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구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데는 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결혼으로 인생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요. 여자들이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있어요."(272쪽)
우리의 여주인공 이사벨 아처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면서 세상에 대한, 삶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기 주장을 가진 여성이었다.
"이사벨 아처는 자기 나름의 의견이 많은 아가씨였다. 그녀의 상상력은 남달리 풍부했다. 주위의 사람들 대부분보다 더 섬세한 마음을 타고 났다는 것은 그녀의 행운이었다. 그녀는 주변의 사실을 더 폭넓게 인식했고,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지식을 원했다. 그녀가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 특출하게 생각이 깊은 아가씨로 통한 것은 사실이었다."(104쪽)
이사벨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만큼 그녀를 만난 남자들은 그녀를 좋아했다. 사촌오빠 랠프 터치트, 랠프의 친구인 워버턴 경, 미국인인 캐스퍼 굿우드, 그리고 길버트 오즈먼드.
터치트 부인은 미국 여행 중에 돌버니에 살고 있는 조카 이사벨을 데리고 영국의 남편의 대저택 가든코트를 방문한다. 방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터치트 부인은 남편과 별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터치트 씨는 여전히 부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둘 사이에는 랠프라는 아들이 있는데 폐질환을 앓고 있다.
이사벨이 가든코트에 등장한 순간부터 가든코트의 남자들은 이사벨에게 호감을 가졌다. 이모부인 터치트 씨를 비롯 사촌 오빠 랠프, 랠프의 친구 워버턴 경은 자유로운 미국인 아가씨 이사벨을 좋아했다. 워버턴 경은 곧 이사벨에게 청혼을 하지만 아직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이사벨은 거절을 한다. 그리고 미국인 약혼자로 여겨지는 캐스퍼 굿우드의 끈질긴 구애도 떨쳐낸다. 이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사촌 오빠 랠프는 아버지인 터치트 씨의 임종 전에 자신에게 물려 줄 유산의 반인 7만 파운드를 이사벨에게 주기를 간청한다. 아마도 랠프는 그 돈을 기반으로 비상할 이사벨의 미래를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마담 멀이라는 여자가 있다. 미망인인 마담 멀은 터치트 부인의 친구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모든 사람이 마담 멀을 좋아하고 자신의 저택에 초대하고 싶어 안달나고 마담 멀의 말에 귀 기울인다. 완벽하게 묘사되는 마담 멀은 자신의 친구인 길버트 오즈먼드를 찾아간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검은 속내를 드러낸다 이사벨이 7만 파운드를 상속 받은 여자이니 유혹해서 결혼하라는 것이다.
길버트 오즈먼드는 나태한 자이고 인습에 얽매인 보수주의자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으면서 예술적인 심미안은 가지고 있어서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부인은 죽고 혼자 딸 하나를 키우고 있다. 마담 멀의 계략임을 모르는 터치트 부인은 이사벨과 오즈먼드가 결혼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마담 멀에게 말한다.
상권을 읽으며 워버턴 경도 캐스퍼 굿우드도 물리친 이사벨이 오즈먼드의 검은 마수에 걸려들지 않기만을 바랐다. 이사벨에게는 이모인 터치트 부인도 있고, 이사벨의 비상을 바라는 랠프도 있지 않은가. 무엇을 꿈꿔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욱 거대한 꿈을 꾸는 어린 나이의 이사벨이 세상을 보고 이모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자유롭고 당당하게 선택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작가는 이사벨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았다.
