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소립자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저자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대담집 “공공의 적들”을 보고 저자에게 관심이 갔다. 어떤 작품이 있을까? 그래서 첫 번째로 고른 작품이 소립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머지 작품을 다 살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다. 대담집에서 레비와 그는 대중에게 위고처럼 사랑을 받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위고처럼 사랑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너무 개성이 강한 이 두 사람이 생산하는 글과 생각들은 대중들 논란과 찬, 반으로 나누어 버리기에. 특히 저자의 글은 항상 논란을 몰고 다닌다.
형이상학적 돌여변이로 생물학자 미셸(제르진스키)와 이복 형 브루노의 일대기라고 해야 하나. 이 형제들의 삶, 다른 성격들 양극단에서 존재하는 것 같은 이들. 왜 이들은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환경의 문제이며 유전적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그들의 공통적인 엄마는 시대에 앞서가는 사람이었기에 모든 것에 도전한다. 특히 성적인 부분에서. 그렇다고 이 책을 성이야기로 도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현대과학과 지나친 성에 대한 경고를 던진다. “사심 없는 연구활동 기간 중에 획득한 지식을 비열한 방식으로 영리화함으로써 단기간에 상당한 재산을 모은 자” 이들은 현 사회에서 영웅으로 우뚝 솟고 있다. 그리고 매체는 성공이란 신화와 그에 취해 자신도 누릴 영광을 위해 추종하는 이들이 존경이란 섬김으로 이들을 더 높인다. 성의 환상 속에서 방황하던 브루노는 마침내 성의 기쁨에 눈을 뜨지만, 이 기쁨은 잠시 사랑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브뤼노의 탄생과 엄마와 함께 한 짧은 시간의 그의 성장이 일생을 지배한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는 그에게 성적 욕구에 대한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과 자신에 대한 자신의 부족이 만든 지속적인 성의 추구와 집착을 남겨주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미셸에게는 할머니가 있다.
평생토록 오로지 헌신과 사랑으로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 자기들의 삶을 말 그대로 남에게 바친 사람들, 그러면서도 전혀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 헌신과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남에게 바치는 것 말고는 삶의 다른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여성이었다.
같은 여인이었지만, 너무나 다른 삶을 산 엄마와 할머니, 그들에 때문인지 너무 다른 이복형제가 된다.
개인의 통상적인 행동과 자유 의지에 따른 일탈행위 흔히 사랑과 성의 집착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을 잊으려는 것은 아닌가 삶은 하루하루 죽음으로 맹렬히 돌진해 나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이미지 만들기와 죽음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불안한 징후다.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는 자아, 자아란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신경증바다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건질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삶은 그렇게 달랐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그들 몸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둘 다 똑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세월 그 자체가 파괴 작업을 벌여 그들의 세포와 세포 소기관이 지닌 복제 능력을 서서히 감퇴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성적인 것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욕망의 집합체가 변형시켜서 자연에게서 빼앗아 가버린 지도 모른다. 욕망과 쾌락은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현상이다. 그 사회가 어떠하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성적인 쾌락은 습관의 문제다. 성장할수록 점점 죽음은 가까이 오기에, “나이에 대한 생각이 이토록 집요했던 적은 없다.” 나는 사라질 것이다. “많은 아이들은 어른들이 건설해 놓은 세계를 잘 견뎌냈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그 세계에 적응하려고 애쓴다. 훗날 그들은 대개 그 세계를 답습한다.” 그렇게 그들도 비슷해지며,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기에.
종교는 인류를 완벽한 통일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계약과 전례와 규범의 예식에 바탕을 둔 순전히 사회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는 소비문화와 성의 상품화 그리고 순수한 도덕과 야생이 혼재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접촉의 욕구,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다정함이 아닐까? 하지만, 욕망은 성적인 매력에서 무너져 버린다. 그러기에 섹스를 둘러싼 경쟁은 오히려 더욱 뜨거워졌다.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자아가 하나의 환상일 뿐이 아닐까? 기독교적인 인류학과 유물론적 인류학 속의 인간의 존엄성 하지만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지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겪어야 할 일이라면 그냥 겪으리라는 것 그것이 고통이 되었던, 환희가 되었던. 삶의 체계화, 아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고,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텔레비전이었다.
