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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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장편소설

리뷰 총점 9.7 (556건)
분야
소설 > 스페인/중남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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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신의 행위는 정당한가 _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 평점10점 | b******s | 2016.06.26 리뷰제목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2015.12.25. 해냄)》은 ‘인류 최초의 악인(惡人), 카인은 동생을 죽이고 도망친 후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뒤 저주를 받고 하느님 앞에서 물러나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그 뒤 성서에서 카인의 행방을 확인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폭력으로 타락한 인간세상을 홍수
리뷰제목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2015.12.25. 해냄)》‘인류 최초의 악인(惡人), 카인은 동생을 죽이고 도망친 후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뒤 저주를 받고 하느님 앞에서 물러나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그 뒤 성서에서 카인의 행방을 확인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폭력으로 타락한 인간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킬 계획을 짜면서 인류 중 유일한 생존자로 선택한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셋’의 후손 노아였고, 이는 홍수가 있은 뒤 새로운 세상의 인류는 노아의 후손에게만 허락된 셈이니 카인의 후손은 멸족한 것이기에 굳이 그의 행방을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는 카인에게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한다. 시간여행자, 목격자, 증언자라는 역할을 부여하여 하느님께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증명할 수 있게 한다. 창조주이신 주님의 죄를 목격하고 이를 증명하는 자라니, 깜직한 발상이지만 대범하고도 놀라운 상상력이다.

 

 

시작은 이러하다. 카인이 동생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벨만을 편애하셨기 때문이다. 카인은 당차게 아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도리어 신에게 묻는데, 주님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신다. 여기서부터 소설 《카인》형재 살해자(p.44) 카인의 행방에 대한 궁금증이 아닌 ‘신의 행위는 정당한가?’라는 새로운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인가.(p.122) 

 

 

하느님께서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p.41)라고 카인에게 말씀하신 뒤 카인이 길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놋 땅이다. 성서에 따르면 카인은 놋 땅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고 하였고, 소설도 놋 땅의 주인 릴리스의 부름을 받아 그녀의 침대에 들어 아들 에녹을 얻었으니 이에 관해서는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시간여행자인 카인은 노아의 10대손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던 해 얻은 아들 이사악을 여호와의 제물로 바치기 일보직전의 현장을 목격하고, 하느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키는 자리에 참석하였으며, 바벨탑이 허물어지는 장소에 있었고,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죽임당하는 장면도 목도한다. 또한 부유하지만 선하고 정직한 욥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과 사탄이 내기를 하여 욥의 모든 것을 빼앗고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과연 근친상간을 눈감아 주고 살육을 서슴지 않으며 죄 없는 사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의 행위는 정당한지에 대한 의심의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카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릴 계획의 현장인 노아의 방주 제작 장소에 발길이 머물고 주님의 허락아래 노아의 가족이 되어 방주 안으로 입성한다. 그리고 카인은 방주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에 반대되는 자신만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하느님의 행위를 두고 인간과 동등하게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재미있는 발상의 이야기 《카인》은 발칙한 소설이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카인의 직설(直說)은 신선하며 독창적이고 발랄하기까지 하다. 과연 ‘주제 사라마구’다운 이야기이며 ‘주제 사라마구’만이 가능한 상상력이다.

 

 

사실 처음부터 《카인》을 독창적이고 신선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었던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의심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낯설었고 어리둥절했다. 구약성서를 다시 읽어보고 소설을 다시 읽어보기를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카인》 역시 일독만으로 작가의 재치와 위트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흥미롭게 읽혔다는 의미다.

 

 

