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일간의 방구석 여행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읽고
길고긴 장마가 끝나자마자 불볕더위가 기승을 피우고 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피서(避暑)하고 싶다가도 늘 그렇듯이 피서(避書)만 한 게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때마침 8월 북클러버의 주제가 ‘여행’이라서 어떤 책을 읽을까 하며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 자문자답해본다. 수많은 여행기 중 으뜸을 꼽으라면, 과연 어떤 작품을 선택할까? 18세기 초에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한데, 18세기 말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라는 작가가 쓴 여행기(의 제목부터)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가 여행한 장소는 걸리버처럼 소인국도, 거인국도, 날아다니는 섬도, 말들의 나라도 아닌 '자기만의 방'이었다. 무려 42일간의 일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담은 책 <내 방 여행하는 법>을 펼쳐본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제목에 반해 작가가 변죽만 울리다 마는 내용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군인이자 작가이며 화가인 저자의 이력이 고스란히 묻어난 글이 독자로 하여금 방구석 여행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책은 그의 방구석 여행기이자 ‘가택연금기’라고 볼 수 있다. 1790년에 모 장교와 결투를 벌인 대가로 당대 법률에 따라 42일간의 가택연금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기 방 여행에 관한 글을 쓸 계획이었던 그에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여행을 시도할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준비할 건 별로 없으나 ‘상상력’ 하나만큼은 꼭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무료해져서 책을 덮게 될지도 모른다.
로마와 파리를 보고자 그 먼 길을 수고스럽게 떠났던 여행자들을 비웃으며 우릴랑 하룻길 조금씩 가자! 우리를 가로막을 게 무언가. 우리 자신을 기꺼이 상상에 내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가면 될 것을.(16쪽)
당시 법과 관습이 신체의 자유는 제한하였을지언정 그의 정신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저자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유(思惟)와 회의(懷疑)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 자유자재로 방을 날아다닌다. 이를테면 그가 방 안에 놓인 탁자와 의자에 머물며 편지를 쓰고 보관해둔 편지들을 읽으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이따금 나도 그러하다는 생각에 예나 지금이나 편지글이 주는 위로와 공감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또 침대에 누워 창밖의 풍경을 예찬하기를 넘어 ‘침대란 어머니의 산고 끝에 아이가 태어나고, 길고도 짧은 잠을 거듭 자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곳’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저자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방에서 지내는 일을 군대의 숙영(宿營)에, 어느 날 의자에서 넘어진 것을 역마차가 전복되는 사고에 빗대어 위트 있게 표현하기도 한다.
책에는 저자가 화가로도 활동해서인지 유독 회화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대를 오가는 길 위에서 벽에 걸린 미술작품들을 보며 자신의 견해와 그림에 얽힌 경험담을 들려준다. 회화와 음악이라는 두 예술 장르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 논하는 부분에 이르러 그의 목소리는 최고조에 달한다.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줬는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으리라. 미지의 독자가 이 책을 읽고 그의 주장을 반박해보는 일도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 같다. 여기서 저자가 내놓은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독자는 자기 자신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 말고 자신 있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다른 그림이나 광경을 알고 있는가?(112쪽) 정답 역시 책에서 직접 확인하면 좋을 듯하다.
과연 그는 무사히 42일간의 방구석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였을까? 책을 덮으며 무대와 객석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 즉 ‘제4의 벽’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모노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생각만 늘어놓는 일방통행이 아닌 독자에게 말을 걸고 또 궁리하게 만드는 작가의 문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과 발견의 거리를 제공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가 적어도 나에겐 적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는 주제로 요즘 유행하는 너튜브 브이로그를 진행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잠시 해본다. 어쩌면 이 책이 다른 독자에게는 무료함을 이겨내기 위한 저자의 몸부림 혹은 일종의 정신승리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 ‘여행은 발견’이지 않는가. 익숙함을 떠나 낯섦과 조우하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자기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나를 찾아내기도 한다. 저자 또한 자기 방 안에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으며, 그 기록을 다음 여행자를 위해 남겨둔 것이 바로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42일간 집에서만 지내면서 방, 그림, 하인, 개 등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처음에는 의자, 침대 뭐 이런 얘기가 나오다가
충성스런 하인과 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중간에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오고
(귀족으로서 옛날을 그리워하는...)
중간중간 애인에 대한 얘기도 나오고
(ㅇㅇㅇ부인이라고 하고, 남편 이야기도 나오는걸 보면 불륜인 듯)
영혼과 동물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온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동물성(타자)는 책장을 넘기지만
영혼은 안드로메다를 여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
저자도 자주 그러는 듯.
저자는 가택연금 때문에 쓴 글은 아니라고 하지만...
가택연금 아니었으면 안 썼을 것 같다.
귀족이고 집도 크고 방도 크니까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우리집 같았으면... 물론 물건이 잔뜩 있으니까 하나하나 쓰면 42장 정도야 가뿐하게 채우겠지만...
