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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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리뷰 총점 9.2 (17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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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인문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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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평점10점 | j********h | 2015.03.09 리뷰제목
이 책의 제목은 <노자인문학>이지만, 제가 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은 지면의 상당부분이 인문학 전체 개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정말 책 잘썼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쾌한 느낌이 듭니다. 본래는 EBS에서 방송한 인문학특강의 강좌라고 들었는데, 정말로 명쾌한 강의였으리라고 생각되고 찾아서 시청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책의 앞부분은 역사의 시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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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노자인문학>이지만, 제가 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은 지면의 상당부분이 인문학 전체 개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정말 책 잘썼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쾌한 느낌이 듭니다. 본래는 EBS에서 방송한 인문학특강의 강좌라고 들었는데, 정말로 명쾌한 강의였으리라고 생각되고 찾아서 시청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책의 앞부분은 역사의 시작에 관하여, 그리고 종교와 도덕의 발생에 대한 저자의 식견을 말해주고 있는데,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매우 명쾌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서구의 역사 (성경의 구약과 신약)와 르네상스 및 법치주의까지도 확대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노자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우선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심적이며, (공자의 예같이) 특정 기준이 비록 선으로 내용이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한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준 또는 이념은 세계를 구분하고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지 못하는 한쪽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기성종교나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이처럼 명확히 이야기한 글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종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정신을 강조하는 도중, 그 기준이 강화되면 그 기준을 따르지 못하는 쪽을 배제하면서 기존의 생각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뚫어본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기준을 정하는 것, 개념을 정하는 것에 의해 다른 쪽과 울타리치는 예를, 이 책에서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 가사를 이용하여 설명하였는데 정말 이해하기 쉬웠습니다.(이 부분을 강의하실 때 강연장 분위가 무척 궁금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나 인연같은 개념 등이 이용되면서 노자의 사상을 설명되어 노자의 사상은 자연과 벗삼은 유유자적하는 자연주의 사상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 책의 후반부에 오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자의 사상은 어떤 하나의 기준에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는 기준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면의 긴장을 받아들여서 무엇을 배우더라도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삼고 긴장을 잃지 않는 삶을 권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있던 신념, 이념, 가치관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돼서 자신이 고유하게 생산한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세계와 관계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이 책에서는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가되어 사는 것이라 말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스펙을 쌓기위해 영혼없는 삶을 택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기위해 인문학 열풍이 불어왔는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발견하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기위해서는 이 책에서 권하는 노자의 사상이 참으로 적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향후 노자의 사상에 대해 좀더 깊게 설명된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10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0 댓글 0
종이책 道란 바로 생각하는 힘을 말한다. 평점9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k*****1 | 2015.07.17 리뷰제목
동양고전이라 함은 흔히 제자백가의 사상서들을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중국의 역사서들과 기서, 그리고 유가의 경전들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원류는 전부 제자백가서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이들 사상서를 설명한 책들을 읽다 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원전을 읽을 정도의 한자 실력이 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서 끙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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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이라 함은 흔히 제자백가의 사상서들을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중국의 역사서들과 기서, 그리고 유가의 경전들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원류는 전부 제자백가서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이들 사상서를 설명한 책들을 읽다 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원전을 읽을 정도의 한자 실력이 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서 끙끙 앓으면서라도 읽고 그 뜻을 오롯하게 사유하겠지만, 그러지 못할 처지이기에 어쩔 수없이 해설서 들을 읽으면서 이래서 독법이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다.

 

제자백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난세라 일컫는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했다. 그리고 백가쟁명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모두 달랐다. 그렇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본질적으로 같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방법론 혹은 지향점이 서로 달랐기에 우리는 그들을 제자백가로 분류할 뿐이다. 그런데도 간혹 해설서들을 읽다 보면 당시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사상을 주장한 것처럼 오독(誤讀)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노자와 장자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노자나 장자에 관한 책들을 읽을 때는 선뜻 손이 나가지를 않는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이유로 많은 시간을 망설였지만, [도덕경]을 해설한 책이 아니라 노자의 사상을 설명한 책이라는 문구에 속는 셈치고 읽게 된 책이다.