소립자, 우리는 소립자, 우리는 고독 속에서 늙어가고 있다. 사회는 점점 원자화 되어간다. 결코 만날 수 없는 떠돎의 존재들로 우리는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인류의 문화는 섹스와 죽음간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토록 오랜 동안 반복으로 쌓아 올린 행위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욕구와 욕구의 종결 그것이 우리의 세상이다. 그리고 내가 익힌 규범은 내 아들에게 유효하지 않은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모두 개별적인 삶으로 끝나버린다. 제대로 산다는 건 남의 시선이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성애란 허구이고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그것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쓸모가 있다. 변화가 실패로 돌아가면, 남는 것 거짓말에 대한 의식과 씁쓸한 뒷맛뿐이다.
정상의 길. 고백, 나는 내 젊음의 종말을 견딜 수가 없었어. 늙는다는 게 바로 그런걸 거야. 늙는다는 것은 지배와 전능에 대한 환상이야. 그것을 이겨내고 싶다.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늙는다는 게 바로 그런 걸 거야. 감정의 반응은 무뎌지고 원한도 기쁨도 별로 간직하지 않게 돼. 그 대신 몸 여기저기에 이상은 없는지, 기관들의 균형이 무너져 있지는 않는지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지.
“성적쾌락과 잔혹행위는 힘에 대한 야만적인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쾌락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인생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브루노는 성적인 사회민주주의를 꿈꾼다. “그곳은 아무에게도 정신적 고통을 주지 않고 각자의 쾌락을 최대화하자는 휴머니즘적 제안에 딱 들어맞는 장소이다. 이제부터 그 점을 입정해 보이고자 한다.” 그 속의 규율과 계약존중 하지만 죽음과 육체의 젊음 속에서 방황하고, 일관성 없고 경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다.
감정의 무한. 성이란 위험하고 퇴행적인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돌연변이 발생을 결정하는 조건을 풀면, 성에서 독립하는 더 인간적이고 더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란 희망과 지식욕 그리고 합리적 확실성은 새로운 진보를 꿈꾼다. 분명 현상은 존재하고 법칙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있다. 분명 해결할 수 있으리라. 그가 꿈꾸는 완벽은 어떤 세상일까? 세계란 우리가 그것에 관해서 갖고 있는 지식의 총합에 지나지 않고, 인생은 고약한 장난, 용서할 수 없는 농담이다. 자유는 결코 진보의 토대가 될 수 없다.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 인류진화의 통제의 통한 새로운 성적 쾌감과 성차의 소멸만이 우리를 좀 더 완전하게 할 것이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다른 종으로 거듭 태어나는 최초의 동물의 종이 될 것이다.
종말. 브뤼노(이복형)는 정신병원으로, 미셜(동생)은 연구를 완성한 논문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들이 걸어온 길을 보면서 성에 대한 생각, 과연 성이란 것이 인류의 미래에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진다. 과학의 발달은 점점 우리에게 성의 사라짐과 더불어 육체의 불필요성을 제공해줄지도 모른다는 악몽이 될지도. 인간에게 갈림길은 선택이고, 되돌릴 수가 없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약간은 고정된 한국적 사고방식 때문인지? 뭐 이런 소설이 있냐? 에서 시작하여 책장을 덮는 순간, 글은 이렇게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아주 철학적이고, 어쩌면 아주 저속한 글속에서 통일된 주제로 나아가서 결말을 멋지게 맺는다. 삶의 고뇌를 말하기보다는 이런 삶을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해서 끝에 도달한다. 그것이 끝일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은 프랑스 발표 당시부터 찬반의 치열한 대립을 일으켰다고 하더니, 우리나라에서 이런 소설이 쓰여졌다면, 외설로 매장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성이란 것도 인간의 부분이며 그 비중도 상당히 높다. 다른 부분의 성취는 공개적이지만, 유달리 성이란 것은 아직도 어두운 곳에서 속삭여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이기에. 폭탄을 꽝하고 터뜨려 버린다. 우리의 머리 속과 우리의 입은 얼마나 일치하는지. 인간에서 성적인 생각을 제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쉽게 말하고 외치는 사람은 적다. 성을 없애버리면 인간의 동물적인 특징을 제거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인간에게는 성보다 더한 정신적 소외가 더 문제일 것이다.