다시는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읽지 못하리라 생각했었기에 《카인》을 읽는 시간이 소름끼치게 행복했다. 더구나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86세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 있는 소설을 읽게 되어 더더욱 기뻤다. 그리고 그 소설이 구약성서를 재해석한 이야기라니, 감탄밖에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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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평점8점 | g******1 | 2016.03.08 리뷰제목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해, 동산을 찾아가 기웃거리다가 경비 천사 아자엘에게서 이 땅에 인간들이 너희뿐만 아니라는 말을 듣자, 그들은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왜 자신들을 창조했는지 궁금해하고, 이에 대해 아자엘은 여호와가 일하는 방식은 신비하지만, 자신이 파악하는 방식으로는 너희는 실험이었다라고 말한다. 동산에서 주어지는 과일들을 따먹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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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해, 동산을 찾아가 기웃거리다가 경비 천사 아자엘에게서 이 땅에 인간들이 너희뿐만 아니라는 말을 듣자, 그들은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왜 자신들을 창조했는지 궁금해하고, 이에 대해 아자엘은 여호와가 일하는 방식은 신비하지만, 자신이 파악하는 방식으로는 너희는 실험이었다라고 말한다. 동산에서 주어지는 과일들을 따먹으며 생각없이 놀고 먹던 이 딱하고 무능한 아담과 하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에 막막해 하자 모닥불을 피워 지나가는 대상에게 빌붙어 살아갈 수 있는 아이디어를 준 사람, 아니 천사도 아자엘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신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어디서 왜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는 대상의 도움으로 카인과 아벨을 차례로 낳아 가족을 이루고 각각 밭과 가축을 맡겨 살아가지만, 알다시피 여호와는 아벨을 편애하고 카인은 자신을 경멸하는 여호와에 대한 복수로 아벨을 죽인다. 여호와가 분노하여 카인에게 묻자, 그는 질문으로 대답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정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편애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은 그 잘못의 크기가 비교 불가능한 것이지만, 카인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여호와와 논쟁한다. 논쟁이라기 보다는 치졸한 말싸움이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여호와는 어쩐 일인지 이런 논리적 대화에 약하다. 결국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도, 심지어는 신을 죽이지 못해 신이 사랑하는 아벨을 죽인 것이라는 말을 듣고도 그를 벌하지 못하고 이마에 표식을 남겨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도록 약속한다. 이처럼 신의 뜻 중에서 최초의 살인범인 카인에 대한 한없는 너그러움은 정말 불가해한 일이다.  


이후 구약 성서의 공간적 배경을 따라 시간을 거스르고 여행하는 카인은 신의 행동 곳곳에서 잔혹성과 모순을 발견하고 신과 대면한다. 신의 절대적 권력 앞에서 카인은 신의 모든 분노와 파괴에 대한 행동들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서로는 오랜 앙숙처럼 정이들어 버린다. 재미있는 것은 비처럼 불기둥을 내려 소돔을 파괴한 신이, 하늘에 닿기를 원했던 바벨탑을 쓰러뜨린 신이, 시나이 산의 금송아지를 섬긴자들을 무자비하게 멸했던 신이, 여리고와 여러 도시들을 그렇게 무차별하게 파괴하고 죄업는 아이들까지 잔혹하게 학살한 신이, 최초의 살인자 카인에게는 자신의 편애를 인정하고 꽤나 약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귀를 타고 시공간을 따라 과거와 미래를 현재 속으로 여행하는 방랑자가 된 카인은 마지막 장소 노아의 방주 속으로 초대된다. 한 인간을 실험적으로 창조했다가 멸하고 다시 실험하는 것을 반복하는 여호와의 변덕스러움에 회의를 품은 노아는 방주 속에 초대받았으나, 한명씩 살해한 후 마지막으로 두번째인 노아의 부인을 죽이고 나서 노아가 부인을 어쨌냐고 묻자 또다시 대답 대신 질문으로 답한다. 내가 어르신의 부인을 지키는 자 입니까, 내가 그분의 발목을 줄로 묶어 나와 이어놓았습니까, 마치 양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카인의 대화술은 이처럼 압권이다. 


명백한 자신의 살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이러한 역공의 대화법은 만일 우리 모두가 카인의 후손이라면 소중한 인류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신을 부정하는 리처드 도킨스가 구약 성경의 뭐 어디라더라 무슨무슨 편을 가장 즐겨 읽는다던데, 그 이유가 학술적인 이유가 아니라 문학적인 이유라던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저녁 식사가 늦어지면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님 중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지르곤 하셨는데, 정말로 어른 치고 너무나도 치졸하면서도 해맑은 분노라고 아니할 수 없으나, 당시 나는 생각했다. 엄마도 돈을 벌고, 아빠도 돈을 버는데, 엄마가 아빠 밥상을 차리는 사람으로 날 때부터 그런 의무가 지어진건가. 이러한 나의 카인적인 가치관은 결혼 이후 잦은 불화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카인의 반증을 이용할 줄 몰랐다. 내가 당신의 밥차리는 사람입니까. 다행히 나의 남편은 아빠와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요리를 취미로 하는 사람이라, 얻어먹는 내가 오히려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밥 차림 대신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많다. 의무와 책임이라는 사회적 명제는 카인의 역공의 대화법으로 성찰해보아야 한다. 