 

저자가 EBS 인문학 특강과 매경에 연재했던 중국사유의 진행과정을 정리하여 엮은 이 책은, 제자백가가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통하여 생각이라는 것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인문학 개론서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제자백가서를 읽으면서도 단지 그 시대의 역사나 제자백가들의 사상에만 몰입할 뿐, 왜 그 시대에 한꺼번에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 철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싶다. 그렇게 볼 때, 노자의 [도덕경]을 화두로 삼아 노자철학의 탄생과정과 인문학적 사유의 힘을 기르는 방법을 설명하는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책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기 충분했다.

 

먼저, 저자는 제자백가가 출현하게 된 배경을 생각의 탄생에서 찾는다. 그리고 생각의 탄생은 천명을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중국 주나라 통치의 기둥은 종법제도에 의한 봉건제도였으며, 그 기반은 정전제에 있었다. 정전제란 각자 자기의 농지를 경작하면서 공동으로 경작한 농지에서 나는 곡물을 국가에 세금으로 내는 제도였다. 그러다 보니 공동으로 경작하는 농지에서의 수확량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국가재정이 부족하게 되자 조세제도의 변화로 이어졌다. 정전제에서의 수확물 납부방식에서 정해진 생산량 납부방식으로의 변화는 백성들에게 제한적이나마 자유를 주었고,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부의 축적이 가능해지자 기존의 종법제도에 의한 지배/피지배 구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어 철기의 등장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균열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출발점이 된다. 종법제도하에서는 세상을 오직 천()과 덕()으로만 해석했다. 천자는 천명을 받아야 가능했고, 그리고 천명을 받은 천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러나 신분제도의 균열은 필연적으로 천명론과 배치되었고, 따라서 천명론의 극복은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인간이 천명이 아닌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길이 도()였다. 여기서 인간의 능력이란 바로 생각하는 힘을 의미했다. 중국에서의 인문사조, 즉 철학의 시작을 춘추전국시대로 보는 이유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는 천명을 극복하여 인간이 만든 인간적인 범주의 개념으로 공자와 노자가 바로 그런 최초의 철학자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만 그런 道를 추구함에 있어 공자는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근거로 삼았고, 노자는 자연의 운행원칙을 근거로 삼았을 뿐이다. 다시 말해 공자나 노자나 인간의 질서인 道를 추구한 것은 동일했으며, 공자가 仁이라는 인간 공통의 본질을 바탕으로 한 가치세계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면, 노자는 자연이라는 사실세계에서 인간질서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흔히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실체론과 관계론으로 대별된다고 한다. 공자가 설파한 유학은 실체론을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仁에서 찾는 가치론적 철학이며, 관계란 실체끼리의 관계를 의미했다. 그에 반해 노자의 철학은 불교나 주역과 같이 관계론적 철학이다. 노자가 말하는 관계는 존재하는 그것 자체가 관계로 되어 있음을 뜻한다. 불교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인연(因緣)이라는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보았고, 주역에서는 음과 양(陰陽)의 관계로 파악했다면, 노자는 바로 유와 무(有無)로 보았다. 관계란 바로 노자의 유무상생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노자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 [도덕경] 1장이라고 말한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 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이처럼 노자는 본질 자체를 부정하고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알아낸 관계성으로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한다. 관계성이란 有와 無라는 대립면의 상호관계, 즉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뜻한다. 여기서 有란 말 그대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며, 無란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이 기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영역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한 대립면의 긴장을 받아 들일 때 이념과 신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렇게 드러난 자율적 주체는 무엇을 배우더라도 그것을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생각하며 긴장을 잃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유무상생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노자는 무위(無爲)라고 했다. 다시 말해 무위란 어떤 이념이나 기준을 근거로 하여 행하지 않는다는 말인 셈이다. 내 의도를 세계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노자사상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노자의 생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복원하게끔 한다. 