하도 못 움직여서 나중에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귀족들의 생활과 생각 등을 알 수 있었다.
밀턴의 <실낙원>과 단테의 <신곡>이 문제야...
가택연금을 받은 이유는 프랑스혁명 때문이 아니라
당시 불법이었던 결투를 벌였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혁명때문에 집에 못 가고 결투를 한 거겠지만...
역자 후기가 아니었다면. 아마 좀 더 심도 있게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유쾌하면서 진지한 방에 대한 개인 성찰' 이라고만 생각했을 것 같다. '군인과 작가 말고도 또 하나의 길이 있었으니 바로 화가' (역자후기, p180) 라 했던 말을 생각하면서 한번 더 읽어보니, 뭐랄까 그래서 그림 이야기나 예술적 생각이 꽤 담겨진 문장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잠시간 고개를 끄덕여보게도 되었다. '자전적 산문' 을 읽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가웠다. 특히 '방' 이라는 공간과 '여행' 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더욱더.
(그런데 왜 분홍색 표지였을까 싶은 여전한 궁금증이...)
초반부터 극공감이라 무르팍을 탁 쳐 버리고 말았다. 집이라는 공간, 특히 집 곳곳의 '방' 이라는 사면이 막힌 공간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삶이란, 그 방에서의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의 인생이란, 얼마나 매력적이던가.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도 행복할 것' 을 작년부터 모토로 삼고 바야흐로 집콕시대를 견뎌내는 중인 나로서는, 아니나다를까, 이 말에 눈이 번쩍, 고개 끄덕, 마음이 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돈이 한 푼도 들지 않는다' 는 건 정말이지 사실이 아닌가! 하하하...
무엇보다 돈이 한 푼도 들지 않는다는 점을 이 여행의 미덕으로 꼽고 싶다. 눈여겨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넉넉지 못한 사람들은 그 점을 높이 치고 반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부류에 속하지만 돈이 한 푼도 들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에 더 환호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누구냐고? 누구긴, 바로 부자들이다. 병약한 이들에게도 안성맞춤인 새로운 여행법이 아닐 수 없다. 날씨와 기후의 변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여행법은 소심한 사람에게도 좋은데, 도둑을 만날 걱정도 없고 낭떠러지나 웅덩이를 만날 걱정도 없기 때문이다.
내 방 여행의 좋은 점
초반부터 너무 극공감;
그러나 '방' 이라는 공간, 그건 어떤 면에서는 좌절과 고통을 앉길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틀어밖혀서 은둔자로 외부든 내면이든 모두 단절된 채 생활할 수도 있을 '방'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작가의 '판화' 이야기를 지켜보며 그런 상상을 해 본다. 방은 누군가에게 절망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자신밖에는 없다는 것, 그러니 방은 죄가 없고.... 그 방에서 잘 살아내려는 노력을 해야 할 뿐이고...... (계속 '방' 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읽다 보니 드는 생각들)
단테의 '신곡' 에 등장하는 우골리노 백작이 그 자식들과 함께 굶어 죽어 가는 모습을 담은 판화다. 절망이 극에 달했을 때 나타나는 무시무시한 적막 속에서 그와 그의 자식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겪고 있다.
판화들 중 판화그림과 함께 작은 각주로 달린 이 문장이 유난히 .... 떠오른다.
'지옥고' 가 현실이긴 하니까. (지하실, 옥탑방, 고시원)
작가만의 독특한 필력과 생각이 담긴, 그런 산문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내 방 여행하는 법' 은 '내 방을 여행하는 법' 이라는 BTS 의 노래와도 묘하게 매칭이 되는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해 보며...
이 방은 너무 작지 그래 나의 꿈을 담기에
침대 그 위로 착지 여기가 제일 안전해
어쩜 기쁨도 슬픔도 어떤 감정도 여긴 그저 받아주네
때론 이 방이 감정의 쓰레기통이 돼도 날 안아주네 또 나를 반겨주네
사람들 같은 내방 toy들 마치 시내를 나온 듯이 북적여
TV 소리는 생각은 생각이 바꾸면 돼
여긴 나만 즐길 수 있는 travel
낙관적으로 채워봐, I’m full
나는 오늘도 '집' 에서 잘 지낼 것을, 그리고 그 집 곳곳, 많은 시간을 보내는 주방이라는 공간에서, 그리고 그 옆에 식탁 위에서 이 글을 쓰면서도, 오늘은 어떤 방을 청소하나 그 생각을 하면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여행하듯 보내려 한다. BTS 가 이야기 해 주듯, '낙관적으로 채워봐' 라는 생각으로.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말해주셨듯. '그런 다음에는 다시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찾아 떠났다 (p 147, 서가) ' 라고 했으니, 나는 이제 이 글을 마치고 곧 책장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된 그 방으로 여행을 떠나야겠지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요 몇년 간 할 수 있었던 최선이고 최대의 '여행' 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