이 대화는 아주 지극히 일부의 대화상의 예일 뿐이다. 이 책의 주제라는 것이 성경에 적혀 있는 여호와의 기만적이고도 모순적이고 또 파괴적인 행동과 말을 자신이 편애로 인해 살인자가 되기로 한 카인의 눈을 통해 비추고 신의 잘못을 조목조목 들쳐내는 것인데, 이러한 주제라면 사실 성경에 적혀있는 신화적인(그러니까 비논리적인) 성격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과 의심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리 새로울 것은 없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문학이라는 틀에 녹여내었느냐는 건데, 신과 카인과의 대화, 카인과 천사들과의 대화,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문장이 단락 구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덩어리로 어우러져 한 문단으로 구성된 글은 이처럼 처음부터 익살스럽고 해학적이고 유머가 넘친다.  카인의 최초의 살인은 아벨을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신을 죽이고 싶어서였음이, 핵심이다. 그는 아벨의 살해를 통해 이미 신을 죽였고, 그리고 노아의 방주를 통해 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다시 처음부터 실험실에 세우려고 했던 신의 계획을 망쳐놓는다. 그러므로 책의 연장선에서의 현재 우리, 즉 이제까지 남겨진 인간은 하느님의 자손인 노아의 후손들이 아님은 확실하다. 다른 사람들 맨 앞장에서 아담이 지나가다 만난 대상들일 수도 있고, 신의 홍수가 닿지 않은 어느 머나먼 땅의 다른 종족들과 카인의 혼혈인들일 수도 있고, 카인이 더는 소설 밖으로 떠났고 없으므로 신의 후손은 존재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나귀는 카인의 동반자이고 그를  그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간으로 이끈다. 성서 속을 여행하며 가는 곳마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잔혹하고 파괴적인 현상들을 목격한다. 아벨이 되기도 하고 카인이 되기도 하고 다른 롤을 부여받지만, 그의 여행은 신의 그러한 잔혹성을 목격하는 것이고 그것은 향후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한 이유가 된다. 카인은 살인자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직한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이다. 그는 동생을 살해함으로써 신을 살해한다. 최초의 그의 살해는 유일한 신과의 결투이며, 그 언어적 결투에서 논리를 갖지 못한 신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를 누구도 죽일 수 없도록 '자비'를 내린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경악할 만한 잔혹함이 극명하게 드러나자, 신의 행동을 자신의 논리로는 용납할 수 없기에 신의 계획을 망쳐놓기 위해, 즉 신의 자손이 대를 끊고 더는 실험이 계속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노아의 전 가족을 살해하는 것이다. 그의 증오는 소설 내에서 합당하고 정의롭다. 여기서 살인은 물리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신의 뜻에 의해 죽음이 허락되지 않은 신을 죽이는 방법은 그의 피조물들을 그 존재를 끊는 것이었기에 , 그는 처음 살인으로서 신에게 인정받았던 것처럼, 역설적으로 그 인정받은 능력으로 또다시 살인을 행함으로써 신과 인류와의 고리를 끊어놓는다. 이것은 카인의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이제 (소설 속에서) 그가 만든 인류는 없다. 노아를 죽인 카인이 유유히 역사속으로 사라질 때, 신을 죽인 노아의 후손(만일 있다면) 역시 신의 자손일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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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카인』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작품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h*****9 | 2016.02.29 리뷰제목
오래전에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를 보고 동명의 원작소설을 읽으며 주제 사라마구를 알게 되었다. 주제 사라마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통렬한 비판을 읽었다. 그때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세계를 어느 정도 인식했다고 할 수 있겠다. 아주 오랜만에 구약성서의 재해석이라는 그의 신작을 『카인』을 읽게 되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묵시록의 재해석, 『예수복음』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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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를 보고 동명의 원작소설을 읽으며 주제 사라마구를 알게 되었다. 주제 사라마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통렬한 비판을 읽었다. 그때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세계를 어느 정도 인식했다고 할 수 있겠다. 아주 오랜만에 구약성서의 재해석이라는 그의 신작을 『카인』을 읽게 되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묵시록의 재해석, 『예수복음』은 신약성서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물론 주제 사라마구만의 시각으로 보는 여호와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기도 하다. 

