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 <위대한 유산>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나는 영화를 본적도 없고, 소설도 이번이 처음이고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피립이 성, 필립이 이름인 필립 피립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피립도 필립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린아이여서 핍이라고 자신을 부르게 되는데 상권 이야기의 중간 누군가에게서 핍이라는 성을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이야기를 모르는데다 아직 하권을 읽지 않아 이 조건이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 잘 모른다.
억세고 괄괄하며 약간은 상스러운 누나에게 구박덩이로 길러진 핍에게 마음을 나누고 위로가 되는 친구는 매형인 대장장이 조이다. 조는 순박하고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진만큼 노련하고 숙련된 장인이며 성실하고 온화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작은 단점이라면 머리가 좋지는 못하다는 것인데,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정도이다.
이야기의 처음 핍은 부모와 형제들의 무덤 앞에서 탈옥한 죄수를 만난다. 이 죄수의 갖은 협박에 놀란 아이, 핍은 음식과 줄칼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그를 돕게 되는데, 핍의 후견인으로 변호사인 재거스가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그 알 수 없는 유산 상속자가 이 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의 숙부 펌블추크는 핍을 동네 유지인 미스 해비셤에게 소개한다. 비밀에 쌓인 미스 해비셤은 자신의 생일이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그 옛날 9시 20분 전에 파혼을 당한 여자다. 그 이후 미스 해비셤의 집은 그 시간에 멈춰버리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현재까지 살고 있다. 웨딩케이크는 썩어 문드러졌고 벌레들이 들끓지만 치워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남길 재산 때문에 아첨하는 몇몇 친척과 온 정성을 들여 마치 세상 남자들에게 복수라도 할 요량으로 키우는 듯 보이는 에스텔라가 있다. 핍은 에스텔라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도도하고 오만한 에스텔라 때문에 운다.
이 미스 해비셤을 보고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1930)이란 단편이 생각났다. 에밀리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남자에게 독약을 먹여 죽인 후 그 시체 옆에서 잠들고 일어나며 한 평생을 산 여자다. 미스 해비셤과 에밀리의 공통점은 부유하며, 남자가 떠난 순간에서 시간이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디킨스가 창조한 미스 해비셤이 포크너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핍은 자신에게 유산을 상속하고 신사로 교육시키는 사람이 미스 해비셤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유산 상속의 두번째 조건으로 유산 상속인을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킨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는 에스텔라가 옆에 있게 될 것을 막연하게 꿈꾼다.
핍의 런던 생활은 허영에 가득차 있다. 일거리를 줄 것이 고민스러운 하인 소년까지 둔다. 핍은 조를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겨 자신이 사랑하는 조의 방문에도 식사대접조차 하지 못한다. 조는 숙녀 교육을 받으러 떠났던 에스텔라가 집에 돌아와있다는 것을 미스 해비셤이 핍에게 전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런던으로 핍을 방문한 것이다. 핍은 당장에 고향으로 떠나지만 그곳에서 조의 집에 묵어야 하는지를 갈등할 정도로 허영에 가득찬 사람이 돼있다. 신사 교육을 받고 있는 핍을 보고 에스텔라의 태도가 변했는가 하면, '아니다'이다. 에스텔라는 여전히 도도하고 어딘지 핍을 업신여기는 듯 하다. 핍은 런던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얼마나 에스텔라를 사랑하고 있는지 룸메이트이자 신사교육을 해주는 선생의 아들인 허버트 포켓에게 고백한다. 핍은 영원히 넘볼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허버트의 사랑에도 고난이 있는데, 허버트의 어머니의 가문관에 못 미치는 가난하고 험상궂은 병자의 딸 클래라를 사랑하고 있다.
"바너드가 창조한 이 쓸쓸한 건물들은 검댕과 연기로 뒤덮인 곰팡내 나는 상복을 차려입고 있었으며 머리에 재를 흩뿌려 놓은 먼지 구덩이의 모습으로 참회하며 굴욕을 견뎌 내고 있는 것 같았다."(295쪽)
디킨스의 문장은 이렇게 비유와 은유와 직유로 넘쳐나서 때로는 해학적이고, 등장인물의 변화하는 감정의 모습을 섬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핍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전혀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가고 그에 따른 인물들의 변화는 이야기를 읽는 이를 집중시킨다.