처음 마담 멀의 계락을 알았을 때 나는 영국의 반을 가진 귀족이라는 워버턴 경의 청혼을 거절한 애송이에게 인생의 쓴맛을 가르쳐 주려고 오즈먼드에게 이사벨과 결혼하라는 말을 한 줄 알았다. 그런 마음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이야기를 다 읽으면 마담 멀의 계획이, 빅 피쳐가 그정도가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불편함을 느낄 때만 의식하지요."(39쪽)
"다만, 고통을 겪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냉정하다는 말을 듣게 되죠."(103쪽)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기반은 서로 간의 오해라고 볼 수 있어. ......"(264쪽)
1.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 사람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의식적인 내지는 무의식적인 생각들을 일일이 기록할 수 있다면, 그 생각들은 대체로 어떠한 것들이고 얼마나 체계적인 것일까. 어쩌면 무질서하고 쓸데없는 공상들로 가득할 수도 있고, 아니면 타인에게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을-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외면하고 싶은-질투나 시샘, 증오와 같은 추한 감정의 파편이나 언어화되지 않은 인상파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로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소위 ‘멍때린다’고 할 때조차 실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을 때가 많다. 누군가 5분 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고를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이 일상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만큼이나 혼자만의 독백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복잡다단한 사고의 흐름을 보통 거의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2.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심리적 사실주의’를 완성시킨 현대 심리소설의 아버지, 미국 현대소설의 기초를 다진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저명한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했다. 물론 전공자나 애서가들 사이에서야 이미 그의 작품들이 많이 읽히고 연구되었겠으나, 같은 국적의 J. D. 샐린저나 마거릿 미첼, 존 스타인벡, 동시대의 영국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 등에 비한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헨리 제임스는 다소 생소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3. 「여인의 초상」은 많은 현대소설이 그러하듯이, 줄거리가 복잡한 소설은 아니다. 세계를 돌아보고 인생을 이해하고 싶어 하던 매우 독립적인 성격의 미국 시골 아가씨 이사벨 아처가 아버지의 사망 이후 이모인 터치트 부인을 따라 영국 런던 근교에 위치한 저택 ‘가든코트’로 와서, 보스턴의 사업가 캐스퍼 굿우드와 영국의 유서 깊은 가문의 귀족 워버턴 경의 청혼은 거절하고서 (그 사이 이모부인 터치트 씨가 사망하는데, 사촌인 랠프 터치트의 애정에 기초한 비밀스러운 부탁으로 이사벨은 7만 파운드라는 거액을 상속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길버트 오즈먼드와 결혼하여 파국을 자초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사물, 배경 등에 대한 묘사만큼이나 인물, 특히 이사벨의 내면 심리에 대한 서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단순히 특정한 시점에서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의 생각을 순차적으로 따라감으로써 지난한 사고의 흐름과 그에 따른 결론까지 서술한다. 그 세세함이란 마치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보는 것 같다.
결국 이 소설을 읽는 의미는 플롯의 재미보다는 주인공 이사벨 아처의 심리를 따라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인물의 심리 묘사를 통해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는 점이다.
4. 「여인의 초상」을 읽는 내내 들었던 가장 큰 의문은 ‘왜 이사벨 아처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남편감인 워버턴 경과 캐스퍼 굿우드의 청혼을 거절하고, 언변만 번지르르한 빈털터리 길버트 오즈먼드를 선택했는가.’였다.
(그 외에도 ‘마담 멀은 대체 무슨 동기로 이사벨에게 불행을 야기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사벨에게 오즈먼드를 소개하여 두 사람을 결혼시키는가.’라는 의문이 있었으나, 이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밝혀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짐작한 이유로 크게 2가지를 꼽아보았는데, 첫 번째는 무지한 인간의 교만과 아집이고, 두 번째는 도덕적 우월감을 통한 타인과의 구별짓기이다.
4-1. 이사벨 아처는 종종 사촌인 랠프 터치트에게 매번 밉살스럽다고 말하지만, 이사벨이야말로 정말이지 밉살스러운 인물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 책에서 읽은 것 말고는 세상물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자신이 똑똑하고 언제나 옳다고 여긴다.
“그녀는 다만 사람들이 자신을 다소 우월한 존재처럼 대할 때 그런 태도가 옳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가 우월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람들이 그녀를 뛰어난 아가씨로 생각한다면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옳았다. 자기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기민하게 작용하는 듯이 보이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녀는 종종 자신의 본바탕을 살펴보면서 만족감을 느끼곤 했다. 근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곤 했다.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 어쩌다 자신의 생각이 괴이하게도 틀렸다는 것을 알아낼 때도 있었다. 그러면 큰마음을 먹고 일주일간 열정적으로 겸손하게 굴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전보다 더 높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던 것이, 스스로를 좋게 평가하려는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상권, 105-106p.)