 

  굳이 성서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카인이라고 하면,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이며 양을 치는 자 아벨을 죽인 자라고 알고 있다. 똑같이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도 자신보다는 동생인 아벨을 더 사랑한다고 여긴 카인은 동생을 돌로 쳐 죽이게 되었다. 부모로부터, 여호와로부터 도망친 그가 도망자의 땅 방랑자의 땅인 놋의 땅으로 가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가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여호와는 왜 아벨 만을 사랑하셨을까? 똑같이 제사를 지내도 왜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셨던 걸까. 여호와는 카인에게 어떠한 형벌과 의무를 주시려고 했던 걸까.

 

  놋의 땅에서 카인은 이름을 묻는 사람들에게 죄지은 자인 카인의 이름을 뒤로하고 자신이 죽인 동생의 이름 아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호와가 자신의 이마에 내준 표식조차 원래부터 있었던 거라며 카인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거부했다. 여호와께 버림받은 카인은 스스로 거짓된 이름으로 거짓된 삶을 살게 되는 걸까.

 

  여호와에게서 거부당한 카인이 하는 일이라고는 많지 않았다. 카인은 정처없이 걷다가 양 두 마리의 줄을 끌고 가는 노인을 만나며 놋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 농사를 짓던 카인은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진흙을 밟는 일 밖에 없었다. 진흙을 밟는 일을 하다가 그 곳의 주인인 릴리스의 눈에 띄어 주인의 숙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주인의 집에서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 그곳에서 카인은 릴리스의 침대 시중을 드는 이, 주인을 지켜주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쾌락을 선물하고 그녀에게 아이를 갖게 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릴리스의 남편인 노아가 그런 그에게 질투를 느껴 죽이려하자 카인은 또다시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여행길을 나서며 또 양 두 마리의 끈을 잡고 걸어가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의 형상으로 나타난 여호와가 아니었을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말 또한 그 나름의 이유와 원인이 있다. 어떤 말은 마치 대단한 일을 할 운명인 것처럼 엄숙하게, 오만하게, 우리를 부르지만 결국에는 너무 가벼워 풍차의 날개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반면 평범하고 습관적인 말, 매일 사용하는 말이 결국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를 낳아, 그런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세계를 흔들기도 한다. (61~62페이지)

 

 

 

 

  그는 여행 중에 무엇을 보았을까. 한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에게 번제할 어린 양을 어떻게 하느냐는 염려섞인 목소리였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복종을 시험하는 여호와께 아브라함이 자신의 어린 아들 이삭을 신에게 바치려는 광경이었다. 카인은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고는 신에 대한 비난의 말을 서슴치 않았다. 또한 성의 관습이 느슨한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 또한 신이 시킨 일이었다. 불에 타버린 소돔과 고모라에도 틀림없이 죄가 없었던 아이들이 있었겠지만 죄없는 아이들의 목숨까지 가져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어했다. 어찌 신으로서 죄없는 아이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행동을 살펴볼 때 그 많은 어두운 면, 그 모든 아름다움, 웅장함, 장엄함이 있는 삶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한 천사가 대답했다. 그 두 가지는 같은 이야기가 아니야, 두 번째 천사가 덧붙였다. 똑같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거의 같죠. 바로 그 거의라는 말에 차이가 존재하는 거고, 그 차이는 아주 큰거야. 내가 아는 한 우리 인간은 절대 스스로 우리가 삶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묻지 않아요. (190페이지)

 

  신에 대한 카인의 끝없는 의문은 결국 신이 노아에게 지시한 '노아의 방주'에 까지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방주를 짓기 시작한 노아는 인류의 번성을 위해 노아의 세 며느리들과의 교접을 카인에게 권했다. 노아의 가족들만 살리려는 신의 뜻을 거부해 카인은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과 교접을 했을 뿐더러 신이 노아에게 지시한 것들에 대한 거부의 몸짓,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인류를 만드려는 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줄 날이 와야만 했습니다. (206페이지)

