살쾡이를 쫓던 호세 노인은 양키에게 총을 맞아 죽어가는 수놈 살쾡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고통을 끝내주며 말한다.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 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 놓고 만 거야.”
지금 이 순간 하나 뿐인 지구를, 아름다운 자연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수많은 생명들의 삶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진보라는 허명으로, 발전이라는 오만으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 하고 있을까. 착취 이외엔 도무지 다른 것을 생각해낼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미개한 종족일까.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 대신, 오직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며 그렇게 삶을 마무리해 가고 있던 호세 노인이 자신의 새끼와 짝을 잃은 암살쾡이와 만났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과연 암살쾡이의 죽음이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작품은 비장하고도 가슴 아프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오두막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승자라고, 암살쾡이가 패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더럽고 추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탐욕과 돈이라는 괴물에게 영원한 저주를 내릴 뿐이다.
문명의 발전을 통해 인간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만큼 인류가 진보했다는, 인류의 삶이 행복해졌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과거를 살았던 이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확신을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지금의 우리는 행복할까?
제2의 새마을 운동을 외치며 당선된 지금의 대통령은 마치 아빠가 했던 것처럼만 하면 우리나라 경제가 70년대 발전 속도로 휙휙 살아날 것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자신이 ‘묻지마’ 식으로 뽑은 주위 인물들이나 다시 한 번 잘 살펴야 할 처지지만. 아무튼 그가 만약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나 대통령에게나 그리고 이 강산에도 재앙이 될 것이 빤하다.
스테판 에셀이 외쳤던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장’을 주문처럼 외쳐선 안 된다. 대신 ‘지탱가능한 성장’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더 양심적이고, 또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다. 결국 이 땅과 강과 바다가 사라진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속이 빤히 보이는 역겨운 자연보호 캠페인보다는 세풀베다의 감수성과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이 작품을 한 번 읽는 것이 백배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지금도 공멸로 가는 기차를 타고 무섭게 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 내가 2013년 새해 벽두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방금 떠올랐다. 저자는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 투사였다. 그리고 나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 때, 그러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아름다운 코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