"진정한 친구로서 네게 하는 말이니 잘 들어, 핍. 진정한 친구나 이런 말을 해주는 법이라고. 똑바른 길을 통해서 비범한 신분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넌 결코 굽은 길을 통해서도 거기 도달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거짓말은 하지마, 핍. 그리고 잘 살다 행복하게 죽으라고.(126쪽)"
"세상의 모든 사기꾼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기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런데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구실들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자신을 속인 사람이었다."(383쪽~384쪽)
위대한 유산은 에단 호크와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98년작 영화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었다. 당시 이 영화는 찰스 디킨스의 원작에 충실하기보다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고전과는 또 다른 섬세하고 감각적인 영상을 보여주었었다. 분수대의 키스 장면은 오랫동안 명 장면으로 사랑 받았으며, 두 배우 역시 이 작품으로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원작을 그대로 살려서 만들어진 버전도 있으며, 그 또한 원작만큼이나 매우 흥미롭다.
어린 핍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성질 사나운 누나와 인정 많은 대장장이 매형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마을 묘지를 찾아갔다가 탈옥수와 만나게 되고 그는 핍을 협박해서 줄칼과 음식을 가져오라고 시킨다. 다음날 핍은 누나와 매형 몰래 줄칼과 음식물을 그에게 가져다 주지만, 한동안 죄인을 도와주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어느 날 조의 숙부를 통해 거대한 부자인 미스 해비셤의 저택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의 양녀인 에스텔라를 만나게 된다.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미스 해비셤의 놀이 상대를 해주며 핍은 에스텔라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쌀쌀맞은 소녀는 그의 신분을 무시하며 조롱한다.
그날은 내게 기억할 만한 날이었다. 내게 큰 변화를 만들어 준 날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건 어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생에서 하루를 선택하여 삭제한다고 상상해 보고, 그러고 난 후 그 인생행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글 읽기를 멈추고 쇠로 만들어졌건 황금으로 만들어졌건 가시로 만들어졌건 꽃으로 만들어졌건 간에, 당신을 얽어 매고 있는 긴 사슬이 만약 그 제일 첫 번째 연결 고리가 어떤 기억할 만한 날 맨 처음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당신을 꽁꽁 얽어 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보라.
자연스레 대장간에서 자라면서 자신도 조처럼 대장장이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핍은, 미스 해비셤과 에스텔라를 만나면서 현재 자신의 처지에 조금씩 불만을 가지게 된다. 멋진 도시 신사가 되어 에스텔라 앞에서 당당하기를 꿈꾸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재산을 물려줄 부모도, 스스로 자립을 할만한 그 어떤 배경도 없었기에 그것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했다.
"나는 이 친구가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라는 지시를 받았소".
재거스 씨가 손가락으로 삐딱하게 나를 지목하며 말했다.
"나아가 이 친구가 즉시 현재의 삶의 영역과 이 집을 떠나서 신사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 한마디로 말해서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게 된 젊은이로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현재 그 재산을 소유한 분의 바람이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밤 런던의 유명한 변호사가 그를 찾아오고, 그의 꿈이 실현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한다. 터무니없던 그의 공상이 오히려 한술 더 떠 생생한 현실로 실현된 것이다. 그는 새롭게 전개될 앞날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신사 교육을 받고, 비슷한 수준의 이들과 어울리면서 핍은 점점 변해간다. 자신이 사랑하던 조를 사교적으로 미숙하고 어리숙하다는 이유로 불편해하고 창피하게 여기며, 고향의 대장간에도 거의 가보지 않는다. 이제는 에스텔라에게 걸 맞는 위치가 되었다는 자각에 미스 해비셤이 그의 짝으로 자신을 위해 이런 혜택을 베풀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는 런던의 상류층 속물 청년 들과 어울리며 점점 겉멋이 들어가고 향락과 소비에 찌든 그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기에 이르른다. 아무런 노력 없이, 대가 없이 갑자기 얻은 부와 행운에 현명하게 대처하기에는 핍이 너무 어렸던 탓도 있었겠지만, 누군들 그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달랐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스물세 살이 된 핍에게 어느 날 거칠고 험상궂게 생긴 인물이 찾아오고, 그는 바로 어린 핍이 줄칼과 음식을 가져다 주었던 그 탈옥수이다. 그리고 그가 바로, 핍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준 당사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핍은 미스 해비셤이 아니라 탈옥수 매그위치가 자신의 모든 꿈을 실현시켜주었다는 것을 깨닫자 좌절하고, 낙담한다. 탈옥수의 고된 노동에서 비롯된 유산과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부자의 유산은 애초에 성격부터 다른 것이니 말이다. 거기다 그는 에스텔라의 결혼 소식까지 접하게 되어 더욱 비참해진다.