생각을 추적하는 일은 삶을 추적하는 일이고, 결국 인간의 정체를 추적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념이나 신념, 그리고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지적 체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사유없이 외부에서 강요하는 가치관에 휩쓸리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노자의 무위(無爲)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유무상생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생각을 통하여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동양고전을 읽으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동양고전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인본주의이고, 특히나 인간질서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유무상생을 강조한 노자의 무위사상이야말로 변화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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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Let it GO !!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h*****o | 2015.03.11 리뷰제목
가히 인문학의 붐이라 할만하다. 인문학 책이 많이 팔리고, 인문학 강좌마다 사람들이 넘친다. 정작 인문학이 활성화 되어야 할 상아탑에서는 관련학과의 인기가 시들해지는데, 사회에서는 인문학 붐이 일고 있다. 왜 일까? 수 백 만원을 호가하는 인문학강좌에 기업의 CEO들이 앞을 다투어 등록한다. 왜 일까? 그들에게 있어 인문학은 생존이기 때문이다. 사업이란 변화다. 변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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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히 인문학의 붐이라 할만하다. 인문학 책이 많이 팔리고, 인문학 강좌마다 사람들이 넘친다. 정작 인문학이 활성화 되어야 할 상아탑에서는 관련학과의 인기가 시들해지는데, 사회에서는 인문학 붐이 일고 있다. 왜 일까? 수 백 만원을 호가하는 인문학강좌에 기업의 CEO들이 앞을 다투어 등록한다. 왜 일까? 그들에게 있어 인문학은 생존이기 때문이다. 사업이란 변화다. 변화하지 않고 기존의 틀에 안주하는 사업은 발전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미래시장을 개척해야하는 그들에게 있어 기존의 틀에 안주하는 행위는 퇴보를 뜻한다. 퇴보하지 않기 위해선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변화의 주체를 인문에서 찾는 것이다. 즉 인문이란 있는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깨고 기존의 방식에 저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모든 것에 왜? 라고 의문을 제시하는 순간부터 인문은 시작한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 아니 더 나아가 틀 안에 구속되지 않는 것. 규정과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인문학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인문적 통찰, 창의성, 상상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것은 인문학을 뒤떨어지면 왠지 불안한 한때의 유행으로 받아들이거나, 인문학을 하나의 학()의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이 학()이라는 굴레를 쓰는 순간, 그것은 고정된 틀이 되어 정지된다. 또한 학()은 모방을 동반한다. 모방은 창조가 아니라 답습이다. ()이라고 개념으로 인문의 개념이 정의되는 순간 그건 박물관에 전시된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해진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인문적 사고를 배양하거나 인문적 활동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학()에 대한 추종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틀을 머리에 이고서 그것에 지배당하는 것이다. 진정한 인문은 인문적 사고를 발밑에 깔고 그 위에 우뚝 서는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인문적이 되기 위해서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답습하고 않고 추종하지 않는 나만의 절대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이 책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EBS<인문학 특강에서 노자 강의로 유명한 최진석 교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는 추상적인 개념의 해석보다 노자의 자구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노자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안내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상대적 개념인 공자와 비슷한 개념인 불교를 끌어와 이해를 돕는다. 한데 왜 노자인가? 우린 흔히 노자를 단순히 세속을 떠나 산속에서 도를 추구하는 은둔의 철학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건 편협된 사고이다. 노자의 무위(無爲)”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모든 것과의 융화의 화법이다. 타자와의 구분이 없는 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노자의 무위(無爲)”. 그것이 바로 노자 사상의 궁극의 목적지인 무위상생(無爲相生)”이다. “()”를 형상이나 실체로 이해하면 나와 도()는 이원화된다. 그 순간 도()는 추종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노자의 도()는 그것이 아니다. ()는 틀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본질을 부정하고 자연에서의 관계성에 중점을 두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경계에 서는 것이 노자가 말한 도()이고 무위(無爲)이다.