* 이 책을 다 읽지 않고 초반만 보면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조금은 다른 생각이지만 부디 앞쪽만 보고 책장을 덮지는 마시기를.
사랑을 잃은 삶을 견뎌야 했던 자들
- 미셀 우엘벡, 『소립자』(열린책들)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
의붓아들과 의붓딸의 만남
우리를 낳지 않은 우리의 부모들을 탈각했다
가진 적도 없던 것을 지키려고 애썼고
서로 악수하면서 서로의 손을 혼동해서 침묵했다
- 이이체, 「연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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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고립되었을 때 고독을 견디기 위해 서너 권의 책을 지닐 수 있게 해준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챙길 것이다. 사랑할 수 없다면, 인간은 누구나 불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줬으니까. 이 소설은 사랑이 거세된 삶을 견딘 두 형제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브루노와 미셀은 바람을 피운 아버지 때문에 배다른 형제로 태어난다. 두 형제의 아버지이자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마르크는 첫째 아들 브루노를 알제리의 할머니에게 떠맡기고, 동생인 미셀을 기숙학교에 방치한 채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한다. 마르크는 1964년, 중국군에게 점령된 티베트를 촬영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실종된다. 또한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 손자 브루노를 키우던 할머니마저 임종을 맞이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두 형제는 10대 중반에서야 파리의 기숙학교에서 처음으로 조우한다. 어머니가 달랐던 탓에 두 형제는 정반대의 외모와 기질을 지녔다. 알제리의 할머니에게서 키워졌던 브루노는 작고 뚱뚱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애정결핍을 심하게 앓던 브루노는 성적 환상과 자위에 몰두하고 프랑스의 고등학교에서 심각한 따돌림을 겪는다. 친구와 애인이 없는 브루노는 그럴수록 글쓰기와 환상에 매달린다. 반면 동생 미셀은 조각 같은 외모를 지녔고 수학과 과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그러나 뛰어난 외모와 지능을 가진 미셀 역시 심각한 장애를 앓는다. 인간의 ‘감성’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이 결여된 것이다. 미셀은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의 눈물, 타인의 죽음을 마주한 인간의 슬픔조차도 수학적인 통계수치나 과학적인 호르몬 분비의 효과로 ‘분석’하려고 하는 ‘괴물’이다. 형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르지만 두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닮았다. 상반되면서도 비슷한 두 형제는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한다. 사랑을 잃은 대가는 가혹하면서도 아이러니하다. 누구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했던 브루노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글’을 얻는다.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한 채로 결핍의 산물인 글을 얻었지만 브루노의 삶은 허망하게 종결된다. 분석과 통계를 일삼던 미셀은 뛰어난 과학자가 되지만, 끝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새롭게 진화한 인간 ‘종’을 연구하다가 실종된다.