 

  성서에 대해 대략적인 이야기만 알고 있는 우리에게 주제 사라마구는 현재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소돔과 고모라를 파괴시켰듯, 노아의 방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려고 했던 신의 뜻에 반해 신과의 논쟁을 즐겼던 카인의 얼굴은 최근의 우리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카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그리고 신과의 대립,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지금과 하나도 다를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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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카인과 여호와, 누가 더 자비로운가.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k*****1 | 2016.01.29 리뷰제목
나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혀 안 읽는 것은 아니지만, 맘에 드는 작가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편이다. 국내작가의 작품도 그러한데, 외국작가가 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다. 그런 내가 어느 외국작가의 작품을 서너권 읽었다면 이건 천지개벽할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그 주인공이 바로 '주제 사라마구'이다. 처음 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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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혀 안 읽는 것은 아니지만, 맘에 드는 작가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편이다. 국내작가의 작품도 그러한데, 외국작가가 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다. 그런 내가 어느 외국작가의 작품을 서너권 읽었다면 이건 천지개벽할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그 주인공이 바로 '주제 사라마구'이다.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아마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눈뜬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를 읽었던 것 같다. 그 작품들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단지 줄거리가 얼핏 생각날 뿐이었다. 헌데, 이 책을 읽겠다고 선뜻 덤벼든 것은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우습다. 요즘 읽는 책들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아, 이제는 소설도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 눈에 띄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게 고르고 보니 저자가 주제 사라마구였고..

 

아마 책 제목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성경에 나오는 인류최초의 살인자에 대한 이야기이니 뭔가 종교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기독교에 대한 나의 인연이 생각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때는 나도 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 신을 믿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다닌다고 다녔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천주교 계통의 학교였던 까닭에 일주일에 한번 학교근처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고, 또 한 시간은 수녀님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성당이 교회로 바뀌었고, 수녀님이 목사님으로 바뀌었을 뿐, 변함없이 기독교와 관계를 이어갔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교생이 공부해야 하는 정규과목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참 많이 읽었다. 시험기간이 되면 최소한의 점수를 얻기 위해서라도, 뜻과 의미는 관두고 그냥 읽고, 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성경 속의 이야기라면 어느 편에 나오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대강의 줄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카인의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저자는 어떻게, 무엇을 썼을까 하는 궁금증이 더 컸다는 게 맞을 성 싶다.

 

작가는 책 뒤 표지에 써있듯이 '카인은 동생을 죽이고 도망친 후 어떻게 살았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저자는 상상력으로 카인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건들 속으로 다가가, 그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직접 경험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어찌 보면 구약성서를 재해석하여 여호와와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소설은 시작부터가 파격적이다 못해 - 물론 기독교인의 입장으로 볼 때이다 - 낄낄거리게 만든다. '아담과 하와가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아주 원시적인 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여호와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에게 언어라는 것을 주었는데, 아담이 하와에게 처음 한 말은 '자러 갈까' 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130년이 지나서야 카인과 아벨과 그리고 또 한 명의 자식이 태어난다. 시간이 지나고 카인과 아벨은 노동의 첫 소출을 여호와께 바치지만, 여호와의 편애를 의심한 카인은 아벨을 죽인다. 이때 나타난 여호와는 카인에게 벌로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지만, 카인은 아벨의 죽음에 여호와의 책임도 있음을 항변하고, 여호와는 자신의 책임도 있음을 인정한다.