 

  노자의 첫 구절이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다. 풀이하자면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 할 수 있는 것은 참 이름이 아니다는 의미다. 이를 조금 더 쉽게 해석하면 어떤 사물에 틀을 부여하는 순간 그 틀이 그 사물의 본질이 되기 때문에 그 틀이 가진 한계에 가려 그 사물의 본질이 왜곡된다는 말이다. ()를 실체나 본체로 이해하면 반드시 본질을 긍정하게 된다. 본질을 긍정하면 가치론, 기준, 구분, 목적, 언어, 확장, 상승 등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7) 이처럼 노자는 규정된 어떤 것도 거부한다. 존재는 존재자체로 인정되어야지 그 존재에 덧붙여진 어떤 형식이나 틀로서 규정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세상은 무() 와 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는 원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고, ()는 무()를 존재하게 만들기 위한 틀이다. 그래서 정작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무()인데, 우리는 유()를 보고 그것을 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유()는 단지 형식이고, 틀이고 관념이다. 실체는 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무()를 외면한 채 유()를 보고서 그걸 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질을 벗어난 사유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생각이다.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기사가 자살이다. OECD가입국 중 자살률 최고라던가 하는 기사가 이제는 식상해질 정도다. 자살율과 더불어 자주 거론되는 것이 행복지수이다. 이 또한 OECD가입국 중 최하란다. 왜 불행할까. 이렇게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데. 그건 자신의 자존감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시각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대기 때문이다. 외적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평가의 잣대를 말이다. 그건 마치 짜장면을 먹으면서 짬뽕 맛이 안 난다고 항의하는 것과 같다.

 

  중국집에 간다. 중국집 메뉴의 대표적인 것이 짜장면과 짬뽕이다.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한참을 고민하다 자신이 원하는 메뉴를 시킨다. 현대인이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이의 삶에 자신의 삶을 맞추는 행위는 마치 짜장면을 먹으면서 짬뽕 맛이 안 난다고 투덜대는 꼴이다. 거꾸로 짬뽕을 먹으면서 짜장면의 맛이 안 난다고 투덜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짜장에서 짬뽕 맛이 나고, 짬뽕에서 짜장 맛이 난다면 그 음식이 맛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 두 번 다시 그 집을 찾지 않을 것이다. 짬뽕은 짬뽕 맛이 나야하고 짜장면은 짜장면의 맛이 나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선택했다. 짬뽕으로서의 삶과 짜장면으로의 삶은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삶을 추구한다. 그리고 타인의 삶의 기준에 자신을 맞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정한 삶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언제나 불만족할 수밖에. 짜장면은 짜장면이고 짬뽕은 짬뽕일 때가 가장 맛있다.

 

  대한민국은 성형공화국이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선생님 날 만드시니라는 블랙 유머가 횡횡하는 나라이다. 어떤 외국 언론에서는 한국여성의 50%가 성형을 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의란성 쌍생아라는 신조어도 유행한다. 같은 병원에서 성형수술을 받은 이들의 얼굴이 닮은 것을 비꼬는 유행어다. 하나같이 똑같은 코, , 쌍꺼풀을 가지고 있으니 의란성 쌍생아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한국사회에 이런 사회현상이 만연하는 것은 왜일까. 그건 자신의 자존감과 생각을 배재한 체 그저 추종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우린 성장과정에서 생각이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오직 생각을 안했으면 타임지에 ‘It’s true. Asians can’t think“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릴 정도이다. 학창시절에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그저 라고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시험 때는 정해진 사지선다형에서 숨어있는 답을 잘 찾는 것이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하나의 정답이 선택되는 순간 나머지는 틀린 답이 되었다. 흑과 백이 명료했고,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이고, 우리 편 아니면 바로 적이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가르침에 절대복종하는 것이 착한 학생이었고, 착한 자식이었다. 그건 사회에 나가서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의 개성이나 취미나 열정은 뒤로한 채 그저 남이 이미 지나간 길, 성공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한길을 향해 모두가 집중한다. 다른 길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러한 모든 제반현상이 바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개념은 사라진 채 자신의 삶의 기준을 타인에게 맞춘다. 타인만큼 돈을 벌어야 하고, 타인이 하는 일을 해야 하고, 타인만큼 생겨야하고, 타인과 같은 직장과 직업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 개인은 없다. 우리만 있다. 개인은 매몰되고 우리만 남았다. 그러니 개인의 생각이나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자신은 없고 그저 타인을 모델로 그들의 삶을 따라가기에 혈안이다. 개성도 없고, 스스로의 삶에 자긍심도 없다. 그저 추종하기 바쁘다. 보이는 것만 추종하는 삶에 생각이 개입될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왜 그것을 추종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지도 않는다. 광고의 말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간다. ? 남들이 가니까.