나는 이 소설을 세 가지 관점에서 읽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세대론적인 관점에서 읽힌다. 1998년『소립자』가 출간되었을 무렵, 프랑스 문단은 엄청난 세대 논쟁에 휘말렸다. 이른바 ‘68세대’의 자손인 브루노와 미셀, 두 형제의 기행이 프랑스 좌파들이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는 ‘68혁명’에 비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말 프랑스 문단에서 벌어진 이 소요(騷擾)는, 어쩌면 우리에게 결여된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68세대’의 자손들의 결여와 상처로 점철된 삶은 ‘486세대’ 이후의 세대가 통과하는 삶과 겹쳐지지 않는가.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했던 ‘486세대’ 의 자손들은 대가가 미미한 경쟁 속에서 불안에 노출된 삶을 통과하고 있다. 두 형제의 기행을 어떤 은유로 독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여기의 2030 세대의 삶과 흡사하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충고였겠지만, 언젠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정한 선배(윗세대)의 기준은 자신이 겪은 상처와 불합리를 후배에게 강요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우리 사회의 ‘486세대’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청춘을 훈장처럼 안고 후배들에게 이 세계의 가혹함을 무작정 견디라고 주문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움켜쥐기 위한 불안을 감추는 것은 아닐까. 세대론적인 상징으로 독해할 때 이 소설은 프랑스보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개인의 실패를 자신의 능력 탓으로 돌리는 기성세대의 화법에 폭력적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마저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자기계발의 현실에 애써 적응하려고 몸부림치거나 작은 모니터 속에서 익명으로 힘겨운 비명을 지를 뿐이다. 타인과 약자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성을 지닌 채로. 브루노와 미셀이라는 ‘괴물’들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다룬 한국 젊은 작가들의 소설 속에서 미세하게 분열된 여러 인물들로 나타난다.
한편『소립자』는 인간의 ‘진화’에 대한 묵시록이자 인간의 내면에 대한 상징으로도 읽힌다. “인류는 이제 자기 자신을 다른 종으로 대체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다른 종으로 거듭 태어나는 최초의 동물이 될 것입니다”(338쪽)는 언급처럼, 인류는 점차 개인의 자유와 쾌락을 위해서 타인의 상처에 관심을 줄여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데이터로 분석되는 세계에서 인간이 지닌 죄책감과 수치심, 연민의 가치는 점차 희석된다. 미셀의 ‘괴물’적인 면모와 과학자가 되어 진행하는 연구는 바로 이 현실에 대한 강렬한 은유일 터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이미 미셀과 브루노가 존재하고 있다. 상처와 결핍을 타인의 사랑과 관심으로 보상받으려는 브루노, 모든 것을 냉정한 수치로 가늠하여 자신을 방어하려는 미셀은 당신의 내면에 이미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내면의 브루노와 미셀은 각자의 삶에 의해서 나름의 비율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사랑의 가치를 논하고 있다. 사랑은 과학과 예술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다. 그리고 두 형제의 이야기가 적힌 단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미셀이 연구한 새로운 인간 ‘종’에 대한 미셀 우엘벡의 마지막 서술을 읽어보자.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 종은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고결한 꿈이 있었다. 그 종은 모순덩어리였고 개인주의적이었으며 싸움을 좋아했고 이기심에는 끝이 없었으며 때로는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339쪽) 기괴하고 슬픈 두 형제를 통해서 세대론과 진화, 인간의 야누스적인 내면, 그리고 사랑의 가치를 역설한『소립자』의 마지막 문장은, 명료하면서도 아프다.
“이 책을 인류에게 바친다.”
시대적 배경에 따른 인물들의 디테일한 묘사가 압도적이다. 거기에 사강, 사르트르, 니체, 칸트, 아인슈타인 등 익숙한 이름들의 등장은 픽션 같지 않은 현실감까지 부여한다. 실종된 생물학자, 미셸 제르진스키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 전개에 흠뻑 빠져 읽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미셸 형제의 기원이 되는 조부모, 부모, 그리고 그들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숨 가쁘게 따라왔다. 재독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했다는 얘기다.
브루노는 미셸과는 아버지가 다른 동복형제다. 그들은 어머니 자닌의 무분별한 성관계와 아버지의 무책임 때문에 일찌감치 (외)조부모에게 맡겨져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형 브뤼노의 아버지는 세르주 클레망으로 만난 당시 의대생이던 아내 집안의 부富에 힘입어 성형 클리닉으로 성공해 상당한 재력가가 되었지만 아내와 합의이혼 후 아들을 처가에 맡긴다. 그리고 동생인 미셸의 아버지는 마르크 제르진스키로 영화감독을 뒤로하고 다큐멘터리 촬영차 티베트에 갔다가 사망함으로써 미셸은 친조모에게 맡겨진다.