사촌인 랠프 터치트는 오즈먼드와 결혼하겠다는 이사벨의 결정을 만류하면서, 오즈먼드가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스스로를 너무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랠프는 ‘너는 그런 식으로 평가되도록 태어난 사람이 아니야. 너는 더 나은 운명을 맞아야 할 사람이야. 생명력이 고갈되어 시들어 빠진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의 감상이나 지켜보면서 보초를 서는 것보다는!’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언과도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이사벨은 사촌오빠의 조언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오즈먼드 씨는 돈을 얻으려고 다툰 적도, 갈등을 벌인 적도 없어요. 그분은 세속적인 보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세요. 나는 그런 말에 겁나지 않고, 불쾌감도 느끼지 않아요. 오빠의 잘못된 판단이 유감스러울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야 잘못 판단할 수 있겠지만, 오빠가 그렇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오빠는 신사를 보면 신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고, 훌륭한 마음을 알 수 있을 텐데, 오즈먼드 씨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아요!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가장 예의바르고, 가장 고귀한 영혼을 가진 분이에요. 오빠의 생각이 틀렸어요.’, ‘이모님은 내가 워버턴 경이 갖고 있는 대단한 장점이 없는 사람에게 만족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셨어요. 재산도, 귀족 칭호도, 저택도, 토지도, 사회적 지위도, 명성도, 그 어떤 훌륭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말이에요. 바로 이런 것들이 그분에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에 나는 기쁨을 느껴요. 오즈먼드 씨는 그저 아주 외롭고, 매우 교양이 높고, 대단히 정직한 분이에요. 그분은 막대한 재산가가 아니에요.’ (하권, 598-603p.)
이사벨은 결혼 후 랠프 터치트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랠프에게 ‘그는 돈을 위해서 나와 결혼했어요’라고 말한다. (하권, 993p.)
한편, 이모인 터치트 부인은 이사벨에게 마담 멀이 자신을 속이고 ‘자기가 내세운 사람과 너를 결혼시켰다’고 말하지만, 이사벨은 전혀 믿지 않고 마담 멀이 항상 자신에게 정직하고 친절하고 헌신적이었다고 말한다. (하권, 581p.)
그러나 이사벨은 이후 오즈먼드의 딸인 팬지에게 워버턴 경이 청혼하지 않은 일로 당사자도 아닌 마담 멀이 자신을 거세게 힐난하자, 순간 ‘이 여자가 이사벨의 운명을 변화시킨 강력한 동인’이었음을, ‘마담 멀이 이사벨이 지금껏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이 모든 것들에 자신이 너무나도 무지하고 교만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권, 889p.)
4-2. 이사벨의 결혼 소식을 듣고 찾아온 구혼자 캐스퍼 굿우드는 이사벨에게 ‘길버트 오즈먼드 씨라는 사람은 누구고 뭘 하는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이사벨은 ‘누구고 무엇을 하느냐고요? 아무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다만 매우 좋은 분이고 대단히 명예로운 분이에요. 사업가는 아니에요. 그는 부유하지 않아요. 어떤 특별한 것으로 알려진 분도 아니에요.’, ‘나는 전혀 이름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하권, 570-571p.)
그렇다면 이사벨은 캐스퍼 굿우드와 워버턴 경의 청혼에 대해서는 그들이 너무나 가진 것이 많아서 거절하는 것이고, 오즈먼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라서 그와 결혼한단 말인가? 작가는 이 선택에 대하여 이모 터치트 부인의 말로써 암시한다.