 

이후 카인은 현재에서 현재로, 혹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식으로 구약성서 속 사건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순간 카인은 호통을 쳐 이삭을 구하고, 뒤늦게 나타난 천사에게 이삭을 살린 건 자신이라고 말한다. 바벨탑을 허리케인으로 무너뜨리고, 소돔에서 유황불로 사람들을 멸하고, 시나이 산기슭에선 엄청난 수위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섬겼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어린아이는 물론 소, , 나귀까지 다 죽이는 것을 본 카인은 되묻는다. '나는 아벨 한 명을 죽여 벌을 받고 있는데, 여호와는 자신이 분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 천명씩 죽이는데,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인가?'라고.. 그런가 하면 우수 땅에서 욥을 시험하는 것이나 아들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것이나, 단지 여호와와 사탄의 내기였다는데 이르러, 카인은 여호와의 존재와 역할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인류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음란서적은 바로 구약성서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함께 흐른다. 그것은 '가서 번성하라'는 여호와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가 끝나던 날, 여호와는 노아에게 배에서 나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아내와 사위와 딸들은 이미 모두 배 안에서 죽었다. 카인만 홀로 남아 배 밖으로 나와 여호와와 누가 더 비열한지, 누가 더 자비로운지, 누가 더 너그러운지 논쟁을 벌인다. 그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끝이 났다.

 

카인에게 비춰지는 여호와는 결코 자애롭지도, 너그럽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신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제기한다. 낄낄거리면서 읽었지만, 읽고 난 후의 생각은 웃음이 쏙 들어가게 만든다. 바벨탑이 무너진 후 작가의 했던 말이 귀에 맴돈다. "여호와가 자존심 때문에 완성을 허락하지 않은 탑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느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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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왜 카인이어야 했는가? 평점10점 | l****1 | 2016.03.14 리뷰제목
주제 사라마구가 지상에 남긴 최후의 노래, '카인'. 신약을 인간학적 차원에서 재해석했던 '예수복음'에 이어 다시 한 번 똑같은 입장에서 구약을 재해석 한 것이 바로 '카인'이다. 이 소설의 목적은 '예수복음'이 그랬듯, 구약을 지배하는 신성의 기운을 말끔히 지우고 아주 인간적인 입장에서 독재적이고 무자비한 여호와에게 항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변호랄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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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사라마구가 지상에 남긴 최후의 노래, '카인'. 신약을 인간학적 차원에서 재해석했던 '예수복음'에 이어 다시 한 번 똑같은 입장에서 구약을 재해석 한 것이 바로 '카인'이다. 이 소설의 목적은 '예수복음'이 그랬듯, 구약을 지배하는 신성의 기운을 말끔히 지우고 아주 인간적인 입장에서 독재적이고 무자비한 여호와에게 항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변호랄까. 그 변호인이 되는 것이 바로 '카인'이다. 그렇다고 소설에 카인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제사, 또한 바벨탑과 욥기 거기에 노아의 방주까지, 구약에서 유명한 이야기는 다 나온다. 그런데도 왜 '카인'인 것일까? 의문이 당연히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카인이 최초의 선악과 사건만 빼고 모든 사건에 다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카인만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구약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비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제 사라마구는 왜 카인을 그 모든 사건에 다 참여시켰던 것일까? 이유는 카인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최초로 거역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사라마구가 카인에게 인간의 변호인 역할을 맡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로의 의지로 거역한 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서에서 자발적으로 탈주했기에 그에 항변하여 인간의 입장을 변호할 자격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어 거역한 아담은 왜 자격이 안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자발적이 아니라서 그렇다. 아담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하와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진정한 자발적 거역자는 하와였다. 사라마구는 그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독자가 여기에 또 한 번 더 가질 수 있는 의문, '촉발이라고 한다면 뱀이 먼저가 아니냐?'에 대한 대답과도 같이 이런 장면을 삽입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낙원에는 뱀이 없다. 주여, 낙원에 뱀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서 뱀이 나타나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래서 나는 말했죠. 아니, 그렇지 않아. 오직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 먹을 수 없어. 그걸 만지면 우리는 죽으니까. 뱀은 말을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쉭쉭 하는 소리나 낼 뿐이지. 여호와가 말했다. 내 꿈속의 뱀은 말을 했어요.(p. 18~19)