인물들의 캐릭터를 비교, 분석한 뒤 공감하게 되는 포인트를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각각의 인물들은 짝을 지어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인다. 자유분방하고 실존주의 시대를 경험하며 장 폴 사르트르와 비밥 춤을 추기까지 한 어머니 자닌은 브루노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이상을 위해서라면 직구밖에 모르는 친부 마르크는 아들 미셸과 닮았다. 남성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셸은 매력이 없어 보이지만, 학계에서는 꽤 많은 성취를 얻은 분자 생물학 연구원이다. 어떻든 형제는 상당히 다른 기질로 태어나 너무나도 상이한 삶의 두 전범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둘 다 부모의 유전적 영향권 안에서 각자의 개성대로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대등하다 할 수 있겠다.
미셸은 휴직하기 며칠 전 동료들과 송별회를 마친 뒤 귀가해 죽어 있던 카나리아와 빈 맥주병을 비닐봉지에 넣어 쓰레기 투하 통로에 던진 그날 밤 거대한 쓰레기통이 나오는 기이한 꿈을 꾼다. “커피 필터, 토마토소스에 버무려진 라비올리, 잘려진 성기들 따위로 가득 찬 거대한 쓰레기통” 그러고 보니 바로 어제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편에서 토마토에 남성 최음제 성분이 있다고 강사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커피 필터는 여성의 자궁을, 토마토소스는 남성의 정력을, 잘린 성기는 그야말로 거세된 남성성을 비유하는 건 아닐까. 쓸모를 잃고 쓰레기가 돼버린 남성성 말이다. 이후의 전개를 감안하면 꽤 설득력 있는 추정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더 의미심장해지는 것 같다. 이 모든 게 소설의 복선인 것만 같아 오래 머물러 반복해 읽었던 문장을 발췌해 본다.
“죽은 새만큼이나 통통한 거대한 벌레들이 새의 부리처럼 생긴 주둥이를 내밀고서 새의 사체로 몰려들었다. 그러더니 새의 다리를 뽑고 내장을 갈기갈기 찢고 눈알을 파내고 있었다.” 얼핏 실종된 미셸을 추적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문장인 것도 같다. 그러니까 ‘눈치 챘어? 그럼 이제 잘 찾아봐.’라며 작가가 내게 준 암시 같다고나 할까.
“<남의 자유는 나의 자유를 무한히 확대한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의 그 말이 캠프장의 표어인 모양이었다.”(131쪽)
외조부모가 사망하자 11살이던 브뤼노는 기숙사에 가고 주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가 생활한다. 기숙사는 청소년기 동물 사회에서 가장 힘이 센 ‘알파 수컷’과 그 반대인 ‘오메가 수컷’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브뤼노는 추악한 폭력에서 벗어나 서투르게나마 성에 입문하게 된다. 이는 미국 사회의 와해된 성문화의 빠른 유입에 편승해 점차 성욕의 노예가 되기 전, 소년기의 ‘참담한 실패’이기도 하다. 정신 치료를 받던 중 의사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역시 바로 그 경험과 연장선상에 있다. 브뤼노는 용두질하다 새끼 고양이에게 들켜 돌멩이를 던지게 되는데, 다음의 문장 역시 위의 복선과 맞닿아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고양이의 머리통이 개지고 약간의 골이 주위로 튀었습니다. 나는 돌들을 모아 고양이 시체를 덮어 주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와중에 그는 동생인 미셸과 아나벨 사이의 관계 진척을 위해 캠핑을 주도하기도 하고 어머니 자닌의 무모한 조언에 따라 자유연애 장소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여자들을 물색하는데 전력투구한다. (브루노의 이러한 행동은 중년에도 계속된다.) 여기서 맥주 깡통들과 버려진 콘돔들이 있는 쓰레기통이 또 등장한다.