 

우리는 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을까? 외부로부터 강한 신념, 이념, 가치관, 지적 체계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반면경계에 있다는 것은 신념과 이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며, 통찰을 하는 사람은 바로 이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결국 신념을 벗어난 로 돌아가야 통찰력, 인문적 사고력이 생긴다.(7쪽)

 

  우리는 시간을 산다. 시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 흘러간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변한다는 것이다. 그건 우리네 삶도 고정되지 않고 흘러가며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흐름 속에 존재한다. 변화되는 시간 속에서 문화도 변한다. 가치관도 변한다. 헌데 우리는 변하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사고는 고정된 어제에 맞추어져 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우린 어제를 뒤로하고 바로 오늘을 산다. 내일은 미지수다. 이렇듯 고정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린 어제의 고정된 사고와 생각과 틀로써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틀로 세상을 구분하고 판단한다. 즉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어제)으로 존재하는 것(오늘)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틀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변화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변하는 것을 측정하는 것. 그러니 그 삶의 결과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저자는 말한다. 인문을 말하기위해 왜 노자를 선택했는지. 수많은 제자백가의 사상들 중 고정되지 않는 것은 바로 노자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는 세상은 무와 유로 구성되어 있지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라고 얘기한다. 즉 무는 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유는 무로 인해서 그 형태와 쓰임을 갖는다. 유가 맞느냐 무가 맞느냐 라고 흑백의 논리로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경계에 서라고 한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고정된 틀을 갖지 않고 올바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경계에 서라고 한다. 경계에 있다는 것은 자신을 지배하는 이념과 신념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고 갇히지 않는다는 것은 욕망의 실현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갇히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적인 욕망에서 자유롭다는 것이고, 세상적인 틀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나의 주체성과 존엄을 확보하는 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나로 사는 방법이고. 바로 무불위(無不爲).

 

無爲而無不爲 (무위이무불위)

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경계에 있을 때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고 모호하다. 하지만 이런 불안과 모호함은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불안과 모호함이 나를 생각게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존재의미이고 생각이 나를 성숙시킨다.

 

  강을 건너면 배를 버려야 한다. 배는 강을 건너기위해서 필요한 존재이다. 강을 건너면 이미 배는 그 가치를 다했다. 하지만 우린 강을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필요 없는 그 배를 등에 짊어지고 우리네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저자가 말한 노자의 사상 또한 우리가 틀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도구일 뿐. 강을 건넜으면 그 또한 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틀에서 벗어나 인문적 삶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세상에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즉 나는 나로서 소중하다. 그래서인가. 석가모니가 세상에 와서 제 일성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좁은 의미로 나는 나로써 존재한다는 의미다. 즉 내가 나로 존재할 때 나는 나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짬뽕은 짬뽕이어야 하고 짜장은 짜장이어야 한다. 짬뽕이 짜장이 될 수 없고 짜장이 짬뽕이 될 수 없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 그러니 나는 나로써 세상에 존재한다. 나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나답게 사는 길이고 나의 삶을 사는 길이다. 그것이 곧 인문적인 틀을 발밑에 깔고서 인문적 사고를 하는 길이다. 좋은 것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자. 바람직한 일보다 바라는 일을 하자.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세상적인 기준에 나의 삶을 맞추지 말고 나의 삶에 세상의 기준이 되게 하자. 내 멋대로 살자. 누가 뭐래도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러니 천하를 차지하는 일은 틀 안에 가두는 방식이 아니라 개방성과 자율성 속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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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비우고, 고집하지 않으며_010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평점8점 | w*****y | 2020.02.22 리뷰제목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자와 노자를 비교할 때, 공자는 인간의 길을 갔고 노자는 자연의 길을 갔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으로 이해하면서 공자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철학자이고, 노자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철학자라는 얼토당토아니한 구분을 하는 것이지요. pp.88-89흔히 노자의 이미지는 소박한 도포 자락 휘날리며 술 한 병 들고 산비탈을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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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공자와 노자를 비교할 때, 공자는 인간의 길을 갔고 노자는 자연의 길을 갔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으로 이해하면서 공자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철학자이고, 노자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철학자라는 얼토당토아니한 구분을 하는 것이지요. pp.88-89