핍, 사랑하는 내 단짝. 인생이란 너무나도 많은 부분들이 하나로 용접되어 결합된 구성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장장이, 어떤 사람은 양철공, 어떤 사람은 금세공업자, 어떤 사람은 구리 세공업자인 거야. 그런 식의 구분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게 생기면 반드시 만족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란다.
세련된 도시 청년이 보기엔 평생을 대장장이로 일해온 조가 바보 같고, 어리숙해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이 대사를 보면 삶에 대한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직업은 없으며, 인간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모두 주인공이니 말이다. 막대한 재산을 통해서 허울뿐인 가짜 신사가 되고 싶었던 핍은, 자신의 지난 날을 반성하고 진정한 신사로 거듭나게 된다. 순진무구했던 어린 핍이 엄청난 재산을 통해 타락을 하다가, 고난을 겪으며 다시 순수한 영혼을 되찾는 일종의 성장 소설인 이 작품은, 찰스 디킨스 특유의 주제 의식과 결합해 깊이 있는 스토리로 감동을 준다. 단순히 위대한 유산이 돈이 아니라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자신의 의지대로가 아니라 주어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부모들의 유산대로 그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닌 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위대한 유산 / 찰스 디킨스 / 열린책들]
찰스 디킨슨의 소설 [위대한 유산]을 드디어 읽었다. 영화로도 나와 유명한 작품인데 솔직히 영화조차 보지 않았었다. 디킨스의 작품은 당시 부조리한 시대상은 소설에 담았다는 것이 기억이 난다. 위대한 소설에서 주인공은 어린 소년 핍이고, [올리버 트위스터] 역시 소년이 고아원에서 자라 가족을 만나기까지 그 과정이 들어있다.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한 순간에 혼자서 성장해야하는 것은 고통이면서 시련이다. 또한, 핍이 혼란스러워 하는 감정을 써내려간 문장은 알아가는 것을 넘어 간접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핍은 부모와 형제를 다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왜 죽었는지에 대해 나오지 않으나 당시 부싯돌로 불을 피웠으니 가난과 굶주림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키워준 누나와 매형 조 뿐이다. 부유하지는 않으나 그 안에서 조와 함께 라면 핍은 행복했다. 늘 자신에게 폭력아닌 폭력과 거친 말로 상처를 주는 누나 대신 조는 항상 핍을 보살펴줬기 때문이다. 언제나 이런 삶이 영원할 수는 없다. 핍에게 뜻밖의 행운이라고 해야할지...미스 해비셤이 핍을 자신의 저택으로 부른 것이다.
부유한 여인이나 늘 음울한 채로 살아가는 여인 미스 해비셤. 몇 번의 만남밖에 없었지만 이 일로 핍의 인생에 전환점이 생기게 되었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보지 않는 한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기는 순간 비교가 되면서 부족함에 대해 낯선 감정을 가지게 된다. 핍이 그러했다. 가난하지만 대장장이로 언제까지나 조와 함께 할 거라 다짐했지만 미스 해비셤을 만나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소녀 에스텔라를 만나면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핍을 제외하곤 아무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하는 것조차 없이 그저 똑같은 일상을 지낼 뿐인데 어린 핍에겐 배우지 못함과 낡은 가구들이 창피할 뿐이었다. 그러나, 누구라면 쉽게 가지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으로 성인이 되어가면서 이런 감정 또한 성장의 뒷받침이 되지 않을까? 어느 날, 누군가의 유산 상속을 핍에게 남겼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더 이상 조와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다. 런던으로 떠나야 하는 핍...그 날짜가 다가오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사실이 두렵고 슬프지만 운명은 런던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파란만장한 사건이나 흥미로운 시선은 없었으나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변화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보여준 [위대한 유산]. 아직 상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핍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표현해서 읽는 동안 푹 빠졌다. 세세한 문장들이 간혹 지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렇게 썼기에 각각의 인물들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핍을 중심으로 부유한 사람은 망상에 가까운 것을 쫓아 가고 ,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핍은 전자와 후자 중 어느 것으로 삶을 선택할지 다음 마지막 도서가 궁금해졌다.