“<나는 나무들 사이로 자동차의 전조등을 바라보고 있다. 이게 바로 내 인생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텐트에 돌아와 위스키를 한 잔 마신 다음, <쾌락은 하나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스윙 매거진』을 훑어보면서 천천히 용두질을 했다.” (135쪽)
브뤼노가 욕망을 좇는 쾌락의 사자라면 미셸은 정확히 그 반대다. “간명하고 사건이 별로 없는 세계에 살”면서 분자 생물학 연구원으로 발탁된 이래 주어진 일에만 매진하는 유형. 데프레슈앵이 스카우트하기 위해 파리 11대학을 찾았을 때 미셸은 박사 학위 논문을 끝내 가던 중이었고, 그 연구 일환으로 했던 실험이 있었다. “동일한 칼슘 원자로부터 연속적으로 방출된 두 광자의 운동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그럼 이제, 본서의 제목 『소립자』를 떠올릴 차례다. 위 실험으로 제기된 두 개의 가설 중 하나는, “소립자는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관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 연구자 대부분은 이 두 번째 가설 쪽으로 기울었다.
과연 소아 성애자 교사와 생물학자가 주는 메시지는 뭘까. 20세기는 여러모로 폭주하는 사회였다. 섹스, 폭력, 살인 세대라 지칭될 정도로. 거기에 과학의 눈부신 발달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회전하던 시대였다. 갑작스럽게 쇄도하는 문명의 이기 앞에서 절제력을 상실하고 정신적·육체적으로 미쳐가던 시대. 혁명과 반혁명, 우파와 좌파가 극렬하게 싸우며 나와 다르면 무조건 배척하고 보는 시대. 그런 면에서 보면 브뤼노와 미셸 형제는 어느 편에도 속해 있지 않은 듯 보인다. 쾌락에 투신하는 브뤼노조차도. 그에게는 자신만의 중심이 있지 않았다. 세파에 휩쓸려 목표 없이 그저 욕망에만 충실한 폭주 세대이면서 동시에 주변인(이방인)일 뿐. 미셸은 또 어떤가. 그는 학자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지만 인간으로서, 남자로서의 삶에 대한 지향은 제거된 사람이었다. 그것이 어떤 알력에 의해서라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는 것. 다수가 말하는 무미건조한 삶, 즉 현재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 이외의 것들엔 철벽을 치는 사람이었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쓰레기통’은 20세기를 통칭하는 대명사가 아니었을까. 온갖 잡종(문명, 性 풍속, 과학 발달 등)으로 뒤섞인 시대(인)를 은유하는. 이로써 소립자는 내재적 속성이나 다른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기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그러한 세계에 예고 없이 배속된 미셸과 브뤼노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브뤼노나 미셸 중 누가 더 선하고 악하다든가 누구의 삶이 더 낫다는 식의 이분법적 감상을 남기기엔 무언가가 너무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완독하고 나서 리뷰를 쓰지 않은 이유가 생각났다. 서양의 성 풍속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했다. 많은 분량의 섹스와 자위, 잔인한 살인 현장 묘사 등이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그땐 그랬다. 그 수위는 중반부에 가서 슬슬 거북해지더니 금세 읽기를 포기하고 싶게 만들 정도였다. 또 하나, 엽기적 살인과 같은 잔혹한 모방 범죄, 혹은 악의 정당화를 지향하는 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우려가 다분해 보인다. 도저히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눈살이 찌푸려지고도 남을 만한 작품이다.