 이렇게 사라마구는 여자의 거역이 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 의지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하와의 모습 혹은 위치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여성의 자리는 소설 전체에 걸쳐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아의 며느리처럼 가부장제에 완전히 포섭된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성적 질서의 바깥에 독립적으로 자리해서는 남성과 대등 혹은 더 우월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와가 그렇고 나중에 카인이 만나는 릴리스도 그러하다. 그런데 구약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 릴리스란 이름에 좀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구약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릴리스란 이름이 적어도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릴리스란 이름이 참 재밌는 것이 원래 아담의 첫 아내로 알려진 여자의 이름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잘 읽어보면 모순된 점이 보인다. 1장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하면서 2장에선 여자가 아담 이후에 창조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 때문에 옛 신학자들은 아담과 동시에 창조된 여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그녀의 이름을 릴리스라 지었다. 그들이 그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 이름이 당시 전승된 많은 서양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여 남자를 유혹하여 파괴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팜므파탈의 대명사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와와 릴리스는 여호와와 대척점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한 마디로 여호와가 대변하는 남성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존재들 말이다. 일부러 전복이란 단어를  쓴 것은 릴리스의 행위 때문이다. 그녀가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은 아담과의 잠자리 위치 때문이었다. 릴리스는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계속 아담의 아래에서 성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항변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인류 최초의 저항자가 되었다. 육체 상하의 자리바꿈이니 문자 그대로 전복인 것이다.


사라마구도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릴리스는 카인이 살인 후 최초로 가게 되는 도시에서 여왕으로 군림하여 그녀의 거처엔 남편조차 그녀의 허락을 얻고서야 들어올 수 있는 것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남성 질서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공간에서 그녀는 향락을 마음껏 누리면서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마음껏 과시한다. 릴리스의 전복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것과 같다. 한 마디로 릴리스의 거처는 절대적인 여성 해방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카인이 누군가 자신을 위해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방에 벽을 쌓아 성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카인은 인류 최초의 도시 건설자였던 셈이다. 도시는 인간 문명의 대표적 산물이다. 에덴 동산이 온전한 신의 공간이라면 도시는 온전한 인간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신과 카인이 대척점이듯, 에덴 동산과 도시는 정반대에 자리한다. 도시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모두 여호와에게 파괴당한다는 점에서도 이 같은 특성을 거꾸로 강조하고 있다. '살인한 남자'로 하나님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거역한 인류 최초의 존재인 카인이 만든 도시를 릴리스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카인이 릴리스가 대표하는 질서에 속해있으며(다시 말해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으며) 하와가 했고 릴리스도 했던 독립된 주체를 갈망하는 인간주의적 항변에 참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더구나 그 릴리스의 공간에서 카인은 기꺼이 스스로를 종속된 존재로 자처하여 여호와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여호와는 남자를 지배자의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카인이 남자라는 게 중요해진다. 그는 여성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으로 여호와의 질서를 전복하며 '여성화된 남자'가 되어 여호와 질서의 구멍을 만든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다. 곳곳에서 카인은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엔 여호와 질서 자체를 자신의 구멍 안으로 삼켜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쓴 바와 같이 난 '카인'을 페미니즘 소설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정치적 의미도 투영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소설 속 여호와는 아무리 봐도 독재자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 때, 생각나는 소설은 사라마구의 '눈 뜬 자들의 도시'이다.


 '눈 뜬 자들의 도시'는 다시 창궐하는 우익을 우려의 시선으로 보는 소설로 지금과 같은 우리나라 상황에선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사라마구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우익이 다시금 창궐하게 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그 난감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 바로 '눈 뜬 자들의 도시'이다. 내 생각에 '죽음의 중지'나 '예수 복음' 그리고 '카인'과 같은 일련의 성경 재해석은 바로 이 난감을 가져온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혼돈을 먼저 겪은 그가 우리를 위해서 마련한 안내서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엔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태도가 있다. 그것을 집약한 존재가 바로 카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카인'은 '눈 뜬 자들의 도시' 이후 그가 찾아온 길의 모범 답안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라마구, 그는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한 셈이다. 카인의 태도에 대해선 앞에서 내내 얘기했으니 여기서 다시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한 번 직접 읽어보시라는 한 마디로 족할 것 같다. 그러면 명확하게 아시게 될 것이니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 왜 사라마구가 카인과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천명했는 지도.


 소설은 사라마구의 마지막 노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너무나 아쉽게도 짧다. 읽기엔 별 부담이 없다. 거기다 너무 재밌다. 아마도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 시간 사라마구의 소설을 읽어 온 한 사람으로서 기꺼이 추천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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