[위 도서는 네이버독서카페리딩투데이에서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 중 읽어본 것은 딱 한권! 바로 불멸의 고전 [크리스마스 캐롤]이다. 사실 [크리스마스 캐롤]도 어린 시절 읽었을 때는 나쁜 스크루지 영감이 하룻밤동안 유령들에게 끌려다니고나서 개과천선했다는 이미지만 남아있었을 뿐, 성인이 되어서야 그 의미와 재미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다. [위대한 유산]은 [크리스마스 캐롤]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주인공 핍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서 받은 막대한 유산. 그 유산을 통해 신사 교육을 받으면서 진정한 '유산'이란 무엇인가 깨달아가는 이야기 구조가, 마치 스크루지 영감이 세 유령을 통해 삶의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과 닮아있기 때문일까.
19세기라면 어디든 그러했듯 핍이 살고 있는 영국 또한 아이들에 대한 대접은 '상냥하지' 않았다. 상냥하지 않을 뿐인가. 그의 상황을 통해 미루어볼 때 상류층을 제외한 빈곤한 집의 아이들은 대부분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이는 맞아야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조금이라도 잘해주면 어른들 머리 꼭대기에 기어오르며, 낳아주고 키워준 은혜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조실부모하고 다른 형제들까지 잃은 핍에게 남은 혈육은 누나인 조 가저리 부인 뿐. 그녀가 모른 척 했다면 오갈 데 없었을 핍을 양육한 공로는 치하받아야 마땅하지만, 작품 속에서 핍을 다루는 그녀의 모습은 우악스럽기 그지없다. 체격도 크고 성질도 불같은 그녀. 그런 그녀의 반쪽은 온화하고 다정한, 핍의 하나뿐인 친구 대장장이 조 가저리다.
그래도 핍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불평하지는 않았다. 미스 해비셤 저택에서 에스텔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도도하지만 아름다운 에스텔라에게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된 핍은, 그제서야 자신이 천박한 하층민의 아이라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스스로가 훨씬 무지한 아이라는 것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크리스마스 선물같은 기회. 이름을 밝히지 않는 누군가가 그에게 신사가 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준 것이다. 에스텔라를 만난 이후로 늘 '신사'를 동경해왔던 핍은, 이 선물을 통해 진정한 신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상권에서 묘사되는 핍은, 내 눈에는 그저 어리석고 어린 남자일 뿐이었다. 누나와 조가 없었다면 핍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그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모습일 터. 그런 핍의 마음을 느낀 조가 그에게 건네는 말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핍, 사랑하는 내 단짝. 인생이란 너무나도 많은 부분들이 하나로 용접되어 결합된 구성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장장이, 어떤 사람은 양철공, 어떤 사람은 금세공업자, 어떤 사람은 구리 세공업자인 거야. 그런 식의 구분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게 생기면 반드시 만족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란다.
p 352
상권에서 등장한 또 하나의 인상적인 인물은 어떤 죄수다. 작품 초반에 등장해 핍에게 음식과 줄칼을 요구한 탈옥한 죄수. 혹시나 핍이 이 죄수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예상과는 다른 의리있는 모습에 감탄했다. 핍은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준 사람이 미스 해비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죄수가 아닐까, 후원자 명부에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도 올려본다.
핍은 조가 자신에게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까. 그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로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나. 부디 핍이 물질적인 유산이 아닌, 그 너머의 더 '위대한 유산'을 발견하길 바라며 하권을 시작해보련다.