“30개국 언어로 번역된 『소립자』는 미셸과 브뤼노 두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성 풍속의 변천 과정을 중심으로 <서구의 자멸>을 면밀하게 해부한 작품이다.” 작가가 이 작품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고, 더블린 문학상까지 받았다니 한편으론 서구 사회와의 높은 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킬 문제작으로 출간 자체가 거부됐을 것 같다. 실제로 작가는 한국(또는 일본)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고 적고 있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서상 큰 괴리감을 갖게 된 이유가.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독서 초반, 실종된 미셸을 생각하며 단서 하나라도 더 찾으려 했던 탐정의 마음가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분명 이 책은 자극적이고 기괴하고 엽기적이다. 완독하는데 인내심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재독했고, 한 번 더 읽을 작정이다. 몇 번이고 중고로 팔아버릴까 했던 책을 말이다.
소설의 제목이 ‘소립자(Automized)’. 마치 물리학 서적의 제목 같다. 물론 내용에 소립자, 즉 물질의 기본 단위에 관한 게 있다. 그렇다고 그게 중심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말 제목을 ‘원자화’ 같이 달았으면 내용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을 해보니 그게 더 맞겠다 싶다).
주인공은 둘이다. 미셸 제르진스키와 브뤼노 클레망. 형제다. 성(姓)이 다른 걸 봐서 알 수 있듯 아버지가 다르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다 같은 중학교에서 만난다. 둘은 서로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살아간다. 미셸은 과학자다. 전공을 굳이 얘기하자면 분자생물학, 혹은 생물물리학 정도다. 똑똑하지만 감정적으로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반면 대학교수 자격도 있는 교사인 브뤼노는 평생을 성(性)을 탐닉하면서 살아간다.
브뤼노가 평생을 갈구하고, 혹은 좌절하는 성에 대한 탐닉은 완전히 무절제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미셸은 누구와도 성적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를 사랑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나벨과의 관계도 거부하고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갈 정도다(끝내는 다시 만나 아나벨의 호소에 관계를 맺지만 너무 늦은 것이었다). 소설은, 특히 브뤼노와 관련된 장면에서는 거의 포르노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적나라한 묘사와 상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이 소설이 그런 흥분을 위한 소설이 아니라는 점이고, 또한 희한하게 읽는 내내 흥분된 상태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우엘벡을 굳건한 명성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논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2022년에는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었고(같은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가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도 적나라한 성적 표현으로 유명하다), 올해에도 그의 이름이 거명되기도 했다. 물론 잘 알다시피 올해에는 우리나라의 한강 작가가 수상했다. 그런데 만약 우엘벡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그 작품이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면 더욱 논란이 되었을 것 같다는 씁쓸한 예상도 하게 된다. 일부 교육청과 학교 등에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받은 대접을 생각해보면 우엘벡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었을 듯하다.
우엘벡은 이 작품에서 68세대의 위선을 아주 가차 없이 뭉개고 있다. 이런 비판이 모든 점에서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엘벡은 포괄적인 비판 대신에 68세대들의 개인적인 성 개념의 문란함을 물고 늘어지고 있고, 여기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파생되어온 파편화된 인간성을 비판하고 있다. 사랑은 사라지고, 섹스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은 새로운 종(種)을 탄생시키게 된다. 그러고는 사랑을 잃고, 성적 관계마저 시장 원리에만 종속된 인간이라는 종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설정은 소설을 약간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데, 그 취지마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을 포르노에 가까운 소설이라고 폄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엘벡이 이후로 보여준 왜곡된 여성상(이를테면 “여성은 25세까지 유통기한을 가진 섹스 대상”이라는 발언 등) 때문에, 혹은 정치적 입장(우파) 때문에, 혹은 종교적 편협함(그는 2001년 이슬람교를 ‘바보 같은 종교’라고 했고, 이 소설에서도 그런 입장이 미셸 제르진스키의 연구소 상사 데플레슈앵의 입을 통해 발설되기도 한다) 때문에 비판받을 여지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현대 사회에 대한 냉소와 풍자는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비판을 통해 다시 소설을 소설로서, 나아가 소설을 넘어선 무엇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면 이 『소립자』라는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물론 근엄하신 분들은 절대 No!라고 외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