“이사벨이 오즈먼드 씨를 어떤 방식으로 보게 된다면 그 애가 그와 결혼하는 걸 이 세상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거야. 그래, 그건 괜찮아.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나보다 더 찬성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애는 이상한 것들을 좋아하거든. 오즈먼드 씨가 멋진 의견을 갖고 있다든가 미카엘 안젤로의 친필 원고를 갖고 있다고 그와 결혼할 수도 있어. 그 애는 사심이 없길 바라지. 마치 욕심을 부릴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자기 혼자뿐인 듯이 말이야! 그런데 오즈먼드 씨가 그 애의 돈을 쓸 수 있을 때 과연 그렇게 사심이 없을까? 네 아버지(터치트 씨)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 애는 사심이 없기를 바랐지만 그 후로 그런 생각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게 되었어.” (상권, 481p.)
‘사심이 없다’는 것은 결혼에 있어 애정 이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는 말이다. 즉 워버턴 경을 거절하고 오즈먼드와 결혼한다는 선택은 이사벨에게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증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 우월감을 통해 결국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타인과는 다른 존재’로서 가지는 의미 또는 가치이다. 그것이 재산이든 명예든 취향이든 지적 허영이든 아니면 도덕적 우월감이든 결국 우리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나는 너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평등만큼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보편적 가치가 있을까.
5. 이와 같이 작중 인물들의 심리는 단순하지 않고, 그들의 선택으로 야기되는 플롯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다. 작가는 주인공이 결국 행복하게 잘 산다는 아름다운 결말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증명하기 위해 결혼한 이사벨, 자신의 몫을 덜어내 상속권자도 아닌 사촌에게 재산을 상속해 달라고 부탁하는 랠프 터치트,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으면서도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이모 터치트 부인 등 헨리 제임스는 인물이나 플롯을 어떤 이상이나 원형에 끼워 맞추지 않고 현실을 최대한 재현하고자 하였고, 이는 1,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모더니즘 소설의 발판이 되었다.
6. 부가적으로 이 소설은 ‘여성의 자아실현 내지 내적 성장과 결혼과의 관계’라는 키워드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헨리 제임스로부터 대략 100년 전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와 「에마」의 에마는 자신의 편견과 미숙으로 인해 상대방을 오판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만, 잘못을 깨닫고 상대와 결혼하게 된다. 여기서 주인공의 내적 성장과 성숙은 결혼과 동일시되고, 결혼으로써 마침내 자아실현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여인과 초상」에서 결혼은 자아실현도 성장도 아닌, 시험대이자 시련이다. 인생을 이해하고자 했던 이사벨은 결혼이라는 시련을 온몸으로 직접 겪어냄으로써 미숙하고 무지했던 자신을 깨닫고 한층 성숙해진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 「여인의 초상」이 출간된 1881년으로부터 약 100년 후인 1984년 출간된 애니타 브루크너의 「호텔 뒤락」에서는 이디스가 결혼이 아닌 자신의 직업적 소명인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이제 여성의 자아실현과 결혼은 별개이고, 심지어 결혼이 자아실현에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7.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은 그렇게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애니타 브루크너도 「호텔 뒤락」에서 ‘지금같이 피곤한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달뜬 마음의 동요 때문에 아주 친숙한 것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이디스는 자신에게 소중한 작품이 엉뚱하게 읽힐까봐 겁이 나 애석하지만 헨리 제임스 작품은 제쳐놓았다.’(호텔 뒤락, 77p.)고 언급할 정도였으니,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여 다 읽고 났을 때에는 독자로 하여금 여러 가지 감상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소설이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대사들」도 읽어보고 싶다. 다만 나중에!
여인의 초상 (상) ③
이사벨 아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아주 운이 좋게도 독립적인 상황에 있는 것을 교양있게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롭다거나 고독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그러나 통풍이 걸린 이모부는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터치트 부인은 남편의 이웃들과 교제를 해오지 않았기에 이사벨은 공허한 삶을 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은 적절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면 자기에게 안성맞춤인 즐거운 일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녀는 결혼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은 천박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비혼주의자일까요? 그녀는 결혼에 대한 열망에 빠져드는 일이 없기를 간절하기까지 했습니다. 여자가 특별히 취약점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홀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소 비루한 마음을 가진 이성과 교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관과 자존심이 뚜렷해 보이는 이사벨의 성격을 뒤바꿀만한 결혼상대자가 나타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요. 워버터 경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와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