흔히 노자의 이미지는 소박한 도포 자락 휘날리며 술 한 병 들고 산비탈을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p.89


괜히 뜨끔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만 이런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안도(?)하기도 했다. 도포 자락 휘날리는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게 있는 노자의 이미지 역시 세속을 떠나 산 속에 은둔하는 도인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공자와 그의 사상(그렇다고 그 사상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과의 비교를 통해 노자와 그 사상에 대한 설명을 풀어가고 있다.


를 추구했던 공자와 노자, 다만 그 ()’를 풀어가는 방법에 있어 공자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했다면 노자는 그 시선을 외부, 자연으로 돌리고 향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단편적인 정보가 노자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간 것은 아닌가 싶다.


공자나 노자나 도를 추구했던 사람들이에요. 도를 추구했다 함은 천명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의미입니다..(중략)..공자나 노자나 모두 인간의 길을 설계하고 인간의 길을 따르려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공자는 인간의 길을 건설함에 있어서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근거로 삼았고, 노자는 자연의 운행 원칙을 근거로 했을 뿐입니다. 공자는 인간의 내면성을 근거로 한 인간의 길, 노자는 자연의 존재형식이나 운행 원리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인간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p.89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도를 건립하면서 인간 세계, 인간의 내면성으로부터 인사이트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주관성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노자는 인간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우리 밖에 펼쳐진 자연에서 인사이트를 구하지요. p.86


유가는 채우고 채우고 채워서 그 높이를 우주의 높이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보고, 도가는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우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거든요. 다시 말해 유가는 채워서 높이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했고, 도가는 비워서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p.182


하나라도 더 채우고 쌓아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그러지 않으면 뒤처질 것이라 계속해서 떠미는 사회에 지쳐있어서인지, 채우기 보다는 '비워서'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도가 사상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비움'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테지만 단어가 주는 의미를, 그리고 내게 있어 '채움''비움'의 균형이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제대로 된 이해를 갖지 못한 내가 감히 공자와 노자의 사상에 대해 비교할 수는 없지만, 노자의 사상에 공감이 갔던 내용 중 하나는 '이곳'에 주도권을 둔다는 것이었다.


공자가 주도권을 저곳에 두었다면, 노자는 이곳에 둡니다. 공자가 저쪽을 이상적인 곳으로 설정하고 그리로 가자고 주장했다면, 노자는 이곳에 집중하여 여기서 이상을 실현하자고 합니다. p.233


평소, 일상을 사는데 있어 '지금그리고 여기가 중요하다 말하곤 하기에 노자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내가 발딛고 있는 이곳을 소홀히 하지 말고, 충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마지막으로 유독 내 마음에 남았던 글을 소개하고 싶다.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보고 반응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보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겠죠. p.244


새로운 조직으로 이동해, 내가 속한 조직이 '이랬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에, 이제는 내가 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더욱 글이 날카롭게 와닿았던 것 같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일을 그르치는 지름길입니다..(중략)..통치자가 어떤 신념을 고집하는 한, 그 신념으로만 세계를 해석하게 되어 그 신념을 집행하는 것을 진리를 행하는 것으로 자처하게 되어 버립니다. 선의 확신에 빠져 버리는 것이죠. p.245


나는 내가 속한 상황이 내 고집대로만, 내 이상대로만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머릿속으로는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무거운 고민을 하게 된다.