대장간과 미스 해비셤의 저택 사이에서, 그리고 비디와 에스텔라 사이에서 ... 그 방과 앞으로 내가 지내게 될 더 멋진 방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마음 상태로 빠져들었다. 248쪽
찰스 디킨스 작품은 처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듣는 이유를 작품을 만나자마자 이해할 수 있었다. 작품이 주는 재미와 웃음이 상당해서 점점 기대하면서 작품속으로 빠져들었던 소설이다. 2권 세트 구성 중의 상권에 해당한다.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작품은 재미있다. 인물과 사건들의 전개까지 흥미롭기만 하다.
보닛 모자를 쓰고 마차를 타는 시절의 시골 대장간부터 떠올려본다. 대장간에서 달구어진 불과 씨름하는 일꾼의 땀과 고단함 속에는 가난의 늪도 함께 드리워진다. 그곳에 핍, 핍의 매형인 조, 핍의 누나가 생활하고 있는 집이 있다. 핍의 부모와 다섯 형제는 이미 무덤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핍은 누나가 키웠음을 작품은 전한다. 하지만 누나의 성품은 다혈질이며 폭력을 핍에게 자주 행사한다.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게 되는 핍에게는 다정하고 정이 많은 매형인 '조'가 있다. 그가 곁에 있어서, 친구가 되어주어서, 다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나고 있는 작품이다.
배움은 짧고 가진 것은 기술뿐인 조는 성실함으로 가족들을 책임지고 있다. 아내의 난폭한 언행에도 참고 이겨내면서 아내의 장점만을 상기하면서 아내와 함께 하는 남편이다. 핍에게도 친구라는 관계로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와 나누는 대화들은 언제나 집중하게 했다. 조가 던지는 대화들은 깊은 대화였다. 하지만 어린 핍에게는 조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뿐이다. 어린 핍에게는 조의 남루한 모습과 배움이 짧은 모습과 가난한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를 부끄러워하기도 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면서 핍의 눈을 가린 것이 부자의 돈과 위선과 신사라는 모순된 가치임을 작품은 전해주고 있다.
미스 해비셤의 저택은 기괴한 저택이다. 시간이 멈춘 저택. 웨딩케이크, 멈춘 시계의 시간은 9시 20분. 가꾸지 않는 정원,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저택과 곰팡이, 촛불에 지탱하는 저택, 아첨꾼인 저택의 손님들. 어떤 비밀이 숨겨진 것일까?
빛나는 행운으로 가득 찬 이 첫날 밤이... 가장 외로운 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 슬프고 이상하다고 느꼈다. 249쪽
부자의 유산, 계급사회의 위선적인 모습, 신사가 되는 기준들이 매우 불안해 보인다. 핍의 친구인 허버트의 어머니의 모습은 온전한 어른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좌절하고 포기한 삶을 선택한 허버트의 아버지의 안타까움 몸짓과 일상들을 보라. 적합한 결혼을 하지 못한 부모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허버트 형제와 허버트 자신의 이야기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버디'라는 소녀의 몸짓과 말, 편지 내용도 떠올려보게 한다. 핍의 누나를 보살피는 버디의 진실한 마음과 살림들은 조의 가정을 유지시키고 지탱하게 하는 강한 기둥 같은 사랑이 된다. 핍과 버디가 산책길에 나누었던 대화들과 진실된 마음들은 어디로 날아가 버린 것일까? 핍에게 다가온 우연한 행운 같은 기회에 버디는 뇌리 속에서 사라지고 미스 해비셤 저택의 소녀만을 떠올리는 사랑은 점점 깊어지고만 있다. 저택의 소녀를 '사랑하라'고 강하게 제안하는 미스 해비셤의 말은 섬뜩하다. 핍의 사랑은 미스 해비셤의 계획에 맞춤형 남자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기고 있다.
핍. 엄청난 유산을 받을 기회가 갑자기 생기면서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점점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 유산을 받기까지 전제조건이 있으며 그것을 받고자 노력하고 있는 핍. 부자가 되는 기회가 행운이 될지, 불행이 될지 늘 되묻게 된다. 작가의 작품은 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독자들과 호흡하고 있다. 가려진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진실인지, 참된 길이 무엇인지 인물들이 보여주는 것들을 통해서 흥미롭게 깨닫는 작품이 되고 있다. 하권의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계속 작품속으로 빠져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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