*나에게 적용하기

하나. 회사업무를 하며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기(적용기한 : 지속)

공자는 논어위령공(위령공)에서 인을 잘 실천할 수 있는 황금률 하나를 제시합니다.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p.73


두울. 나의 생각으로 상황을 틀에 가두려 고집하지 말기(적용기한 : 지속)

사실을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는 게 소유입니다. 사실을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그 소유적 시선과 세계의 실상은 잘 맞지 않거든요. 잘 맞지 않는 태도, 자신의 뜻을 고집하여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 집착이지요. 집착은 고통을 낳습니다. pp.139-140


*기억에 남는 문장

노자의 사상에서는 소극적이며 지방분권적이며 자율적이며 또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 등이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또 앞으로 나서기 보다는 뒤로 물러서라고 합니다. 남성적이거나 태양을 닮는 것보다는 여성적이면서 달을 닮으라고 합니다. 불보다는 물을 닮으라고도 하지요. p.101


노자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라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p.103


무엇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차지할 공간이 필요하고, 무엇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기능을 가능케 해주는 여백이 필요합니다. p.108


노자는 이 세계를 본질론적 실체관이 아니라 관계론으로 해석합니다. 유와 무의 상호 관계를 유무상생으로 표현합니다. p.114


무소유라는 말은 재산을 많이 갖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p.139


혹자는 철학을 뜬구름 잡는 학문으로 여기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거든요. p.143


몇 가지 명예를 지키려 하다가는 명예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옥처럼 고귀해지려고 하지 말고 돌처럼 소박하라. p.205


자기가 진실이라 믿는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견제하는 내공을 발휘해 긴장을 유지할 때, 오히려 폭발력이 터져나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진실의 힘입니다. ‘확신하지 않는 힘이 바로 내공입니다. p.215


배움은 수단이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죠. 삶은 자기표현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p.216


하나의 의미에 갇히지 않고 대립면을 살피며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신중합니다. 어떤 다름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아요.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편을 가르지 않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 성인은 방정하되 옳고 그름을 가르지 않고, 예리하되 찌르지 않고, 솔직하되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되 눈부시지 않다는 겁니다. p.221


바라는 것과 바람직한 것 사이에서 빚어지는 엇박자 때문에 인생은 고달픕니다. p.229


신념이 강한 사람은 행동이 경박합니다. 이념이 강한 사람은 행동이 가볍습니다. 진리에 대한 신념이 강한 만큼 행동의 근거가 너무나 분명하거든요. p.248


왜 자기가 하찮게 느껴질까요? 그것은 스스로를 자기의 눈으로 보지 않고 외부의 어떤 가치에 의해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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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k******4 | 2017.08.11 리뷰제목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에요. 그런데 공자식의 문명은 '예'라고 하는 특정 교화 체계를 저 위에 걸어 놓고, 백성을 모두 거기에 통합하려 합니다. 노자는 통합적 욕구를 발산하는 이런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한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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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에요. 그런데 공자식의 문명은 ''라고 하는 특정 교화 체계를 저 위에 걸어 놓고, 백성을 모두 거기에 통합하려 합니다. 노자는 통합적 욕구를 발산하는 이런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한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해요. 왜냐하면 보편화된 이념 내지 체계는 그 내용의 선악여부와 관계없이 기준 혹은 이념으로 작동해 세계를 구분하고,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지 못하는 한쪽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p.79


공자나 노자나 모두 인간의 길을 설계하고 인간의 길을 따르려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공자는 인간의 길을 건설함에 있어서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근거로 삼았고, 노자는 자연의 운행 원칙을 근거로 했을 뿐입니다. 공자는 인간의 내면성을 근거로 한 인간의 길, 노자는 자연의 존재형식이나 운행 원리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인간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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